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박한 땅에 불법 꽃 피운
구산선문 聖住寺파 본찰
옛 절터라고 하여 모두 쓸쓸하고 허전한 것만은 아니다. 산경문전(山景紋塼). 보령 성주사지처럼 절도 없고, 인적도 없으나 외지지 않고 마냥 편안한 곳도 있다. 어디선가 금방이라도 닭 울음소리가 들릴 듯 하고, 송림 사이로는 학의 날개 짓이 떠오를 듯 하다. 전돌에 희미하게나마 그 풍치를 남겨놓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한이 되었을 백제 사람들의 심정이 헤아려지는 구도이다. 산언덕의 듬성듬성한 소나무 숲. 계곡을 따라 흘러가는 저녁노을. 빈 절터를 빼곡히 메운 토끼풀은 세월이 무정하여 ‘산경무늬전돌’에 다 못 새겨 넣은 여백의 풍경이다.
반도 땅 곳곳이 척박하기는 하여도 끈질기게 불법을 싹틔울 성지는 성지인가 보다. 후미진 산자락, 굽이치는 강어귀. 그 어디를 뒤져도 부처 꽃 뿌리가 있거나 그 향기가 남아있다. 차령산맥 끝자락, 한 때는 무연탄광으로 석탄재 가루가 날리던 보령 땅 성주산 발치에도 옛 가람자리가 깨진 연적처럼 놓여있는 것을 보면 이 곳 또한 옹골차게 불법을 꽃 피울 토양은 토양인가 보다.
보령 땅은 옥석이 뒤섞인 곳이다. 겉으로는 태연스레 아미산, 성주산 ‘산경무늬전돌’ 같은 풍치를 만들지만, 그 내면에는 크고 작은 옥석이 뒤섞여 애도 끓이고 속도 태운다. 보령의 웅천과 남포에서는 오랫동안 이 땅 곳곳에 오석(烏石)과 벼루를 댔다. 그래서 성주사의 창건 명이 오합사가 되었다. 보령의 토질이 여물고 차진 것은 오랜 세월 이 곳에 배인 민생들의 피와 땀이 만만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마한의 영토에서 통일신라의 선풍이 깃들기까지, 백제의 오합사에서 임진왜란의 전쟁터까지, 무수한 말밥굽이 달렸을 것이고, 비바람이 성주산 솔가지를 흔들었을 것이다.
부처 꽃은 잡초더미 속에서도 잘 자란다. 무너진 절터의 돌담 밑이나 외양간 두엄더미에서도 어김없이 자리를 잡고 꽃을 피운다. 부처 꽃은 율무가 되기도 한다. 순하고 어질어 배곯고 등 시린 이 땅의 백성들에게 곡식은 아닐지언정 허기를 때우는 양식이 되고자 한다. 깨어진 틈새로 부처 꽃향기가 스며드는 성주사 터에서 모처럼 폐허가 주는 충만함을 만끽하는 것은 홀로 나선 답사 길이 해방감을 안겨주기 때문일 것이다.
부여의 대표적 폐사지인 정림사 터를 돌아 나오며 가슴 한 켠에 먼지처럼 쌓였던 아쉬움이 성주사 터에 이르자 어느새 풀 향기로 채워진다. 폐사지도 역시 절집의 흔적이므로 소음으로 뒤범벅된 도심보다는 물소리 한적한 산그늘이 제격이다. 성주탄광이 폐광된 지 몇 년이 지난 탓인지 성주천 물길도 이젠 땟물을 많이 벗었다. 분진을 털어버린 솔가지들도 싱그러움으로 몸단장을 하고 있었다. 세월이란 참으로 무상한 것이다. 한때는 바랑을 걸머진 수행자들이 줄을 잇던 골짜기가 또 다른 시절 인연을 만나서는 석탄을 실은 차들로 붐볐고, 이제는 다시 돌아온 토종 물고기 마냥 옛 것을 찾는 길손들의 호흡이 가쁜 것이다. 성주사 터는 무려 천오백년의 세월을 이렇게 윤회하며 성주산 대중을 맞이했다. 목탁을 든 대중이든 곡괭이를 든 대중이든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세월 잡지 않았다.
백제 법왕이 이곳에 오합사를 세우고 전쟁에서 숨진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려 한 것은 599년의 일이었다. 그 때야 말로 성주산 송화가루는 서해까지 흘러갔을 것이고, 백제의 왕실은 관솔불을 대낮처럼 밝힌 채 지성으로 유주무주 고혼들을 달랬을 것이다. 백제의 오합사가 지금의 성주사로 사명이 고쳐진 것은 통일신라의 대표적 고승인 무염국사(無染國師, 801~888)에 의해서이다. 무염국사는 무열왕의 8세손으로 그 시호는 낭혜(郞慧)이다. 그는 25년 간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웅천(보령의 옛 지명)의 호족 김양의 권고로 이곳에 와 크게 선풍을 진작했다. 무염은 당시 사회의 모순을 직시한 몇 안 되는 성인 중의 성인이요, 선지식이었다. 그리하여 이곳은 성인이 머무는곳, 즉 성주사(聖住寺)로 불렀던 것이다. 그가 성주사에 자리를 잡고 ‘무설토론(無說吐論)’을 주창하자 그를 따르는 제자는 수천 여명에 달했고, 전각은 960여 간에 이르러 당시의 선문 가운데 가장 번성했으며, 곧 구산선문의 최대파인 성주산문을 이뤘다.
진성여왕 2년 88세로 무염이 입적하자 왕은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부도비를 세웠다. 이 비가 절 터 서북쪽 전각 안에 남아있는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大郎慧和尙白月寶光塔碑, 국보 제8호)이다. 물론 이 부도비의 재질은 이곳 성주산이 주산지인 남포오석이다. 문장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 지었으며, 글씨는 그의 사촌 동생 최인곤이 썼다. 이 비는 신라 부도비 중 규모, 조각, 문장 등 모든 것이 빼어나 신라 하대 부도비 가운데 최고의 것으로 손꼽히는 것이다.
성주사지는 1968년과 1974년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을 실시하여 금당지, 삼천불전지, 회랑지, 중문지 등의 건물 윤곽이 드러났다. 성주산을 배산으로 동서를 장축으로 동향사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북을 기본 축으로 하여 남쪽에 중문, 탑, 금당이 일직선상으로 배치된 1탑 1금당식의 가람배치를 기본으로 삼은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성주사지에는 중앙의 오층석탑(보물 제19호) 외에도 금당지 뒷편으로 똑같은 모양의 3기의 삼층탑이 나란히 서 있는데, 이는 다른 절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성이다. 이처럼 세 쌍둥이 탑이 함께 서 있는 것은 달리 알려진 바가 없으나, 성주사지에 낭혜화상의 비문만 있지 정작 부도가 발견되지 않아 이 삼층석탑이 탑의 형태로 지어진 부도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부도밭이 법당 뒤편에 나란히 줄선 예가 없고, 부도비와도 멀리 떨어져 있어 설득력이 약해 보인다. 1974년에 밝혀진 ‘숭암산 성주사 사적’에는 이 세탑이 정광(定光), 약사(藥師), 가섭(迦葉)의 세 여래 사리탑이라고 적혀 있어 그 신비감을 더해준다. 서탑과 중앙의 탑은 각각 보물 제47호와 제20호이고, 동탑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지정되어 있다.
발굴 이후 잘 정돈된 9천여 평의 대지에는 석물들과 몇 그루 배롱나무들이 각자 제 위치들을 지키고 있다. 나무의 습성은 무엇인가. 제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돌의 습성은 무엇인가. 잘 닳지 않고 깨지지 않는 것이다. 나무와 돌의 습성에 인연을 맺어 탑이 되고 비가 된 이 땅의 원력들 또한 무정물들과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윤회의 강을 건너고 있는 것이다.
<시인·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
다음은 익산 미륵사지 편
성주사지 가는길
서울에서 서해 고속도로를 타고 대천에서 내려 보령시로 향하면 된다. 성주터널과 성주초등학교를 지나 성주천을 따라 3백여m 올라가면 성주사 터 드넓은 공터가 나온다. 부여에서는 40번 도로를 따라 보령 방향으로 25㎞ 정도 달리면 석탄박물관이 나오고, 성주삼거리를 지나면 성주사지 팻말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