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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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12)석탑에 효를 새긴 까닭은?
삼국통일 이후 새로운 지배질서 필요

신라 오악(五嶽)의 하나인 지리산. 이 산은 항상 아버지처럼 든든하고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하다. 이 산에는 그 명성답게 천은사, 천은사, 쌍계사, 실상사 등 신라시대의 명찰이 자리 잡고 있고,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절이 화엄사이다. 화엄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17세기 해안(海眼)이 지은 사적기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임진왜란 이후 화재로 불타 없어진 뒤에 작성한 것이라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오히려 이보다 분명한 화엄사의 역사는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과 석등이다.
이 석탑과 석등에는 우리나라 석탑에서 유일하게 창건설화가 조각으로 표현되어 있다. 네 마리의 사자가 기둥처럼 받치고 있는 기단의 중심에는 연기조사의 어머니가 서 있고 석등의 기둥에는 연기조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어머니께 차를 공양하고 있다. 연기조사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했는데, 1979년 신라시대의 <대방광불화엄경>(755년, 호암미술관 소장, 국보 196호)이 발견됨에 따라 연기조사가 경덕왕 때 황룡사의 승려임이 밝혀졌다.
8세기 중엽 이후 석탑에는 조각장식을 새기는 것이 유행하였다. 이전에는 탑의 조각이라 해야 1층 문 양 옆에 새긴 인왕상 정도였는데, 이 때부터는 불, 보살, 팔부중, 사천왕, 천인, 12지 등 매우 다양해졌다. 사사삼층석탑은 환조로 조각된 사사자와 인물상, 부조로 새겨진 인왕상ㆍ사천왕상ㆍ보살상ㆍ천인상 등 각종 조각이 풍부한 석탑이다. 특히 연기조사와 어머니를 등장시킨 것은 매우 이채로운 일이다. 더군다나 부처님이 있어야 할 자리에 어머니가 서있으니, 어떻게 이러한 파격이 가능했는지 의아할 뿐이다. 그렇다면 왜 어머니를 부처님처럼 모신 것일까? 그것은 신라가 통일된 이후 중점적으로 펼친 효의 정책 때문일 것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로서는 서로 다른 국가를 하나로 뭉치기 위해서는 충(忠)이 필요했고 충을 요구하려면 효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682년 신문왕 때 세운 교육기관인 국학에서 효경(孝經)을 가르치고 788년 원성왕 때 실시한 과거시험인 독서삼품과에서도 효경을 주요 과목으로 정했다. 연기조사 활동했던 경덕왕 때에는 충담(忠談)스님에게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노래인 안민가(安民歌)를 부탁했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을 베푸는 어머니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 효와 충이 왜 필요하고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 이 노래 속에 명료하게 밝혀져 있다. 또한 경덕왕 때 불국사는 김대성(金大城)이 이승의 부모를 위해 지은 것이요, 석굴암은 전생의 부모를 위해 지은 것이다. 따라서 신라 오악의 하나인 지리산에 그것도 절 꼭대기에 보란 듯이 연기조사의 효를 탑에 새긴 까닭은 통일 이후 조정에서 절실했던 지배질서의 확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화엄사의 사사삼층석탑에 새겨진 조각은 통일신라 효를 상징한 드라마인 것이다.
■경주대 문화재학부
200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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