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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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2)강인한 고구려 이미지
1963년 7월 16일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 있는 자굴산 계곡. 열두 살 난 꼬마가 계곡 옆 돌밭에서 자갈을 캐다가 30cm 정도의 돌판을 발견했다. 돌판을 들치니 길이 40cm의 석실이 나타나고 그 안에 금붙이의 상이 보였다. 고구려의 대표적인 불상인 연가7년명금동불입상은 고구려 영토도 아닌 한반도의 남쪽 산골에서 이처럼 우연히 발견됐다.
연가7년명금동불입상의 인상은 매우 강렬하다. 백제나 신라 불상이 살이 통통하고 부드러운데 비하여 이 불상은 얼굴이 갸름하지만 강인하다. 강렬한 표현은 얼굴에만 머물지 않는다. 작은 크기의 불상이지만 최대한 큼직한 양감과 역동적인 조형을 창출해냈다. 옷주름은 V자형으로 골이 깊고 날카롭게 내려가다가 옷자락에서 지느러미처럼 좌우로 뻗쳐 있다. 손은 신체에 비하여 유난히 큰데, 오른손은 위로 세우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무명지와 약지를 구부린 시무외여원인이다. 이러한 조형적인 고려는 불상의 권위를 드높이는 데 한 몫을 하고 있다. 몸에서는 배 모양의 불빛이 활활 타오르고, 부처님은 터질 것같이 팽팽하게 살이 오른 연꽃에서 팽이 모양으로 튀어나온 연밥을 딛고 서 있다. 잔잔한 음각선으로 표현한 얇은 광배는 양감이 높은 불상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불상의 광배 뒷면에는 음각으로 명문이 새겨져 있다. 연가(延嘉) 7년에 낙랑(평양) 동사(東寺)의 승려들이 천불을 조성하였는데, 그 가운데 29번째 불상이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연가 7년이 과연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539년이란 설과 599년 설이 있다. 이 문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판단을 내려야 할 사안이지만, 고구려 고분벽화와의 비교로 한정해 본다면 좀더 이른 시기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이 불상은 얼굴이 갸름한데다 어깨까지 좁고 가파르게 내려가고 더욱이 옷깃이 좌우로 펼쳐져 있어 우산 또는 고깔 모양의 실루엣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형상은 5세기 고분벽화에서 쉽게 발견되는 특징이다. 고깔 모양의 인물상은 이미 408년에 조성된 덕흥리벽화고분부터 나타난다. 5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고분벽화인 수산리벽화고분에서도 여전히 고깔 모양의 인물상이 그려지는데, 여기서는 매우 세련된 면모가 돋보인다. 6세기 말 오회분4호묘의 연화화생은, 여전히 고깔 모양의 실루엣을 유지하고 있지만 어깨가 비교적 둥글어지고, 옷깃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나 타오르는 불꽃을 보면, 연가7년명금동불입상보다 동감이 넘친다. 그런데 아쉽게도 6세기 전반의 특징이 뚜렷한 인물이 고분에서는 매우 드물어 539년설의 시비를 가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5, 6세기 고분벽화의 인물상이 연가7년명금동불입상과 양식적인 측면에서 상통한다는 것이다.
■경주대 문화재학부
2003-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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