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공학은 윤리가 ‘생명’
어느 젊은이가 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고 자대 배치를 받았다. 그의 주 임무는 부대장 심부름이었는데, 하루는 부대장이 애지중지 기르는 강아지 밥을 갖다 주라는 명령을 받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개밥에 얹혀 있는 계란 프라이 때문이다. 그는 계란 프라이를 가장 좋아하는데 입대 후 그때까지 한 번도 먹지 못했다. 물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민하다 결국 그는 ‘개밥’을 먹고 말았다. 하지만 민간인이 되고 나니 후회 막심하다고 그는 술회하였다.
최근 어느 생명공학연구소에서 인간 배아 줄기세포를 쥐의 배아에 넣어 인간과 쥐의 유전자가 섞인 쥐, 일명 ‘휴 마우스’를 생산하는 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이 소식을 접하면서 불현듯 이런 우스개 실화가 생각나는 것은 왜 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 역시 젊은 군인처럼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군인은 후회하고 있는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때문이다. 인간 존엄성은 욕망 충족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따라야 하는 도리인 윤리를 지킬 때 비로소 얻어진다.
현재 생명공학의 발전을 두고 일어나는 생명윤리 논쟁 역시 이와 흡사하다. 생명공학 기술을 이용하여 ‘휴 마우스’를 개발하고, 나아가 이를 실험 대상으로 삼아 줄기세포에서 각각의 장기가 어떤 경로를 통해 발달하는지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얻어진 줄기세포는 치매나 정신병 등 난치병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 바야흐로 의학의 새 장이 열리는 셈이다.
그렇다고 인간 존엄성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과연 인간과 쥐의 유전자 혼합이 윤리적으로 옳은가를 우리는 물어야 한다. 물론 이번에 개발된 ‘휴 마우스’는 사람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도 반신반수(半人半獸)가 아닌 100% 쥐이지만, 유전자가 생명의 책임을 감안할 때, 이로써 이미 이종교배 내지 키메라 탄생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인간 종의 고유성은 상실되고,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 짓는 종의 경계는 무의미하게 된다. 이제 더 이상 인간 존엄성은 설 땅이 없어진다.
더군다나 생명공학은 돈의 논리에 따라 발달한다. 즉, 겉으로는 질병치료라는 대의명분이 강조되지만 실제로는 돈이 되기 때문에 생명공학은 발달하고 있다. 생명공학은 굴뚝 없는 산업으로,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말하지 않는가? 부를 창출해야 하지만, 윤리의 한계 내에서 생명공학이 발달해야 한다. 생명공학자들은 식량난 해결을 위해 유전자 변형식품(GMOs)을 개발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세계 식량은 세계 인구가 먹고도 남을 양인 1.5배가 생산되고 있다. 오히려 식량이 무기화되고 있다. 문제는 생산이 아니라 분배이다. 돈에 의해 식량이 분배되는 한 결코 기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식량의 양이 아니라 분배의 윤리가 문제이다.
줄기세포 연구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의술은 발달되어야 하지만,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어야 한다. 의술이 돈의 논리에 의해 지배될 때 그것은 빛깔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는 사고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자동차의 생명이 제동장치이듯이, 생명공학이 정말로 생명을 살리는 공학이 되고자 한다면 제동장치를 갖추어야 한다. 그 제동장치는 다름 아닌 생명윤리가 아닌가? 생명공학의 발달이 아니라 생명공학 기술 개발과 이용에 있어서 생명윤리가 마련되지 않으며, 생명공학 역시 무기화될 수 있다. 상업주의가 생명공학을 지배할 때 생명윤리는 들어설 땅이 없어진다는 점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