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건 다 부처님의 뜻 아님이 없어
벌써 날씨는 가을 날씨로 변했습니다. 우리가 살아나갈 때 찰나찰나 변해서 돌아가듯이 말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인간이 정신계는 무시하고 물질계에만 집착하여 정신계의 50%만 넣고 굴리려니까 맞지 않습니다. 정신계의 50%와 물질계의 50%가 맞물려서 같이 작용을 해야만이 100%가 되는 이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모두 바깥으로 끄달리고 바깥으로 이름을 찾고, 바깥으로 형상을 찾고 바깥으로 허공을 보고 모든 것을 허무하다 하고 나가시니까 50%는 감추어져서 100%가 같이 돌아가지 못하는 이치가 됩니다. 그러니 어떻게 걸리지 않고 순수하게 돌아가겠습니까. 모두가 걸리고 액난이 거듭거듭 닥쳐오고 결국 내 몸도 이끌어가지 못하는 그런 상태까지 오게 되는 거지요.
모두 회보에 나와있으니까 보셨으리라고 믿고, 오늘은 살아나가다 어떠한 고난이 생길 때 여기를 찾아오시는 얘기를 합시다.
여러분이 오시게 되면 마음에 어떠한 액난이나 고난을 안고 옵니다. 그 안고 오는 고난과 액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바로 내 마음속에서 악이 술술 풀려 나오고 액이 술술 풀려 나오고 병고가 술술 풀려 나오고, 모두 과거에 살던 그 인연에 따라서 업이 지어진 관계로 그렇게 나옵니다. 그렇게 나오는 것을 거기에 다 되맡겨 놔야만이 다시 입력이 돼서 과거의 것이 무너지고 현실의 것이 나오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왜 생각해 본 예도 없고 말한 예도 없고 행한 예도 없다고 말씀하셨을까요? 그 이치는, 여러분이 가져오시는 것을 마음으로 가져오시죠. 나도 여러분과 똑같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 마음과 마음이 한데 합쳐졌을 때 광력이 일어나게 돼 있습니다. 합쳐서 작용을 할 때에 바로 나오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러분의 마음과 내 마음이 양면이 없어지고 그 에너지 광만 나오게 돼 있죠. 그 양면이 없어지고 불이 번쩍 일어나듯이 여러분이 가져온 재료가 성사가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내가 했다고도 할 수 없고 여러분 중에 어떤 상대가 했다고도 할 수 없는 겁니다. 이것을 좁게 보면 네가 했다, 내가 했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공해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독불장군 없이 이렇게 돌아가는 반면에, 엄마 아빠가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엄마가 내 자식이라고만 할 수도 없고 남편 자식이라고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넓게 보면 모든 문제들이 네 자식 내 자식이 따로 없고 네 형제 내 형제가 따로 없다는 그런 이치로 돌아갑니다. 그럼으로써 하지 않았다도 아니고 했다도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했다 안 했다가 없습니다. 네 자식이다 내 자식이다 그것이 없습니다. 네가 했다, 내가 했다 그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선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일체중생이 다 무심이 와서 닿는다고 하더라도 무심이기 때문에 모든 게 들여놓은 것이 두드러짐이 없고 그것은 많이 굴려서 내보내도 또 주는 사이가 없다 이겁니다. 알아듣기 쉽게 하느라고 영은 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영이 왜 묘한가 하면 그것은 체가 없고, 만물을 다 한가지로 비유할 때 목신과 인간의 마음이 한마음이 된다면, 내가 목신이 될 수 있고 목신이 인간도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나무를 자르면 탈이 난다고 하는 것도 둘이 아닌 까닭에 그 마음을 내 마음에다 넣어서 한마음이 된다면 그것을 잘라도 괜찮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단을 만들어 놓고 영가의 위패를 모셔놓고 이렇게 하는 것을 모두 없애도 그 마음이 한마음으로 들기 때문에 그 물건은 치워도 되는 것입니다. 이 뜻을 아시겠습니까? 이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이 얼마나 묘하고 얼마나 뜻이 깊고 광대무변한지, 여러분은 들은 얘기 또 듣고 수만 번을 들어도 흘려버리다가 어느 순간 한번 딱 오는 예가 있습니다. 듣는다고 다 감응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침착하게 들으시고 침착하게 행동하시고 침착하고 부드럽게 말씀하시고, 생전의 마음으로 항상 나쁘게 생각하지 마시고 좋게만 굴려서 생각하고, 이익하게만 굴려서 생각하고 말하고 하십시오. 생각과 말이라는 것이 그렇게 구덩이에 빠뜨릴 수도 있다 이 소리입니다. 그냥 말과 생각들을 아무렇게나 해버리지만 그게 아주 적중되는 얘기입니다. 현실로 나오는 그렇게 무서운 도리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전자와 전자가 한데 합일해서 돌아갈 때, 바로 두 전자는 그냥 없어지는 거죠. 없어진다 하는 것은 하나로 몰두하기 때문에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광력, 즉 에너지광만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나가지 아니하면 성사되지 않습니다. 여기도 여러 정신분열자, 유전성으로 오는 사람, 영계성으로 오는 사람, 세균성으로 오는 사람, 업보성으로 오는 사람, 윤회성으로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것을 병원에서 100%를 다 해낸다고는 못 봅니다. 과거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정신계를 발전시키지 아니 한다면 그것을 막아나갈 수가 없습니다. 65%든 60%든 커버해 나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첫째는 내 몸도 이끌어가지 못한다면 내 가정도 이끌어 나가지 못합니다. 넓게 생각하세요. 하나만 생각하지 말고 포괄적인 하나로 생각하십시오. 한 가정이라면 한 방통 안이라고 봅니다. 내가 항상 말씀드리듯 전력은 다 똑같다는 얘기를 하죠. 방편으로, 전구는 많지만 전력은 똑 같다는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남편이나 자식이 내 뒤를 따라주지 않는다고 해서 싸우면서 온통 야단들을 하지 말고 그저 모든 것이 마음의 작용이니까 모든 것을 내 주인공에다 돌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주인공만이 우리 식구를 다 이끌어 줄 수 있고, 내 몸을 이끌어 줄 수 있고, 성사가 되는 것도 거기요, 성사가 안되는 것도 거기니, 성사가 되게 하는 것이 거기밖에 없다 이렇게 믿고, 거기에 맡기고 놓았을 때 식구들 마음이 점점 밝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전등은 각각이지만 전력이 같으니까, 그러니 그렇게 밝아질 것을 애를 태우고 나가서 안 들어오느니, 나가서 무슨 짓을 하느니, 나가서 어떻게 행동을 하느니 하고 모두 잠이 안 와서 잠을 못 자고 아둥바둥하니까 병은 병대로 나고 가정은 가정대로 파괴되고 화목하지 못하고 부드러운 말이 나오지 아니하고 부드러운 행동이 나오지 못하고 모두가 악화되는 겁니다. 너그럽게 생각을 하십시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배낭을 짊어지고 나왔기 때문에 과거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의 몸 속에 벌써 현실로 수억 개나 악업 선업을 짊어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과거가 어디 있습니까?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없구요. 그럼 이 몸이 배낭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렇게 수억겁을 거치고 진화되면서 쫓고 쫓기면서 인과를 짓고 업을 지은 이 악업 선업을 어떻게 해결을 하시렵니까? 모두 나오는 대로 용도에 따라서 거기에 다 맡겨 놓으신다면 바로 과거의 것은 무너지고 없어진다 이 소립니다.
현실에 좋게 생각해서 좋게 맡기는 것만이 좋게 나오게 되어 있어요. 그것을 숙명통이라고 하죠. 숙명통을 비교한다면 지금 컴퓨터와 같은 겁니다. 과거를 짊어지고 나오는, 그 입력이 되어서 나오는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나는 그렇게 해도 안됩니다’ 이런 사람이 있거든요. 안되긴 뭐가 안됩니까? 생활이 그대로 부처님 법이자 우리들의 법인데.
모든 것은 여러분이 있으니까 상대가 있죠. 여러분이 없으면 상대가 있을 리가 있나요? 무효지.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도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바로 상대가 있고, 상대가 있기 때문에 부작용이 생기고 모든 것이 일어나는 거니까 모든 것은 나로 인해서 상대가 있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됩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게 태초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게 화두입니다. 그것이 그대로 화두예요. 그대로 내가 내 주인공이 화두니까 앉으나 서나, 눕거나 깨나, 일을 하나 잠을 자나, 모든 것이 참선 아닌 것이 없어요.
좌선이다, 입선이다, 행선이다, 이런 것을 모두 합해서 참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앉아있을 때는 앉아서 생각하고, 설 때는 서서 생각을 하고, 일할 때는 일하면서 생각하고 그대로 하십시오. 내가 없으면 일체만법을 들이고 내고 할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 바로 여러분 배낭 속에서 나오는 것이지 딴 데서 나오는 것은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배낭 속에서 나오는 것을 다 다시 맡겨놔야만이 입력되었던 것이 없어진다 이 소리입니다.
이렇게 천차만별로 나오는 그 액난을 어떻게 커버하고 나갈 겁니까? 거기서 나오는 줄 모르고 거기서 딴 사람을 통해서 나를 지겹게 만들고, 딴 사람을 통해서 망하게 만들고, 딴 사람을 통해서 사기를 당하게 하고 별의별 우환이 찾아드는 것이 바로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억지로 못합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나오는 거니까 거기에다 모든 것을 맡겨 놓고 똑바로 믿고 직선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한마음 주인공! 나를 이렇게 해 주시오.’ 이게 아닙니다. ‘해 주시오’가 어디 있습니까? 둘이 아닌데 유심과 무심이 어떻게 둘이 됩니까? 정신과 육체가 어떻게 둘이 됩니까. 그러니까 해 주시오가 아니라 틀림없이 거기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 안되는 것도 거기서 나오는 것이니까 되게 하는 것도 거기다 이겁니다.
이심전심으로 수없이 통하고 돌아가는데 내 마음이 상대 마음으로 가서 바로 해결을 하는 것도 내 몸뚱이 속에 있는 중생들을 바로 보살로 화하게 만드는 작업입니다. 이 작업 없이는 내 속에 있는 업보성을 전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전부 보살로 만들 수 없습니다. 보살로 만들 수 없으면 중용을 할 수 없습니다. 즉 무심의 중용,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100%를 작용하면서 굴리는 것이 중용입니다.
그러니까 이쯤 해 두고 여러분이 질문할 것이 있으면 질문하십시오.
▲질문자1: 스님께서는 항상 말씀으로도 가르쳐 주시고 제 안으로도, 그리고 밖으로도 늘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그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오늘 한 가지 여쭙고자 합니다.
저희들은 윤회라는 것에 대해서 모르는 점이 많습니다. 현대 과학에서는 윤회한다는 것은 유전자를 통해서 후세에게 계속 자기를 복제해 주고 그렇게 개선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본래 육신이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고 마음은 다시 본래 주인공 자리로 되돌아간다고 한다면 업식으로 뭉쳐서 윤회하는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앞에서 배낭이라는 표현을 하셨는데 그 배낭 속에서 나온 업식은 모양이 있는 것인지 그것에 관해서 말씀을 해주십시오.
▲스님: 물론 그 배낭 속에 생명과 의식 모습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이것은 의학적으로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식 자체는 체가 없기 때문에 우리 마음 자체가 체가 없듯이 모두가 내 마음이 하는 대로 행은 그대로 따라줍니다. 인과의 업식은 잘되고 잘못되고 자기가 자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마음에 따라서 움죽거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윤회라는 것, 우리가 어떻게 윤회라는 것을 못 느낍니까? 사계절이 돌아오는 것도 윤회입니다. 우리가 어린애로 태어나서 늙을 때까지 이것도 윤회입니다.
또 별성도 은하계에서, 별성들의 마음이 태양계를 만들었다 합시다. 그럼 만들었으면 옷만 벗지 그 영혼 자체는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근본과 거기에 에너지가 부합되면 다시 옷을 입고 생산이 됩니다. 인간도 영혼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가 있다고, 과거의 업보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가 살아나가는 모든 것이 조금도 에누리없이 자기한테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한테 몸을 받아서 나오죠. 부모의 정자와 난자가 있다고 해서 어린애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거기에 한데 합쳐 삼합이 돼야 임신이 되는 겁니다. 그런가하면 물이 올라가서 비로 내립니다. 비로 내려서 천차만별로 되어 있는 이 생명체들이 다 그것을 먹고 삽니다.
살아나가는 데도 이것을 독사가 먹으면 독물이 되고 독의 피가 되고 약초가 먹으면 바로 약초가 되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가 원점으로 돌아가고 이렇게 해서 또 도랑물을 만들고 바다를 만들고 바다에서 또 올라가고 또 죽고, 물도 도로 원점으로 돌아가고 이렇게 해서 또 도랑물을 만들고 바다를 만들고 바다에서 또 올라가고 이렇게 먹고사는 겁니다.
이럴진대 어떻게 윤회가 아니라고 그럽니까? 윤회라는 것은 이름이지 모두가 일체만물 만생이 다 그렇게 하고 사는 겁니다. 우리가 살다 죽어 그냥 없어진다면 지속되는, 끝간 데 없는 진리가 어떻게 구성이 됩니까?
▲질문자1: 스님,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살아 있는데 어떻게 윤회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스님: 그럼 말입니다. 댁은 이름을 몇 개 가졌습니까?
▲질문자1: 그냥 저죠.
▲스님: 형님이라는 이름도 가졌지요? 동생이라는 이름도 가졌겠죠?
▲질문자1: 예, 물론입니다.
▲스님: 자식이라는 이름도 가졌겠죠. 사위라는 이름도 가졌구요, 남편이라는 이름도 가졌구요. 아버지라는 이름도 가졌구요. 그런데 순간순간 남편이 될 때는 자동적으로 남편의 말을 하고 남편의 행동을 하고 이런단 말입니다. 또 “아버지!” 하고 자식이 오면 자동적으로 아버지의 말을 하고 아버지의 행동을 한다 이겁니다. 또는 부모가 “얘, 아무개야!” 부르면 자동적으로 아들의 노릇을 하고 아들로서 말을 하고 아들로서 아들의 행동을 한다 이겁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데 어떻게 없다고 합니까?
▲질문자1: 제가 지금 살아있고 행동하는 것 자체는 지금 생각하고 또 본래 주인공 마음에서 입력하고 다시 내놓고 그러는, 지금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걸 과거에서 이어져오고 미래에까지 연결된다고 할 수가 없고 현재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살아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 생활자체가 지금 나하고 같이 살아 있는 다른 사람에게 이익 되게 할 수도 있고 또 손해를 끼치게 하는 그런 경우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인연대로 뭉쳐서 돌아가는 것이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현상들이 참으로 제 소견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스님: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려울 게 뭐 있습니까? 평상시에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데, 그래서 모르면 얽매이고 알면 얽매인 것에서 벗어난다고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은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는 진리 속에서 말하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듣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보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먹는 것도 고정됨이 없고, 만남도 고정됨이 없고, 가고 오는 것도 고정됨이 없어요.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자꾸자꾸 바뀌어서 돌아가는데 생활 속에 있는 것을 그게 뭐가 그렇게 의증이 납니까?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정신계의 무심도를 이렇게 생활로서 엮어나가려고 하지도 않을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 정신이 빠졌으면 무효예요, 그런데 정신이 있는 반면에 그렇게 찰나찰나 돌아가고 있어요. 그대로 부처님 법이라. 여러분의 법이 그대로 부처님법이예요. 윤회라고 말할 건덕지가 뭐 있나요? 그대로 돌아가는 것을, 고정됨이 없이 공해서 돌아가는 것을 가지고 말입니다. 부처님 아닌 것이 하나도 없이 그렇게 연결이 되어서 돌아가니까 우주와 직결이 되어 있고 세상과 가설이 되어 있다, 이 소리입니다.
▲질문자2: 스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모든 것을 주인공이 하니까 그 주인공에다가 몰락 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라는 존재를 관찰해 보면 예전부터 믿어왔던 나가 아니라 참나 또는 주인공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느껴집니다. 일상생활에서 늘 느낄 수는 없지만 주인공을 찾는데 스님께서는 관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가장 올바른 관을 할 수 있는지 그 관하는 관법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여태 얘기했는데도, 관법은 누우나 앉으나, 내가 좀 앉아서 참구해 보겠다 하고 앉아서 ‘주인공! 당신만이 당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 하는 겁니다. 그게 관법입니다. 당신만이 당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지 바깥에서 증명할 수는 없는 겁니다. 주인공만이 자기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겁니다. 뛰어넘고 뛰어넘는 교차로가 바로 거기입니다. 우리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수 없다면 죽을 것이고, 내쉬고 들이쉴 수 없다면 죽을 것입니다. 그 양면이 교차하는 그런 틈에서 숨을 쉬고 그대로 살아있는 바로 그놈이 있으니까 그놈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그놈밖에 없는 겁니다. 그리고 모든 생활을 들이고 내는 것이 자기가 있기 때문에 들이고 내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가 없다면 들이고 낼 건덕지가 뭐 하나나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죠. 그리고 숨을 들이쉬고 내쉴 수 없다면 이 공부는 어떻게 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배낭이라는 종이 사는, 집이라는 육신에 50%가 달려있다 이 소리예요. 그래도 이해가 안 갑니까?
▲질문자2: 저 나름대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거든요. 이제 배낭에서 나오는 문제를 관하라고 말씀하시는 건데 실제로 관할 때는 전혀 관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도 들 때가 있거든요.
▲스님: 관하지 않으나 관하나 지구는 돌아가고 있어요. 세상은 그대로 돌아가고 있고, 자기도 관을 안 하든 하든 돌아가고 있어요, 그냥. 안 하는 것도 그 자리요, 하는 것도 그 자리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대로 여여함이에요. 한다 안 한다, 끊어졌다 하는 생각은 자기 관념적인 생각이지 포괄적인 생각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냥 쉬어라 이 소리죠. 하루종일 24시간 얘기를 안 하고 그것을 끊어뜨리고 있다 하는 것도 자기관념의 생각이지, 끊어지긴 뭐가 끊어집니까? 시공이 없이 그대로 돌아가는데 말입니다.
▲질문자2: 정말 쉬라는 얘기가 맞는 것 같습니다.
▲스님: 아, 끊어졌다고 생각하는 것도 생각일 뿐입니다. 하루종일 일을 하다가 생각을 문득 해도, 이런 게 있어요. 24시간이라는 것은 우리의 관념적인 생각이지 24시간이라는 것도 없이, 그러니까 아침에 생각했다 저녁에 생각해도 아침하고 저녁하고 그냥 붙어버려요. 시간과 공간이 그냥 없어져버리는 거죠. 그래서 묘한 법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래도 모르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이 만들어놓은 관념적인 생각이라 이거예요. 하루종일 내가 끊어뜨렸다 하는 생각은 생각일 뿐이라는 겁니다.
▲질문자3: 제가 체험한 걸 얘기할까 합니다. 얼마 전에 저희 집 부엌에 개미가 참 많았어요. 그래서 제가 공부를 하고 나가다 보니까, 제가 일을 하다보면 개미가 물에 씻겨가고 죽기도 하고 그러는지라 개미를 볼 때마다 마음이 참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개미야! 제발 부디 살 데서 살아다오. 여기서 살지 말고, 네가 살 곳에서 살아야지 왜 여기서 사느냐.’ 하는 마음으로 언제나 부엌에서 일을 했거든요. 그랬는데 제가 가게에 가서 일을 하다가 어느 날 저도 모르게 ‘아휴, 개미야!’ 하는 마음이 되더라구요. 그러면서 ‘제발 거기서 나가 줘.’ 하는 마음이 무심에서 일어난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랬는데 그날 저녁에 집에 들어가 보니 부엌 싱크대 위에 개미가 참 많았었는데 개미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거예요. ‘어머, 이상하다. 나도 모르게 아까 이상하게 그랬었는데 왜 개미가 한 마리도 없지?’ 하는 마음이 들어 이상해서 개미가 좋아하는 설탕이나 빵부스러기를 일부러 놓아 보았지만 개미가 없는 거예요. 부엌과 다용도실이 있는데 다용도실에는 개미가 있는데 부엌에는 개미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며칠 지나면서 그 곳도 개미가 사라진 거예요.
그때 제 마음은 그랬어요. 그걸 느끼면서 ‘아! 이 마음과 풀 한 포기가 본래 하나로 다 연결이 되어있다고 스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정말 그런가 보구나. 내 마음이 개미와 통했구나. 내가 그렇게 안타깝게 가슴이 아팠었던 것이 개미하고 한순간에 통했구나.’ 그래 저는 그것을 느꼈는데요. 그런 건지 아니면 개미가 거기가 살기 싫어서 갔는지 궁금합니다.
▲스님: 좀 믿어봐요. 이 우주전체가 그대로 한마음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하나를 체험해서, 체험할 때는 그 줄을 잡고서 자꾸자꾸 체험을 하고 가야 돼요. 그래서 모든 풀 한 포기, 지렁이 한 마리, 진드기 하나,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건 다 부처님의 뜻이니까 그렇게 믿고 열심히 하세요.
이런 예가 있었습니다. 어느 스님이 중단을 전부 치워버렸습니다. 부처님 한 분만 모시려고 그랬더니 자기 몸이 자기를 마구 때려서 그냥 죽었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치우되 그 마음과 마음이 연결이 되어서 나한테로 다 넣고 그 물건만 치워야 되는데, 그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도 않은 데서 너는 너고, 나는 나라고 치우니까 그 쪽에서는 내 몸을 치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몸속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화해서 보살이 되면 모든 각처 각 곳의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돌아가면서, 벌써 무심도리에서 중용을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에도 모두가 움죽거려 가지고 같이 이끌어주는 모든 중생들이 보살이 되어서 그렇게 하는 거죠. 그래서 보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질문자3: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 많은 개미에게 다 마음이 전달될 수가 있구나 하니, 이제는 풀 한 포기를 보아도 꺾지를 못하겠구요, 벌레고 사람이고 누구를 보아도 나라고 생각이 되는 겁니다.
▲스님: 그러기에 옛날 선지식들은 짚신을 신고 주장자에 방울을 달아서 저렁저렁 딛고 다니셨어요. 그 소리를 듣고 밟히지 말고 미리 달아나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식물 하나 무정물 하나도 전부 나 아님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이 몸뚱이 속에 내면의 세계에서 나 아님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를 죽일 수 없다는 결론입니다. 아픈 사람들이 와서 낫게 되는 동기가 모든 것을 한마음 속에서 해결을 할 수밖에 없다 하니까 자기가 자기를 죽일 수가 없거든요. 이래서 성사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길을 막히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싹 돌아서 옆으로 가게 만들지. 이렇게 묘한 법입니다. 강도가 칼을 들었다 하더라도 칼을 떨어뜨리는 법입니다. 이렇게 묘한 도리를 여러분이 몸이 있을 때 이것을 알아야지 몸뚱이 없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부딪침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항상 그러잖습니까? 지난번에도 얘기했죠. 아, 저 뭡니까? 의식이, 중생의 의식이 그냥 있어서 죽으니까 여기서 그림자 쫓아다니듯이 나와서 그냥 와글와글하니 한 발짝도 떼 놓을 수 없는 거죠. 또 강을 건너가려니 그 영혼이 자기가 이 몸뚱이가 있는 줄 알고 의식이 배어있기 때문에 빠져 죽을까봐 건너가질 못하고 말입니다. 배가 올 때를 기다리니 몇천 년을 그 강가에서 거닐고 있다 이 소리입니다.
그리고 블랙홀이라는 불바퀴 속을 넘어서야 되는데 타 죽을까봐 못 들어가죠. 마음이라는 것이 타 죽는 게 어디 있고 타 죽지 않는 게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고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다 이 소리입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보면 그 개미하나 그러는 것도 신기하죠. 그런데 만물이 다 나와 더불어 같이 놀게 되고 같이 작용을 하게 된다면 하늘을 보고 기가 막혀서 앙청을 하고 땅을 보고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을 겁니다, 아마.
▲질문자4: 제가 금방 질문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난 뒤에 일어섰을 때에는 아무 생각었는데, 현재 제가 느끼는 것은 이 심장이 뛰는 것만 느껴지고 다른 아무런 생각이 없어요. 그런데 불현듯 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이게 뭣고’ 그런 생각이 딱 떠오르지만 그러나 이것이 무엇인지 그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히 제가 오게 된 그 어떤 인연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있지만 아직 그걸 모르겠습니다. 그것을 의심하면서 화두처럼 참구를 해야 하는 건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조차도 주인공에 맡긴다는 마음으로 그런 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하도록 해야 하는지요.
▲스님: 참선이라고 하는 것은 ‘이 뭣고’ 하는 것도 그 자리에 다 놓는 작업입니다. ‘이 뭣고’라는 말에 착이 붙으면 끊어질까봐 두렵고 또는 무기공에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이 뭣고, 이게 뭘까 하는 것에 10년이 걸리고 20년이 걸리고 이러는 겁니다. 당당히 네가 있으면 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라 하는 것하고, 이 뭣고 하는 것하고 수박을 보고 이 뭣고 하고 있는 것하고, 그냥 칼로 딱 잘라서 먹어 보는 거하고는 의미가 다릅니다.
기왕지사 배낭 지고 한번 나왔다가 이 모습은 원점으로 돌아갈 텐데 맛을 봐야 먹고 싶기도 하는 생각이 들지 맛을 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먹고 싶은 생각이 나겠습니까.
그러니까 무조건입니다. 모든 일체만법이 벌어지는 이 세상이 전부 자기로 인해서 생긴 것이니까 자기만이 자기가 있다는 것을 증명받아 가지고, 세상이 둘이 아니게 돌아가는 이 이치를 꿰뚫어서 알기 위해서는 또 놓고 뭉쳐놓고 뭉쳐놓고 그렇게 해나가야 됩니다. 나를 발견했다고 해서 무의미하게 그냥 나라는 존재를 씌우고 그렇게 보림을 하지 않으면 역시 또 미해지니까요.刊
세상의 도리는 너무나 즐겁고, 좋은 세상입니다. 남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기 이전에 자기로부터 생겼다는 그 점을 상세히 아실 것 같으면 이 세상이 즐겁기만 합니다. 그러다가 정히 그것이 사사로이 쓰이는 것이 아니고 남이 불쌍해서 쓰인다거나 또는 피치 못할 일이 있어서 쓰인다거나 이런다면 가차없습니다.
엊그저께도 누가 이사를 가는데 잘사는 집이 이사를 가는 것 같으면 괜찮지만 못사는 사람이 차에다 이삿짐을 싣고 그 위에 사람도 타고 가야할 텐데 비가 오면 엉망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사갈 동안만이라도 비가 안 오게 좀 해주세요.” 그러기에 “날더러 해 주세요가 아니다. 네가 해라. ‘나 갈 동안까지 비가 안 오게 해야지 비가 오면 어떻게 하느냐.’ 하고 하라.”고 그랬어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고 TV에서 일기예보를 했다는데 이삿짐을 잘 갖다놓고 그날 저녁에야 비가 오더랍니다. 이렇게 사람이 비를 피해서 다니는 것이 아니라 비가 사람을 피해주는 겁니다.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그것으로 한 가지를 체험한 것입니다. 모든 게 다 그렇습니다.
▲질문자5: 이사 말씀이 나와서 저 공부경계와 상관 지어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저도 아까 말씀드린 가난한 이사인데 그 이사가는 것을 지금 빨리 들어가기는 해야 되겠는데 제 마음에 가고 싶은 마음도 있고, 또 선뜻 가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고 그래서 항상 스님께서 지도하신 대로 주인공에다 모두 맡겨 놓았는데 저한테 이사를 권했던 분들이 이사를 언제 가려고 하는지 자꾸 물어 보거든요. 그런데 저도 잘 모른단 말입니다. 아직 제가 잘 몰라요. 맡기고만 있지 모르는 상태란 말입니다. 아주 난감해서 그분들한테 저도 잘 모르겠다고 그럴 수도 없고, 저 스스로도 주인공한테 맡겼는데 이것이 잘못 맡겨졌는지, 여러 가지로 좀 그렇습니다.
▲스님: 맡기는 도리도 이렇습니다. 맡기기만 해서도 이게 좀 딱! 침을 정면에 찌르는 소리가 못됩니다. 정히 급하면 ‘당신만이 가게 할 수 있고, 또는 가고 안 가고 하는 것을 정하지 못한다고 하는 내 마음이 정돈되어서 정할 수 있도록 당신만이 할 수 있다.’라고 맡기세요. 그렇게 해 놓고 생각해 보면 여기 그대로 눌러 않는 게 좋겠느냐, 가는 게 좋겠느냐 할 땐 눌러 앉고 싶으면 그냥 눌러 앉아도 됩니다. 오히려 가는 것보다도 댁에서는 눌러 않는 게 더 좋을 거 같지 않아요? 더러 아는 사람이 이렇게 서로 마음도 알아주고 돌보아 주니까 말입니다.
▲질문자6: 전번에 스님께서 KBS에 오셨을 때 먼 발치로 뵈었고 오늘 가깝게 뵈오니까 너무 감개무량합니다. 다름이 아니옵고 제가 아끼고 사랑하는 딸이 지금 10개월 째 두드러기가 심하게 나고 있습니다. 약도 많이 먹고 했는데도 아무런 차도가 없습니다. 제가 금방 여기에서 머리에 스쳐가는 생각에, 한 20년 전에 집에 바퀴벌레가 많아서 그것을 불에 태운 적이 있거든요. 그것이 머리에 스쳐가면서 가슴이 막 떨려요.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스님: 그것이 인간의 양심이죠. 인간의 양심인데 그 바퀴벌레 몸은 비록 없어졌으나 그 바퀴벌레가 타 죽을 때 그 애타던 쓰라림, 그런 것도 이 공부를 하시게 되면 둘이 아니게 되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씻은 듯이 나을 것입니다.
▲질문자7: 저는 돼지 새끼를 잡아서 식당에다 넣어주는 그런 일을 하거든요. 이제껏 그런 직업을 해왔는데 그로 인해서 잘못되어 그랬는지 죄를 받아서 그랬는지 항상 마음에 걸려요. 제가 이번에 아파서 병원에 가니까 암으로 진단이 나왔어요. 그래서 제가….
▲스님: 그럴 것 같으면 이렇게 생각을 하세요. 돼지 새끼도 모습을 돼지로 태어났으니 사람으로 인도환생을 시키면 오히려 잡은 것이 무주상 보시가 되지 않을까. 그러니 생각차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인공에다 다 맡기시면서 모든 게 한마음으로 돌아가서 인도환생을 할 수 있게끔 당신밖에 할 수 없다고 이렇게 하시면 병에도 영향이 가서 많이 좋아질 겁니다. 그리고 육식이나 계란 닭 이런 것들을 주의하시고 감자즙을 내서 미싯가루에 타서 죽하고 끼니로 잡수십시오. 해물은 괜찮습니다. 절대로 산 것은 먹지 마세요.
그리고 산 것을 토막칠 때에 토막쳤던 그 자리를 먹으면 누구든지 병이 들어요. 그것은 전부 몰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산 것을 죽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두 산 짐승들을 많이 죽인 사람들이 자손들을 갖다가 둘씩 셋씩 이렇게 정신병자로 만들고 또는 불구자로 만들고 이런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현실에서 알고 그렇게 했다면 알고 받게 마련이고, 모르고 지었다면 모르게 받게 마련입니다.
▲질문자7: 그러니까 직업이 앞으로도 그런….
▲스님: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습니까? 돼지를 갖다가 사람으로 만든다면 좋죠. 그런데 돼지를 백 마리 죽였다고 해도 한 사람만 나게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 법이 부처님의 묘법이죠. 이 영혼이라는 것은 그냥 100, 200, 1000개를 갖다가 한데 모아서 하나의 사람으로 만들어도 될 수 있다는 결론입니다. 그런 문제가 불가사의한 문제들이지만 그것은 무심의 도리 도법이기 때문에 중용을 하는 사람이라면 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죽일 때마다 모든 것은 주인공에 맡기시고 당신만이 잘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만이 해결할 수 있다’ 이렇게 아주 간단하게, 천도를 시켜달라는 둥 환생을 시켜달라는 둥 이렇게 지저분하게 하지 마시고 자식들하고 먹고살아야 하니 당신만이 이 처리를 해주실 수 있다고, 당신만이 할 수 있다고 하십시오.
내가 애들 보고는 그럽니다. ‘주인공, 네 친구만이 이것을 해줄 수 있다. 한마음만이 이것을 해줄 수 있다. 주인공만이 이것을 해줄 수 있다.’ 만날 이렇게 사람봐서 말을 하죠.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그렇게 하시면서 하루에 종합비타민 두 알과 간장약 두 알씩 잡수세요. 왜 그것을 먹으라고 하느냐면 그 감자즙이 항생제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시라는 겁니다.
그러면 또 질문할 게 있습니까? 그럼 이 얘기만 하고 그만두죠. 옛날에 제가 들은 얘기입니다. 어느 큰스님께서 제자들이 모여 앉아있는 데서 물으셨답니다. 첫째, 대장부가 방귀씨 눈을 왜 틔우지 못하는가? 둘째, 대장부가 귀신 방귀털을 더하고 덜함도 없이 먹여서 싹을 틔우지 못하는가? 셋째, 대장부가 거미줄에 얽힌 발목을 왜 끊어버리지 못하는가?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한 사람도 대답이 없자 하신 말씀이
“산천은 두루 푸르른데
대장부의 살림살이가
한손 들어 하늘을 꿰어들고
한발 들어 땅을 디디니
일곱 발짝 뛰어 놓은 사람
그렇게 많지 않구나.”
하셨더랍니다. 만약 그 당시에 여러분이 계셨더라면 어떻게 대답을 정리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공부하는 데는 물러서지 않는 담력이 필요합니다. 밤중에 두려움이 없는 것도 내 마음을 발견해야 두려움이 없어지는 겁니다. 둘이 아닌 까닭에 두려움이 하나도 없는 거죠. 그래서 대담하게 나설 수도 있는 건데. 어떻게 대답을 하시렵니까? 모두 웃고만 계시니까 도인들만 계신 모양입니다. 하하하.
그럼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49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