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구와 글자풀이에 매달리지 말고 마음의 눈 밝혀 인과 굴레 벗어나야
보이는 집을 짓는다 해도 그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면 집을 짓고 있는 중에도 금이 가고 무너지는 수가 있듯이 여러분 마음의 기초도 튼튼해야 합니다.
여러분께 내가 무엇을 안다 모른다를 떠나서 항상 말씀드려온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태어나 살면서 얼마나 쫓고 쫓기면서 몸이 바뀌고 마음이 진화되면서 이렇게 인간까지 왔나 하는 사실을 거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누누이 하는 말이라 여러분 모두 너무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말을 하고 금방 다른 말을 했다면 조금 전에 얘기한 것은 벌써 과거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불법을 공부한다고 하면서 경구(經口)에만 매달리고 글자풀이에만 매달린다면 마음공부와는 천리만리 멀어지고 말게 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 중세계의 쫓고 쫓기는 세상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억겁을 통하고 또는 끝간 데 없이 그 차원에서 끼리끼리 모여 살면서 이리 끌려다니고 저리 끌려 다니면서 인과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없다면 바깥경계의 보고 듣는 대로만 생각하고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건 겉만 볼 뿐이지 속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생활해 나가는 데 하나도 이익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른쪽 두뇌는 물질세계로서 활동하는 것을 말하고 왼쪽 두뇌는 깊은 속의 모든 것을 넣을 수 있는 작용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 앉아 계신 여러분 중에 의학적인 전문인들도 계시겠지만, 왼쪽 뇌와 오른쪽 뇌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들이고 내는 것도 거기서 점검을 해서 들이고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모른다면 그대로 물질에 끄달리고 정신에 끄달리게 됩니다. 아까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면 집을 짓는 중에도 금이 가고 무너지는 수가 있다고 했듯이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마음의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아니, 육신 속에 인과로 인해 악업 선업이 뭉쳐 있으면서 좋고 나쁜 것이 수없이 나오는데 좋은 것은 잠시 잠깐이고 언짢은 것, 화나게 하는 것, 술 먹고 아수라장을 만들고 하는 모든 일체를 일으키는 그 놈이 누구냐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몸 속에 그러한 의식들이 인연으로 뭉쳐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말하자면,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쳐서 헤아릴 수 없이 수만 개가 모였다가 흩어지면서 하나가 뽑히는 것이 부모에게 육(肉)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영혼이 자기가 과거에 살던 악업 선업을 짊어진 채 거기에 부합이 됩니다. 그래서 삼합이 한데 합쳐져서 삼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뭉쳐진 악업 선업이 과거의 것은 현실로 모이고 미래는 아직 가지 않았기 때문에 없으니 현재 여러분이 모두 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식이 여러분한테 그렇게 강요하고 강요당해서 악업 선업에 휘말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의식들은 좋고 나쁘고를 모릅니다. 그래서 여러분 현재 의식이 나쁘고 좋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마음으로 중심을 지키면서 다스려야 한다는 겁니다. 들이는 것도 다스려서 들이고, 내는 것도 다스려서 내야 한다는 얘기예요. 이것이 바로 마음을 통해서 두뇌에 통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게 우리 마음 속에서 두뇌로 올라가면 두뇌에서 사대로 통신을 해서 그렇게 다스려 나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돈을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돈이 여러분을 찾아오게 해야 합니다. 지나치게 욕심부리지 않고 자기 분수를 잘 지키는 그 마음이 바로 여러분을 리드할 수 있어서 홀연히 밝아지게 되는 겁니다. 그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나오는 것을 중용으로서 활용을 할 수 있는 여러분이라면 조금도 어긋남이 없을 겁니다. 상대를 둘로 보고 남의 탓을 하며 상대를 원망하면서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면 누가 뭐라고 하기 이전에 우선 자기 스스로가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우리가 불제자라면 자기의 영원한 생명의 근본을 알아야 합니다. 풀포기 하나도 불교 아닌 게 하나도 없다고 항상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들었으면서도 들은 사이가 없이 분명히 들었습니다. 전쟁터에 나가면 이등은 없이 일등이어야 살 수 있다고 하듯이 말입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마음공부 하는 데도 둘째는 없습니다. 무조건입니다.
무조건이 되면 일체제불과 일체중생, 하다 못해 진드기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든 것을 섭류해서 한마음으로써 둘이 아닌 도리를 알면 그때에 비로소 부처님은 부처님이요, 중생은 중생이요, 풀은 풀이요,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거기 놓지 않는다면 하나도 얻을 바가 없고, 그 얻는 것조차도 일등으로 이겨서 나조차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만이 일체가 모두 한마음으로 구성이 되고 한마음으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몸 속에 그 헤아릴 수 없는 악업 선업이 과보가 되어 가지고 인과성, 유전성, 영계성, 세균성이 모두 그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팔자 운명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다 모든 것을 되돌려 놓아서 녹여야만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내면의 세계부터 알아야 바깥세계를 알 수 있지 내면의 세계를 모르고야 어찌 바깥세계를 바로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속에 있는 중생들이 한마음으로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고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잘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로부터 인연 지어 온 모든 것들이 세포 하나하나에, 위장이나 척추, 콩팥, 그리고 심장과 위, 간장, 식도, 소장, 대장 등에 모두 집을 짓고 소임을 맡아 가지고 운행을 하는데 악은 악으로만 나가는 반면, 선한 일을 하는 소임자에게는 돈을 아무리 주고 악하게 하라고 해도 절대 안 합니다. 그러니 악이 많고 선이 적으면 여러분 마음 속이나 몸 속에서 악의적인 문제가 수없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하는 일을 안되게 한다든지 남을 증오하게 하고 남을 싫어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악행의 원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남을 꼭 죽여서만이 악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서건 상대를 나와 둘로 보면서 항상 남에게 원망을 하고 조그만 문제가 생겨도 남의 탓을 하면서 바로바로 내 탓으로 돌리지 않는 마음도 악이 될 수 있습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스스로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내가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상대가 어찌 있으며, 내가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세상이 벌어졌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때그때 내 탓으로 돌려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남의 탓으로만 돌린다면 이 마음공부 하는 데는 여간 지장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나온 자리에다 다시 맡겨 놓는다면 마음의 눈과 또 육안을 겸해서 우리가 생활을 원만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자재로 들이고 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보고 들일 때 점검을 해서 안으로 들이게 됩니다. 그런 마음으로 안으로 들여야만이 모두 통신이 되고 또 안으로 들이는 그 마음이 한마음으로 돌아간다면 전부 보살로 화한다 이 말입니다.
악업 선업이 둘이 아니라 하나로서, 모든 게 하나로 돌아가니 끝간 데 없는 진리이자 그것이 하나도 남김없이 천백억화신이 되고 천백억화신 속에서, 즉 말하자면 중생들이 응해달라는 대로 응해주시는 것입니다. 천만 가지 만만 가지로 모습을 바꿔가면서 한 찰나에 응해 주시니 그것이 바로 천백억화신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안에서부터 제도를 해야지 바깥에 끄달리면서 제도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불성설이죠.
항상 이 마음이 그렇게 충족되고 내가 그 이치를 완전히 알아야만 의학적이기도 하고, 천문학적이기도 하고, 지리학적이기도 하고, 과학적이기도 하며, 천체물리학적이기도 하고 철학적이 되는 겁니다. 일체가 다 한마음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마음 자체가 어떻게 해야만이 자기를 잘 이끌어 갈 수 있으며, 그 마음이 중심에서 양면을 이끌어갈 수 있는 다스리는 마음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안에서 벌어지는 경계가 팥죽 솥이라면 팥죽이 끓을 때 방울방울이 끓어 올라오는 대로 이것도 문수, 저것도 문수 하고 주걱으로 쳤다고 하듯이, 그게 법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몸 속의 어느 한 기능에서 만약에 파워를 일으키게 되면 여러분의 몸은 병이 듭니다. 그러니까 한 부분도 빼놓지 않고 모두 한마음으로 돌아가야만이 몸도 건강하고, 마음도 건강하고, 지혜로워서 부자 부럽지 않게 마음이 부자가 되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정말 대장부의 살림살이어서 조금도 가난하지가 않다 이겁니다. 그렇게 당당한 것이며, 물질적인 부자가 아니라 내가 필요한 것이면 어디서든지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 묘한 도리를 모른다면 늘 가난하기에 바쁠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뿐만 아니라 재난이 들어와도 그것을 막지 못하고 또는 병고가 들어와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렁이 같은 미물들을 볼 때 보기 싫고 징그럽다고 하겠지만 여러분 속에는 똥통도 들어있고, 구더기도 있고 진드기도 있으며, 거위도 있고, 촌챙이도 있고, 벼룩 같은 것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두서 없는 말이지만 잘 참작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왜 이렇게 우리들의 몸 속에 여러 모습들이 들어있는가 하는 겁니다. 그것이 곧바로 모두 자기입니다.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지구가 생긴 이래로 역사를 볼 때에 미생물의 시대가 있었고, 곤충의 시대가 있었고, 그 뒤에는 수많은 공룡시대도 있었죠. 우리 사람이 나기 이전에 미리미리들 그렇게 진화되어서 올라오기 위한 수련으로 수많은 모습으로 바꿔가면서 세대를 따라서 이렇게 인간까지 온 것이 바로 정신수행입니다. 자연적으로 지수화풍이 바탕이 되어서 그걸로 인해서 잡아먹고 잡아먹히고, 쫓고 쫓기면서 마음이 그렇게 진화돼 가지고 모습을 바꾸면서 이렇게 인간까지 올라왔지 않습니까?
누가 그것을 말해 주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이것을 파악할 수 있는 이 지금 현재의 나, 참나의 속에 다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끝없는 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인간이 되어 가지고 또다시 다른 모습으로 된대서야 말이 됩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행동하고 말하고, 남의 탓을 하면서 상대를 원망하고, 남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면서 온통 부서지게 하고 남을 해롭게만 하는 그런 마음을 갖는다면 미래에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입니다. 자기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은 지금 자기 현실을 살펴보면 여러분이 더 잘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여러분이 살아나가는 과정을 가만히 지켜본다면 아마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잘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몸 속에 그러한 모든 악업 선업으로 뭉쳐서 컴퓨터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대로 입력이 되었다가 하나하나 나오는 것이니 거기에 속지 마시고 누가 되는 일은 하지 말며, 들이는 것도 맡겨서 들이고 내는 것도 맡겨서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공부할 수 있는 재료가 모두 여러분에게 본래 주어져 있습니다. 항상 말했지만 광력이나 전력 자력 통신력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물질세계만을 추구하며 산다면 물질세계의 노예가 되고, 그것은 끝간 데 없는 길을 고통스럽게 걸어야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살아 있으면서 죽지 않는다면 참다운 열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살아서 이 도리를 알고 죽어야 열반이지, 살아서 이 도리를 모르고 육신이 죽은 것은 그냥 그대로, 그 고통 속에서 죽는다 산다도 없이 끝없는 길을 걸어야만 하는 그런 고통입니다. 백 가지 천 가지를 알고 있지만 한 가지도 행을 못하면 하나를 알고 하나를 행하는 것만 못하다고 했습니다.
남의 것을 훔치고 싶다는 생각이 난다고 해서 남이야 어찌 되건 상관없이 생각 일어나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도 있는데, 안의 의식들은 나쁘고 좋고를 모르고 자기가 생각 내는 대로 그냥 따라줍니다. 그럴 때 사람에 따라서 악한 마음이 더 강하느냐 선한 마음이 더 강하느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똑같은 살기 좋은 시대를 살면서 즐겁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괴롭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같은 시대에 사는데도 악행만을 일삼는 사람이 있고 선행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죠. 만약에 같은 물을 마셔도 독사가 먹는다면 그건 독이 될 것이고 약초가 먹는다면 약이 돼서 인간을 살리는 것입니다. 칼도 마찬가지입니다. 칼 나름입니다. 똑같은 칼이라 해도 의사가 칼을 들고 일을 하면 사람의 생명을 살리지만 만약에 강도가 칼을 든다면 그건 곧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알고 본다면 한마디도 할 게 없고, 한마디도 한 게 없는가 하면 한생각도 한 것이 없고, 행동 하나도 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잘 터득해야 합니다. 실생활 속에 도가 있는 것이지 실생활 빼놓고 도가 따로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처음 참나를 발견했을 때 안에서 나오는 대로 행을 한다면 그건 정신계에 끄달리는 것입니다. 또 처음에 이렇게 믿고 거기다 놓고 갈 때 물질을 보고 남의 소리를 듣고 이렇게 해서 내 중심을 세우지 못하고 산다면 그거는 바로 물질계에 끄달리는 겁니다.
반야심경에 보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라고 했습니다. 저 언덕을 넘어서야만이 우리들이 자유로워진다는 뜻이죠. 고해의 강을 건너서 만납시다, 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편 언덕 뒤에는 항상 밝음이 있고 감로수가 있으니 그리 건너가자는 말입니다. 끝없는 밝음이 있기 때문에 컴컴하다는 언어도 붙지 않는 자리라고 말할 수 있겠죠.
여러분이 물질세계에 끄달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첫째는, 만약에 거위, 지렁이들이 그냥 있다 한다면 여러분은 의식적으로 벌써 징그럽다고 생각하고 귀신들이 있다면 무섭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내 마음이 체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냥 모두 징그럽게만 보이고 무섭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사대가 흩어져서 원점으로 돌아간다면 몸은 없어지고 영혼만이 남는데 이 도리를 모르는 영혼이라면 거길 못 건너가는 거죠. 살아있을 때의 의식이 그대로 남는 겁니다.
둘째는, 기독교 카돌릭교에서는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 했고, 우리는 강을 건너고 저 언덕을 넘어서 같이 한자리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이런 물질세계의 의식이 꽉 차여 있기 때문에 이 도리를 모르면 자기가 죽어서도 몸이 있는 줄 알아요. 그래서 배가 오기를 기다리니 아무리 기다린다 할지라도 배가 옵니까? 의식적으로 강에 들어가면 물이 깊어서 빠져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배가 오지 않으니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한생각 끄덕하면 찰나에 건너 갈 것을 한생각을 돌리지 못해 그렇게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지금 과학적으로 본다면 블랙홀이라 말하지만 부처님께서는 불바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불바퀴가 세 번째 단계의 통로입니다. 그 통로를 넘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기를 넘어갈 때 타 죽을 까봐 못 들어가고 뜨겁다고 못 들어갑니다. 물질세계의 의식이 꽉 차 있기 때문에 죽어서도 몸이 있는 줄 알고 못 들어가는 겁니다. ‘나 아닌 나’는 없습니다. 뜨거워서 죽을 필요도 없고, 어디를 들어가도 들어간 사이가 없고, 나온다 하여도 나오는 사이가 없어서 그대로 뚫리고 그대로 여여하건만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못 들어간다는 얘깁니다.
그것은 첫번에 벌써 내 이 몸 속에 있는 그 의식들이 전부 모습을 그렇게 해 가지고 보이니 그 길을 못 간다는 얘기죠. 그게 딴 데서 와서 보이는 게 아닙니다. 몸뚱이가 사대로 흩어지니 내 몸 속의 그 의식들이 앞을 가리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것이고, ‘허! 너와 내가 둘이 아닌데….’ 하고 딱 한생각을 넘기면 그냥 보살로 화할 텐데 그 한생각을 못하기 때문에 넘지 못하는 겁니다. 재차 말하지만 빠져 죽을까봐 배를 기다리고 있는가 하면, 타 죽을까봐 불바퀴 속을 못 들어간단 말입니다.
우리가 이 마음을 빼놓고는 부처를 이룰 수가 없고 내 마음 빼놓고는 도저히 앞뒤 뚫린 용문을 열 수가 없습니다. 본래는 열려있는데 자기 소견으로 닫아 놓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리고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나는 나고 너는 너고, 미운 걸 보면 보기 싫어하고, 또 부부지간도 그렇고 자식지간도 그렇고 일일이 잘못하는 걸 보면 자꾸 상대방 탓을 합니다. 속이야 어떻든지 누가 좋은 말을 해주면 좋다고 하고, 진실로 너는 이렇고 이렇다고 지적을 해주면 그게 듣기 싫어서 왈칵 화를 내면서 너 두고 보자고 한다면 이러한 마음이 결국 자기를 깎아 먹게 되는 거죠. 이 세상은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없고 내가 있기에 일어나는 것이니 모두 내 탓으로 돌리는 반면에 바로 내가 공해서 없다는 그 뜻을 여러분이 잘 아실 겁니다.
본래 자성불은 누구에게나 있는데도 자기 불성은 믿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그 자리 능력으로 인해 나고 드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법당에 계신 부처님을 믿고 ‘부처님, 나 좀 잘되게 해주십시오.’ 한다면 그건 기복이지 공덕이 될 수 없습니다. 공덕이라는 것은 한마음으로 돌아가야 공덕이 됩니다. 일체가 내가 아님이 없기에 내가 하지 않는 일이 없고, 내 아님이 없기에 내 아픔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고, 내 몸 아닌 것이 없는데 어찌 그게 공덕이 안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여러분은 일체제불과 일체보살, 역대조사, 수많은 중생들,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고 전부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그 한마음마저 없다는 사실은 한마음이 고정되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부처님께서 한마음을 내실 때에 보살로서 화해서, 법신으로 화하시고, 그래서 남이 원하는 대로 응해주시는, 한마음이 돼주시는 그 마음 말입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백정 노릇을 했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 부처님께 귀의해서 내 마음 가운데 항상 넣고 끊어지지 않는 그 마음이면 그대로 한마음이죠. 그러니 여러분이 일을 할 적에나 똥을 눌 적에나 잠을 잘 때나 앉았을 때나 일어설 때나 그것이 바로 내 부처, 즉 한마음 주인공의 작용이라 생각하고 뭐든지 거기다 놓고 아주 잔잔하게 한생각 일으킨다면 그게 바로 법이 된다 이 말입니다.
이 묘한 도리의 무심도법을 어떻게 우리들이 공부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알기만 하면 또 뭘 합니까. 아는 것은 여러분이 잘 안다고 해도 행하는 게 문제입니다. 백 가지 천 가지를 알고 있지만 한 가지도 행을 못하면 하나를 알고 하나를 행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이 세상에 모두 살고 있는 자체가 팔만대장경의 증거입니다. 부처님이 법을 설하시던 그때 시절에는 그때 시절대로의 용어가 달랐고, 지금 시대에는 현실에 맞는 용어로 바꿔 써야 해요. 뜻도 같고 사는 도리도 같습니다만 시대가 자꾸 변하여 돌아가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옛날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용어를 가지고 인용한다면 요즘 사람들은 그걸 알아듣지 못합니다. 아무리 귀한 보석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이해시키지 못하면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러니 이 마음 자체가 부처님의 뜻을 저버려서가 아니라 진짜로 부처님의 뜻, 골수를 알아서 한마음으로 내 마음 속에 지닌다면 구태여 염주를 목에 걸고 다니지 않아도 되겠죠. 백팔염주를 걸고 다니는데 백팔염주가 바로 표현입니다. 백팔 번뇌 망상이라고 했습니다만 그 번뇌 망상이 아니라면 어찌 공부하겠습니까?
백팔이라는 건 뭐냐하면 백은 무입니다. 무! 팔은 사무 사유가 한데 합쳐져서 무의 세계 유의 세계가 같이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같이 돌아가면서 생각 생각에 꼬리가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그것을 망상이라고 합니다. 번뇌망상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일어나는 마음이 부처를 이룰 수 있고 법신을 이룰 수 있는 수련과정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망상이 아니라 나를 수련시키는 채찍이라고 해야 합니다.
어떠한 것이 나온다 해도 허허 웃고 거기서 나온 거니까 거기서 해결해라 하고 믿고 놓으면 끄달릴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둘이 아닌 도리를 알고 나를 둥글게 다스리기 위해서 정으로 치는 것이며, 상대를 통해서 어떤 경계가 닥쳐와도 나를 다스리기 위해서 내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돌아가서 상대를 통해서 나를 치니 참 감사하구나 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맡긴다면 남 탓할 것도 없고, 남을 증오할 것도 없고, 배신할 것도 없고, 미워할 것도 없으니 얼굴에 웃음을 머금으면서 환희심이 가득할 것입니다.
이것 버리고 저것 버리면 뭐 남는 게 있어서 정복하겠습니까? 더럽다고 버리고 밉다고 버리고 또 괴로운 건 버리고 즐거운 것만 들인다면 하나도 가질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도 남김없이 다 귀결해서 넣고 보니까, 나중에 하나도 버릴 게 없어서 다 나 아님이 없더라 할 때까지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합니다.
어느 누구라도 자유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난이나 병고, 또는 영계성, 유전성, 세균성 등 모든 경계가 언짢고 고통스럽다고만 알지 말고 바로 공부할 수 있는 재료로 삼아서 모든 걸 나온 자리에 다시 돌려놓으면서 하나하나 실험을 하면서 체험을 해 보세요. 직접 체험을 해 보고 그 맛을 알면 홀연히 참 자기가 밝아집니다. 홀연히 밝아지면 ‘아하! 이게 모두가 독불장군이 없구나. 회사에도 직원이 있으니 사장이 있고 사장이 있으니 직원이 있구나.’ 하고 웃어지죠. 바로 이것이 보는 대로 느껴지고 보는 대로 알아지고, 보는 대로 생각나면은 그냥 제도가 되는 것이고, 육의 조상이 따로 있고 부처님의 조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한 뿌리임을 알게 됩니다.
알고 보면 부처님께서 해골더미에 큰절을 하신 이유도 하나로 돌아가는 이치를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던 것입니다. 윤회해서 돌아가니 모두가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자식이 아님이 없고, 내 형제 아님이 없는 도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공부해서 알고 보면, 수억겁에서부터 이렇게 걸어오면서 돌아가면서, 구름이 모였다가 흩어지면 다른 구름과 또 모였다 흩어지고 또 모이고 흩어지고 이렇게 반복되는 세월을 걸어왔다는 그 자체를 가르쳐주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그렇건만도 부처님께서는 한번도 행하신 예가 없고, 한마디도 말씀하신 예가 없고, 한번도 생각해 본 예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부처님께서는 말없는 말씀으로 수없는 나날을 가르치셨습니다. 꽃을 한 송이 들어서 가르치셨고, 또는 다자탑에서 자리의 반을 내주시어 가르치셨고, 또 관 밖에 두 발을 내놓으셔서 평발을 가르치셨다 이 말입니다.
그 평발의 도리가 어떠한 것입니까? 발이 납작해서요? 발이 뭉툭하게 평지 같아서 평발이라고 한 것일까요? 여러분! 이 세상에 지구 벌레로서 아니, 우주 삼천대천세계에 모두가 딛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진드기 발 하나도 이 땅에 딛지 않는 게 없어요. 풀포기 하나, 지렁이 한 마리도 이 땅을 딛지 않음이 없으니 어느 것 하나도 빼놓지 않은 게 평발이다 이 소리입니다. 뜻으로 알아야지 말귀로만 알아듣고서 그대로 그걸 반복해서 외운다면 소용없는 일입니다.
이 공부는 지식이 많고, 학식이 좋고, 위대하고 부자이어야 하는 공부가 아닙니다. 누구나가 본래 청정한 불성을 가지고 있기에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는 높고 낮고 가난하고 부자고도 없이 그대로 평등한 것입니다. 늙고 젊고도 없고, 여자 남자도 없는 자리입니다. 여자 빼놓고 남자만 제일이라고 하고, 또 비구스님만 제일이라고 해서 비구니를 우습게 안다면 자기가 나온 곳을 모르는 것이죠. 나온 곳을 한 번 더 들어갔다 나와봐야 알겠지요. 그러기 때문에 산하대지는 어머니의 젖줄과 같고 저 태양계는 아버지와 같아서 하나도 빼놓지 않고 원기를 주고 공기를 주어서 생명을 살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네 가지를 우리들은 감사함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네 가지 중에 한 가지만 없어도 안 됩니다. 물론 사람이 없어도 안 될 것이며, 불이 없어도 안 되고, 물이 없어도 안 되고, 흙이 없어도 안 되고, 바람이 없어도 안 되고, 물과 불 바람과 흙, 사람, 우주개공을 바로 한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알아야 할 겁니다. 그래서 어느 벌레 하나라도 나올 자격이 있으니까 나온 것이지 자격이 없이 나온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진리가 끝간 데 없이 지탱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화되면서 자꾸자꾸, 별성도 자꾸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상대성 원리가 아닌 것이 없는 거를 배웁니다. 부처님께서는 상대성 원리를 하나로 해서 그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자유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재차 말하지만 여러분 속에 있는 의식은 나쁘고 좋고를 모르기 때문에 두서 없이 나옵니다. 망하든지, 흥하든지, 좋게 보이든지, 나쁘게 보이든지, 밉게 보이든지 두서 없이 나오는데 나쁘고 좋고를 알고 있는 현재의식이 다스려야 합니다. 다스려서 중생들을 제도해야 하기 때문에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 했습니다. 위로는 한마음을 갖고 아래로는 중생들을 제도해야 하는 거죠. 내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면 천백억화신이 화하지 못해서 털구멍을 통해 나고 들면서 중생을 제도 못하니 그건 보살이 아니니라 한 겁니다. 아무리 보살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고 부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공부를 많이 한 큰스님이라 할지라도 그건 이름일 뿐입니다.
내가 여러분 대신 밥을 먹어 주어서 여러분 배도 불렀으면 좋겠는데 내가 다 먹으면 여러분은 굶어죽어요. 어떤 신도들은 개가 아프고 소가 아프고 젖소가 아프다는 등 별 소리를 다 합니다. 돼지를 기르는데 그 돼지들이 다 죽는다면 살림을 망쳐버리게 되어서 아이들을 기를 수 없다고 했을 때, 부처님은 그 소리를 들으시고 보살로 화해서 돼지 속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돼지 속으로 들어가서 돼지가 되었을 때 부처라고 하겠습니까? 사람 속에 들어갔을 때 부처라고 하겠습니까? 독사를 건지기 위해 독사 속에 들어갔을 때 부처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개구리 하나, 진드기 하나 안 돼보시는 게 없는 그 마음 자체의 무한량, 광대무변한 이 법을 어찌 말로 다 하리까?”라고 한 말씀 하신 겁니다.
그러니 내가 잘났다 네가 잘났다를 떠나서 여러분은 기복으로 믿지 마시고 바깥으로 찾지 마세요. 아무리 위대하다 할지라도 바깥으로 찾는다면 부처님께서 ‘너는 고깃덩어리만 아는구나. 내 가죽과 내 뼈다귀만 알지, 내 골수를 모르는구나.’ 하시고는 눈을 감으실 겁니다, 아마. 모두 알아야 ‘저 형상은 내 형상이요, 저 몸은 내 몸이요’ 이렇게 되는 거고 내 마음 내 생명과 둘이 아닌 게 되죠. 우리 법당에도 부처님을 모셨지만 다 알고 난 뒤에 부처님이 진짜 부처님으로 보이고, 부처님으로 보이는 그 부처가 나하고 둘이 아니라는 그것까지 아셔야 합니다. 그렇게 공부가 익을 때까지는 누구의 탓도 하지 마시고 일체를 모두 자기 탓으로 돌리고 하심(下心)하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남이 다 해놓은 것을 자기가 먹기도 하지만 먹는 반면에 바로 또 자기가 해서 남을 대접도 할 수 있는 그런 마음 자세를 가져야만 됩니다. 여러분은 내 스승이자 바로 부처이며 법신이며 화신입니다.
산중에서 컴컴할 때나 또는 밝았을 때나,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그 끝없는 길을 한번 걸어보자고 걸었을 때, 돌부리를 차서 발톱이 빠졌어도 나는 감사하게 생각한 것이 ‘돌부리를 차게 한 것도 바로 내 스승이로구나.’ 한 것을 알아챘기 때문입니다. 한자리인 것을 모르고 어딜 그렇게 다니느냐는 것이죠.
돌이 발톱을 빼놓고 한다는 소리가요, ‘네 발이 어디가 좋을까 하고 좋은 자리를 찾아다니는 그런 발이라면 한 발은 못돼. 그러니 발톱이 빠져도 싸지! 아니 전체가 한 도량이건만 도량을 어디 가서 또 찾아?’ 하고 그 돌이 나한테 반박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허허, 이 돌이 바로 돌부처로구나! 요만한 돌 하나도 부처 아닌 게 없으니 그 돌부처 속에서 희한한 밝음이 나오고 돌부처 속에서 감로수가 수없이 끊어지지 않고 나오니, 그것들을 먹고 악하면 악한대로 독이 되고, 선하면 선한 대로 사람을 살리는 약물이 되니 그거 참 희한하구나.’ 그랬다구요. 그러니 ‘어디 따로 정해 놓은 데도 없고 나무 한 그루 서 있는 것도 그냥이 아니구나.’ 하고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만 말하고 여러분이 질문하세요. 아니면 제가 질문할까요?
우리가 불제자라면
자기의 영원한 생명의 근본 알아야죠
▲질문자1: 좀 깨닫게 해 주십시오.
▲스님: 깨닫게 해달라구요? 좋지요. 깨닫게 해 주는 것은 좋은데 모두가 스승 아닌 게 없으니 여러분, 스승 찾아서 돌아다닐 생각 하지 마세요.
그리고 내가 만약에 여러분 대신 밥을 먹으면 여러분 배도 불렀으면 좋겠는데 내가 아무리 먹은들 여러분은 배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밥을 해다가 상을 차려서 여러분한테 드리기는 하나 먹는 건 여러분이 먹어야 배가 부를 것 아닙니까. 내가 어떻게 여러분의 도를 깨우쳐줍니까?
여러분에게 내가 질문 하나 할까요? “쥐가 고양이를 쫓습니까? 고양이가 쥐를 쫓는 겁니까?” 한마디 대답해 보시렵니까? 걸리지 마시고 대답을 좀 해 보세요. 모두 도인들이 되고 부처들이 다 되었군요. 사실을 알고 보면 한마디도 할 게 없습니다.
▲질문자2: 전 이곳에 세 번 왔으나 오늘 처음으로 뵙는군요.
▲스님: 실컷 보세요. 실컷 봐도 거죽만 보시지 마세요. 이 고깃덩이는 아무리 봐도 흩어지면 송장이니 보시려면 아주 진짜로 잘 보세요. 그래 기껏 그 대답이에요? 그러니 “쥐가 고양이를 쫓느냐 고양이가 쥐를 쫓느냐?” 여러분이 잘 생각해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누가 가르쳐줘서 되는 것도 아니고 누가 뺏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행복도 누가 갖다 주는 것도 아니고 뺏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자식을 기르고 부모님을 모시고 젊은 분들이 살아나가는데 부모가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몸만 흩어졌다 뿐이지 다시 태어나고 그러는데, 어떻게 잘못해서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게끔 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그저 한생각을 잘하면 위로는 묵은 빚도 갚을 수 있고 아래로는 햇빛을 줄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여러분이 종지라면 나도 종지입니다. 사람이 손을 폈다가 오그릴 줄 알고 오그렸다가 펼 줄을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데도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데 그게 한쪽만 끊어져도 송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사람 콧구멍은 내려뚫리고, 소 콧구멍은 치켜뚫려서는 바람이나 비, 흙, 먼지가 전부 날려서 꽉 막혀버렸대요. 사람은 비바람으로 인해서 먼지가 끼면 그냥 막힐테니까 아래로 뚫어놨거든요. 왜 그렇게 소 콧구멍은 치켜뚫렸고, 사람의 콧구멍은 내려뚫렸는지 그 이치를 여러분은 잘 알아보세요. 온통 거기에 매달려서 붙잡고 걸리지는 마시고요.
마음은 체가 없어서 걸릴 것도 없고 걸리지 않을 것도 없습니다. 앞뒤 없는 피리소리, 이 온 우주 삼천대천세계에 두루하면서 요리를 한답니다.
▲질문자3: 포항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스님: 외국이나 지방이나 안양이나 멀고 가깝고가 없습니다. 이 공부를 하려는 마음에 달려있을 뿐 멀고 가까운 곳이 없는 공부입니다.
그럼 여러분! 이렇게 같이 도반으로서 한자리를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