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 종합 > 기사보기
죽고 사는 것도 다 놓게 되면 고에서 벗어날 수 있어
따로따로 찾고 매달리지 말고 지극하게 일임해서 놓을 줄 알아야

공양하는 참다운 자세

불자들은 사찰에서 식사를 할 때 공양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과 스님들께 음식을 올릴 때도 공양을 올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할 때는 깨달으신 분이나 깨닫지 못한 모든 이들에게 공양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이 합당한가,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일체를 위해서 공양을 올릴 수 있어야 참다운 공양이지, 자기 몸 하나 살찌우기 위해서 먹는 것이 어찌 공양이 될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질문을 올립니다. 공양하는 참다운 자세를 일러주십시오.

우리가 밥을 한 그릇 먹어도 그것을 해서 올리는 자는 누구며 받는 자는 누구입니까? 해서 올리는 자도 자기요, 받는 자도 자기입니다. 그런데 내면으로 볼 때 내가 먹는 게 아니라 공동체로서 먹는 것입니다. 몸속에도 수십억 마리의 생명들이 들어있음으로써 네가 먹었다 내가 먹었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양 한 그릇을 내가 먹는다 하더라도 생각을 잘하면 공양이 되고 생각을 잘못하면 그냥 밥 한그릇이 되는 겁니다. 더불어 함께 공식(共食)한다고 생각한다면 네가 먹었다 내가 먹었다 할 게 없습니다. 그래서 공양인 것입니다.
그래서 공양을 올리면 공덕을 입는다 이런 소립니다. 그러나 공양이 아니고 개별적인 밥이라면 공덕이 될 수가 없습니다. 공덕이라는 것이 내 몸의 조직체, 즉 모든 생명들이 한 그릇을 놓고 다 같이 먹는다는 뜻입니다. 다 같이 먹으니까 다 같이 마음을 내서 모두 서로서로 도와가면서 서로서로 작용을 하고 작용을 해주고 사니까 공동체요, 바로 공덕이 되는 거죠. 공덕이 된다는 뜻도 그렇지만 공양을 올린다 하는 것도 그렇고 공향을 피운다 하는 것도 이런 데서 오는 겁니다.
공양을 올리면 삼라만상 대천세계가 전부, 만물만생이 전체가 다 한 그릇을 놓고 내부에나 외부에나 전체가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공덕이 될 수 밖에요. 나를 떠나서 상대로 믿는다면, 상대를 믿는다면 공덕이 될 수가 없지요. 그리고 공양이 될 수가 없구요. 그리고 마음의 향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공향이 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바깥으로 믿고 바깥으로 끄달린다면 아무리 공양을 많이 올리고 시주를 많이 한다 하더라도 공덕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덕이 되게끔 공양을 올리고 향을 피우고, 공덕이 되게끔 행을 하고 마음을 내라 이거죠.
무엇이든지 조직체로서 운영을 하는 거지 조직체가 아니고는 운영을 할 수가 없습니다. 회사도 조직체가 돼 있기 때문에 회사 운영을 하는 겁니다. 굳이 조직체라는 이름이 없이도 말입니다. 회장이 있고 사장이 있고, 상무가 있고, 총무가 있고, 직원이 있고 모두 이렇게 조직이 돼 있기 때문에 질서정연하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공동체고, 그렇듯이 우리가 공양 한 그릇을 올린다 하더라도 그렇고 내가 먹는다 하더라도 공양입니다. ‘이거는 내가 먹으니까, 뭐….’ 이렇게 아무렇게나 생각하지 말고 단 한 숟가락을 먹더라도 공양을 올리시라 이겁니다.
부처님께 올리는 것도 공양이요, 둘이 아니게 공생 공용 공체 공식화 하고 돌아가는 전체가 바로 그것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먹든, 한 그릇을 바치든 공양은 공양입니다. 더불어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둘이 아니게 돌아가는 까닭입니다. 그러니까 참다운 공양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내 몸속의 생명들과 공식을 한다는 생각으로 음식을 먹느냐, 아니면 이런저런 생각도 없이 앞에 있으니까 그냥 먹느냐에 달려있습니다. 부처님전에 올리는 공양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산해진미를 올린다고 해도 이만큼을 올린다는 생각으로 한다면 아무런 공덕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한마음으로 한 공덕이 되게 하십시오.

놓음의 단계에 대해서

놓고 지켜보는 관법에도 모든 것을 놓는 단계, 둘로 보지 않는 단계, 일심에서 무심으로 되는 네 단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그렇게 놓아가는 과정이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한 단계가 끝이 나야지 또 새로운 단계가 다시 다가오는 것인지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물론 놔버리는 것도 단계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차원이 다 다르고 생김생김도 다르고 또 생활해 나가시는 방법도 다릅니다. 부처님의 법은 똑같지만 생활 자체를 해나가시는 것은 다 다른 것입니다. 이렇게 해나가는 분이 있고 저렇게 해나가는 분이 있습니다. 이걸 잡숫고 싶어하는 분이 있고 저걸 잡숫고 싶어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 하는 데에 매달리지 마시고 아주 지극하게 일임해서 놓을 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무여(無如), 일여(一如), 여여(여여), 즉여(卽如) 이것을 사구로 나누어서 이렇게 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따로따로 찾을 게 없어요. 우리가 자유권을 얻으려면 다 타파를 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귀 따로 눈 따로, 코 따로 입 따로 이렇게 찾는 거나 똑같아요. 이름만 다르다 뿐이에요. 그대로 듣고 그대로 보고 그대로 하고 그러는 거지, 보고 먹지 못하는 거는 소용이 없는 거예요. 보고 내가 행할 줄 알아야 즉시, 즉각이에요.
사제법에도 고집멸도가 그것이 ‘고(苦)’ 이러면 ‘고만 없어진다면…’ 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배낭만 놓는다면…’ 하는 소리거든요. 인생이 나올 때에 고의 배낭을 짊어지고 나왔는데 그 배낭을 놔야 하지 않겠는가. 또 배낭을 지고 간다면 요다음에 나올 때 또 배낭을 짊어지고 나오지 않느냐, 그러니 그 배낭 안에 고집멸도가 다 들어 있으니 그 고덩어리, 이 몸 가는데 뭘 나에게 착을 붙이고 있겠느냐 이거예요. 그러니까 그거 내 자체만, 하나만 놓는다면 집도 없어지고, 즉 말하자면 착이라는 거죠. 멸도 없어지고 도도 없어지는 거다. 그런다면 만(卍)자처럼 둥글둥글 그냥 돌아가니 그것이 바로 자유인이며 젊음을 가져오며 삶을 가져오며 영원한 삶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구공법’ 하면은 벌써 한순간에 그냥 한순간에 왔다 갔다 함이 없이 그냥, 우리가 이런게 있지요. 삼십 방망이를 맞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가 음식을 여러 가지 놨다 이거예요. 한 삼십 가지 놨다. 그런데 음식이라는 것이 그 음식은 다 똑 같으나 음식 맛은 다 다르지 않습니까? 자기가 먹어봐야 아는 거지. 맛을 알라는 거죠. 음식을 보라는 게 아니거든요. 음식의 이름을 가지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음식을 가지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그 맛을 알라는 거예요. 맛!
여러분이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사람들한테 속기도 하고 사기도 당하고, 반면에 안 당하고 사는 사람도 있을 테고, 자기가 사기를 친 사람도 있겠죠. 그러나 주인공에 방하착 할 수 있는 진실한 마음을 갖고 있는 그런 분들은 나중에는 참자기의 감응이 와서 그걸 그렇게 하라 그래도 안 그럴 겁니다. 또는 안 그런다 하는 마음조차도 없고 한다 하는 마음조차도 없이 슬그머니 보이지 않는 데서 다, 오온에 칠보(七寶)가 가득히 차 있듯이 그 모든 것이 다 저절로, 가난도 면할 것이고 병도 물러날 것이고 자기의 뿌리로서 모든 것이 해결될 겁니다.
그 뿌리엔 자식의 뿌리도 있고 부모의 뿌리도 있는데 뿌리는 다 똑같이 공(空)이다 이겁니다. 만강에 달이 비쳐도 그 달이 한 달에서 비쳤지 여러 달에서 비춘 게 아니듯이 말입니다. 만강에 수많은 달이 비쳤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달에 불과합니다. 결국 하나의 달에 불과하다 이겁니다.
그러나 그 달이 만강에 비칠 수가 있기 때문에 어떤 게 달이다 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하나의 달이 하나의 달일 뿐이냐? 아니다, 만강에 비칠 수 있는 달이다 이겁니다. 그렇다면 때로는 달빛이 만강에, 즉 말하자면 만 달이 될 수가 있고 또 때에 따라서는 한 달이 될 수가 있고, 달이 하나가 될 수가 있고 달이 만 개가 될 수가 있고요. 이렇듯이 인간의 마음도 한마음이 될 수가 있고 여러 사람들이 내 아님이 하나도 없을 때는 바로 여러분과 같이 한마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자꾸자꾸 찰나찰나 나투기 때문에 그 마음 하나도 없느니라 하고 바로 ‘무(無)!’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해만 가서 되는 것이 아니니 될 수 있으면 모든 것을 공자리에다가 놓아버리세요. 모든 것을 공에다 놔버리라는 것은 왜냐? 예를 들어 만약에 장님이 있다고 한다면 장님은 지팡이가 없이는 못 갑니다. 그러니 공에다 놓지 않는다면 장님의 눈을 밝게 할 수 없는 것이고 겨우 지팡이 하나 쥐어 주는 것밖엔 안 되죠. 그래서 공에다가 이름을 붙여서, 주인공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거기다 다 놔버린다면 바로 여러분에게도 그 뜻이 풀려 공도리(空道理)도 알 수 있으며, 바로 인에 의해서 연도 생기고 그렇게 돌아가는 자체가 바로 연기법(緣起法)이라는 걸 알 수도 있구요. 그 마음을 쓰면서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연이라고 할 때, 그 연에 따라서 인연의 결과가 나온다는 걸 아실 겁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고 행하고 듣고 보고 하는 그 결과가 바로 여러분한테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절에 다닌다고 하면서 건성 다니지 마시고 정진 열심히 하시고 진실하게 믿으셔야 합니다. 진짜 불법이라는 것은 우리가 방귀 뀌면은 방귀 뀌는 소리는 반드시 났는데 방귀 뀐 사이가 없이, 어디로 온데 간데가 없듯이 그런 거나 마찬가지인 게 ‘참진리’라고 봅니다.
우리의 삶은 꿈이자 현실이고 현실이자 꿈입니다. 생시도 꿈이요, 꿈꾸는 것도 꿈이면서도 생시입니다. 그러니 모두가 꿈에 얽매이지도 말고, 현실 일도 꿈으로 보시고 얽매이지 마시고 공에다가 모든 것을 놔버리는 방하착을 하신다면 진짜 참자기의 감응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생로병사에서 벗어나려면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언제까지나 한정 없이 굴러야 하나요? 부처님께서도 이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출가를 하셨다고 하시지만, 이렇게 나이를 먹고 살아온 나날을 되돌아봐야 하는 시기가 되니 다음 생에 또 다시 태어나서 한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갑갑합니다. 물론 살아온 나날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를 움직이는 장본인을 알지 못한 채 꼭두각시 놀음을 영원토록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근거로 해서 움죽거리고 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직접적인 이 도리를 우리가 느끼고 알아야지 되는 겁니다. 벌써 “얘, 아무개야!” 하고 아버지가 부르면, 아침에 그 아버지가 무엇을 찾는지 그거부터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항상 그렇게 해 왔으니까 “얘, 아무개야!” 하고 부르면 벌써 ‘신문 가져오너라.’ 이 소린 줄 알고 신문을 가지고 들어가야 됩니다. 그것과 같다 이겁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눈 쓱쓱 비비면서 신문부터 찾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그래서 그것을 아는 사람은 벌써 미리 알고 아무개야 부르기만 하면 ‘뭐, 그걸 찾으시려니’ 하고 벌써 신문을 갖다 놓을 줄 아는 거죠. 벽을 치면 봇장이 울려야지 않습니까?
우리가 죽는다 산다 하는 것도 말짱 거짓말입니다.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름이 흩어졌다 모였다 하는 건데 죽는다는 것이 뭐 별건가요? 지금 무명을 쓰고 있다가 무명이 벗어지면 다른 무명을 쓰고 다시 나옵니다. 그래서 마음의 발전을 해야만이 산다고 하는 겁니다. 마음의 발전, 즉 정신계의 발전을 해야만이 물질계의 발전도 할 수 있거니와, 또한 여러 가지로 중용을 할 수 있어서 자동적으로 자유자재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마음이란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마음이라는 자체가 바로 우주 삼라만상을 빚어내기도 합니다. 삼라만상에 모든 일체 만물만생을 다 마음으로 그려내기도 하고 마음으로 짓기도 합니다. 이 마음은 정말 어디다가 비할 수 없는 보물입니다. 그래서 한생각을 잘 굴려서 내면 일체 모든 게 생기고 구해집니다. 그리고 한생각을 쉬게 되면 모든 고에서 벗어나게 되고 소멸이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소멸된다는 그 자체가, 한생각에 어떻게 그렇게 다 소멸될 수 있을까 하겠지만, 믿고 물러서지 않는다면 생사에 관한 것도 그렇고 모든 것이 다 놔지게 됩니다. 죽고 사는 것도 다 놓게 되어지면 고에서 벗어나는 거죠.
매일 ‘마음! 마음!’ 하는데 마음만 귀중한 게 아니라 그 마음으로 인해서 빚어지는 모든 일들이 바로 마음으로 나오는 것이거든요. 예전에 광명선원에 공양주가 계셨습니다. 그 공양주가 언젠가 한번은 이렇게 말을 합디다. “스님! 저는 이다음에 죽을 때도 자식들한테 가서 앓고 죽을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절에서 죽자니, 절에서 앓거나 이런다면 스님네들께 누(累)가 되겠으니 모두가 아니 됩니다. 그러니 스님, 죽을 때도 살다가 금방, 앓지 말고 그냥 금방 가게 해주십시오. 내 처지가 그러니 어떡합니까.” 아, 이래요. 그래서 “그거는 당신의 마음이 하는 거지 내가 하는 게 아니지 않소?”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 얼마 후에 다시 찾아와서는 진탕 얘기를 벌여놓고 가다가 그냥 쓰러져서 옷을 벗었답니다.
그래서 자기가 서서 죽든지, 앉아 죽든지, 누워서 죽든지 그건 자기 마음대로라는 겁니다. 옷을 벗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 업을 모두 녹이지 못하면, 애고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익지 못한 콩깍지와 같다. 익지 못한 콩깍지는 까도 속껍질이 찰싹 붙어서 떨어지질 않아요. 그게 까도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 바로 아파서 질질 매고 그냥 죽네 사네 하고, 온통 남을 괴롭히고 이러는 겁니다, 표현을 하자면. 그러나 잘 익은 것은 탁 건드리기만 해도 콩이 그냥 나옵니다. 그거와 같다 이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나는 늙었는데 이런 공부는 해서 뭘 하냐고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젊어서 나오는 게 바쁘게 돌아가니까 젊어서 또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젊은 사람보다 외려 더 쉽게 젊어질 거니까 빨리 해야지요. 그러니 노인네든 젊은이든, 애든 어른이든, 남녀를 막론해 놓고 이 도리를 알아서 벗어나야만이 우리가 다람쥐 쳇바퀴 돌듯 도는 애고 속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공부를 한다고 하면서 그냥 왔다 갔다 하고, 애고나 병고가 있다고 해서 그것만 애원하지 말고, 그것이 바로 공부할 수 있는 재료라고 생각을 돌려서 공부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냥 그것만 앞장세우고 애탄지탄 하지 마시고 ‘야, 이런 수확이 어딨어? 이런 게 닥쳤기 때문에 내가 공부 할 수 있다. 그리고 실험을 해서 체험을 할 수 있구나!’ 한다면 그때는 고(苦)도 고가 아니에요.
그러니 여러분이 애고나 병고, 유전성·영계성·세균성, 어떠한 문제가 다가온다 하더라도 코웃음 탁 치고 웃을 수 있는 그러한 믿음을, 물러서지 않는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공부할 수 있는 재료가 또 생겼네! 네가 그렇게 공부하라고 내놓은 거니까, 그렇게 내놓은 것도 너니까, 그렇게 아프지 않고 어떠한 고(苦)가 닥치지 않게 하는 것도 너만이 할 수 있잖아.’ 하고 맡겨 놓으세요. 그러니까 모든 것을 타파하고 넘어갈 수 있는 수행의 재료로 알고 공부 열심히들 하시기 바랍니다.

집착 않고 자식 키우려면

지금 저의 뱃속에 너무도 소중한 한 생명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스님, 소중한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어떻게 승화시켜 나가야 하나요. 자식을 낳아 키울 때 집착하지 않고 한 사람의 참다운 인격체로서 키우려면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요?

예전 일입니다만, 옛날에 어떤 어른이 “쓰레기통이 돼봐야 쓰레기의 이치를 아느니라. 금은보화 담은 창고가 되지 말고 쓰레기통이 돼라.”하셨는데, 왜 그런 소릴 했는가 하고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까 쓰레기통에는 별의별 게 다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쓰레기통이라는 건 고귀한 데 있는 게 아니라 바깥에 그냥 팽개쳐져 있죠. 그러니 쓰레기통 노릇 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쓰레기통이 되지 않는다면 자식을 올바르게 키울 수가 없습니다. 어떤 거든지 쓰레기 같은 것은 자기가 갖고 좋은 것은 자식을 주려고 하는 부모의 마음은 부처님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죽는 것마저도 그렇죠. 부모는 자식을 위해 죽는 것도 대신 할 수 있을 만큼 돼 있죠. 사는 것도 그저 고생 없이 살기를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구요. 부모의 그 소망이 작고 클 뿐이지 그 마음은 똑같습니다.
세 살 먹은 어린아이가 ‘주인공, 낫게 해.’이렇게 하라고 부모들이 관하는 거를 가르쳐주니까, 감기가 들어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콧물을 줄줄 흘리더니 “주인공, 낫게 해 줘잉.”그러고 하더라는 거예요. 그러더니 걔가 그냥 부신 듯 일어나더라는 겁니다. 그러던 애가 자라서 지금 다섯 살이 됐는데 엄마가 “아이구, 아파서 죽겠다. 감기가 들어서 죽겠다.” 이러면, “엄마는 아직 멀었어!” 그런다는 겁니다. 그러니 애들 중에도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그런 애들이 드문드문 있단 말입니다. 그런 애들이야 아주 박혀서 이다음에 자라도 그냥 거침없이 해 나갈 거란 말입니다.
어떤 아이는 지금 중학생이 됐는데, 초등학교 다닐 때 말입니다. 저희 아버지 머리에 혹이 나 가지고 병원에 가니까 악성이라고 수술도 못한다고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그렇게 몇 해를 걱정을 하다가, 어느 날은 “중학교를 들어가면서도 아버지 혹 하나 못 없애니 이거 어떡하지?” 그러더래요. 그러더니 어느 날은 형이 병원으로 모시고 가서 수술 한번 해 본다고 하니까 형더러 그러더래요. “우리 몸뚱이를 끌고 다니는 운전수가 진짜 나라면 왜 못하겠어? 하여튼 형은 아직도 멀었어.” 그러더니 불과 한 달이 좀 넘었는데 아버지의 혹이 반으로 줄었더란 얘기죠. 그런데 중학생이 또 학교에 갔다 와서는 착 깔고 앉았다가 일어나면서 “걱정 없어.” 이러더래요. 그러더니만 그냥 또 한 반달이 되니까 그냥 싹없어져 버렸다는 거예요. 없어지고 나니까 걔가 형더러 하는 말이 “뭐는 못하겠어? 형은 아직 멀었어. 취직 못하는 것도 아직 멀어서 그래!” 그러더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아이들은 진짜 어려서부터 그렇게 실천을 해 나가기 때문에 앞으로 어떠한 일이 생겨도 끄떡없이 하늘을 받치고 나갈 거라는 겁니다.
그런 것과 같이 여러분이 한 가정의 어머니로서 아버지로서 어떻게 해야 집안이 편안하고 자식들도 여유 있게 클 수 있고 어디다 세워놔도 살 수 있는지 잘 아실 겁니다. 관하는 도리를 재산 주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르쳐야 어디다 세워놔도 주인공이 보디가드가 돼주고 해결사가 돼주고, 그리고 항상 영원하게 자기를 지켜주는 바로 자기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재산은 물려줘도 탕칠 수가 있지만 이거는 탕칠래야 탕칠 수가 없잖습니까? 줄줄이 내려가면서 말입니다. 여러분만 살다가 죽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뱃속에 잉태했을 때부터 어머니가 마음을 다스리면서 관하는 도리로 태교를 한다면 그거야 더 말할 나위가 없겠죠.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자기가 정말 편안해서 좋을 거예요. 나쁜 것을 가르쳐야 말이지, 부모님은 물론이요, 아이도 좋으라고 하는 건데요, 뭐. 그러니까 진정 소중한 부모 자식의 인연으로 승화시키려면 꼭 그렇게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마음공부의 효과

불교를 모르는 이들도 세상사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말하듯, 불자로서 부처님을 믿고 나쁜 일 하지 않으면서 가족들 화목하고 그러면 되는 것 아닌지요? 왜 굳이 자기 마음을 깨달아야 하고 스님들도 하기 어려운 불법을 생활 속에서 놓치지 않고 공부해나가야 하는지요? 우리가 이 마음공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인생의 효과는 무엇인지요?

사람이 살면서 하기 쉬운 말로 그냥 세상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면서 사니까 마음이라는 것을 그렇게 우습게 생각하는데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냥 어떻게 지나가는 게 마음인 줄 알지 마시고 똑바로 진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애고가 큰 것 작은 것 할 것 없이 다가오는데, 닥쳐오는 대로 살아나가려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째, 내가 낳기 이전으로 돌아가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심이 같이 연결되고 통합이 됐을 땐 내 몸에 5억이라는 생명이, 소대장도 있고 대대장도 있고, 사단장도 있고 그렇습니다. 이 지구 안에 오대양 육대주가 있다 하면은 소우주 내 몸 안에는 오장육부가 있습니다. 그 오장육부에는 모든 생명들이, 예를 들어서 내 몸 하나에 참자기의 생명의 근원에 5억이라는 것이 한데 합쳐져서 하나의 물체에 다 융합이 돼요. 그렇게 융합이 되어 골인을 해 가지고선 어린애가 탄생합니다. 그러면 그 어린애가 자라면서 또 자기 소임을 맡아서 간이면 간, 소장이면 소장, 대장이면 대장, 직장이면 직장, 콩팥이면 콩팥, 두뇌면 두뇌, 이렇게 모든 자기 소임을 맡아 가지고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작용을 하고 있는데 참나의 한생각을 할 수 없다면, 한 샘물이 없다면 내 몸의 근원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근원을 알아서 모든 겹겹이 싸여있는 여섯 겹의 막, 즉 말하자면 모든 세포의 막과 더불어 철두철미하게 나를 내가 보호하고 있게 되는 겁니다. 그게 첫째 이익이 되는 거죠. 그러니깐 그 생명들이 한데 합쳤기 때문에 내가 있고, 내가 이렇게 운행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깐 한마디로 말해서 ‘자가발전소’라고나 할까요? 자가발전소의 근원이, 바로 모든 생명들이 한데 합쳐 있기 때문에 내가 한생각을 하면 만도 되고 천도 되고, 수억도 됐다가 하나가 됐다가 하나마저도 없다가 이렇게 자재력을 가질 수 있다 이 말입니다.
둘째, 내가 내 몸과 더불어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고 했는데 그 삼세심을 통과해서 내 몸에 있는 일체 중생들을 다 거둘 줄 안다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일체 유생 무생이 나와 더불어 같이 나투고 있다는 거를 알게 되죠. 알게 됨으로써 모르는 걸 알게 되는 거죠. 그리고 말이라는 것이 붙지 않는 자리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너와 내가 둘이 아니게 나투는 거를 알게 된다면 그때는 또 너와 내가 둘이 아니게 돼서 생사도 열반도, 인도 과도 모두가 그대로 여여하게 돌아가니까, 끊어진단 말도 안 끊어진단 말도 할 수 없는 거죠. 감도 옴도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런 이익이 있는 것이죠. 그럼으로써 우리가 전자에는 육신 무예로 썼는데 지금은 정신 무예로서 연구를 해서 정신과학으로서 발전을 했습니다.
근데 지금은 마음의 계발이 바로 오관을 통해서 공중에서 날아다니고 공중을 날아서 바로 정보 수집을 한다든가 이런 것도, 영사기를 돌린다든가, 탐지기나 컴퓨터, 녹음기, 이런 것이 전부 내 자연의 오관을 통해서 바로 부속이 되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그러면 세계 만방 어느 골골마다, 온 누리에 내 손이 안 닿는 데가 없다는 그 점이, 내 손이 내 손이 아니라 모두가 한데 합친 손이기에 내 손이라고 말할 수 없는 내 손! 이것이 우리의 근본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오관을 통한다 하더라도, 오신통을 한다 하더라도 이건 ‘도’라고 할 수가 없다. 도라고 이름도 붙일 수가 없다 이겁니다. 왜냐하면 이건 부속이기 때문이죠. 그러기 때문에 내 근원을 앎으로써 한 번 죽기 어려워라 했더니, 두 번 죽기 어렵고, 두 번 죽기 어렵다 했더니 세 번 죽기 어렵다 하는 것을 세 번으로 붙였던 겁니다.
예를 들어 봄이 되어 작년의 콩씨를 심었더니 올해 콩 싹이 났습니다. 반드시 콩씨를 가을에 추수하면 새 봄에 다시 심는 거니까요. 그래서 그 콩씨는 싹이 돼버리고, 싹으로 화하고 말았다 이 소립니다. 그렇게 싹으로 화했는데 싹에서 콩씨가 또 붙을 것을 우리가 번연히 알면서도 작년 콩씨를 찾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작년 콩씨를 찾아서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겁니다. 작년 씨는 벌써 화해서 이미 자기한테 있는 줄 모르고 찾아 헤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바깥에서 구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말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 안에서, 내 공에서 바로 화해서 한 발 한 발 뛸 때마다 앞도 없고 뒤도 없는 그 작용을, 그대로 말하고 듣고 행하는 것이 그대로 참선이라는 것을 우리는 명백히 알아야 된다 이겁니다.
그러니 어제가 오늘로 연결되고, 오늘이 내일로 연결돼서 삼세심이 한데 합쳐져서 영원한 오늘의 작용이 그대로 영원히 지속되니까, 그래서 일물도 없고, 옛사람도 없고, 옛 산도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바로 그것을 모르면 세균에 끄달리게 되고 영계에 끄달리게 되고, 유체나 유령에 끄달리게 되고, 인과 업에 끄달리게 되고, 또는 유전에 끄달리게 되고, 생사에 끄달리게 되고, 윤회에 끄달리게 되니 이것은 만방으로 끄달리는 겁니다. 그러면 이 끄달림을 어떻게 방지를 해야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공부를 안 해가지고는 안 되겠기에 ‘경을 보되 보지 말라.’ 했습니다. 경을 보되 그것은 거름으로 생각을 하고 보라고 했습니다. 거기다 착을 두고 하라는 게 아니거든요. 그 경을 보게 한 놈이 누구냐 하는 것을 추구해야 된다 이 소립니다. 경을 보게 한 놈은 누구며, 똥을 누게 한 놈은 누구며, 밥을 먹게 한 놈은 누구며, 자게 하는 놈은 누구인가? 이 세상 만방에 모든 작용을 시키는 고놈에게 중심을 두고 모든 걸 놔버리세요.
그렇지만 처음부터 의정을 해서는 안 되지요. 모든 걸 거기서 하니깐 놔버리세요, 무조건! 놔버렸을 때 거기에서 새 물이 나옵니다. 그럴 때 바로 거기에서 그 물이 볼 때에 대의정이 나옵니다. 자꾸자꾸 의정이 날 때 그걸 파악하고 들어가서 나중에는 참바다의 물이 되듯이 말입니다. 모든 물이 바다에까지 이르듯이, 퍼내도 줄지 않고 부어도 두드러지지 않는 물이 내 물이다 네 물이다 하는 말이 붙지도 않는 그 자리가 돼야만이, 우리가 지금 앞으로 한다 안 한다가 없이 그대로 여여하게 할 수 있고, 물 먹고 싶으면 갖다 먹을 수 있는, 막말로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이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게 생명 없는 게 없고 마음 없는 게 없어요! 둘이 아니라면 어찌 통하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둘이 아닌 까닭에 생활 자체가 바로 부처님 법이라고 하지만, 여러분이 안 계시다면 부처도 없습니다. 부처님 마음과 여러분의 마음이 둘이 아닌 까닭에 생활 자체가 그대로 법입니다. 그대로 부처님 법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활을 어떻게 해나가느냐에 따라서, 애고라든가 어떠한 업보가 닥쳐오고 용도에 따라서 피치 못할 일들이 닥쳐오는 것도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내 몸을 이끌어 갈 수 있다면, 내 안에 있는 중생들을 이끌어 갈 수 있다면, 바로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고 말함이 됩니다. 또한 내 몸을 끌고 다닐 수 있는 그 뜻이라면은 바로 이 세상을 이끌어 갈 수 있고, 세상을 자유자재 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 삼라만상 대천세계까지 서로 상응하면서 자유스럽게 살 수 있는 겁니다.

천도재를 지내야 하는지요?

질문드리고 싶은 것은 천도재에 관한 것입니다. 저도 정성을 다해 어렵게 재비를 마련해서 천도재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셋방살이 등 생활고에 전전긍긍하는 분들이 많이 있는 줄 압니다. 이렇게 어려운 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되는 것도 법 안 되는 것도 법이라고는 하나 역시 경계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하셔야 됩니다. 부모의 뜻을 한생각이라도 진실로 생각을 했다면 내 먹는 밥 한 그릇을 가지고도 천도를 시킬 수 있다는 그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은 피땀을 흘려서 번 돈을 가지고서 빚을 얻어서라도 천도를 시켜야만이 잘 되는 줄 아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돌아가신 조상이 못 먹고 못 입고 못 쓰고, 그렇게 돌아가신 분들이 한이 되니까 자식된 도리로서 다소는 차려놓아야 되겠지만, 이거 보십시오. 여러분은 아파도 조상의 탓, 잘못돼도 조상의 탓으로 많이 돌리시죠? 그래, 자식 잘못돼라고 하는 부모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죽어서나 살아서나 말입니다. 그런데 살아서 부모가 지게꾼이라면 돈을 못 벌어서 모자라니까 못 시켰지 부모의 마음이 모자라서 못 시킨 거 아니거든요. 가난해서 못 시켰다 이 소립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부모를 위해서 예수재를 지내 드리는 것은, 부모가 이 다음에 환토해서 이 세상에 다시 나오실 때에 무의 통장을 해 가지고 나오시면 물질에 궁색하지 않게 잘 쓰고 잘 사신다는 뜻에서 예수재를 지내드리는 겁니다.
또 우리가 넉넉하다면 스님들한테 몇 십만 원이라도 몇 백만 원이라도, 몇 천만 원이라도 갖다 드리면서 “부모를 위해서 정성을 들입니다. 저는 자식으로 열 달 내내 뱃속에서 그 피와 살과 뼈를 다 받아서 이 육신을 받아 태어났습니다. 이것만 해도 참 머리를 깎아서 신을 삼아드려도 다 못 갚는데, 더군다나 마른 자리, 진 자리를 닦아 뉘시면서 맛있는 걸 먹이면서 이렇게 길러 주셨는데 무엇으로 부모님의 은혜를 다 갚으오리까? 그러니 우리 부모를 위해서, 부모가 부처님자리에 같이 계시도록 길을 인도해 주십시오.” 하고서 시주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부모의 이름을 쓰고 가지 않아도 시주를 해드리는 것만은 아주 찬성입니다.
어떤 때 아주 돈도 없고 그런데도 그걸 주워 모아서 가져왔을 때 내 가슴이 찡하고 아플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견딜 수 없다면 내 마음 편하자고 그걸 얼마든 떼어놓고 가져온 사람에게 도로 줍니다. 왜 그것을 도로 주느냐 하면 내 마음 편안하자고요. 그러고도 그 사람은 그만큼 했다는 얘기입니다. 그 값어치가 충분하게 했다는 얘기예요. 돈이 넉넉히 있는 사람이 몇천만 원 시주한 것보다도 그렇게 지극하게 올리는 정성이 더 의미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거 다 여러분은 모를 겁니다.
그러나 돈도 없는데 빚을 얻어다가 하지는 마세요. 병이 생겨 무척 아파서 지금 급하니까 내가 내 형세대로 부처님한테 갖다놓고 정성들이면서 아픈 것을 계기로 삼아 공부하면서 그렇게 하면 빚도 안 지고 그 병이 나으니 좋고, 또 그 돈 모아서 도량을 지으니 좋고, 또 마음을 공부하니 풍부해지고 지혜가 넓어지고, 또 저승과 이승을 서로 회전해 가면서 삼라만상을 구경을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이런 속담의 말도 있죠? 출세하라, 의자를 돌리려면 출세하라고요. 그런 말이 있듯이 내가 이 도리를 알면 스스로 두루 원력이 있고 두루 자비가 생기고, 두루 아니 봐주는 데가 없고 두루 물리가 터져서 모든 일체 삼천대천세계의 그 법계의 에너지가 여러분의 자손들에게 가고 옴이 없이 바로 간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셔야 하고, 여러분도 이 도리를 공부한다면 그대로 에너지가 부유하게, 바로 서로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갈 수 있다는 그 사실을 명심하셔야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 자체가 그렇게 귀중한 것을, 그렇게 보배인 것을 꼭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그만큼 열심히 해서 일체 만법의 그 능력을 쓸 수 있는, 수레바퀴 굴리듯이 내 마음을 굴려서 쓸 수 있는 그런 능력을 얻으셔서 앞으로 자유스럽게 쓰시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2003-07-16
 
 
   
   
2024. 11.2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