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에서 벗어나려면…
문
요즘 매트릭스 리로디드라는 영화가 세간에 한참 흥행을 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매트릭스(matrix)는 자궁을 뜻하는 용어이고 영화 속의 배경이 되는 가상공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두뇌 속의 기억을 조작하여 인간을 지배하려는 컴퓨터와 이에 대항하는 인간들 간의 대결을 그린 작품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보고 선도 악도 없고, 정해진 운명이나 예언도 벗어날 수 있는 것이 마음의 능력이기에 무심히 알아왔던 믿고 놓고 관하는 이 마음공부가 바로 매트릭스에서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님, 진정 살아서 이 미망의 매트릭스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살아서 나라고 하는 이 환영에서 벗어나 실존을 깨닫고 자유인이 되고 싶습니다. 가르침 주십시오.
답
그래서 ‘독 안에 들어도 못 면한다’ 하는 속담의 말이 있지만, 깨달으면 독 안도 없고, 나올 것도 없고 들어갈 것도 없다는 얘깁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안에서 벗어나라고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스님들이 다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삼천 년 전에 그렇게 하셨고, 단군 할아버지도 그렇게 했고, 여러 가지로 그때 그 시대에 따라서 모두 그렇게 가르치셨던 겁니다.
여러분이 진짜로 자기를 믿는다면 걱정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왜 걱정할 게 있느냐는 얘기입니다. 누가 죽든지 살든지, 가든지 오든지 교훈과 교양과 교육을 받음으로써 좋고 그른 거는 다 알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도 잘하고 잘못하고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뿌리에다가 습기와 에너지를 넣어줄 수 있는 그런 어머니, 아버지가 되시라는 얘기입니다.
주인공 자리는 누구에게나 평등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전해 준다면 바로 자기가 아들이 되기 때문에 아들이 생각을 내면 애비가 돼 버립니다. 둘이 아닌 까닭에 그렇습니다. 그게 어디로 가겠습니까? 애비가 생각했던 마음 그대로 자식이 전달을 받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무질서하게 굴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그래 여북하면 ‘자신(自神)'이라고 그랬겠습니까? 몸과 신(神)이 둘이 아니다라는 얘깁니다. 모든 게 신 아닌 게 없어요. 그러니 신(身)과 신(神)이 둘 아니게 똘똘 뭉쳐서 너도 주인 나도 주인이니 주인이 한마음으로써 이끌어 가는 거니까, ‘선장이 전부 하는 거니까 거기다 다 맡겨 놓으라’고 했습니다.
초기에 이렇게 하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기를 형성시킨 참자기와 현재 자기가 상봉을 하게 하느라고 그러는 겁니다. 상봉을 하지 않는다면 진짜 무(無)의 공부를 못하니까요. 천차만별의 뜻을 가진, 중용을 하는 뜻을 어찌 다 알겠습니까. 상봉해야만이 스승을 좇아서, 즉 말하자면 참나를 좇아서 무의 공부를 하면서, 또 현재 나를 통해 보고 듣는 대로 감지하는 바로 이 무의 참나는 같이, 같이같이 바로 찰나찰나 보고 듣고 이러면서 들이면서 내면서 공부를 해 나간다 이겁니다.
이렇게 광대한 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조그마한 거 가지고 그냥 모두 마음 속으로 끌어안고 헤매고 한다면, 착을 두고 이렇게 한다면 도저히 피안의 세계의 맛을 못 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인생이 얼마나 긴가. 그런데 말입니다.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그 가운데 생사가 없다 하는 도리를 알게 되기까지가 문제입니다. 그래야만이 자기가 옷이 더러우면 벗어버리고 다른 세련된 옷으로 입고, 또 옷이 헐면 또 새 옷을 맞춰서 입는 거와 같이 그렇게 인생을 영원토록 자유인으로서 살게 되는 겁니다.
그거를 다 알고 지내기 때문에 껍데기 벗어버리는 건 뭐 그렇게 걱정이 되지 않죠. 하늘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걱정할 거 하나도 없죠. 그래서 ‘강이 없는데 배가 어디 있으랴. 배가 없는데 건너갈 게 어디 있으랴. 건너가는 데는 어디고 건너오는 데는 어딘가.’ 하는 문제 등등, 모두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이 세계의 자유스러운 광대무변한 법을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몸뚱이 하나가 지금 한 가정에 묶여 있는 것만 알고 가시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도야지처럼, 짐승처럼 먹고 살기 위해서만 나왔습니까? 우리가 한바다 물속에서 살던 생물이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그래도 마음의 도리를 닦아서 짐승이 되지 않고 인간까지 이렇게 등장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인간까지 왔지만 또 인간세계에서 우리가 벗어나야 합니다. 인간세계에서는 공기라는 주머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공기도 지수화풍이 가공돼서 형성됐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는 이 공기주머니에서 허덕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지금 공부를 하고 있는 분들이 한 가정 속에서도 벗어나지 못한다면 안되지요. 아, 누가 사랑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돈을 벌지 말라고 했습니까? 가정을 이끌어 나가지 말라고 했습니까. 그렇게 하면서도 착이 없이 해야 진정한 사랑을 할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진정한 사랑을 하고 진정으로 위해주고 모순됨이 없이 한 발도 잘못 딛지 않고 한 말도 잘못하지 않고 실천으로 옮기면서도 자유스럽게 이 세계, 아니 대천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공부가 바로 이겁니다.
대천세계가 돌아가는 것은 수레와 같습니다, 수레! 수레는 어떻게 돌아가느냐? 불기둥이 아래 위 끼어서 딱 버티고 있으니까 중간에 수레가, 그 가운데 불기둥이 끼었기 때문에 바로 수레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거와 같습니다. 수레가 돌아가는 것은 바로 우리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 수레에서 우리가 턱 벗어나서 자유스럽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주의 주인이요, 세상의 주인이요, 이승 천자 저승 천자요, 그러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도리를 알기 위해서 짧은 한 생을 우리가 헛되이 보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정말입니다. 여기는 그저 보이는 데마다 보이는 것마다 ‘네 마음을 먼저 알아라. 네 마음이 모두 너를 이끌고 가는 거다. 너의 껍데기가 너라고 하지 말라. 안보이는 너를 먼저 발견해야만이 이 세상 무의 세계 유의 세계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고 그 도리를 알 수 있느니라.’ 이렇게 써놓았고 그저 어디고, 하다 못해 달력에도 써 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공부를 안 한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문
평생을 쉬지 않고 일을 했는데 사는 것은 점점 어렵기만 합니다. 이젠 지치고 자신감도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스님께서 일러 주십시오.
답
모두들 어떡하든지 그저 돈 벌어서 잘 살 궁리만 하시는데 말입니다. 내가 이런 소리를 하면 어떤 분들은 그러시겠죠. “그럼 먹고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하고 얘기할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혼자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얼른 쉽게 말해서 지금 당장 먹을 게 없어도 ‘나 혼자 먹으려고 그러는 게 아니잖아. 속의 자생중생들 너희들을 대신해서 내가 입도 빌리고 몸뚱이를 빌려서 다 심부름해 줄 뿐이지, 너희들이 먹는 거니까 너희들이 먹고 싶은 거 알아서 해.’ 이렇게 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이라야 된다 이겁니다.
사람이 살아나가는 데 그까짓 것 하늘이 무너진들 어떻고 땅이 꺼진들 어떻습니까? 당장 먹을 게 없어도 없단 소리 하지 마세요. 나는 예전에 그랬습니다. 언젠가 선원에 내일 먹을 게 없다고 그러는데도, 쌀 두 가마 있는 걸 딱딱 긁어서 누굴 주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 쌀 두 가마니를 그냥 준 거예요. 그래도 그냥 우리 스님들은 다 믿으니까요. 그런데 그 날 밤에 누가 쌀 두 가마니를 트럭에다가 싣고 덜덜덜덜 들어온 거 있죠?
이렇게 마음을 너그럽게 쓰면서 사세요. 이게 다 네 거 내 거 따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려있고 우리가 하기에 달려있는 겁니다.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것도 무에서 유로 나오는 겁니다. 유에서 무로 들어가는 거는 우리가 없어지는 걸 말하는 거죠. 그래서 무에서 유로 창조를 해낸다 이런 뜻이죠. 이 공부는 정말이지 하기 쉬우면서도 만나기가 어렵다 이런 뜻이에요. 그런데 하다가 “그렇게 아무리 해도 안되는데요, 뭐.” 하고선 자기가 자기를 무시해요. 그러나 절대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죽는 것도 네가 죽게 한다면 죽는 거고, 네가 형성시켰으니까 살리는 것도 너고 죽이는 것도 너니까 너 알아서 하라고 하면 책임이 있죠. 책임을 져야죠. 자기가 책임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다 이름만 부르면 되나요?
눈물나고 아프고 시린 자기의 모든 문제를 공부하는 계기로 삼아서 자기한테 물어보세요. 하나하나, 적은 거든지 큰 거든지 앞에 닥친 거든지 ‘너만이 해결 할 수 있어! 너만이 굶지 않게 할 수 있어!’ 또 아픈 사람은 ‘너만이 낫게 할 수 있어!’ 그러면 금방 보살이 응신으로 화해요. 응해주는 화신으로 화해요. 화해서 응해준단 말입니다. 마음에서 나가는 이름이 보살이거든요, 마음에서 나가는 게 보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자신으로서 한번 실천해보시고 경험해보시고 그 진의를 하나하나 체험하고 돌아간다면, 남한테 돈 취하지도 않고 궁색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많이 체험을 해서 아주 슬기롭게 잘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안된다고 합니다. 근데 안되는 원인이 그동안 중학교 다녔으니까 고등학교로 올라가라 이런 뜻인데도 그걸 캐치 못하고 주저앉는 겁니다. 어떤 체험이 되는 것만 진리가 아니라 안되는 것도 진리다 이겁니다. 안되는 것도 알아야 되는 것을 잘 이끌어 나갈 수가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고거 안되는 걸 ‘안되는 것도 너가 하는 거니까 알아서 되게 하는 것도 너잖아.’ 그냥 태평하게 ‘안되는 것도 너가 하는 거니까 알아서 해!’ 하고 ‘그걸 가르치려고 하니깐 고마워.’ 이러고 하면 그냥 담박 돌아가는데, 알았으니깐…. 이걸 모르면 그냥 오래 가요. 빨리 알아채면 그냥 빨리 확 돌아가 버리는데 말이에요.
우리가 마음이 벗어나야 몸에서 벗어나고, 우리를 마음대로 굴릴 수가 있고 우리 생명체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어요. 그렇게 조복을 받아야 내 마음대로, 어디가 아프면 ‘아프게 해서 되니? 안되잖아!’ 이러면 그냥 금방 돌아가거든요. 또 그뿐이 아니에요. 어떠한 문제가 생겼을 때 ‘저거를 어떻게 하면 좋지?’ 할 때 내 안의 의식들이, 즉 얼른 쉽게 말하자면 원자에서 입자가 다 나가서 해결하듯 하는 거죠. 그러니까 어떤 경우이든 어떻다 어떻다 말로는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스스로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여러분 하소연을 다 들어주면 참 좋겠지만 오히려 그것이 빨리 도의 길을 이루는 데는 더디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 항상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거를 감지해서 원만히 치워버리시고 내가 없는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내 말 뜻을 잘 알아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음 어떻게 다스려야…
문
스님,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면서 공부해 나가야 하는지요? 제 마음은 어디에서 생겨났고, 그 마음을 바꾸어서 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답
우리는 지수화풍으로 뭉쳐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동적으로 지수화풍을 먹고 살고 지수화풍이 없으면 죽습니다. 우리 몸이 지수화풍으로 뭉쳐진 거죠. 지수화풍으로 뭉쳐져서 지금 내 몸 안에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악업 선업이 모두, 그 모습과 의식이 있습니다. 딴 데서 나오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영계성 유전성 업보성 세균성 또는 생사윤회의 모든 것도 다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병고도 애고도 다 거기서 나오는 거죠.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아주 자동적인 입력이 돼 가지고 현실에 그 입력이 풀려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한테 항상 네 뿌리에서 나오는 거니까 네 뿌리에다가 직접 직결해서 놔야 통신이 돼서 두뇌로 올라가서 대뇌를 통하고 소뇌를 통하고 중뇌에서 결정을 내려서 사대로 통신이 된다고 했습니다. 통신이 되면 통신이 되는 대로 작용을 해 줍니다. 작용을 해 주는 것은 내 마음이 그렇게 통신을 했기 때문에 그 마음에 의해서 자동적으로 작용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마음으로써 내 자성중생들을 다스려라 이런 겁니다. 내 마음의 선장이기 때문에 다스려라 이 소립니다.
다스린다는 것이 별난 게 아닙니다. 좋게 생각을 해서 좋은 결과를 맺고, 모든 걸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내 탓으로 돌리는 겁니다. 내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까, 누구한테서 나오는 게 아니고 나로 인해서 나로부터 생긴 거니까, 끼리끼리 만난 건데 누구를 원망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내 탓으로 돌리고 내 뿌리에 모든 것을 놓는데, “너한테서 모든 것이 나온 거니까 헌 물이 나오는 것도 너만이 새 물로 바꿔 쓰게 할 수 있다.” 하고 돌려놓는 방법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한 구멍으로 들고 한 구멍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죠. 내면의 한 구멍에다 넣고 한 구멍에서 베풀어진다, 넣고 꺼내는 건 한 구멍이지 두 구멍도 아니다 이런 소립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가 이 도리를 알고 행해야 나한테 공덕이 있고 이득이 있고, 발전하면서 창조력이 길러지는 겁니다. 그래서 내 가정을 이끌어 가면서 어떠한 문제라도 타파를 하고 넘어갈 수 있다 이 소립니다. 천차만별의 각자 여러분이 모두 뿌리가 있듯이 풀 한 포기도 제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둘이 아닌 까닭에 제 뿌리만이 모든 것을 흡수해서 제 나무를 살리는 겁니다.
오고 가는 삶의 의미
문
스님 게송을 선법가로 만든 ‘빈 손’이라는 곡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올 때도 빈 손 갈 때도 빈 손, 올 때도 빈 발 갈 때도 빈 발’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오고 가는 중에 현재의 삶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답
두 가지로 요약해서 표현을 해보죠. 여러분이 어디를 걸어간다고 했을 때 한 발 떼어놓으면 한 발은 없어지고 한 발 떼어놓으면 또 한 발 없어지고 하거든요. 그래서 한 발은 무에서, 한 발은 유에서 항상 떼어놓고 사니까 내가 떼어놓은 사이가 없는 겁니다.
전력이 말입니다. 태양계에서 전력을 끌어쓰는데 우리가 그릇을 해 놨기 때문에 우리가 태양열을 받아서 전력으로 쓸 수 있죠? 장치를 해 놨기 때문에 그것을 쓸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죠? 그래서 우리가 마음의 주장자를 완벽하게 세워 놓지 않는다면 태양열을 받아쓰기 위한 장치를 해놓지 않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런데 태양열이 들어올 때는 들어온다는 말도 없고 들어온 게 보이지도 않고 그렇지만, 태양열은 들어와서 전력으로 흘러서 쓸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빈 발 빈 손, 무심, 무의 정신 세계가 있기 때문에 유의 물질 세계가 나온 것입니다. 저 검은 지평선도 역시 지수화풍의 에너지가 있기 때문에 우주를 폭파시켰고, 이것이 에너지가 보이지 않고, 전기가 들어오는 데도 전력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없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설을 해서 불을 켜고 끄는 것만 알았지 전력이 들어오고 나가는 거는 못 보는 거예요. 못 보는 건 못 보는 건데 진짜로 빈 손이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고 빈 발이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우주 대천세계를 한발로 디디셨고, 우리들이 딛고 있는 발이 부처님 발 아님이 없기 때문에 한 발입니다. 부처님 손 아님이 없기 때문에 한 손이구요. 그 광대무변하고 묘한 도리는 마음공부를 하셔야 아시게 될 겁니다. 그것은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어요. 지금 전력으로써 말을 했지만 전력이 들어오고 나가는 거는 못 보니까요. 그러니까 빈 손이다 빈 발이다 하는 거를, 없다고 단정을 짓지 마시고 빈 발 빈 손이 있기 때문에 현실에 보이는 손, 보이는 발이 있다는 사실을 아세요.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알게 될 겁니다.
마음을 밝히려면…
문
스님께서는 늘 “자기 안에서 구해서 마음을 밝혀나가고 깨우쳐 나가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생활해 가면서 어떻게 살아야만이 마음을 밝히고 안으로 구할 수 있는 것인지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답
만날 하는 말이 그 말인데요, 뭐. 하지만 진짜로 여러분이 믿고 절감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걸 내가 이렇게 말로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아주 죽어가거나 급박할 때에,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는 그 정도의 심정이 돼야 겨우 자기 근본자리를 믿게 되죠.
어떤 때는 미국에 있는 사람도 그렇고 일본에 있는 사람도 그렇고, 전화를 할 때 절박하게 합니다. 그러면 “알았어. 절박하게 관해 봐!” 하고 얘기하면 그 다음날이고 그 이튿날이고 전화가 또 옵니다. “스님, 전화하고 나니까 그냥 멎었어요. 참 감사합니다.” 이러거든요. 그러면 나는 그럽니다. “네 전깃줄과 내 전깃줄이 둘이 아닌 까닭에 불이 들어왔을 뿐이지, 내 전깃줄이 제일이고 네 전깃줄은 아니고 이런 게 아니다. 네 마음의 전깃줄하고 내 마음의 전깃줄을 같이 합쳐 놨으니까 불이 들어온 거다. 그러니까 네가 낫게 하고 내가 낫게 한 것도 없다.”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진정으로 자기 뿌리를 믿어야 합니다. 자기 뿌리를 자기가 안 믿으면 누굴 믿을 겁니까? 이름을 믿을 겁니까, 형상을 믿을 겁니까? 어떻게 할 겁니까? 자기를 이끌어 가는 진실한 자기 근본 뿌리를 믿어야죠.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말씀을 해 놓으신 경이나 또 스님네들이 이끌어 주신 것은 역시 길잡이밖에 안 되는 겁니다. 나부터도 길잡이밖에 안 되는데요. 그런데 여러분이 공부를 하면서 방편을 안으로 두고 썼으면 좋겠는데 바깥으로 기도하고 비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두 바깥으로 기도하게 하고 바깥으로 믿게 하거든요. 주처는 자기가 있기 때문에 있는 건데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진짜 자기부터 알아야 일체를 다 알 수 있다고 가르치셨는데, 모두 타의에서 구하고 있고 바깥으로 기도하고 있거든요. 어느 종교를 막론해 놓고도 그렇고 세계적으로 봐도 다 그래요. 하지만 그게 전부 부처님의 가르침에 엇나가는 격이거든요. 부처님이 가르치신 그 뜻을 아예 뒤바꿔 놓고 지금 가르치는 거와 똑같은 얘기죠.
그러니 우리가 경을 한번 본다 하더라도 경의 내용을 달달달달 외워서 그 이름을 알고 말을 아는 게 아니라 그 속에 숨겨진 진실을 알아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저 못났든 잘났든 자기를, 어떠한 사람도 역시 자기 원소는 자기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의 그 원소 자체, 불성은 변하지도 않는 거고 영원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영원한 자체의 불성은 사람이 못났든 잘났든 잘 배웠든 못 배웠든 그거를 떠난 자리입니다. 그러니 실망하시지 마시고, 뒤로 물러서지도 마시고 공부 열심히 하세요. 당장 급한 일이 있는 분이나 처음 발심하신 분들이나 모두 ‘주인공, 내 뿌리야! 너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 하고 내면으로 진짜로 믿고 진정코 그렇게 한번 마음으로 해보세요. 진정으로만 한다면 통신이 됩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만 공부를 하는 거는 아닙니다만, 여러분은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바로 방편이자 바로 부처님께서 불난 집에서 아이들을 나오게 하는데 우선 장난감을 주고 나오게 하는 것과 같은 방편이라는 걸 안다면 거기에 끄달리지 않고 제대로 공부해 나갈 겁니다. 그런 부처님의 가르치심이 아니었더라면 여러분과 내가 이렇게 얘기하지도 않을 겁니다. 이런 말을 할 줄도 모를 거구요.
그러니까 매사에 감사한 줄 아시고, 하여튼 열심히 생활 속에서 하나 하나 진실히 해보십시오. 다가오는 괴로움을, 애고와 번뇌를 고통이라고만 생각지 마시고 공부할 수 있는 재료라고 바꿔서 생각하세요. 그 재료가 있기 때문에 내가 공부할 수 있다는 그런 믿음을 진실하게 가지시고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복덕 아닌 공덕 얻으려면
문
참다운 수행자는 복덕을 쫓는 게 아니라 내 안의 무한공덕을 얻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스님, 어떻게 하면 복덕만을 찾는 소인배가 되지 않고 무한공덕을 얻을 수 있는 대장부가 될 수 있을는지요?
답
공덕은 모두 한데 뭉쳐서 너 나가 없이 서로가 아픔을 알고 내 아픔 남의 아픔을 둘이 아니게 위로해 주는 그런 마음이 바로 공덕입니다. 그런데 나만을 생각하고 내가 잘 살기 위해서 기복적인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정성을 들이고 시주를 했는데도 나한테 이득이 없다고 한다면 복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복덕을 누리는 것은 우리 사는 동안 아주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복덕은 잠시잠깐 그저 불 반짝 켜 주다가 꺼지는 거와 같습니다. 그러나 공덕은 세세생생입니다. 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세세생생의 밝음을 언제라도 꺼진다, 켜진다는 도리가 아닌 밝음의 세계로 우리는 등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덕이 되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내면의 자기 자성을 믿는 데에 큰 공덕이 있는 겁니다. 그러니 자성으로 인해서 내 몸뚱이 나무가 살고 있구나! 자성의 뿌리로서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면 내가 먹는 게 혼자 먹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몸뚱이 속에 내가 얼마나 많이 들어 있으며, 내가 일한 것도 혼자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언제든지 말하는 건 좋게 말하죠. 자기가 죽도록 애를 써서 벌었다고 그러거든요. 아니, 혼자 번 게 어디 있어요? 수십만의 생명들, 의식들, 모습들이 한데 작용을 해 줘서 자기 몸뚱이 하나가 움죽거려서 번 건데 어떻게 벌었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혼자 먹는 게 어디 있고, 혼자 듣는 게 어디 있고, 혼자 만나는 게 어디 있고, 혼자 걸어가는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내가 했다고 내세울 건덕지가 하나나 있을까요? 내가 했다고 세워서 잘못했다고 할 것도 없고, 잘했다고 할 것도 없고, 업이 많다고 할 것도 없고, 얼마나 과거에 잘못했으면 업이 이렇게 많을까 할 것도 없습니다. 모두가 공생 공심 공용 공체 공식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나는 그렇습니다. 나를 떠나서 모셔 놓은 부처님의 형상을 믿으라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을 믿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나로부터 모두가 있는 거니까 나부터 알아라 이겁니다. 나의 마음의 안테나부터 세워놔야 오고 가는 것을 다 통신할 수 있는 거죠. 통해야 뭐가 어떤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든 모두 나로부터입니다. 내 주처는 나한테 있다, 나의 뿌리는 나한테 있지 딴 데 있는 게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들과 물과 산과 허공이 전부, 허공의 생명까지도 모두 한 손으로 그물을 드는 것과 같습니다. 한 손으로 그물을 들어서, 일체가 그물 하나 드는 거와 같다는 거는 뭐냐 하면, 내가 어떠한 지경에 빠져도 그것을 대치하는 것은 스스로 입력이 되기 때문에, 스스로 손 없는 손 발 없는 발이, 즉 말하자면 내 마음의 주장자 없는 주장자가 다 하늘을 받치고 굴립니다.
『반야심경』 읽어 보셨죠? 반야심경이 이 세상 돌아가는 진리, 팔만대장경을 함축해서 다 거기다가 모두 한데 합쳐 놓은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화엄경이니 금강경이니 반야경이니 어떤 경이든 막론해 놓고, 무슨 공덕이라도 들어올 줄 알고 아침저녁 달달달달 글자로다가 그냥 외우죠? 염불을 하지 않나, 염(念)을 하지 않나, 절을 하지 않나. 별거를 다 하고 있어요. 그거는 단시일내의 복이지, 세세생생에 벗어나는 공덕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묘하고 광대무변한 법을 부처님께서 49년 동안이나 설해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상대를 믿고, 상대의 뿌리 이름을 찾고, 상대의 나무 이름을 찾고 이렇게 기도를 하고 온통 야단들이니 뭐가 전달이 되고 뭐가 이익이 되고 뭐가 공덕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이 한 생을 살아나가는데 한 철 왔다가 가는 겁니다. 모습은 한 철이요, 마음은 영원한 겁니다. 마음의 차원은 영원한 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 통 속에서 벗어나서 살고 죽는 것도 없고 그대로 영원하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각자 가정에서 필요에 따라 전력을 끌어쓰듯이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에너지를 배출하는 힘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고 이 몸 떨어지기 전에 열심히들 공부해서 마음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지금 시대는 심성을 빼놓고는 창조도 없고 발전도 없습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을 한다고 해도 심성을 빼놓고 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할 뿐더러 서로를 해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해나가는 공부를 모두 자기 근본을 발현하는 계기로 삼아서 가정에서 일어나는 문제, 사회나 국가에서 일어나는 문제, 또 세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나 지구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재난을 무마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노력들을 하시기 바랍니다.
무작정 가는 것이 맞는지…
문
항상 커다란 법문을 내려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요즘 모든 것을 놓는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놓는다는 생각도 놓으려 합니다. 그러면 사고작용은 일어나지 않고 그저 ‘그냥’입니다. 그런데 그게 별 감흥을 주지 못합니다. 자성을 느끼기 위해 제가 가는 이 길이 잘하고 있는 것인지요? 계속 이렇게 빛깔도 체도 없는 어딘지 모를 곳으로 무작정 가는 것이 맞는지 궁금합니다. 부디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답
사람이 내 몸 하나 던지면, 죽고 사는 생사의 문제를 던지면은 아무 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내가 길을 걸을 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이 길을 어디 끝이 있어서 가는 것도 아니고 또 어디를 허겁지겁 찾아가는 것도 아니다. 이 길은 세세생생 끝없이 걸어갈 길인데 내가 뭘 그렇게 찾아서 어디를 부지런히 가야 하고 또 노비를 빌려서, 노비를 달라고 그래서 내가 차를 타고 어디를 가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남한테 달라하지도 않고 그냥 가다가 앉으면 앉고 서면 서고 걸으면 걷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아, 내가 고행이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안 해도 그대로 고행이며 그대로 참선이구나.’ 그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조리, 마음의 도리를 공부해 나가는 모든 분들이 다 완성을 하라는 건 내 욕심이지만은 그래도 다 하게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이 이 마음의 도리를 빨리 배우려면 이유를 붙이지 마세요. 이유를 붙이면 일심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이 도리는 일심으로 정진을 해야 하거든요. 소멸시키는 실천이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실천하는 겁니다. 정진이다 뭐다 이름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실천해 가는 거예요. 소멸시키는 실천 말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름은 붙이지도 않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는 여러분처럼 아주 지식이 많고 학식이 많아서 이렇게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나는 길이 없는 길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여러분한테 얘기를 하는 겁니다. 길을 알기 때문이에요.
이 세상을 가만히 살펴보세요. 물에 가면 주해신이 됩니다. 모든 걸 자유스럽게 대치해 나갈 수 있는 주해신이 된다는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먼저 하거든요. 기독교 믿는 사람이 나는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고 하듯이 말입니다. 이름이 뭐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실천이 중요하지. 그래서 천차만별의 마음은 마음이 없는 것이 마음이다 이겁니다. 부처라는 이름이 없는 것이 부처지, 부처라는 이름이 있는 것은 부처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북하면 마음이 없는 것을 마음이라고 한다, 이렇게 말을 했을까요.
그러니까 마음을 자유스럽게 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으로 자유스럽게 실천하지 못한다는 얘기예요. 여러분도 사람이기 때문에 부딪치면 아프고 또 좋고 나쁜 걸 다 뻔히 아시죠? 그러니까 아시는 그대로 행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대로 행하면서 그냥 그렇게 편안하게, 일상생활 속에서 내 몸이 하는 거, 먹는 거, 말하는 거, 사는 거 몽땅 한자리에다 맡겨 놓고 사시면 얼마나 편리합니까? 그렇게만 믿고 살아간다면 이 세상이 다 없어진다 해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겁니다. 정말입니다.
여북하면 부처님께서도 그러셨겠습니까. “허허바다에 배를 타고 가는 형국인데, 배는 네 모습이고 배 속에 있는 생명들은 네 중생이니라. 그런데 그 배를 이끌고 가는 선장한테다 진짜로 믿고 맡기고 가만히 있으면 선장이 다 알아서 가는 데까지 끌어다 줄 것을 그냥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하면서 바깥으로 찾고 온통 난리를 치니까 그 배는 뒤집힐 수밖엔 없다.” 이거죠. 지금 우리가 하는 이 마음공부는 천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허공 길의 공부입니다. 우리가 저승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무의 세계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승의 이치를 다 알아서 대치를 해 나가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여덟 달 만인가 일곱 달 만에 애를 낳아서 다 죽게 됐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애가 또 몇 대 손이랍니다. 몇 대까지 손이 없었대요. 아, 그러니 어떡합니까. 그런데 그 부모가 이 공부를 잘 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급하니까 지극하게 오직 그거 하나로만 들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살아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급하게 자기 앞에 떨어져야만 그렇게 야단법석을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가 지금 허허바다에 배 한 쪽 타고 가는 형국이거든요. 지금 살아나가는 게 그렇게 아슬아슬해요. 어느 때 차 사고가 날는지, 어느 때 떨어질는지, 어느 때 또 잘못될는지, 어느 때 식구가 어떻게 될는지 그것도 모르구요. 그냥 허허바다에 떠서 가는 형국인데 이 공부 안 하고 그냥 살아서 되겠느냐는 겁니다.
나는 내 수중에 아무것도, 내 수중이 아니라 내 몸까지 없어요. 아주 버린 사람이에요. 그래서 나중에 알고 보니까 ‘버릴 것도 없는 걸 버렸다고 했구나.’ 했어요. 버릴 것도 없는 걸 버렸다고 했구나 했다구요.
여러분이 함이 없이 살고 공해서 내가 따로 한 게 없다는 것을 알고, 내가 너무 많아서 고정됨이 없이 그냥 항상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듣고, 만나고 또 만나고, 하고 또 하고 이러기 때문에 내가 먹었다고도 할 수가 없고, 내가 산다고 할 수도 없고, 내가 이렇게 했다고 할 수도 없고, 내가 돈 벌었다고 할 수도 없고 내가 망했다고 할 수도 없는 겁니다, 전부.
그렇게 없는 걸 알아야 내가 아주 자유스럽고, 집안에서 무슨 일이 생기고 가족이 다 죽는다고 해도 앉은 자리에 그냥 뻔뻔하게 앉아 있을 거예요,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