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법정스님의 ‘어린 누이에게’란 글이 요즘은 빠져 있다.
‘어린 누이에게’ 혹은 ‘무소유’ 등의 글을 읽고 불일암에 찾아온 사람들이 많다. 또한 신문 잡지에 실린 스님의 글, 수필집이나 경전 번역·해설서 등의 책을 읽고 찾아온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여름날에는 수제비를 만들어서 멍석을 깔고 풀밭에서 참배객들과 먹는 재미도 있었다. 물론 수제비를 만드는 일은 내 몫이다.
스님은 목공 도구를 잘 갖추고 계신다.
전각도 100여 점 갖고 있다. 대개가 석정(石鼎) 스님, 수안(殊眼) 스님, 무용(無用) 거사, 그리고 내가 해 드린 스님의 전각 작품들이다. 스님의 심미안(審美眼)이 예사롭지 않다. 전각을 완성해서 보여드리면 차를 마시면서 평을 하신다.
“여긴 공간처리가 어색해. 칼 맛은 나는구먼!”
그리고는 밑그림 디자인을 직접 해 보이실 때도 있다.
“불일암 전각은 부처, 해, 암자를 그림으로 그려 넣고 해 봐요.”
그러고 보니 ‘불(佛) 일(日) 암(庵)’이다.
길이 세 치 크기의 이 불일암 낙관은 나의 인보(印譜)에 들어 있다.
불일암 한쪽 벽에 걸려있는 ‘살어리 살어리랏다’ 현판은 스님이 직접 목각한 작품이다. 문인화 전시장에서 스님이 감상하면서 살펴보시는 눈이 높았는데 한때 부채에 그려주신 그림들은 그런 수준에서 나왔을 것이다.
차도구, 죽비 등도 스님이 손수 만드신다.
이제 법정스님이 나에 대해 자랑하신 이야기를 할 차례다. 중생은 입을 열면 남의 험담이 아니면 제 자랑뿐이라던가.
“지묵 수좌에게는 내가 못 따라가는 세 가지가 있어.”
“지묵 수좌는 칭찬을 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그래서 일을 시키기가 수월해.” 하신다.
칭찬을 받으면 의기양양해져서 잠시 몸을 잊는다. 하하, 팔풍(八風)이 불어도 끄떡않아야 하는 처지에 칭찬에 흔들리다니….
법정스님이 말씀하시는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전각이다. 스님도 전각을 조금 하시지만 보는 눈만 있으신 편이다. 내가 처음에는 백석(白石)옹 풍의, 쓱쓱 밀어붙이기식 칼질을 즐겼다가 오창석(吳昌錫) 풍으로 돌아오기까지 법정스님이 곁에서 지켜보시고 늘 칭찬을 해 주셨다.
둘째는 수제비이다. 수제비를 시키기 전에 스님은 말씀하신다. 소금과 밀가루, 단 두가지로 수제비를 만들라고 해도 거뜬히 해내는 건 지묵 수좌 뿐이라고.
셋째는 돌계단 쌓기다. 규격 돌을 쌓기 보다 잡석을 쌓기가 힘들다. 스님은 나의 돌 쌓는 일에 이름을 붙인다.
“지묵 수좌의 특수공법!”
이십 여 년이 지나도 불일암을 올라가는 층계 돌이 그대로 남아있다. 맨 위의 16 계단은 길이 바꿔지면서 사라졌고 나머지는 여전하다.
돌 쌓는 일에 빠져있을 때에 나는 경험하였다. 밤낮으로 나는 돌을 쌓고 있었다. 눈을 감고 누워도 여전히 돌을 쌓았다. 피곤했지만 돌 지게를 지고 일을 쉼없이 하였다.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돌을 쌓고 있었다.
만일 누가 나의 돌 쌓는 일을 그만 두라고 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느새 돌쌓기와 나는 하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뒷날 생각해보니 그게 삼매(三昧)였으며, 마치 화두 공부에서 화두와 수행자가 하나인 것과 같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미 열반한 휴암(休庵)스님이 돌쌓기에 여념이 없는 나를 두고 법정스님께 말하였다.
“하, 처음 봤어요. 밤에 불까지 켜놓고 산길에서 돌을 쌓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일에 재미붙인 지묵 수좌 외에는.”
세월이 무상하다. 이야기를 꺼내다가 문득 휴암 스님 이야기에 와서 찡해진다. 불일암에서 수제비를 먹고 크게 웃으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수선사 선방 열중이셨던 휴암 스님은 선적(禪寂) 여가에 불일암에 올라와 법정스님과 담론하기를 즐겼다. 스님 역시 지인(知人)의 한 사람으로 맞아들여 오가는 세상사며 선사 일화들을 조용히 나누는 모습이 그대로 한 폭의 신선도(神仙圖)였다.
■송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