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4 (음)
> 종합 > 기사보기
계율의 제정과 정신
종교윤리에는 두 가지 형식이 있다. 하나는 규범윤리이며, 다른 하나는 응용윤리이다. 서두에서 종교윤리를 언급하는 것은 계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기 때문이다. 계율이란 종교윤리에서는 규범윤리에 속하는 것이며, 윤리의 정합성을 논하기 이전에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하는 일종의 강제성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규범윤리에 속하는 계율은 세분하면 개인에 관한 조항과 단체에 관한 조항으로 구분할 수 있다. 개인에 관한 것을 계(戒)라 하며, 단체에 관한 것을 율(律)이라 한다. 결국 개인적인 규범과 단체의 규범이 합하여 계율이 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5계, 10선계, 8재계 등은 모두 개인적인 규범이며, 기타 교단을 운영하기 위한 조항이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시설된 조항 등은 모두 단체 규범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구족계라는 것은 비구와 비구니에 따라 약간 다르지만 그 근본정신은 경계와 제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요익중생계나 정법호지계(正法護持戒)는 계와 율의 어디에 속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까? 중생을 이익되게 해야 한다는 조항이나 정법을 지켜야 한다는 조항을 개인적인 규범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단체의 규범으로 보아야 하는가? 필자의 견해로는 어느 쪽으로든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계와 율과는 다른 입장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대승불교의 계율들은 그 성격상 종교윤리의 두 가지 영역 속에서 응용윤리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중생을 유익하게 한다든가 혹은 정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해석상의 여지를 남겨둔다 하더라도 일단은 교단이나 불교도 개개인의 문제를 넘어 그 성격이 사회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정의, 평화, 분배, 인권 등은 모두 요익중생이나 정법호지와 결부되어 있으며, 이러한 주제들이 바로 응용윤리에서 주목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불교윤리, 즉 계율은 신이나 다른 궁극적 절대자에 의해 제정된 것이기에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많은 제자들을 이끌고 수행하는 과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사안에 따라 그때그때 제정된 것이다. 이것은 계율이 가장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동시에 시대정신에 맞지 않거나 수행이나 화합에 방해물이 되는 조항은 언제든지 교단의 합의에 의해 폐기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부처님께서도 아난에게 ‘소소한 계율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구체적으로 소소한 계율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부연설명은 전해지고 있지 않지만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 법에 상응하지 않고, 깨달음에 상응하지 않고, 청정한 생활을 영위하는데 상응하지 않는 것은 필요에 따라 없앨 수 있다고 유추 해석할 수 있다.
계율이 폐기될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새로운 계율의 제정도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기에 부처님께서 언급하지 못했던 사회악이나 개인의 자유의지를 침해하는 사안들에 대해서는 교단의 합의에 의해 새로운 계율 조항으로 편입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범람하는 담배, 사이버테러, 사이버 매매춘, 인종차별, 몰래 카메라, 도청 등등 많은 사안들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본다.
새삼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께서 설명하신 계율을 제정하게 된 이유를 통해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분율>권1에 나오는 것이며, 전문적으로는 계율제정의 열 가지 정당성이란 의미의 십구의(十句義)라 부르는 것이다. 첫째는 대중의 통솔을 위해서이다. 제자가 많아지자 수행자의 근본을 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에 계율이 필요했다. 둘째는 대중의 화합을 위해서이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개성을 발산하며 수행한다는 것은 사실 많은 불협화음을 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셋째 대중의 안락을 위해서, 넷째는 통제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 다섯째는 참회한 사람들의 안락을 위해, 여섯 번째는 신자가 아닌 사람들을 입문시키기 위해, 일곱 번째 입문자의 신심을 증장시키기 위해, 여덟째 현세의 번뇌를 끊도록 하기 위해, 아홉 번째 후세의 욕망을 끊기 위해, 열 번째 정법이 영원히 유통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시대와 공간이 달라지면 그 정신은 살리되 현실성이 없거나 앞으로도 계율의 의미를 살릴 수 없는 것들은 폐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것은 가장 비불교적인 행태라 본다. 현재 동북아불교 역시 자연환경 내지 문화적 차이에 의해 지키지 않고 사문화된 계율이 많다. 계율정신의 현실화가 필요한 것이다.
<본지 상임논설위원·불교학 박사>
2003-07-30
 
 
   
   
2024. 5.21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