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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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절제
욕망은 갈등·분노·저주의 원천
절제와 조화로 행복한 생활 가능

최근 신문이나 방송을 보기 싫을 정도로 범죄가 속출하고 있다. 유아유괴, 명품족 납치 살해, 부녀자 납치, 패륜 등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해 인간의 내면에 저장되어 있는 동물적인 야수성을 그대로 노정하고 있다. 필자는 최근 신문을 장식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첫째는 살인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남의 생명을 담보로 잡는 데 망서리지 않는다. 생명은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것이라도 소중한 것이다. 더구나 인간의 생명이라면 더더욱 신중한 자세로 취급해야 마땅할 것이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인간의 생명을 수단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가족 이야기지만 월남전에 참전했던 친척 형님이 계셨다. 이 형님은 월남전에서 몇 명의 베트콩을 사살했다는 것이다. 이 형은 제대한 뒤에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짓고 있었으며, 신체는 건강한 편이었다. 그런데 몇 년 되지 않아 이 형에 관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밤마다 망령이 나타나 밤거리를 배회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는 오래지 않아 실성했다는 소문이 번지더니 몇 년지나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간이 인간을 죽였다는 사실에 대해 무척 번민했던 것 같다.
그 형님은 학력이 높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과거 보다 훨씬 고학력 시대임에도 생명의 존엄성을 경시하는 것은 아닌가?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혹은 출세하기 위한 교육은 있으되 인격을 함양하는 교육은 지양되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한다. 사람이 사는 도리를 배우지 않는 데 사람 노릇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사람답지 못한 것을 나무란다면 그것은 이 사회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이란 말 밖에는 할 수가 없다.
둘째는 살인과 유괴, 납치의 이면에는 카드란 낱말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도 카드를 만들어 사용해 보니까 편리한 점이 매우 많다는 점을 느낀다. 반면에 신중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수입이 별무인 청소년이나 대학생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카드를 발급하다 보니 사고가 빈발하고 있다는 점이다.
부처님은 불만족 내지 괴로움의 원인을 세 가지로 꼽고 있다. 그것은 무절제한 욕망과 분노나 저주, 그리고 지혜롭지 못한 판단 등이다. 카드란 물건은 쓸데는 기분이 좋다. 다른 사람들에게 생색을 내기도 좋다. 그렇지만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수입이 별무한 사람들이 급하니까, 우선 생색을 내기 위해서 혹은 무의식적인 욕구에 휘말려 마구 카드를 사용한다면 악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에서는 다섯 가지의 욕망이 인간을 타락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재물욕, 이성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이다. 여기에 저주나 분노, 판단력 미비 등이 합해진다. 그런데 인간을 타락시키는 요인으로 지적되는 것들은 바로 가장 평범한 보통의 인간들이 지니게 되는 속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만큼 버리기 어려운 것이다.
보통의 인간이 지니는 보편적인 속성을 부처님은 왜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까? 성인이 되라고?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욕망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을 간파했던 것이다. 동시에 무한대의 관계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사회에 행복과 안녕을 담보할 수 있는 길은 절제와 조화란 점을 인식했던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종교인도 싸우고 욕한다. 아니 종교간에 전쟁도 일으킨다. 그렇기에 갈등과 분노와 저주를 야기하는 원천을 통제하는 방법 이외에는 도리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욕구 충족에도 분수와 절제가 있어야 한다. 성숙한 사회일 수록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남의 입장과 권리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남이야 어찌되든 자신의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행동한다면 그 사회는 혼란은 있으되 평화와 발전은 있을 수 없다. 공업중생으로서 이 사회로부터 무한대의 은혜를 받고 있으며, 그렇기에 최소한의 보은이라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카드를 마구 발급하거나 인명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관계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기에 사회적 동물이라 말한다. 불교는 이것을 연기적 관계라 말하면서 공존과 공생을 강조한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을 함양하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교육과정 속에서 사회의 구조와 최소한의 윤리를 배울 수 있다면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최소한 너와 내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운명공동체라는 의식을 자아낼 수 있는 것이다.
<본지 상임논설위원·불교학 박사>
2003-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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