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상 시인과 시조로 대화
“말세 창생을 뉘 있어 건지리까”
“마른나무 앞에 산잎 찾는 이마음”
내 책상 위에는 인암스님이 열반한 이듬해인 1987년에 출간된 <인암시조선(忍庵時調選)> 한 권이 놓여 있다. ‘송광사 순례 시조’란 부제를 달고 있다. <인암시조선>에 들어있는 시조는 줄잡아 300 수가 넘는다. 투박한 사투리 그대로 쓰여있어 구수한 숭늉 맛처럼 깊이가 느껴진다. 맞춤법도 옛 어투가 많다. 또한 스님의 육성 녹음테이프도 많이 있었다. 살아 생전에 사중 젊은 스님들이 녹음을 한 귀한 원본테이프는 지금도 송광사 도서관에 잘 보관돼 있을것이다.
노산 이은상 시인이 송광사를 참배 왔을 때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이때 인암스님이 지은 시조 제목은 ‘고향수(枯香樹)’이다.
송광사 일주문 부근, 곧 우화각(羽化閣)과 세월각(洗月閣) 사이에는 바짝 마른 고목 기둥 같은 고향수(枯香樹) 하나가 서 있다. 이 향나무는 보조 국사의 기념 식수인데, 1200년 송광사에 오셔서 불교 중흥의 기치를 높이 세울 당시 보조 국사가 친히 심으신 나무다.
그 후 세월이 흘렀다.
1210년 3월 27일 이른 아침이었다. 보조 국사가 세속의 인연을 다 하였을 때였다. 이때 훌륭한 제자는 스님 주위에 많았으나 함께 따라 죽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헌데 기특한 일이 생겼다. 잘 자라던 향나무가 말라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정말 놀랍구나. 이 향나무는 효자 나무여. 뛰어난 제자들이 많아도 그보다 훨씬 나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향나무는 썩지 않고 오랜 세월이 흘러 지금에 와서도 옛 모습을 잃지 않고 우뚝 서 있다.
그 사이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믿음이 생겼다. 보조 국사가 살면 향나무가 살고 보조 국사가 죽으면 향나무도 죽는다는 믿음이다.
“이 나무가 살아나는 날이면 보조 국사도 환생하여 다시 이 도량에 오실 것이다.”
이렇게 보조국사와 향나무를 하나로 보아 송광사 대중 스님들은 이 나무를 끔찍히 아낀다. 이러한 이야기를 인암 스님은 고향수 안내를 할 때면 항상 하곤 하셨다.
그때가 가을이었던가, 귀한 객손이 송광사를 방문했다. 유명한 시조시인인 노산 이은상 선생과 그 일행이었다. 스님은 평소대로 송광사 안내를 하면서 간간이 자작 시조도 읊었다. 전각 하나 하나에 시조 한 수를 붙여 읊으니 흥겨운 분위기가 저절로 조성되었다.
‘고향수’와 관련된 전설을 소개하고 났을 때였다. 인암 스님이 먼저 시조 한 수를 청했다. 노산 선생은 인암 스님이 얘기한 보조스님과 고향수 관련 설화를 한 수 시조에 담았다.
“어디메 계시나요 언제 오시나요
말세 창생을 뉘 있어 건지리까
기다려 애타는 마음 임도 하마 아시리.”
노산 선생이 즉석에서 이렇게 읊자 인암스님도 솜씨를 발휘하여 예사롭지 않게 화답하였다.
“살아서 푸른 잎도 떨어지는 가을인데
마른 나무 앞에 산 잎 찾는 이 마음
아신 듯 모르시오니 못내 야속합니다.”
그 후로 송광사 안내를 하면서 이 시조를 읊을 때마다 신명이 나서 스님의 목소리가 달라지신다. 스님의 힘과 노련미가 정점에 와서 넘치는 듯 하였고 무언가 삶의 체취랄까 향기로움, 생기발랄한 기운이 물씬 풍기는 시조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낙(樂)이 다 모인 듯 하고 사람은 저마다 이런 크고 작은 면이 있어서 에너지를 샘솟게 하는 것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영결식 때에 소개된 스님의 행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인암 스님은 사하촌(寺下村) 낙수리에서 태어나 열여덟에 송광사로 출가 하여 송광사 주지를 역임한 후에는 송광사 말사 주지 혹은 송광사 대중으로 지내셨다면서, “…1960년대에 송광사를 다녀간 여행객들은 어떤 승려의 위트와 해학과 정열이 넘치는 안내를 기억할 것입니다. 구수한 목소리에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인암 스님의 송광사 안내는 서울의 5대 일간지가 지면을 할애하여 보도할 만큼 유명했습니다.”라고 소개했다.
<송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