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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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13)벽암이 새로 쓴 화엄사 역사
화엄사는 임진왜란 때 잿더미로 변한다. 나무로 지은 건물은 사라지고 석조물만 남게 된다. 이때 벽암각성(碧巖覺性)이 등장하면서 화엄사의 역사는 새롭게 시작된다. 벽암대사는 병자호란 때 의병을 모아 한양으로 진격한 공으로 왕실과 백성들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던 분이다. 허능(虛能)의 <대각등계집(大覺登階集)>에 의하면, 1632년 벽암이 화엄사를 개수하려 하자 돈을 내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웠으니, 절은 어느새 큰 총림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연기조사가 화엄사에 효(孝)를 심었다면, 벽암대사는 충(忠)을 펼친 분이다.
벽암대사를 기리는 비석은 인왕문 오른쪽 옆에 세워져 있다. 무심코 지나기 쉬운 비석이지만, 오늘날 화엄사의 면모를 세운 분이고 각황전 건립을 주도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누구나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벽암대사는 해인사 대장경판고 중영을 시작으로 남한산성 축성, 완주 송광사 창건, 하동 쌍계사 재건, 안변 석왕사 재건 등 17세기 불교 중흥을 이끈 분이다.
지리산의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 화엄사는 일주문에서 인왕문, 사천왕문을 거쳐 보제루에 이를 때에도 왼쪽의 봉우리에 의지하여 건물을 배치하고 오른쪽은 열어두었다. 한쪽은 건물로 한쪽은 자연으로 명료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최근에는 오른쪽에 건물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그 균형이 깨졌다. 화엄사 가람배치의 극치는 보제루 너머 마당에서 펼쳐진다. 보제루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통일신라 석탑과 단아한 단층의 대웅전이 보여 이곳이 중심건물이라 생각할 즈음, 계속 왼쪽으로 돌면 넓은 마당이 펼쳐지면서 높은 기단 위에 각황전이 갑자기 그 위용을 드러낸다. 각황전이 중심건물인 것이다.
각황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2층 건물로서 사찰건물 가운데 가장 웅장하다. 장엄하지만 화려하지 않고 웅대하지만 근엄한 품위를 갖춘 건물이다. 이 정도 규모와 위용이면 궁궐건축에 버금가는 것이다. 경복궁 근정전도 정면 5칸, 측면 5칸에 불과하다. 내부를 들어가면 1층과 2층이 하나로 뚫려 있어 밖에서 느끼는 웅장함은 배가된다. <봉성지(鳳城誌)>를 보면, 이 건물은 670년 의상대가 화엄사를 중창할 때 왕명으로 3층의 장륙전(丈六殿)을 짓고 그 주위를 돌에 새긴 화엄경으로 둘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조각으로 남아 있는 화엄석경은 9세기로서 기록과 차이가 난다. 임진왜란 때 장륙전이 불타면서 석경이 산산조각 났고, 일제강점기 때에는 각황전 주위에 돌무더기로 쌓여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석경이 불전에 어떻게 부착되어 있었던 것인가? 중국 베이징 인근에 있는 방산을 가면 석경으로 장엄된 석굴을 볼 수 있다. 다만 장륙전은 주위를 둘렀다고 하는데, 방산의 경우는 석굴 내부에 석경이 둘러져 있는 차이가 난다.
오늘날 화엄사의 역사는 연기조사의 효를 씨줄 삼고 벽암대사의 충을 날줄 삼아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사사자삼층석탑에 새겨진 드라마와 각황전의 압도적인 웅장함은 화엄사를 화려하게 빛낸 소중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경주대 문화재학부
2003-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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