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고 크게 전체를 본다면 내 부모 내 자식 아님이 없어
여러분과 같이 이렇게 항상 공체로써 공용하면서 공생으로 살고 돌아가건만 한 달 전이 아주 먼 것 같았습니다. 오늘 이 좌석에 같이 앉아 계시는 이 인연으로 인해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비워서 그 에너지의 광력을 이루었으면 합니다.
오늘은 항상 우리와 혹성이 다르고 태양이 다르고 별성이 다르고 삶도 다르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리라고 생각돼서 그에 대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 인간과 태양계가 동시에 같다는 점, 우리가 마음공부를 해서 그 도리를 알게 된다면, 일초도 틀리지 않는다는 점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간단하게나마 왜 틀리지 않다고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해 드릴까 합니다.
우리 인간이 태어나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데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속에 있는 참자기는 늙으나 젊으나 마찬가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자기가 모르니까 몸이 커지고 중년기에 이르러서 그 대책을 강구하고 세우고 나가죠. 그와 마찬가지 원리로 억만년 전이나 지금이나 질량은 똑같습니다. 그건 몸이 비대했던 과거나 줄어든 지금이나 생명의 불성은 변함없이 똑같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 태양의 몸도 수만 배로 비대해진 동시에 중심이 가벼워서 타지도 않고, 차디찬 가스덩어리의 중심 중력으로 인해서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이 점점 내부로 뭉쳐 점차 작게 되면서 1700만 도나 올라가 모두 원자로 바뀝니다. 즉 말하자면 원자로 바뀌어 나누어졌다가 5000만 도에 오르게 되면 원자핵은 전자로 분해가 됩니다. 그런데 원자핵이 고온으로 되어 고온 속에서 작용을 함으로써 결합이 되고, 가벼운 원자핵에서 무거운 원자핵으로 바꿔진다는 뜻이죠. 즉 말하자면 전자와 전자가 융합이 돼서 한데 합쳐서 작용이 되면 두 분자는 바로 제 질량이 없어지고 에너지덩어리가 되어서 광자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이 뜻을 가만히 볼 때, 나는 용어를 잘 모릅니다마는 용어가 틀렸다면 잘 이해해서 들으십시오.
사람도 역시 몸이 비대해져서, 아까 얘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커지면 중력을 이루고 중심이 가벼워진다는 뜻은 그 중심이 되는 마음은 탈 수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타지는 않으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찬 가스덩어리 그 중심에서 중력으로 인해서 바깥쪽이 점차 작아진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모든 바깥에 있는 그 자체를 안으로 뭉치는 작용을 합니다. 또 아까 1700만 도가 오른다고 한 것은, 내는 작용에 의해서 나누어지는, 즉 활궁법(活宮法)에 의해서, 여러분이 한마음 가지고 한 가지를 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하시죠. 한마음 속에서 아마 헤아릴 수 없이 여러 가지를 할 것입니다. 그런 것과 같이 1700만 도가 올라 모두 원자로 나누어진다, 이것은 바깥으로 내는 작용입니다. 바깥으로 내는 작용에, 거기에다 나누어진 데다가 또 5000만 도가 오르면 전자로 분해가 됩니다.
이것은 예를 들어서 우리가 용광로에다 헌쇠를 다 넣었더니 새 것으로 다시 재생이 되어서 나오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게 분해가 되니까 원자핵은 평등화되는 겁니다. 고온이 되고 평등화가 돼서 평등한 그 자체 속에서 작용을 하니까 모든 양면이 다 질량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서산대사가 문지방을 걸터 밟고서 “내가 나가겠느냐, 들어가겠느냐?” 하고 물었다는 것처럼 나가겠느냐, 들어가겠느냐는 질량은 다 없어지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고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오고, 나가고 들어오는 그것도 용도에 따라서 달라지겠죠. 그러니까 모두가 상대성 원리라고도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 상대성이 합쳐서 융합이 돼서 핵반응을 할 때에 비로소 에너지만 나온다는 얘기입니다. 그 에너지가 나오게 되니까 광자를 이룬다, 우리가 크게 물리가 터졌다, 이런 거나 마찬가지죠.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전자와 전자가 한데 합쳐지면 그 두 개가 융합이 돼서 바로 반응 작용을 할 때에 두 입자의 질량은 다 없어지고 에너지 덩어리가 광자를 이룬다 이런 겁니다. 그와 같이 인간도 역시 들이고 내는 모든 것을 자기로 인해서 들이고 내는 거지 다른 사람으로 인해서 들이고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하는 작용도 우리가 살기 위해서 그러는 거 아닙니까? 그 작용이 없다면 송장이죠. 그럼으로써 그 작용에 따라서 이 활동도 바로 그 작용을 하는 겁니다.
여러 가지를 들이고 내는 것은 고정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들이고 내는데 이게 됐다 저게 됐다, 몸은 똑같은데 아버지가 됐다가 아들이 됐다가 형이 됐다가 동생이 됐다가 사위가 됐다가 남편이 됐다가 이렇게 분주하게 돌아가는 겁니다. 이렇게 돼서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일체는 모두 공했다, 그런 얘기가 나온 겁니다.
색이 공이요, 공이 색이니라 했고, 둘이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라 했습니다. 그렇게 돌아가다 보니까 네가 잘못하고 내가 잘하고, 아까 전자와 전자가 양면이 반응 작용을 한다고 그랬듯이 사람도 그렇게 놓고 맡기고 작용을 한다면 그게 바로 함이 없이 하는 것이 됩니다.
매사를 다 놓으라니까 그렇게 놓으면 난 어떻게 사느냐고 이러거든요. 사는 거나 죽는 거나, 일을 하는 거나 쉬는 거나, 보고 듣는 거나,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거나 일일이 작용하는 것이 전부 하나에서 나온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오는 작용이 둘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나 하나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 있으니까, 생겨났으니까 나로부터 알아야 된다고 하는 것이고, 나로부터 믿어야 된다는 것이고, 나부터 발견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를 발견했으면 그 작용이 바로 나한테서 나오는 걸 알아야 하고, 그 작용이 나한테서 나온다면 일체가 다 내 주인공한테서 나오는 거죠.
이 몸뚱이는 주인의 시자일 뿐이며 종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나한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종이 주인의 말을 잘 듣고 주인의 의사에 따라서 그대로 하는 것이 법 아닙니까. 주인의 생각은 따로 있고, 여러분의 생각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사를 갈 때에 어디 가서 좋고 나쁜지 뭘 봐야 되고 이러는 게 없이 내가 있는 게 그냥 법이니까 내가 생각하는 것도 그냥 법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는 날을 내가 정하는 거지 누가 정해주는 게 아닙니다. 그것 한마디로써 표현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사물을 자세히 보고, 내가 건너뛸 수 있나 없나 하는 그것부터 보고 건너뛰는 것입니다. 그게 법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이 나의 작용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들이쉬고 내쉬는 교차로에서 우리가 모든 일을 정한다 이겁니다. 그 교차로가 바로 중심이자 중력, 중용이며 모든 일을 하고 전후사 일체만법에 균형을 잡아서 일하는 것은 여러분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모두 바깥에서 찾고 바깥에서 빌고 바깥에서 잘되게 해 달라고 비는 그러한 관습이 붙어 돌아갔으니까, 그 관습에 의해서 그대로 이게 틀렸다는 둥,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둥 하는데 그것은 자기 생각이지 원래 이 큰 우주의 섭리가 그렇게 된 게 아닙니다. 자기 한생각으로 자기를 빠뜨리기도 하고 자기 한생각으로 자기를 꺼내기도 하는 이러한 묘법이 바로 자기한테 있다는 얘기입니다.
겉으로 터져 나오는 작용에 의해서 태양도 우리네가 작용하는 거나 같습니다. 둘이 아니에요. 이 도리를 알고 보면 내가 태양이 됐다가 태양이 내가 됐다가,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그런 에너지 광력이 그렇게 충만하다는 얘깁니다. 충만하니까 모든 것이 돌아가죠. 지금 별성의 관계도 그렇고, 별성이 전부 한마음으로 돌아가면서 다시 재생을 하려면 다시 굴려야 되기 때문에, 수명은 짧고 긴 것이 있지만 수명에 따라서 껍데기를 벗고 또 재생을 하려면 에너지, 즉 말하자면 광자가 있어야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발전소를 해놔야 그 전력을 꺼내 쓰듯이 별성들 은하계에서도 광자를 해놔야 바로 에너지를 꺼내 쓸 수 있습니다. 재생하는 데는 반드시 광자에서 재생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재생이 되기 전에 활동할 때는 바로 그 에너지가 광자로 이름이 되죠. 즉 한데 합쳐진단 말입니다. 여기서 전력을 쓰지 않을 때는 그 발전소에서 그냥 함축이 되지만 여기서 끌어 쓸 때에는 모든 게 달라집니다. 쓰는 용도에 따라서 달라지는 겁니다.
그렇듯이 그러한 어마어마한 광자를 해놓았지만 이 마음들이 광자를 한데 모아서 쓰는 거죠. 그런데 우리 인간이 먼저 생기고 발전소를 만들어놨죠? 발전소가 먼저 생긴 게 아니죠? 인간이 다 생기고 난 뒤에 ‘이거 발전소를 해야 우리가 전력을 끌어쓰겠다.' 해서 발전소를 했었는데, 그것이 네 가지가 한데 합쳐지지 않으면 전력을 끌어올 수가 없어요. 발전소를 만들 수가 없죠. 그와 같이 우리 인간들의 재생이나 별성의 재생이나 똑같다는 얘기입니다. 수명이 짧고 긴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명이 길다고 영원하다고 하고 수명이 짧다고 해서 영원치 않다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영원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껍데기만 벗어지고 그 영원한 에너지는 그냥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에너지를 한데 모아서 껍데기를 조성해서 다시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불바퀴가 있으면 법바퀴가 있다고 했습니다. 불바퀴와 법바퀴, 그리고 지혜바퀴가 한데 합쳐진 결론에서 바로 생산을 얻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작용을, 만약에 몸이 쇠퇴해지면 작용을 해서 껍데기를 벗고 그 별성이, 아주 새 생활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폭발이 되죠. 그럼으로써 이 껍데기라 하는 것도, 아마도 우리들한테도 미치게 돼 있죠. 지구에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똥 누면은 거름이 돼서 다시 우리가 먹듯이, 그 껍데기가 떨어지면은 껍데기 떨어지는 대로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거름이 되는 거죠. 거름이 돼서 다시금 그것이 세 가지가 다시 모여서 에너지 광자가 들어간다면 바로 그게 네 가지가 한데 합쳐지는 거죠. 이렇게 해서 몸을 가지고 나온다. 그런 거름이 아니라면, 지금 우리 인간들에게도 그러한 물리가 잘 터지지 못할 겁니다.
은연중에 우리는, 공기가 아니면 생명이 살 수 없듯이 바람에 의해서 물이 올라가서 구름이 돼서 다시 비가 내리는 것도 거기에 모든 것이 다 섞입니다. 섞여서 나오는데 또 한 가지 참 묘한 점이 있는 것은 동(東)이다, 서(西)다, 사방이 있다면 그 사이 사이에 물에서 사는 영식이, 영혼이 올라가면, 공부하는 영혼들입니다. 그것은 특별히 인간으로 화할 때 그 사이를 통해서 물이 올라가서 구름이 되고, 구름의 씨앗이 되어 동쪽 사이 서쪽 사이, 남쪽 사이 북쪽 사이, 그 사이로만 올라와서 인간에게 접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누구도 모릅니다. 그래서 물에서 진화되는 여건은 그렇게 해서 인간으로 오게 되는 거죠. 인간으로 화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물의 성질도 있기 때문에 물에서 사는 것도 있고, 불의 성질은 불의 성질이기 때문에 불성이 전체 불성을 가졌고 영원한 불성이 주어지는 겁니다. 바람은 바람의 성질이 있기 때문에 날아다니는 짐승들이 있구요. 이 모두가 이렇게 자기의 성질을 하나도 죽이는 법이 없이 살리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조그마한 일도 자기를 이익하게 작용을 하지 남을 이익되게 작용을 안 한다 이겁니다.
그런데 부처님 법에서는 남을 위해서 일을 하면 그게 나에게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공을 치면 반드시 되돌아온다, 이런 원리를 말씀하신 겁니다. 그래서 바깥에서 시각적으로 들어오고, 감각적으로 들어오고 하는 이런 것을, 온통 들리고 보이고 하는 것을 그냥 내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아무렇게나 그냥 말하지 말고, 아무렇게나 그냥 행동하지 말고, 아무렇게나 그냥 판단하지 말고 안으로 놓고 굴려서 다시 내놓고 활용하고 작용해라 이겁니다. 너무 성급하게 가면 안의 도리는 모르고 바깥의 물질에만 끄달려서 해 나가는 게 되기 때문에 절대로 실패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안으로 모든 것을 놓고 맡기면서 자기의 작용은 그대로 해라 이겁니다. 이것이 바로 중심·중용입니다.
여러분은 중용은 하시지 않고 항상 그저 들리는 대로 누가 아주 몹쓸 욕을 했다 그러면 바로 또 그냥 쏜살같이 나갑니다. “도대체 그 놈이 왜 그래? 그 놈이 왜 그런대?” 그런 말이 악의적으로 나가면서 막 뱉어 버리죠. 그러나 알고 본다면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있었지 내가 없다면은 상대가 있을 리가 없으니까 알고 보면 다 내 탓입니다. 또 넓게 생각한다면 수억겁전으로부터 진화되어 곤충으로 인해서 오기도 하고, 시대시대를 좇아서 참 많은 시대를 극복하면서 쫓고 쫓기면서, 먹고 먹히면서 이렇게 살아온 결과가 인간으로까지 진화되어 올라왔단 말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구름이 모였다 흩어졌다가 딴 구름하고 모였다 흩어졌다, 또 모였다 흩어졌다 이렇듯이 여러분이 부모가 된 것도 그렇고 자식이 되는 것도 그렇고 수없이 엇갈려 가면서 그렇게 돌아왔단 말입니다.
수없이 그렇게 돌아온 나날 중에, 이 생에 이 부모를 만났을 때 내 부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다음 생에 저 부모를 만났을 때 내 부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넓고 크게 전체를 본다면 하나도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아주 좁게 본다면 내 가정, 내 식구, 내 남편, 내 자식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한 철 나와서 같이 인연을 맺어서 놀다갈 뿐입니다. 한 철 놀다가 헤어지면 또 딴 구름하고 모이듯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고무줄 인생이라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둥바둥하면서 천년만년 살 줄 알지만 한 철 나왔다가 가는 걸 그렇게 아귀다툼을 하고 원수처럼 싸우며, 모두 이쁘고 미운 것 찾으면서 온통 야단법석들을 하는 겁니다. 배신들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고운 말 대신 악의적인 말들을 뱉어버리곤 하죠. 그게 인과응보가 된다면 얼마나 무서운 인과응보가 되는지 모릅니다. 사람이 기가 오르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5000만 도에 오르게 되면은 그냥 확 바뀌어지면서 전자로 분해가 된다는 얘깁니다. 그렇듯이 인간도 폭발이 되면 아무 말이나 막 뱉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인과가 되어 언젠가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거죠. 아주 몸에서 전력을 다해서 그렇게 뭉쳐진 액이 나가는 거나 마찬가지죠.
이렇게 해서 여러분이 악을 만드니 여러분이 살기가 고통스럽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자기가 알게 악을 만드는 것은 알고 받게 마련이고, 모르고 뱉은 말은 모르고 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아무리 힘이 들고 괴롭다 해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떤 때는 딱한 일들이 한두 건이 아닙니다. 머리가 시원치 않아서 오시는 분들, 내가 이렇게 듣기 좋게 말합니다만, 병고에 시달려서 오는 분들, 가난해서 오는 분들, 부부 사이가 원만치 못해서 오는 분들, 자식이 나가서 안 들어오고 공부 안 한다고 그래서 오는 분들, 그리고 그 뿐이 아닙니다. 세세히 말을 어떻게 다 하겠습니까만 그것이 모두 여러분의 마음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과거에 뱉은 인과응보로써 나온 것은 어찌할 수 없고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한다는 결론이 되는 거죠. 그래서 팔자 운명이 거기에 붙어 돌아가니까 그 도리를 잘 모르는 분들은 자기 탓인 줄 모르고 살기가 어렵다는 소리만 하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이 이 공부를 하시면서 어떤 것은 이렇게 잘 되는데 어떤 것은 잘 안된다고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안되는 것은 과거로부터 여러분이 지은 것입니다. 현재에 짓는 것은 현재에 그렇게 갖다가 넣으니까 모든 것이 없어지는 반면에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빠르지마는, 과거로부터 지은 것은 더딥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현실의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것을 가만히 볼 때 과거에 내가 어떻게 살았는가를 아실 수 있을 겁니다. 현실에 사는 것은 미래에 다가올 것을 미리 마련하고 있는 거구요.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스님이 고행을 하신다고 다니시다가 아마 쓰러지신 모양입니다. 쓰러져서 정신을 잃고 자고 있는데 어떤 노인이 그 스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모시고 가서 우선 먹지 못하고 그랬으니까 간장 물을 타다가 스님한테 권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지쳐서 그랬는지 권했는데도 그냥 자고 그러니까 고개를 들고 떠 넣어서 간장 물 반 그릇을 다 먹이고 나니까 정신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는 죽을 쑤어 드리고 해서 웬만큼 정신이 나서 이제는 괜찮아졌습니다. 그런데 밤중이 되니까 어디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튿날 새벽이 되니까 그 노인이 들어와서 무릎을 끓고 앉아서 하는 말이 “스님 업보가 얼마나 무섭기에, 제가 전생에 업보를 얼마나 졌기에 이렇습니까?” 하는 겁니다. 그러니 스님은 어리둥절하면서 “밑도 끝도 없이 무슨 업보 얘기를 하시오? 이렇게 괜찮게 사는데….” “그럼 어젯밤에 무슨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해서 “들었습니다” 하니까 “그러면 스님, 좀 봐주십시오” 하여 곡간엘 가보니 두 남녀가 묶여 있더랍니다.
그러면서 노인이 하는 말이 “먹으려고 해서 먹이면 그걸 다 토해내고, 핏물 같은 것을 쏟는가 하면 끌러주면 끌러주는 대로 죽인다고 날뛰며 온통 견디지 못하고 그러니 저렇게 묶어놓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묶어 놨습니다. 그래 얼마나 죄를 지었으면 이렇습니까?” 하고 묻거든요. 참 어떻게 그 업을 다 없앨 수 있겠습니까. 스님은 참 딱했죠. 말을 하려니 말을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무슨 말도 잇지 못 하고 돌아 나오니까 바지가락을 꽉 붙들고는 말씀 좀 해달라고 아주 청을 하거든요.
그래서 그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저 딸은 과거의 당신 며느리였고, 저 아들은 과거의 당신 아들이었는데 아들 내외가 당신네들을 못살게 하고 부처님전에 가서 기도만 해도 왜 돈을 갖다 버리느냐? 쌀 한 됫박 가져가면 쌀 한 됫박을 도로 뺏어오고 했습니다. 그러다 못해 부모가 먹는 양식도 아까워서 내쫓아버렸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내쫓기면서 하는 말이 ‘너희들이 그 업보를 어떻게 받으려고 그러느냐. 그 업보를 받을 때 내가 꼭 지켜보리라.’ 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했으니 당신이 끝끝내 지켜봐야 되지 않겠소?” 하더랍니다.
그러니 지켜보는 그 업보나 당하는 그 업보나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러니까 말들 조심하시라 이겁니다. 말 한마디, 이게 가르치는 방편으로 인해서 그냥 말하는 것하고 속에서 응어리가 되어 나오는 말 한마디 뱉는 것하고는 천지차이입니다. 그것은 당장 업보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한 식구가 잘못되면 온 가족이 편안하겠습니까? 가만히 보세요. 아니, 자식이 나가서 잘못되면 아이구! 그러한 괴로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어떤 일이 생겨서 안 들어 오거나 또 어떻게 잘못 일을 저질렀다거나 그런다면 “요놈의 새끼, 나가서 깡통이나 차거라. 이놈의 새끼야, 배울 때도 시기가 있는 건데 배우지도 않고 너는 기껏해야 그저 노동이나 하고 그래야 좋겠느냐. 너는 꼭 그렇게밖에는 못 될 게다.” 하면서 이렇게 분노가 일어나는 대로 막 말을 한다면 십중팔구는 아마 그렇게 될 겁니다.
그러니 이것은 바로 생활과학, 조금도 틀림없는 과학인 것입니다. 그리고 에누리가 없는 철저한 법입니다.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고 내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내 아내라고 생각해서 소유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두 자기가 각자 해 나갈 수 있는 자기를 가지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진 못할지언정, 일체를 맡겨놓고 어떠한 잘못이 있더라도 내 탓으로 돌리고 모든 것은 내가 못났을 때, 잘못했을 때의 내 모습으로 보시라는 겁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볼 때 미약한 점을 발견할 수도 있는데, 그건 자기가 어렸을 때의 자기 모습을 한번 생각을 해보면 그렇지 않을 겁니다. 자기 생각으로, 즉 말하자면 철든 마음으로 자식을 대하니까 그게 어디 같나요? 초점이 안 맞죠. 그러니까 자기 모자랐을 때의 모습으로 보면 모든 행동이 다 이해가 갈 겁니다. 그러니 분노할 게 하나도 없는 거죠. 그리고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의 자기 소유를 자기가 가지고 나온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식이라고 해서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자식이 싫다는 것을 강요하거나 그러지 마시고, 자식이 부모 뜻과 반대로 나가는 거, 부모가 보기에 이렇게 나가면 안 되는데 이런 판단이 서면 이런 것도 잘 돌려서 잘 되게끔 해줘야죠. 이 부처님 법이라는 게 잘 돌려서 잘 살게끔 해주는 것이 부처님 원력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나가는 건 옳고, 저렇게 나가는 거는 틀리다고만 생각을 한다면 그건 모가 나죠. 그건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법이 아닙니다. 그래서 잘못 나간다 하더라도, ‘어! 내가 잘못 나간다고 생각하는 건 내 생각이지 그게 아니다.' 하고 주인공에다 맡겨서 잘 돌아가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이거를 하나하나 이것이 옳다 그르다 밉다 곱다 해서 판단을 자꾸 한다면, 남편도 아내 일에 잘한다 못한다 판단을 하고 아내도 남편 일에 잘한다 못한다 해서 판단을 한다면 이거는 진짜 잘못 나가는 겁니다. 모두가 잘못 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내 갈 길이 바쁜데, 용도에 따라서 닥치는 것을 놓고 맡기고 가는 것도 바쁜데 남의 일까지 걱정을 합니다. 또 남의 참견까지 하죠. 남의 말 하는 것 듣고 온통 참견을 하는 겁니다. 남이 나를 죽인다고 하더라도 ‘어! 네가 죽인다고 하지만 나하고는 상관이 없다.’ 하고 놔 버려야 할 텐데, 모두 이것을 끄집어내 가지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아가면서 미워하고 이혼을 해서 자식들도 다 팽개치고 하는 예가 많습니다. 여러분이 자녀들을 시집보내거나 장가보내는데 당사자들은 서로 뜻이 맞는데 부모가 맞지 않다고 강요하는 게 있어요. “너 이렇게 한다면 내 자식이 아니다.” 이럽니다. 모두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몸을 빌려 태어났지만 몸 빌려 주고 빌려 받고 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끝간 데 없는 진리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어가는 것이지, 각자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모두가 그렇게 해서 머리가 커지면 그저 태양이 아버지가 되고 산하대지는 어머니가 되고 그래서 양면이 다 키워줄 뿐이지, 키워서 또 그 대에 가면 또 그렇게 키워줄 뿐이고 또 그 대에 가서 또 그렇게 키워줄 뿐이지, 아니 종시 내 자식이 어디 있고, 종시 내 부모가 어디 있고, 종시 내 형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조그만 물에서 노는 고기들의 생각은 컵 안으로만 생각하지 좀더 바깥으로 넓게 나가서 바다를 생각하지 못하는 거죠.
그러니까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그 법은 생동력 있고, 바로 반작용을 한데 모아서 작용을 하는 그런 마음의 도리를 배워서 그 에너지를 광대하게 쓰라는 그러한 이치였지, `‘죽어서 천당에 가거라, 죽어서 승천하거라.' 이러고 가르치신 게 아닙니다. 살아서 이 도리를 모르는 사람이 죽는다고 어떻게 그걸 알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살아서 그 도리를 모른다면은 물질에 그냥 관습에 의해서 아주 이 창살 없는 감옥을 벗어나지 못할 텐데, 죽었던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사대(四大)가 흩어져서 원점으로 돌아가나 그 마음은 그대로 내 몸이 있는 줄 알고 그대로 살아있는 줄 알아요, 의식이.
그러니까 인과로 인해서 악업 선업 지은, 몸속에 있는 이 고(苦)덩어리가 내 사대가 무너지면 내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겁니다. 그림자처럼 확대가 돼서 일어나니까 한 발짝도 딛고 나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뱅뱅뱅뱅 돌죠. 그런데다가 그 의식은 다 내가 있는 줄 알기 때문에, 어쩌다 내 몸뚱이에 있는 그 악업·선업이 확대돼서 보이고 그러는 거를 넘어선다 하더라도 내 모습이 있는 줄 알고, 내가 있는 줄 알고 나라는 걸 놓지 못해서 나라는 데 항상 끄달리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강을 건너가려고 하는데도 강에 빠져죽을까봐, 배 올 때를 기다리고 영혼들이 줄을 서 있는 겁니다. 그러니 내 모습이 없는 줄만 알았더라면 한생각 끄떡하면은 건너갈 것을, 물에 빠져죽을까봐 못 건너가고 있는 영혼들이 그렇게 많습니다. 그럼으로써 천도가 생긴 거고 시주가 생긴 거고 이런 겁니다. 그러나 그뿐입니까? 어떻게 또 물은 건너갔다고 합시다. 지금 이 우주 전체의 그 불바퀴 소용돌이가 있듯이, 전체 소용돌이가 있단 말입니다. 그 전체의 소용돌이를 넘어서야만이 영원한 밝음을 얻을 텐데, 뜨거워서 타죽을까봐 못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니 살아생전에 이 도리를 모르면 첫째 내 몸속에 있는 고덩어리가 그림자처럼 헤아릴 수 없는 모습으로 해가지고 나타나고 자기의 그 환상으로도 나타난단 말입니다, 사람으로. 그러니 그 환상이 나타나면 귀신으로 보일 거고, 또 온통 그냥 인연에 따라서 나타날 거고, 사람의 인연 따라서 모습이 나타나고, 모든 억겁을 거쳐오면서 그 짐승들의 인연에 따라서 나타날 거고, 또 곤충의 인연에 따라서 나타날 거고, 그 쌓이고 쌓였던 고 덩어리가 그냥 한꺼번에 그림자처럼 나타나니까, 그거 일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고 덩어리 여기에서 나오는 대로 거기다 다시 되놓는다면, 자꾸 나오는 데다가 입력을 다시 해넣는다면, 앞서의 입력이 없어진다 이런 소립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거기다 놓지 않는다면 그런 맛도 모르고, 이 모든 게 무너져서 참 현실에 좋은 생각으로 입력을 한 것이 바깥으로 나오게끔 하는 그런 도리를 체험을 못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이 단계는 ‘내가 나라는 아집을 벗어버려라. 나라는 게 있다면 강물도 건너가지 못하고, 요단강을 건너지도 못하고, 아제아제 바라아제 그 강도 건너가지 못한다. 또 불바퀴를 넘어선다 하는 것은 내가 깨우쳤다고 하더라도 깨우쳤다는 말을 하지 말라. 깨우쳤다는 말만 하지 않는 게 아니라 깨우쳤다는 생각조차 하지 말아라. 내가 있었다는 생각, 내가 했다는 생각, 내가 말했다는 생각, 내가 가르쳤다는 생각, 이런 생각을 아예 놔라. 그럼으로써 응당 불바퀴가 불바퀴가 아니라 바로 자기 에너지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일 단계 이 단계 삼 단계를 넘어설 때엔 바로, 일 단계 이 단계 이렇게 얘기했다고 ‘일 단계는…, 이 단계는….’ 하지 마시고요. 평소에 사시면서 어떤 것도 내 소유물로 생각하지 마세요. 모든 것을 그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내 마음속에 맡겨 놓고 ‘한마음!’ 이러면 모든 고(苦)의 의식들이 전부 한데 합쳐지는 그런 뭉침입니다, ‘한마음!’ 하면은. 여러 사람한테 자꾸 부탁을 해야 할 텐데, 그 부탁이 한두 건이라야 부탁을 하죠. 그러니깐 아예 동시에 묶어버리는 겁니다, 한마음! 동시에 묶어버린 동시에 그 한마음으로서 중심을 세우는 것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한마음 주인공만이 해결할 수 있고 잘되는 것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안되는 것은 거기서 나왔으니까 안되는 것도 거기서 될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지시고, 왜 되는 것도 금방 거기서 한순간에 될 수 있나 이런 걸 생각해 보시면 속도가 빠르거든요. 우리네 인간들이 가져가는 속도보다 시공이 없는 속도가 아주 빠르거든요. 그래서 작용하는 마음에 놓고 거기 맡기면 안되었던 것도 순간에 되돌아오는 것이 속도가 빠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빛보다 더 빠르니까요. 이해가갑니까? 아리송합니까? 어리둥절합니까?
나는 힘들여서 이렇게 말을 안 하지도 않고 하지도 않았습니다만 말입니다. 그랬는데 그렇게 자식들이 반대로 나간다 하더라도 반대로 나가는 것이 반대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식들 생각으로는 그게 옳다고 믿고 그렇게 나가는 거니까 그 생각에 따라주는 것이 바로 자비이자 부모인 것입니다. ‘요렇게 나가니까 넌 안될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가혹하여 부모 될 자격도 없는 겁니다.
죽는다 산다는 것도 떠나버리십시오. 그렇게 떠나게 되면 모두가 한 에너지가 되고 한 주인공이 되고 모두가 한마음이 돼서 그저 한 전력이 동시에 스위치 하나만 올리면 다 들어오듯이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내가 편안하자면 자식도 편안해야 될 거 아닙니까. 자식이 편안하게 돼야 나도 편안하죠. 자식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자식을 잘되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나 잘되려고 나 편안하려고 그러는 겁니다, 냉정하게 판단을 한다면. 그러니까 부모가 볼 때 잘못되게 나가는 것 같지만, 부모가 ‘아, 그것도 순간순간 바뀌어지는 일이니까 예측 못하는 일이지. 고정된 게 하나도 없으니까 잘못된 것도 잘 될 수 있다.’ 그러면서 넣어주는 겁니다. 마음을 따라주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모든 일이 화합과 조화를 이루고 나아가서 이 세상천지가 조화를 이루어 공생 공심 공용 공체 공식화 하고 돌아가듯이 한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이렇게 돌아간다면 전세계에 평화가 올 것입니다. 그런데 평화를 가져오려면 울그락 불그락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모든 작용은 어떠한 물질이나 무정물이나 작든지 크든지 절대적으로 돌아가는 건 똑같습니다. 그러니 바깥으로 빌고 여기서 빌고 저기서 빌고 여기다 놓고 빌고 저기다 놓고 빌어서 잘되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한마음 하면 일체제불의 마음도 한마음이요, 인과응보로 또는 유전성, 영계성으로 인해서 모인 인연들도 다 풀리는 것입니다. 즉,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옛날에 아주 유명한 강도가 있었는데요, 그 강도가 어느 집엘 들어갔는데 아주 좋은 집 안에서 얘기를 하는 걸 가만히 들어보니까 아니, 내일 아침에 끼니가 없고 애들 학교 보낼 여비가 없다 그러더래요. 그렇게 좋은 집인데. 하도 기가 막혀서 그 집의 다락으로 들어가 보니까 하나도 가져갈 게 없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좋은 집인데! 그리고 세간살이도 돈 될 게 없더라는 얘기죠. 그런데 다락에서 얘기 소릴 들어보니까 “어휴! 집도 이제 팔릴 것 같은데 우린 어디로 가느냐.” 어머니가 애들에게 하는 말이 “내일 아침 끼니꺼리도 없으니 어쩌면 좋으냐. 아버지가 저렇게 아파서 오늘 하루도 일을 허탕쳤으니 어쩌면 좋으냐.” 하면서 넋두리를 하고 있거든요. 강도가 가만히 생각을 하니까 기가 막힌단 말입니다.
이건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어서 딴 데서 훔친 것을 다락문을 조금 열고 “이것 먹어라!” 하고 화다닥 넣어주고 그냥 가버렸는데 그 집 사람들은 무슨 영문일 줄 모르고 돈 보따리가 다락에서 나오니까 아파서 누웠던 사람이 이게 무슨 일인가, 도깨비 같기도 해서 문을 활짝 열고 나가보니 유리창을 깨뜨리고 벌써 나갔더랍니다. 그러니 그 집 사람들한테는 그 강도를 생각할 때에 강도이기 이전에 자기들한테는 은인인 것입니다. 전세라도 얻을 수 있게 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강도라도 하지만 자기들에겐 은인이다 이거죠.
그러니까 강도도 강도 짓만 하는 게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좋은 일도 할 수 있고 나쁜 일도 할 수 있고, 나쁜 일을 하다가도 좋은 일을 할 수 있으니 결국은 어떻게 살거냐 하는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밉다 곱다를 떠나서, 또는 자식이 잘못한다 잘한다를 떠나서, 또 자식들 장가들이고 시집보내면서 부모들이 강요하여 자식들 마음을 전부 버려놓아 그르치게 만들거나 또 죽게 만들거나 병들게 만들거나 하는 그런 법이 없도록 극히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그럼 오늘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48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