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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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석은 산 사람이 촛불을 밝히듯 내 마음을 밝혀서 다스리는 날
버릴 게 없기에 가질 것도 없으니일부러 짊어지지 말고 놓고 다녀야

기복이 아니어야 하는 이유

스님께서는 내 안의 참나를 발현해야 한다고 하시는데 세속에서 살아가는 저희들에게는 그 말씀이 너무나 요원하게 느껴집니다. 단지, 제 앞에 닥치는 병고와 삶의 무게만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기복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저의 생각이 잘못되었는지요? 힘든 삶 속에서 복을 구하는 삶이 정말 잘못인가요?


예전에 어떤 사람이 기복으로 부처님께 아주 지극하게 다녔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해라 하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라 하면 저렇게 하면서, 또 무슨 백 일을 기도드려라 그러면 백 일을 그냥 멸치도 먹지 않고 식구들도 먹이지 않으면서 국 하나도 끓여 주지 않으면서 열심히 다니기는 했는데 그게 되겠습니까. 그게 어디 부처님 법입니까?
그러다가 늙어서 죽었는데 소가 됐대요. 참, 사람으로 살다가 소가 됐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껍데긴 소지만 안은 사람이니 기가 막히죠. 그런데 자기 모습이 소니 어쩔 수가 없지 않습니까. 농촌에서 주인이 끌고 다니며 밭을 갈고 하는데, 노냥 일을 하고도 끝이 나질 않는데다가 웬만하면 막 후려갈기고 말입니다. 이러니까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데 어느 동자가 왔습니다. 보이지 않는 데를 봤겠죠. “부처님, 부처님! 나는 왜 그렇게 일생을 두고 지극하게 정성을 들이고 했는데 어찌 소가 됐습니까?” 하니까 “너는 남이 사는 데만 쫓아다녔지 네가 어디 부처님을 진짜 찾아봤느냐? 그러니까 지금도 남이 사는 데 쫓아다니면서 일 하는 거 아니냐!” 그러더라는 거죠.
그 말을 듣고선 퍼뜩 깨어난 게 그만 사람으로 화한 거예요. 그래서 그 이튿날 소를 잡는 데로 팔리게 된 거예요. 팔려서 죽게 됐는데 아프지 않게 죽게 된 겁니다. 그러고는 그 소 모습을 벗고선 사람으로 환생을 한 거죠. 그러니까 절에 가도 눈에 익죠.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요. 평생을 또 소로 살 줄 알았더니 평생은 안 가고 그래도 그렇게 해서 사람으로 화현이 돼 가지고 절에 들어가서 마음공부를 하는데 기복으로 또 되니까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큰 선지식을 만나서 공부를 해서 아주 일체를 건지는 선지식이 됐단 얘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우스울지 모르지마는 ‘부처님 법’이러면은 그저 부처님한테 가서 빌고, 기복으로서 내가 잘 되게 해달라고 하고, 또는 물건을 갖다 놓고 잘 되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 아닙니다. ‘물건으로 이렇게 공을 들였으니깐 해주실 테지.’ 하는 의지심, 그런 것도 여기에는 붙지 않습니다.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억겁을 거치고 광년을 거쳐서 모습을 바꿔 나투어가면서 진화돼서 이날까지 끌어온 자기의 주인공의 뜻을 배신 아닌 배신을 하면서 바깥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그것이 찾아질까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기복으로 나갈 때엔 내 몸에도 이득이 없고 내 가정에도 이득이 없고, 나라에도 이득이 없고, 사회에도 이득이 없어요. 이건 하나가 잘못됨으로써 여러 가지가 무너지는 겁니다. 지금 국가적으로 볼 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극복하는 데 있어 ‘나 아닌 누가 하겠지’라고 미루면 안 됩니다. 불법에서는 나와 사회가 한 치도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국민의 일이요, 그것이 다 사람이 하는 노릇입니다. 역사를 태평성대로 끌고 오는 것도 바로 사람들입니다. 그 여건이 부족하다면 예전보다도 더 처참한 역사를 가져올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인간이 천부적으로 만법의 근원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내일이 없고 어저께도 없는 오늘, 이 한 주머니 속에서 허덕이고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내일이 없고 어저께가 없는 그런 속에서 내일이 있는 세계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자유인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아주 잘 살고 있는 줄로 알지 마세요. ‘우린 주머니 안에서 꼼짝 못하고 그냥 닥쳐오는 대로 살고 있다.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고, 그저 이렇게 그냥 닥쳐오는 대로 살고 있으니 자유는 영 없구나.’ 이런 생각을 하시고 내일이 있는 자유를 한번 맛볼 수 있게 꼭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무명업식에서 벗어나려면…

우리에게는 본래부터 나가 없는 것인데 무명업식(無明業識)으로 말미암아 나를 고집하여 사는 것이 중생이다 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는데, 내가 본래 공해서 없다면 무명업식은 어떻게 생기는 것인지요?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는 것인지요?


자기가 와서 자기가 살고, 자기로 인해서 자기가 가니까 간 데도 없고 온 데도 없는 겁니다. 그냥 영원한 자기지요. 그러니까 업이라는 그 자체도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그 한 백지장 사이를 모르기 때문에 벗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가 몸통 속에서, 육신통이라고 한다면 오신통에서 벗어나야 누진으로서 마음대로 자유자재할 수 있는 겁니다. 그 통이라고 한 것은 바깥으로 나와야 내 모든 것을, 오신통을 굴릴 수 있다 이 소리거든요. 속에 들어가서 있으면은 속에서만 복작거리지, 이것을 굴릴 수가 있나요? 그러니 바깥으로 나와야 마음대로 굴리지요.
우리가 그냥 지금 생각하는 것도 사실은 공해서 고정됨이 없기 때문에 그거를 내가 한다고 그러지는 말아야죠. 그냥 그대로 뿌리로 인해서 자기가 지금 하고 있다는 것만 알고 그대로 뿌리에다가 맡겨 놓고, 마음으로다가 ‘너만이 나를 이끌고 다니고, 또는 빛이 나게 하는 것도 너고, 물리가 터지게 하는 것도 너고, 지혜가 생기게 하는 것도 너고, 가정을 화목하게 하는 것도 너고, 또 굶고 살지 않게, 부자는 아니더라도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도 너다.’ 이렇게 모든 걸 거기다 맡겨 놓고 해야만 되지 이유를 자꾸 따지면은 그 속에는 들어가 볼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이유를 따지지 말고 거기다가 자꾸 넣으세요. 아리송하면은 그냥 아리송한 대로 ‘아리송하니깐 너만이 네가 있다는 걸 알게 할 수 있어.’ 하고 거기다 놓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남한테 물어보려고 하지 말고 자기한테다 물어보세요. ‘너만이 알고 있잖아!’ 하고 자꾸 이렇게 정으로다가 참, 뚫지 못할 돌도 정으로다 뚫듯이 하면서 거기다가 자꾸, 한 번 놓는데 정을 한 번 치고 들어가고 하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한번 해보세요.
진짜 공부라는 건, 물리가 터지게 하려면 일체를 그냥 거기다가 넣고 ‘네가 있다는 것도 너만이 증명할 수 있잖아.’ 하고 생각날 때마다 관하고 집어넣으세요. 일부러 생각하라는 게 아니라 말입니다. 그리고 배고프면 ‘배고프지 않게 해!’ 하고서 거기다가 놓으시란 말입니다. 그래야 밥도 갖다 주고 옷도 갖다 주고 다 갖다 줘요. 정말입니다.
여러분이 조금씩, 조금씩 그저 자꾸자꾸 체험을 하면서, 체험을 해야만 또 진짜로 믿어지고 의젓해지는 겁니다. 그러니 뒤로 물러서지 마시고 무명에 가려진 나를 발현하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아시고 더 열심히 공부하세요.

칠석과 칠성부처님에 대해

칠석은 일월성신신앙, 특히 칠성(七星)을 신앙하던 토속신앙이 불교와 습합된 전통신앙으로서 칠석이 되면 치성광 부처님께 정성어린 공양을 올리는 날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근본의 뜻으로 볼 때 칠석과 칠성 부처님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칠석날 촛불을 켠다, 이런 것은 우리가 마음의 밝음을 그대로 연결해서 내가 밝아짐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칠석날은 산 사람이 촛불을 밝히듯이 내 마음을 밝혀서 다스리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칠석날이 산 사람을 위해서 정해진 날이라면, 백중은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정한 날이니 마음이 육근 안에 있음으로써 님과 같이 있으니 ‘칠’이요, ‘각’이라고 하는 건 밝음을 뜻하는 겁니다. 이것이 둘이 아니기에 항상 만나려고 애쓸 일도 없거니와, 항상 밝았으니 죽고 사는 게 어디 있으며 맴돌 게 어디 있겠느냐는 얘깁니다. 동서가 둘이 아니고 남녀가 둘이 아닌데 어찌 이것이 둘이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항상 마음의 불을 켜야지요. 노예로서 남의 덕만 보려고 해서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항상 남한테 지배만 받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어느 부부가 참 정답게 살았더랍니다. 비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답게 살면서 못 잊어 하다가 한 사람이 일찍 죽었습니다. 한쪽이 일찍 죽으니까 남은 사람은 항상 그 마음으로써 그 사랑을 간직하면서 살다가 말입니다, 그 아내를 쫓아가니까 그 여인은 벌써 남편을 쫓아서 이 세상으로 나왔더랍니다. 그랬으니 또 못 만났지 않습니까? 그래서 부인은 다시 또 염원을 하다가 남편을 쫓아가니깐 남편은 또 들어오게 됐죠. 그러니 그거를 맞추려니까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래서 안타깝게도 나중에는 돌다, 돌다 스쳐가기만 하고, 즉 북쪽을 향해서 스쳐가기만 하면서 그렇게 애원을 했답니다. 애원을 해서 만나보기를 그렇게 염원했건만 기일이 얼마나 오랫동안 걸렸는지 모른답니다. 그 기일은, 우리가 세상에서 살면서 나이가 맞지 않으면 안 되죠. 나이가 맞지 않으면 부부로서 살 수가 없는 거죠. 10년이 위다 20년이 위다 30년이 위다, 어른하고 애하고 살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맞추려니까 나중에는 할 수 없이 뒤쫓아 나왔는데 뒤쫓아 나와도 어린애더랍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살면서 또 닦고 닦아서 왔다가 또 다시 가면서 맞지 않는 것이 뭐냐 하면, 그저 허덕지덕 하다보니까는 하나는 상놈의 집 딸로 나오고 하나는 양반의 집 아들로 나왔으니 또 맞지 않는 겁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그 집의 종으로 들어가 살면서 그렇게 빌었답니다. 나는 언제나 상놈을 벗어나서 저 양반하고 살겠나 하는 생각을 하고 그랬는데 은연중에 인연이 돼서 돌아가는 거예요.
이게 얘기이니깐 그렇지, 여러분도 그렇게 인연 따라서 도는 겁니다. 인연 따라서 식구들이 한데 모인 거고, 인연 따라서 정치인들이 한데 모인 겁니다. 또 차원 따라서 상업가들이 한데 모인 겁니다. 은은 은대로 한데 모이고 금은 금대로 한데 모이는 겁니다. 그 차원에 따라서 만남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차원이 다르니까 차원에 따라서 그것을 맞추려고 그렇게 애를 쓰다보니 나중에는 종으로까지 살게 됐고, 주인이 일찍 죽으니까 부처님 앞에 가서 염원을 하면서 그렇게 3년 동안, 산등성이 밑에 가서 그 분의 자손들이 시묘살이 하고 있는 거를 피해 그 밑에 가서 그렇게 염원을 하고 애를 썼더랍니다. 그랬더니 나중에는 똑같은 문벌을 가지고 똑같은 양반의 집으로 태어나서 둘이 재미있게 살았다 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한번 만나서 살기가 인연에 따라서 너무도 어려웠다는 얘깁니다. 그랬는데 그 부부가 살면서 그거를 알았답니다. 부부의 인연이라는 건 잠시잠깐 뜬구름같이 사는 건데 우리가 모르고 이날까지 염원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거를 말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부처님 앞에 가서 스님이 되었습니다. 양쪽이 다 그것을 알고는 30이 넘어서 40이 가까울 때 입산을 해서 승려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출가를 해서 무엇을 생각했느냐 하면은, ‘칠성’이라는 것은, 바로 육신 안에 바로 내 님이 계시고, 내 님 안에 밝음이 있으니 이것이 칠성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한마음에 의해서 여러분의 명과 또는 아픔을 다 가시게 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돌고 돌면서 너무도 헤맸던 그 인연에, 자기의 깨우침에 의해 눈물을 흘리면서, 명이 길게 해주시고, 항상 잘 살게끔 노력을 해주시고, 또 길을 인도해 주시고, 항상 보배로서 길잡이가 됐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오늘날 칠성이라는, 칠성각이라고 하는 그 뜻은 밝았다는, 여러분이 사람이기에 바로 부처가 될 수 있고, 부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밝음을 가질 수가 있고, 밝음을 가졌기 때문에 님은 나한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교차로에서 얽매이고 찾으려고 애를 쓰고, 만나려고 애쓰지 않아도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에 이날을 정해놨다는 얘깁니다. 그러니 산 사람을 위해서 촛불을 켜야 한다는 그 뜻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걸 아셔야 합니다.
오늘날 살면서 차원에 따라서, 여러분 잘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항상 차원에 따라서 지배를 받고 밟히고 또 죽이고 살리고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세상 이치 아닙니까. 우리 인간만 그런 게 아니라 일체 만물이 그렇듯이 우주의 섭류도 역시 그렇다는 겁니다. 나 하나가 별을 낳았으면 그 별은 바로 내 미래이고 바로 나이기 때문에 별성의 그 능력을 다 거기에, 에너지를 다 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건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껍데기만 떨어지고, 껍데기가 떨어져도 여기 땅에까지 떨어지는 건 아닙니다. 땅에까지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녹아버리기 때문에도 그렇죠. 그러니까 허공에도 그렇게 전력이 흐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가 올 때나 어떠한 때는 쇠붙이나 이런 것을 지니지 말라고 하는 것은, 물기가 쇠에 붙으면 언제나 전력이 붙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의 몸에도 그러한 물기가 있기 때문에 그 전력이 올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수화풍으로서 이 몸뚱이가 생기고, 모든 물체가 지수화풍 아닌 게 없고, 생명 없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그 깨우침을 상징해서 칠석날로 정해놓은 거는, 다 각자 여러분의 몸 자체가 칠성각이요, 몸속에 바로 님이 계신 거고, 부처님이 계신 겁니다. 그 부처님은 항상 밝으시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을 밝히면 그대로 밝아있는 칠성각이요, 칠석날은 영원한 오늘의 자기 마음 그대로가 밝음이 아니냐는 얘깁니다. 그러니 바로 인등이요, 항상 꺼지지 않는 불이요, 항상 꺼지지 않는 그 불은 그렇게 원자력이, 큰 능력이 풍부하고, 천차만별을 다 가지고 응용하기 때문에 바로 자유인의 응용자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동쪽이 있고 남쪽이 있고 북쪽이 있고 서쪽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꿈과 생시가 둘이 아닌 그 까닭에 오늘의 밝은 칠석날을 정해놓은 것도 참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모르는 사람들도 칠석이라고 가시다보면 부처님의 뜻을 알게 되고, 자기가 부처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그 영향력을 가지고 수많은 중생들을 제도할 수 있는 그러한 분이 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오늘날의 몸을 가지고 그 뜻을 모른다면 세세생생에 끄달리면서 업보의 고를 어떻게 받으시렵니까. 그러니 몸이 무너지기 전에 우리가 이러한 것을 다 알고 넘어가야 될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욕심이 진보의 요인 아닐까요?

모든 선지식들께서는 항상 욕심을 버리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늘 그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깨끗하게 가진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소극적이고 발전적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보다 나은 가정과 보다 나은 사회, 보다 나은 자기의 생활을 이루고 싶은 욕망이 인간의 본능일진대 어떻게 그 마음을 깨끗하게 갖고 욕심을 저버리면서 살아야 하는지요. 그리고 사실 욕심을 버리면 진보도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비록 월급쟁이지만 보다 좋은 가정과 높은 자리에 올라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싶은 것이 저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자기발전을 위한 욕심마저도 잘못된 것인지요?

그것은 간단합니다. 모든 것이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또 위대한 것이든, 모든 걸 가지고 있어도 자기는 관리인이지 자기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관리인! 자기 몸뚱이는 자기 마음의 시자일 뿐이고 만약에 자기에게 재산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건 자기가 가지고 있지만 자기는 관리인으로 생각하라 이겁니다. 자기 거라고 생각한다면, 사량으로 자기 거라고 했기 때문에 그것은 불티나게 도로 나가버립니다.
그래서 여러분한테 유익하게 해드리기 위해서 모든 욕심을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욕심을 놓으라고 그러는 것은 반드시 스스로, 즉 말하자면 내가 이렇게 올라서겠다는 생각 자체가 스스로 돼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욕심이 아닌 까닭에, 모든 건 네가 하는 게 아니니 네 주인에게 모든 거를 맡기고 놔라! 네가 스스로 욕심을 청하면 외려 나간다고 하는 겁니다.
누가 그렇게 사랑을 하지 말랬나요, 돈을 갖지 말랬나요? 위대한 사람이 되질 말랬나요? 과학적으로 연구를 하지 말라고 했나요, 철학을 공부하지 말라고 했나요? 모든 것을 생동력있게 해 가면서도 자기 주인공에 맡겨 놔라 이겁니다. 자기 주인공이 하는 거지 자기가 하는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자기는 좀 빠져라 이겁니다. 운전수가 차를 몰고 다니는 거지 차가 운전수를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운전수가 차를 올바르게 끌고 다니면서 기름을 자유자재로 넣어라 이겁니다. 나쁜 데 기름을 쓰지 말고 좋은 데 기름을 써라 이겁니다. 그렇게 차를 잘 끌고 다닌다면 부숴지지도 않을 것이고, 만약에 인간으로 친다면 육신에 병이 나고 어디가 어떻게 돼야 된다 할지라도, 내가 항상 얘기하죠. 관음보살도 지장보살도 다 내 마음 가운데 있다고요, 그랬으니까 바로 그 마음은 체가 없는 거라, 자기 주인공은 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가사의한 겁니다.
그러기에 묘한 거고 유전자가 있기 이전 무전자를 말하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꽉 찬 무전자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불성 자체가 무전자라면 바로 그 무전자로부터 내 운전수가 운전을 하고 갈 수 있는 겁니다. 기름이 있기 때문에 내가 차를 몰고 갈 수 있다는 얘깁니다. 내 생명이 없다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육체와 마음내는 거와 생명과 더불어 아주 존경하라는 얘깁니다. 모든 걸 존경하면서도 바로 중간에 중도로서 중심을 갖고 양면을 다 한마음에다 넣고 관리인으로 살고, 관리인으로서 올바르게 몸도 마음도 잘 끌고 다니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그렇게 올바른 마음을 안 쓴다면 내 몸도 올바르게 행동이 나오질 않아요. 내가 욕심을 내지 마라 하는 것은 조그만 거든 큰 거든 모든 것을 다 놓고 쉬어라 이겁니다. 즉 불가에서 말한다면 방하착 하라 이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만약에 사량으로 그냥 ‘내가 줬다, 내 것이다, 내가 공장을 하고 있다, 내가 사장이다, 이것은 내 재산이다’ 하면서 자꾸 ‘나는 권위가 있어! 너희들은 하수인이야!’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지혜가 넓지 못해서 그리 길지 못하며, 길지 못한 까닭에 모든 사람의 추앙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증오를 받게 된다 이겁니다. 그러므로 길게 갈 수도 없거니와 인간의 존엄성이나 광대무변한 불성 자체, 그 능력 자체를 손실하고 있다는 얘깁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무한의 능력이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쓰지 못하는 까닭에 우리가 계발을 못하는 거죠. 그걸 말하는 거지, 갖지 말란다고 갖지 않고 하지 말란다고 하지 않는다면, 그럼 움죽거리지 않고 어떻게 합니까? 움죽거리지 않는데 부처를 어떻게 이룹니까? 그래서 벽을 치면 봇장이 울리는 걸 알아야 한다고 누누이 말하는 겁니다.
마음은 체가 없지만 아직 이런 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벽이 막히고 문이 닫혀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어디든 나갈 수 있지만 몸뚱이는 나갈 수가 없죠? 그렇게 지금 몸으로는 벗어날 수 없지만, 마음은 지금 우주 바깥에 어디라도 갈 수 있는 무한의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 영원한 참나는 이 감옥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벗어날 수 있는 마음이라면 몸도 여여하게 벗어날 수 있다 이겁니다. 자유스럽게 살 수 있다 이겁니다.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것을 뜻으로 말씀드린 거지, 어떤 거 하나도 가질 게 없는 까닭에 버릴 게 없다는 겁니다. 모두가 쓸모가 있기 때문에 나왔지 쓸모가 없는 거라면 이 세상에 나오질 않았을 겁니다, 아마.
그래서 버릴 게 없기 때문에 가질 게 없으니 일부러 마음으로 짊어지고 다니지 말고 놓고 다녀라 이겁니다. 공에서 나오는 거 공에다 놓으면 아주 가볍게 다니면서도 내가 열쇠를 가졌기 때문에 항상 쓸 때에 쓸 수 있다 이겁니다. 발휘할 때 항상 발휘할 수 있고요. 그것은 지혜로써 그 말뜻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분수를 지키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우린 일반 상식적으로도 분수를 지켜야 하는 문제가 있어야 할 겁니다. 분수를 지키지 못하면 파장이 일어나니까요. 모든 일체 만법에 말입니다.

먹기 위해 사는 겁니까?

스님, 정말 죄송합니다. 이런 궁금증은 12년 전부터 가져왔고 또 여러 사람에게 질문을 하였으나 아무도 답을 주지 못해 스님께 감히 이런 무례한 질문을 합니다. 이렇게 힘든 세상 왜 살아야 합니까? 먹기 위해 사는 겁니까, 살기 위해 먹는 것입니까? 매일 근심걱정에 싸여 사느니 목숨을 끓어버리면 아무 고통 없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사실은 살기 위해 먹는 것도 아니고 또 먹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우리는 지금 걷고 있는데, 목마르면 그대로 물을 먹고 갑니다. 내가 먹기 위해서 사느냐 하는 그 생각을 하기 이전에 벌써 목마르면 내 앞에 놓인 물을 바로 먹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러니 내가 이 물을 먹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그 생각을 하기 이전에 벌써 먹어버렸으니 무어라고 말을 해야 될까요? 그러니까 그런 말은 군더더기가 되죠. 그래서 여러분이 내가 살기 위해서 먹나, 또는 먹기 위해서 사나 이런 걸 생각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 생각 하기 이전에 벌써 먹었고 변소에 갔고 벌써 다 치웠으니까요.
그러니 그렇다 저렇다를 다 맡겨 놓으세요. 내가 있기 때문에 참나가 있고 참나가 있기에 그게 근본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근본. 근본은 우주의 근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거기에다 맡겨 놓고 가신다면, 내가 아는 거 모르는 거 할 거 없이 모든 것을 그 자리에 놓고 여여하게 가게 됩니다.
그냥 거기에 맡겨 놓으십시오. 아는 것도 참자기가 알기 때문에 아는 거지 자기 겉껍데기가 생각이 없다면 목석입니다. 생각을 낼 수 없는데 목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생명이 없으면 송장이죠. 육체가 없으면 안 보이니까 무효구요. 그러니 삼위일체가 무효로 돌아갑니다. 삼위일체가 구성돼서 같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에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한’이라는 게 들어가죠. 바닷물도 한 그릇이라고 할 수 있고, 사람 하나가 전체 우주라고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실험도 해 보시지 않고 이렇다 저렇다 말로만 얘기 하지 마세요. 무조건입니다.
아니, 형상을 믿으라고 했습니까,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까? 허공을 믿으라고 했습니까, 이름을 믿으라고 했습니까?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를 믿으라는데 왜 못 믿습니까? 차가 운전수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어요? 운전수가 차를 끌고 다니니까 구덩이에 처박는 것도 운전수지 다른 누가 그러는 건가요? 기름을 넣는 것도 운전수요, 차를 거꾸로 박는 것도 운전수요, 좋은 길로 끌고 가는 것도 운전수입니다. 그러니 어떡합니까? 거기를 믿고 모든 것은 거기에 맡겨 놔야죠.
여러분이 만약에 장님이라면 여러분의 참자기는 눈 뜬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눈 뜬 사람을 쫓아가야죠. 바로 여러분이 눈 뜬 사람이자 눈 뜨지 못한 사람입니다. 왜? 물질세계를 육안으로만 봐서 알 수가 없으니까요. 심안으로 봐야 됩니다. 그래서 심안과 육안이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이 공부를 해서 나를 발견하면 심안이나 육안이나 둘이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이 공부를 모른다 하더라도, 일단 내가 지금 가랑잎이 떨어질 때가 서서히 와 가지고 가을 벌판을 걷고 있거든요. 그런데 뭐이 그리 원통해서 자기 주인공 믿으라는데 왜 못 믿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노인네가 되셨으면 애가 될 거고 애가 됐으면 늙어질 겁니다. 우리는 영원히 죽고 영원히 사는 게 없습니다. 내가 그런 소리를 가끔 잘 합니다. 낙엽은 떨어졌을지언정 어찌 나무 뿌리가 죽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와서 가랑잎이 다 떨어졌지만, 그 나무는 내 마음의 봄이라고 생각하면서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락없이 봄이 오면 싹이 트고 물이 오르고 그러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그런 물질 아닌 참나를 발견함으로써 바로 현상으로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이 물질 아닌 주인공과 물질인 나와 둘이 아니게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진짜로 믿는다면 무의 생각이 현상으로 나오게 되죠. 무심으로 보이지 않고 남이 모르게 생각을 했는데 바깥으로 내가 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생활의 과학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러니 딴 데 가서 찾지 마시고 우리 생활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정성들이는 의미

저희 언니가 절에 열심히 다니는데 요즘 제 사업이 잘 되지 않으니까 마음을 닦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절에 정성을 들이는 만큼 그것이 내 쪽으로 온다고 하면서 천도재도 지내고,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라는 말은 수긍이 가는데요, 정성을 들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 말만 들으면 너무 기복을 바라는 것 같아서요. 어찌해야 하는지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보이지 않는 데서 생긴 병은 보이지 않는 데서 고쳐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자기가 잘못 저질러 놓은 거는 자기가 바로 잡아야 합니다. 자기가 말을 잘못했으면 자기가 수습을 해야 하듯이 말입니다. 이게 전부 일반 생활입니다, 우리가 생활에서 체득을 안 하면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보이지 않는 데서 고장 난 거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데서 고쳐야 된다 이겁니다. 그러니 절실히 믿으셔야죠.
그 반면에 우리가 인간은 태어날 때 어머니 아버지의 뼈와 살을 빌어서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인과에 의해서 전자에 살던 악업 선업을 다 이 몸뚱이 속에 지니고, 한 혹성의 별성이 움죽거리듯이 몸뚱이 속에 생명들이 그렇게 인연지어진 대로 지금 움죽거리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악업 선업이 한데 뭉쳐진 고(苦)라고 합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과거에 살던 자기의 업식이 지금 현실에 자꾸 나오는 까닭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어떠한 행과 마음가짐을 가져야만 복과 덕을 쌓고, 즉 공덕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거를 침착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있어야 합니다. 항상 얘기하지만 어머니 아버지의 몸만 받았지 자기가 지니고 있고 자기가 행한 그 과거의 업보를 자기가 지금 현재 들고 나온 겁니다. 그런 거를 여러분이 정성을 들이고 불사에 동참을 하고 이러면서도, 자기가 과거의 업을 제거해야 자식 대로 내려가도록 그것이 즉, 뿌리에서부터 가장구에서부터 이파리로부터 꽃이나 열매가 익을 수 있는 그러한 부모의 유전적인 인과가 있기 때문에, 부모가 잘 해야만이 자식뿐 아니라 자기가 이다음에 죽어서 다시 태어날 때도 그 자식으로부터 받들어 줄 수 있고 내가 수만 명을 거느려도 손색이 없으리만큼 그런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하지 않은 것을 그걸 어찌 바라겠습니까? 지금 고통이 있어서 고통스럽다고 앨 쓰기 이전에 내가 해놓으면, 이 세상에는 요만한 거 하나 에누리가 없습니다.
절에 스님이 계신다 해도 어떤 스님을 위해서 여러분이 한 푼 두 푼, 아니 콩 한 쪼가리도 갖다 주는 게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고, 자식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또 자기 부모 은덕을 기리기 위해서고, 위로는 조상님의 은혜를 갚고 묵은 빚을 갚고, 아래로는 햇빛을 주면서, 또는 뿌리를 길러줄 수 있는 그런 어머니 아버지의 능력에 도달해야만 되고 정성이 도달해야만 되고, 그 공덕이 도달해야만이 우리가 참으로 자유스럽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그런 기초가 되고 또 그런 기반이 다 정해지는 겁니다.
나무가 가을이 오면 낙엽이 떨어지고, 낙엽이 떨어지면 앙상한 가지만 남아서 눈이 오거나 비가 오더라도, 바람이 세게 불어도 그 추위에 바들바들 떨면서도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그 마음과 같이 우리 인간의 마음도 그렇게 인내가 있어야 하고 믿음이 있어야 하고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마음이 자기에게 모든 것을 갖다 주는 거지 하지 않았는데 누가 갖다 줍니까.
여러분 지금 현 세상에서 지금 생활을 하고 계시지요? 생활을 하고 계신데 밤이나 낮이나 일을 나가서 그만큼 하지 않았다면, 내가 움죽거리지 않았다면 그 대가가 올 수 있을까요? 대가는 오지 않습니다. 그것입니다, 바로. 내가 마음의 정성을 한 번 했을 때 그 마음의 정성이 있었기 때문에 과거의 빚진 거를 갚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도리를 배우고 실천하고 나가다 보면 내 마음이 바뀌고 내 모습이 바뀌고 가정이 바뀌어지는 것을 모두 아실 겁니다.
그와 같이 인간에게는 자식과 부모와라는 가설, 형제라는 가설이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자동적인, 자가발전소라고 하죠? 주인공이 바로 자가발전소입니다. 용광로도 되구요. 그래서 거기다 모든 것을 하나하나 맡겨 놓다보면 그렇게 여러분이 아시게 됩니다. 하나하나 맡겨보고 지켜보면서 거기서 실험도 되고 바로 체험이 되는 겁니다.
요즘은 참 어려운 시기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이렇게 이해는 하지만, 없고 있고를 떠나서 불심이 돈독해야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모든 것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건데 이 몸뚱이가 살아봐아 얼마나 오래 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생활을 하면서 항상 무주상 보시를 하라고 하는 말의 뜻은, 내가 천원을 가지고 가든 만원을 가지고 가든 상점에 가서 물건을 살 때에 물건과 더불어 바꾸어 가지고 나오면서 내가 돈 준 것만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나를 위해서, 내가 쓰기 위해서 물건을 샀는데, 어찌 부처님 전에 단돈 천원이라도 정성을 들이면서 그 천원 낸 거를 생각하겠느냐는 겁니다. 만약에 냈다는 생각을 하고 보시를 한다면 그것은 아마 무효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냈다는 상을 두고 했기 때문에 대가가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무주상 보시로서 내 성의껏 내 가정 형편껏 하면서 식구를 속 썩이지 말고, 또 내 속을 끓이면서 남을 원망을 하면서 이렇게 단돈 얼마를 시주했다고 하면은 그것은 무효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그 병들 난 것도 바로 주인공에 그렇게 믿고 맡길 수만 있다면, 바로 자기가 밀고 나가는 거 아니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절대 이거는, 그건 다짐합니다. 자기가 실험 안 해보고 자기가 체험 안 해보고는 이런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공부를, 공부랄 건 없지만 내 마음의 도리를 다 익히지 못한 여러분이 지금 이런 저런 일들에 끄달리고 있는데 마음으로만 기울어지지 말고 공부를 하면서도, 이 도리를 알려고 공부를 하면서도 단 한 푼이든 두 푼이든 자기 형세대로 부처님 앞에 갖다 놓고 ‘일체제불이 바로 당신이요, 당신이 바로 내 마음이요. 당신의 형상적인 몸이 내 몸이니 어찌 둘이겠습니까? 주인공! 당신밖엔 해결 못하지요.' 하고 내 형세대로 갖다 놓고 정성을 들인다면, 여러분이 나으니 좋고 그 돈을 모아서 또 여러분의 여래의 집을 만든다면 그건 더욱 더 좋은 일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것은 어떠한 개인의 집이 아닙니다. 여래의 집이라는 건 부처님의, 이 여러분의 일체 만물만생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정성을 지극하게 할 수 있다면, 바로 제일 큰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바로 마음 씀씀이입니다. 인간이 살아나가는 데에 돈이라는 것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을 올바로 가지고 자기 몸을 똑바로 이끌고, 자기 마음으로 하여금 몸을 똑바로 이끄는 반면에 몸은 마음을 이끌고 이렇게 해서 양면이 온전하게 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주인공을 믿고 일체를 거기에 맡겨놓고 편안하게 살아가기 바랍니다.
2003-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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