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체인 우리는 서로 말을 사용하여 뜻을 공유한다. 인류의 문화와 문명도 말로 인한 지식의 공유와 전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편, 말을 놓으라고 강조하는 참선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이다. 어린이에게 이 질문을 하면 보통 ‘나는 나지요’라는 대답을 한다. 이 대답은 지극히 당연한 대답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 아이의 대답은 ‘사실’에 근거한 대답이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진실’한 내가 누구이냐 하는 것이기에. 그렇다면 무엇을 사실이라 (과학적 사실을 포함하여) 하며 무엇을 진실이라 할까요?
진실은 상대적 실체의 유무를 벗어나서 과거 현재 미래를 떠나 스스로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짐짓 정의한다면, 사실이란 우리들의 약속된 조건을 통해 서로가 그렇다고 ‘믿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과학자들의 약속 하에서 펼쳐져 이루어진 것이 지금의 과학적 세계이기에 지금의 약 속에서는 ‘25-2’를 23이라 말하면 사실이지만 우리가 약속하기에 따라 ‘25-2’를 5라고 (2가 없어지니까) 약속하여 이 세계를 보아왔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문화와 관점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이렇듯 사실을 규정하는 우리 믿음의 대표적인 것으로서 생명체가 사용하는 말이 있다. ‘어’, ‘머’, ‘니’라는 단순한 세가지 소리를 조합해 어머니라는 뜻을 만들어 낸다. 그러한 소리와 그 뜻은 본래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던 것이지만 우리의 공통된 약속에 의해 그러한 세 가지 소리의 조합은 어머니라는 것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당연히 가리키고자 하는 그 자체와 그 수단과는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어머니라는 말을 우리가 쓴다 해도 그 말을 듣는 각자는 어머니에 대한 개인적 체험이 들어가 실제로는 각자 틀린 뉘앙스로 어머니라는 말을 받아들이게 된다. 어쨌든 말의 이러한 면은 일종의 상징이요, 은유(metaphor)라 할 수 있다.
성장하며 말을 배워 말을 통해 자의식이 형성되기에 우리가 보고 들어 믿고 있는 이 세상의 사물(相)은 말로 표현되는 단순한 상징과 은유에 불과한 것이요 실체·실상·진실이 아닌 우리가 만들어낸 비유의 세계에 불과한 것이다. 즉, 말의 질서는 사물의 질서요 은유의 질서이며, 이것이 곧 존재의 질서이다. 은유나 상징으로 나타난 것은 실상, 그 자체와는 본질적으로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다만 그 양자간의 관계를 우리는 믿어 받아들일 뿐이다. 결국 현재 이 세상 속의 실상은 단지 우리의 믿음 속에서 그 얼굴을 나타내고 표현되어 지고 있는 것이다. 즉, 실체(실상)는 단지 우리가 어떠한 믿음(마음)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가에 따라 8만4천의 얼굴로 존재하게 된다. 내 마음 하나에 의해 이세상이 펼쳐지고 지금 이 순간에 삼천대천세계가 내 마음 한자리에서 공존하는 것이다.
■서울대 수의과대학 면역학교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