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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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과 길들여짐
생명체는 대상통해 자기존재 확인
“길들여 지지 않으면 그대로가 부처”

부모로부터 몸을 받아 세상에 나타나게 된 생명체는 스스로를 홀로 알 수 없다. 비교행동학자인 콘라트 로렌츠를 어미라고 착각하여 따르던 오리들에서 보듯이 태어난 생물체는 오직 타자(대상)를 통해 자기 자신을 확인하게 된다. 부모나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알아가게 되기에 우리는 자기 자신에 집착할수록 자신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대상에도 집착하게 된다.
결국 몸이라는 육근에 속아 길들여진다는 것이 이 우주 법계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치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 세상의 모습 때문이다. 이렇듯 무명의 참 모습은 본디 그러한 연기(緣起)에 있다.
생명체가 길들여질 때에 그 대상이 나쁜 것도 아니요, 그 마음을 내는 너와 내가 잘못된 것도 아니지만 무엇에 길들여진다 함은 그 대상에 머물고자 하는 마음을 낳게 되고, 그렇게 머무르게 된 마음은 그것을 못 구해서 괴로워하고 또 그것이 충족되면 새로운 대상을 구하게 되는 끝없는 갈망(渴望)의 연속일 뿐이다.
돈이나 사랑은 물론 더 나아가 우리가 자신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길들여질 때, 우리는 이러한 길들여진 일상생활로부터 뛰어나와 자신이 머물고자 하는 또 다른 새로운 대상을 찾아 끝도 없이 찾아 헤매게 된다. 다시 말하여 길들여진 사람일수록 자신의 일상적 삶의 소중함과 새로움을 잊고는 단조롭다고 느껴서 막연히 무엇이 부족한 것인 양 돈, 명예, 권력, 진리, 법(法), 해탈 등등의 이름으로 그것을 구하고자 방황을 하며 심지어는 그 구하고자 하는 마음에 마저 길들여지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자신들의 삶과 생활 속에서 길들여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함은 더 나아가 우리의 태어남과 죽음에 길들여지지 않아야 함을 의미하며, 생(生)에 길들여지지만 않는다면 생이 있되 생이 없고, 또 사(死)가 있되 사에 길들여지지 않아 사가 없으니 이로 인하여 생사를 떠날 수 있으니 생노병사, 윤회를 거듭하는 무명심의 근본은 이렇듯 본디 실체도 없는 마음의 길들여짐에 있는 것이다. 이렇듯 길들여진 모습을 반야심경에서는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한다. 출가를 하여도 승상을 벗어야 하고, 공부를 하여도 법을 여의며,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 깨달은 바가 없고 보살행을 행한다하여도 그 행하는 바에 머물지 않아야 할 것이니 이것이 곧 중생의 모습 그대로 부처가 되는 도리이기에 단지 길들여지지만 않는다면 그대가 곧 부처가 된다. 이를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 했고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했던가.
그래서 우리 모두 주인이 되어 그저 따지지 않고 오거나 가거나 마음은 장 썩듯이 푹 쉬고 쉬어 오직 깨어있으니, 그저 졸리면 잠자고 배고프면 밥 먹고 예쁜 미녀보면 마음이 동하는 바로 이것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닐까 한다.
■서울대 수의과대학 면역학교실
2003-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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