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미륵신앙 구심점
미륵은 침묵의 부처님이다. 아주 멀리 깊은 침묵 속에 있어 역사의 구비마다 중생들이 간절히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리하여 미륵은 또한 원망의 부처님이다. 그러나 무수한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은 미륵하생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므로 미륵은 다시 영원한 희망의 부처님이다. 거대한 침묵. 56억 7천만년 후에나 이 세상에 강생하여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단 3번의 설법으로 사바 예토의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한다 함으로 그 때까지는 눈 질끈 감고 기다려야 한다. 도솔천에도 무슨 현안이 그렇게 많은지 아직도 그 때 아니라고 한다.
익산(益山)은 그냥 산이 아니다. 원력의 산이고, 침묵의 산이다. 미륵을 기다리다 못해 천길 수심 연못을 메우고, 탑을 세웠던 사람들. 그들의 원력이 켜켜이 쌓인 곳이 익산이다. 이 나라 불도량 가운데 미륵을 기린 도량이 허다하지만 익산의 미륵사지(사적 제 150호)만큼 간절히, 위대한 기다림으로 미륵의 성지를 만든 곳은 흔치 않다. 익산의 미륵사지는 도솔천 미륵부처님이 중생의 성화에 못 이겨 짐짓 현신(顯身)의 기적을 나투었던 예사롭지 않은 곳이다. 그 사연이 전설이든 설화이든 벅찬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곳이 바로 제행무상의 현장이요, 열반적정의 진면목이기 때문이다. 절터 구석구석 유구 아닌 것이 없고 부재 아닌 것이 없다. 그것들은 단순히 잊혀진 가람의 망가진 유물이 아니라 부서진 설화이고 깨진 전설의 조각들이다.
신라에 황룡사가 있었다면 백제에는 미륵사가 있었다. 서라벌 하늘을 황룡사 9층 석탑이 이고 있었다면 백제 땅 금마에는 미륵사지 9층탑이 있어 기울지 않는 높이로 반도의 하늘을 떠받칠 수 있었다. 황룡사가 화엄의 절이라면 미륵사는 미륵의 절이다. 그리하여 신라불교에서는 숯불 같은 따스함이 배어나지만 백제불교에서는 질박하고 부드러운 황토 냄새가 느껴지는 것이다.
미륵사의 창건에 관하여는 전해오는 이야기들이 넉넉하다. 삼국유사 무왕조의 기록에는 미륵사 근처 오금산(현재 익산 쌍릉이 자리하고 있는 곳)에서 마를 캐며 홀어머니와 살던 마동이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하는 서동설화가 미륵사 창건설화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선화공주를 연모하여 서라벌 장안에 향가 ‘서동요’를 퍼뜨려 아내로 얻은 서동은 무왕(백제 30대왕, AD600~640)이 되어 왕비와 더불어 용화산(현재의 미륵산) 사자사에 있는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 못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출현하자 그 곳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미륵삼존을 모시기 위하여 전·탑·낭무를 세 곳에 세웠다는 것이다. 미륵사 창건에 관한 삼국유사의 이 기록은 발굴조사를 통해 못을 메운 흙이 산 흙이라는 것과 가람이 삼원으로 구성된 것 등에서 대부분 사실과 일치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미륵사 창건에 관하여서는 이러한 설화만이 아니라 백제의 의도된 정치적 목적이 있었음을 추측하지 않을 수 없다. 백제의 영토이기 이전에 익산은 마한의 땅으로 54개 소국 가운데 하나인 건마국(乾馬國)이었다. 백제의 시조 온조는 마한을 병합하여 이곳을 금마저(金馬渚)라 불렀다. 이후 백제 문화의 전성기였던 600년 무렵, 무왕은 새로운 세력 확장의 기반으로 마한의 중심이었던 이곳 금마저를 도성으로 삼고 미륵사, 제석사와 같은 거대 사찰을 조성하고 왕궁리평성을 축조하였다. 이것을 근거로 백제가 금마지역으로 천도를 계획했었다는 주장과 함께 사비성, 웅진성과 같이 별도(別都)로 정해 경영했다는 설들이 있는데, 이 역시 근래의 발굴 결과 백제의 중엽이래 공주 부여와 함께 백제문화의 또 하나의 중심지였음이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륵사 창건 시에 신라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 도와주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이 미륵사야 말로 백제의 문화적 역량이 총동원되고 삼국의 기술이 결집된 한국 최대의 사찰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미륵사지가 세인의 주목을 받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나라 최고, 최대의 석탑이라 불리는 미륵사지석탑(국보 제 11호)이 있기 때문이다. 창건 당시 높이 14.24m의 9층인 것으로 짐작되는 이 탑은 세월의 무게로 무너지기 시작하여 6층까지만 남아 있었는데 2001년부터 보수작업에 들어가 현재 한창 해체 작업이 진행 중이다. 문화재청은 2010년까지 총 예산 80억을 투입하여 원형 찾기를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914년 일제가 붕괴 직전에 있던 탑의 서쪽과 동북쪽 면에 콘크리이트를 발라 응급복구를 한 흔적은 탑의 해체 및 보수에 큰 장애물로 여겨지고 있다. 석재에 묻은 콘크리이트 흔적들을 원 석재의 손상 없이 떼어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복원 계획 역시 창건 당시의 9층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해체 직전의 6층으로 할 것인지도 신중을 기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완전 복원도 좋지만 새로운 석재의 비율이 50%를 넘을 때는 국보로서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지적을 경청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가덧집 속에서 새로운 탈바꿈을 시도하는 미륵사지석탑이 어떠한 모습으로 태어날지 여간 궁금해지지 않는다.
미륵사지에는 본래 3기의 탑이 있었는데, 현재의 미륵사지석탑은 서쪽 편에 위치한 ‘서탑’이었고, 중앙에는 거대한 목탑이, 동편으로는 동탑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의 동쪽 9층석탑은 1993년에 복원된 것인데, 새로운 석재를 쓰다보니 아무래도 세월의 더께까지는 흉내 낼 수 없어 연못에 비친 그림자조차 어색하기 그지없다. 다시 얼마의 세월이 지나야 이 동탑 또한 서탑과 같이 국보급의 대접을 받게 될 것인가. 성보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만드는 것임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사역이 광범위했던 만큼, 미륵사지에는 동편과 서편에 당간지주(보물 제 236호) 2기가 서있다. 당간지주 앞에는 또 2개의 연못이 있어 옛사람들이 못을 메웠다 하나 그 샘물은 아직 마르지 않고 있다. 소금쟁이와 물땡땡이들이 헤엄치는 물 속이 잊혀진 그 세월의 수심만큼이나 어둡다. 미륵사지는 왕조가 바뀌어도 그 향화를 끊이지 않고 미륵신앙의 구심점으로 자리잡아왔으나, 임진왜란으로 전화를 당한 채 역사 속에 매몰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륵사지 탐방이 예전과 달리 허전함을 금치 못하는 것은 그 고졸한 석탑이 가덧집 속에 갇혔기 때문만은 아니다. 마룡지를 찾지 않고는 미륵사지 순례의 발길을 돌릴수 없는 것이다. 마룡지는 쌍릉이 있는 산 아래 논 한가운데 있다. 일명 용샘이라고도 하는 이 샘터는 바로 무왕의 어머니가 용과 인연을 맺어 서동을 낳았다는 전설이 깃든 그 곳이다. 이 또한 세월의 무상함인가, 전설의 허구성인가. 1300여 년전 미륵의 꿈을 가꾼 역사적 인물의 탄생을 간직한 샘터에는 농약병과 잡풀들만이 뒤엉켜 있었다.
<시인 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
다음은 왕평리사지편
사진=고영배 기자
미륵사지터 가는길
호남고속도로 익산 I.C에서 722번 지방도를 타고 익산시내 방면 금마 사거리(미륵사지 주유소)에서 우회전하면 금마, 미륵사지가 나온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할 경우 동군산 I.C로 진입해 718번 지방도를 이용하면 된다.
현지에서는 전주 공용버스터미널에서 3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금마행 직행버스를 타고 금마에서 41, 60번 시내버스를 이용해 미륵사지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