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생명 빼앗을 권리 없어
사람들이 저마다 살기가 힘들다고 한다. IMF 때보다 더하다고까지 한다. 신용불량자가 몇 명이라는 통계나 카드 빚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다는 소식은 이제 그리 놀랄 일이 아닐 정도로 예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예사 소식 속에서 들리는 자살 소식은 언제나 슬프고 우울하다. 도대체 사람이 돈을 부리고 사는 건지, 돈이 사람을 부리고 사는 건지….
생활고에 시달리다 아이들을 아파트 아래로 집어던지고(!) 자신도 투신자살한 어머니의 소식은 충격이라는 말로도 표현하기 힘들만큼 놀라운 사건이다. 죽기 싫다면서 살려달라는 아이들의 버둥거림이 눈에 어른거려 울컥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쉽지 않았다.
<증일아함경>에서는 임신에 대해 언급하면서 어머니의 상태가 적절해야 하고, 부모가 화합해야 하며, 마지막으로 바깥에 있던 식(識)이 태로 들어가야 한다고 설명한다. 중유 상태인 식이 태에 들어가 새로운 생명체가 되는 과정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유가사지론>에서도 “태생(胎生)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업력(業力)이 같아서 서로의 애착이 부합하여야 출생하게 된다”고 서술하였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부모가 아이를 낳는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태어날 아기와 부모의 업력이 서로 맞아야 한단다. 더 나아가 아이가 부모를 선택하는 것처럼 말한다. 자신의 행동에 철저한 책임을 요구하는 업이라는 논리에서는 탄생마저도 예외일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낳은 자식이라도 그의 생명까지 내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어머니 없이 힘들게 살게 하는 것보다는 함께 죽는 것이 낫다고도 하지만 그 아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살(自殺)’을 요즘은 ‘자아살인(自我殺人)’이라고까지 한다. 자살도 살인인데 부모가 천륜으로 맺어진 자식을 살해하는 일은 어떤 변명과 핑계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최원섭(성철선사상연구원 연학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