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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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불을 항상 밝히면서 생활 속에서 행주좌와 참선해야
호국영령 추모하는 자세

매년 6월이면 많은 사찰에서 호국영령 위령제를 지내드리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재를 지내드리는 것이 돌아가신 그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그렇게 나라를 지키다가 산화하신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자리에 참석한 저희들의 마음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여건이 닿는 대로 그 분들을 위해서 재를 지내드리는 것은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잃고 자식이 부모를 잃었을 때의 그 심정, 저도 6·25때 똑똑히 보았습니다. 장작개비 내뜨린 것과 같이 무더기 진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피가 한없이 흘러내리는 걸 봤습니다. 강을 못 건너오고 모래사장에서 허덕이다가 총을 맞아서 픽픽 쓰러지고, 수없이 쓰러진 그 시체들을 보기도 하고, 총알을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뛰는 사람도 많이 봤습니다.
우리는 마음의 근본이 몸을 형성시켜서 이끌어 간다는 것을 꼭 알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정신차려서 앞으로 생활을 해나가지 않는다면 어려운 상황이 많이 닥치리라고 봅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령들을 위해서 해야 할 두세 가지 문제, 여러분이 알아두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는, 나와 나를, 참나를 탄생시켜서 상봉하는 겁니다. 현재 내가 과거에 살던 나를 발견해서 상봉을 한다면 자유자재권을 얻어서 자기가 자유로써 모든 걸, 12대 종손을 건진다고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응신으로서 나투면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일체 만물만생들을 다, 어느 것 하나도 나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또는 내 부모 아님이 없고 내 형제 아님이 없고, 내 자식 아님이 없는 그런 모든 진리에 관한 건을 섭류해서 자유권을 갖는 겁니다.
그런데 둘째는, 살다가 죽는다면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현실을 살게 되고, 현실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미래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차원에 따라서 과거도 현실이고 미래도 현실, 영원한 오늘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을 사시면서 말입니다. 여러분이 부모라는 마음이 있고 자식이라는 마음이 있어서 그것이 바로 전기가 가설돼서 들어오듯이, 부모라는 마음이 가설돼 있고 자식이라는 마음이 가설이 돼 있기 때문에, 부모를 위해서라든가 자식을 위해서라든가 더불어 같이 내 육신 안에 생명들이 잔뜩 들어서 공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내 마음을 밝히고 모든 것을 남의 탓으로 두지 말고 남의 원망을 하지 말고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면서 나를 밝혀야 합니다. 그래서 하다못해 1년에 한 번씩이라도 촛불재를 하면서, 또는 우리가 마음으로 항상 불을 밝히면서 생활 속에서 재료로 삼아 항상 행주좌와 참선을 할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을 어떻게 밝혀야만 되는가. 자기가 나온 자리에 자기가 들어가지 않는다면 도저히 정신계를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 육신이 태어났으면 정신이 다시 태어나야 진짜 사람인 것입니다. 지금 현재 상황 속에서는 별의별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을 밝히면 자식들도 나가서 어떠한 문제도 저지르지 않습니다. 내 마음의 불을 밝히고 마음공부를 하신다면, 생활을 재료로 삼아서 항상 하실 수 있다면, 바로 아래 자손들은 마음이 화해서 바꿔지면서 몸 안에 들은 모든 의식들이 다 착해지고 밝아지고 보살로 화합니다. 말로 안 하고 욕을 안 하고 때리지 않아도 스스로서 밝아짐으로써 일이 되고, 또 부모는 스스로서 밝아져서 천도가 되는 겁니다. 자기와 더불어 말입니다.
그렇게 되는 그 마음이 얼마나 크고 광대합니까. 우리가 마음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것도 연구 재료죠. 우리가 꼭 연구를 한다 하고 연구를 해서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하나하나 마음을 정돈하고 계발하고 발전시켜서 우리 생활과 더불어, 나라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렇고 우주적으로도 내 한생각에 모두 자유로이 할 수 있다면, 실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세하게 맡겨야 하는지…

스님께서는 모든 것을 주인공에 맡기라고 하셨는데 이 세상 만물만생을 주인공에 한번 맡겼으면 그만이지 세세하게 다시 또 맡길 필요는 없는 것 아닌지요? 그리고 스님이나 다른 분들이 벌써 일체 만물만생을 주인공에게 맡겼다면 제가 다시 맡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단 하루를 사는데도 세 번 공양을 하듯이 한 번 먹었다고 해서 그걸로 그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 마음이라는 게 늘 고정되게 한 가지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순간순간 올라오고 변하는 생각을 나온 그 자리에 다시 좋게 돌려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지구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올해로 봐서는 지구에 바람과 뜨거운 기운이 사람이 먹으면 체하듯이 모두 정상적으로 물이 고르르 내려가지 못하는 현상이 생기니 될 수 있으면 항상 관하라고 했습니다. 보이는 손이 일을 처리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데 손이 그 모두를 합니다. 그리고 나 혼자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보다, 여러분 생활이 교재라고 했죠. 그런 것도 하면서 만약에 80~90% 없어진다면 그 얼마나 여러분의 기분이 좋겠습니까? 여러분의 기분이 좋을 뿐 아니라 우리가 서로 한마음이 된다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여러분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근본적인 문제가 어떤 거냐. 우리가 바퀴가 굴러갈 때, 심봉 때문에 바퀴가 굴러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누가 했느냐. 심봉이 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 심봉은 보이지가 않으니까 한 사이가 없이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어떻게 믿지 않고 들어가겠습니까. 자기 본래면목 그 실상을 진짜로 믿고 들어가야 합니다. 벌써 내가 살아있다는 것만 봐도 입증이 되지 않습니까. 내가 살아있다는 것만 봐도 벌써 입증이 되고, 내가 움죽거리고 말하고 생각하고 이러는 것만 봐도 벌써 입증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 자신을 믿어야지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고 딴 데 형상에나 허공에나 또는, 즉 말하자면 말에나 이런 데에 속지말고 항상 자기 자신을 믿고 일체를 근본자리에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일체 행을 누가 하는 겁니까. 자기 주인이 모든 걸 하는 겁니다. 그 주인은 빛깔도 없고 쥘 것도 없는 거기 때문에, 무한량의 에너지가 같이 이 삼천대천 우주 전체가 돌아가는 그 무한량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개별적인 여러분 하나가 아니라 전체적인 하나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이런 게 있습니다. ‘아이구!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뭘 해?’ 이러지만 그게 아닙니다. 또 ‘생각을 하지 말라는데…. 그걸 끊어버리라는데….’ 아, 그걸 끊어버리고, 몸뚱이 끊어버리고 말 끊어버리고 생각 끊어버리면 뭐 남는 게 있다고 부처를 이루겠습니까. 몸뚱이가 있죠? 생각을 하는 게 있죠? 말이 있죠? 그러니까 부처를 이루는 거예요. 그게 도구예요. 부처를 이룰 수 있는 도구를 다 버리고선 뭘로 합니까. 그 도구가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바로 심봉이 있다는 걸 아셔야 됩니다. 벌써 차가 이렇게 있으면, 지금 시대로 볼 때는 차라고 비유합시다. 차가 있으면 벌써 차 안에 엔진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차가 있는데 엔진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걸?
이걸 한번 자세히 생각해 보세요. 갈래갈래, 해가 뜰 때에 바늘같이 이렇게 햇발이 비치지 않습니까? 그 햇발이 비치는 것과 같이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천차만별로 많은 거죠. 해는 하난데 그 햇발은 수만 개가 될는지 모르죠. 헤아릴 수도 없는 거죠. 그러나 그 해 하나 속에서 다 그 빛은 나오는 거죠.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근본적인 실상의 불성은 다 하나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각자가 힘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각자가 햇빛이 비칠 때에 이렇게 비치는 것 모양으로 한 줄기 한 줄기가 따로 떨어져 있는 한 줄기가 아니라 그 해 전체에, 하나의 줄기에 붙어있다는 그 점을 아셔야 됩니다. 그러니깐 그 붙어있는 그 자체가 바로 해 자체를, 전체를 내가 가지고 거머쥔다면, 거머쥐고 그것이 바로 크다는 생각도 없고 작다는 생각도 없이 근본 나 자체가 바로 주인공 실상이라는 걸 알게 되면 전체를 한생각으로 움죽거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현 생활 속에서 하나하나 부딪치는 대로 가는 거 잡지도 말고 오는 거 마다하지도 말고 앞에 닥치는 것대로 그것이 바로 법문이요, 법의 문이라 이겁니다. 그리고 화두요, 그것이 근본이요, 그것이 자아부처라 이겁니다. 불이자 법이고 법이자 용이거든요. 그대로 한데 붙어 돌아가는데 어떤 걸 따로따로 이렇게 찾습니까. 우리가 지금 하나하나 움죽거리고 말하고 이러는 것이 그대로 용이자 그대로 법이고, 법이자 그대로 우리 진리 아닙니까? 여북하면 불성이 둘도 아니기 때문에, 바로 보이지도 않기 때문에 진리라고 말을 한마디로 해버렸을 뿐입니다. 진리예요, 그게!
하여튼 이 정신계라고 그러는 건 이 물질계의 몸을 이끌어가는 바로 주장자입니다. 그러니까 이 주장자가 자기 몸을 끌어가고 주장자만이 속의 의식들을, 생명의 의식들을 다 이끌면서 컴퓨터에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스리고 이렇게 가는 원동력인 주장자에다가, 즉 말하자면 주인공 뿌리죠, 거기다가 맡겨 놓으면은 그 다스리는 게 바로 주인공이니까요. 하여튼 이렇게 말로 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한테 실천을 해보지도 않고 하라는 것은 참 어렵지만 실천을 해본 사람들도 많이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니 우리가 한마음을 낸다면 일체를 살릴 수 있는 겁니다.
마음은 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 언덕을 넘고 또 언덕을 넘고 또 언덕을 넘는다 하는 것은 무색할 정도죠. 마음은 체가 없기 때문에 어떠한 거든지, 큰 거든지 작은 거든지 실천을 할 수가 있는 그런 능력이 여러분한테 이미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고가 없다 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대치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만이 고가 없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모든 걸 조끔조끔, 이건 굴곡이 돼서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고 보이고 이런 굴곡이 돼있기 때문에 여러분한테 말을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마는 이런 것은 그저 여러분이 진짜 체험을 해서 알고 그 주장자를 잡고 나간다면 성불을 할 거는 따 놓은 당상입니다. 그러니까 꼭 그렇게 하세요. 될 수 있으면 될 수 있는 대로 여러분이 이렇게 해놓고선 살아서 그대로 움죽거리듯 해야 되겠죠.
올해와 내년은 그렇게 차고 뜨거운 일들과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살기가 참 어렵고 머리 돌리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마음속으로 항상 공식으로서 관을 하고 가십시오. 재차 당부하지만 항상 어떠한 일이 있어도 모든 것을 감지해서 어떤 것이든지 치워버리시고 다니십시오.

소공(小空)과 대공(大空)

스님 법어집인 『한마음요전』에 보면 소공(小空)과 대공(大空)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그 뜻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옛날에 이런 점이 있지요.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시고 나서 하도 이 말 저 말이 많으니까 “이 세상에 둥근 공이 있는데 공을 누가 움죽거리게 하느냐? 또 그 공 가운데엔 티끌만한 공이 있는데 그 공을 누가 쉬지 않고 튀게 하느냐?” 이렇게 물어보셨더랍니다. 그랬는데 한 사람도 대답을 못하더랍니다. 그러니깐 그것을 알면 모두 다 알 수 있으니 여러 말 하지 말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은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고 하셨더랍니다.
지금 이 말을 부처님께서 하셨다고 하기보다도 우리를 지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진리가. 진리가 우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해 주시고 우린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이 떠다니는데 우린 그 공 속의 공과 같습니다, 티끌 공. 그 공이 쉬지 않고 돌아갑니다. 그 쉬지 않고 돌아가는 그 공이 자기 공, 티끌만한 공 속에 자기가 빠져야 큰 공 속에서도 빠지죠. 그러니까 어렵다고 생각 마시고 아주 간편하고 쉽게 생각하세요.
그래서 우리가 ‘안으로 들여서 모든 걸 몰락 놔 버려라’ 하는 것은 부정으로 들어가는 길이죠. 부정으로 들어가면서 모든 것을 긍정으로 나오게 하려면 들이고 내는 것을 지켜봐야 이것을 확실히 알게끔 되는 겁니다. 자기가 탄생을 다시 하는 겁니다. 우리 지금 이렇게 사는 거는 탄생한 게 아닙니다. 육신을 형성시킨 것뿐입니다.
공에서 형성됐고 그 형성된 자체가 바로 공으로 돌아간다는 거를 모름으로써 이론이 많고 방황하게 되고, 이것은 자기 육신을 하나도 이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즉 말하자면 자기 중생입니다. 자기 중생 하나 이롭게 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남의 중생을 이롭게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첫째 자기한테 자기가 인가를 받아야, 자기를 몰락 죽이고 인가를 받아야 상대의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인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내가 다시 죽어야 그것은 양면에서 하나가 돼 가지고 다시 또 인가를 받는 것이죠. 그래서 소공의 인가를 받아야 대공의 인가를 받을 수 있고 대공의 인가를 받아야 바로 내가 내가 아니면서 전부 내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너지 통은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다 이겁니다. 누구나가 다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깥으로 찾으면서 관세음보살이니 문수보살이니 지장보살이니 모두 추구하고 구원을 받으려고 애쓰고 있다 이거예요. 그러면 안에서 그 에너지 통, 삼각형으로 된 에너지 통은 바로 내가 그렇게 확신하면서 거기에서 모든 것을 들이고 낼 줄 안다면 이게 스스로서 둥그러진단 말입니다, 전체가. 그게 바로 소공에서 대공으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삼보에 귀의한다 이러는 것도 그 삼각형의 에너지 통에 귀의하는 거예요. 우리가 지금 주인공의 그 실상 자체와 더불어 내 마음, 분별하는 마음과 육신과 삼합이 한데 합쳐진 삼각형이거든요, 이게. 그러니까 여러분이 다 그 삼각형의 에너지 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깥에서 구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으냐는 겁니다. 안에다가 코드를 꽂고 안에서 구원을 받게끔 하고, 감사한 일이 생겨도 거기다가 감사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자기 나오기 이전 참자기 에너지 통이거든요. 그러기에 받을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만약에 어제 먹은 이 컵의 물이 부처님이라면 이건 어제 먹은 컵의 물이에요. 그런데 어제 먹은 컵의 물이 있었기 때문에 먹고 그것이 바탕이 됐다 이거예요. 그래서 오늘의 물이 또 있게 됐다 이거예요. 그러면 이거는 뒷생각이 끊어져야 될 거 아니에요? 그것이 왜 그러냐. 이 컵의 물은 바로 앞의 물이 돼버렸으니까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이것이 없어진 게 아니라 앞으로 왔다 이겁니다. 이걸 끊는 게 아니라 이렇게 다시 바꿔져서 여기 또 왔다는 걸 모른다 이거예요. 앞의 물은 방치해 두고 뒤의 물만 생각을 하고 자꾸, 자기가 먹고 돌아선 뒤의 물만 생각을 하니까 앞의 물이 생기질 않는 겁니다. 그리고 받아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어디까지나 계발을 하는 데는 내가 현 시점에서 그 모두를 바탕으로 삼아서, 주춧돌로 삼고 길잡이로 삼고 그렇게 하는 반면에 그 길잡이가 모든 것을 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시점에 도달하고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계발을 또 해야 되지 않느냐 이겁니다. 어저께 계산한 거를 또 오늘에 가서 계산을 한다면 되느냐. 어제 계산한 건 어제 계산한 것대로 어제 계산한 거지 오늘 계산이 아니다 이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오늘 계산을 하는 거는 오늘의 나로부터 계산을 해야 되는 거죠. 그럼으로써 과거의 계산과 미래의 계산이 여기 오늘의 계산으로 합쳐지는 것이 삼각형입니다. 그래서 삼각형이 법이라면 둥근 것은 대공의 열반의 나툼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열반이란 것은 나툼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없어서 無자로 돌린 게 아니다 이거예요. 너무 꽉 차 있기 때문에 이것도 됐다 저것도 됐다 조것도 됐다 요것도 됐다 하니깐 ‘평등 공(空)’이다 이거예요. 그러니 꽉 찬 공이다 이겁니다. 그래서‘무’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 무 하나에서 수만 가지가 소생되는 겁니다. 나고 죽고 나고, 생사가 여기에서 나오는 겁니다. 공을 모르고는 대답 한마디 할 것도 없고 질문을 할 것도 없는 겁니다.

지구창조 이전의 윤회

나라는 존재는 본래 수억겁 동안 윤회해서 오늘의 나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럼 지구창조 이전의 윤회는 어떻게 된 건지, 다른 별에서도 윤회를 해서 지금의 지구인 나가 생겨난 건지 정말 궁금합니다.

태초라고 해서 어느 먼 옛날을 말하는 게 아니라 매일 오늘이 태초입니다. 영원한 오늘 이 순간이 늘 태초입니다.
여러분 앞에 어떠한 말을 해서 이해가 가도록 할 수 있을까요? 내 몸, 가정, 사회, 국가, 세계 전체에 우리가 너무도 하는 일이 많지만 우리 몸부터 먼저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물론 태어날 때는 보통 우리가 삼신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건 삼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엄마 아빠의, 말하자면 나 자체, 그러니까 마음의 근원이라고 할까요? 근원 자체가 우리와 한데 합쳐져서,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쳐지면 어린애가 되듯이, 이렇게 정자와 난자가 한데 합쳐져도 씨가 없으면 안 되는 이치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삼합이 한데 합쳐지니까 인간 하나가 나온다고 보는데 예로부터 삼신이라고 일컬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태어나서 말입니다. 태어나면 벌써 물주머니에서 터지고 나오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지수화풍에서부터 이 세상이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지수화풍으로부터 한데 합쳐지니 그것이 바로 큰 성을 이루었고 성을 이루었으니 온기가 거기 등장을 했고, 모든 삼라만상이 벌어졌다고 보는데 거기에서 생명이 생겨났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우린 지금까지도 지수화풍을 떠나서는 못 삽니다. 지금 몸도 지수화풍이니까요.
그러면 우리 몸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는 그 물질이 무엇인가. 그러면 내가 억겁 광년을 거쳐오면서 애당초에, 태초에 생긴 그 자체는 무슨 모습을 하고 있는가. 바로 여러분의 그 몸 속에 갖가지 형태로 있는 세균, 그 생명들입니다. 그 생명, 모습이 바로 태초의 자기라고 볼 수 있겠죠. 하나가 생긴 것들이 그렇게 각처의 그 모습을 나타내고 지금 수만 개가 돼서 형성된 게 인간의 별성 하나가 됐다고 봅니다.
그럼 인간으로 이 세상에 나오니까, 불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오고부터 이 세상은 생긴 겁니다. 거슬러 올라가서 삼천 년 전으로 갈 것도 없어요, 후로 갈 것도 없고요. 대충대충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니 참작해서 들으십시오. 그래서 몸의 태초의 모습 하나가 수만 개가 돼가지고 지금 운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체들이 운행을 하고 있는 겹겹의 세포에 모든 것이 있는데, 선장은 누구냐 하면 자기의 마음, 즉 말하자면 공생이다 이겁니다. 우리가 전체 합치면 공생이요, 공용이요, 공체요, 공식을 하고 있다 이겁니다. 이것을 따져본다면 내 몸 하나가 은하계도 될 수 있는가 하면 바로 혹성이기도 하고, 별성이기도 하고, 우리는 지금 한시 반시를 그냥 머무르지 않고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지금 지구가, 이 세상 우주가 전체 돌아가는 것이 우리 몸을 자도 깨도 항상 올라갔다 내려갔다 운행을 하고 있죠. 여러분이 그건 잘 아시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제일 문제는, 이런 게 있습니다. 자기의 마음 하나를, 한생각을 잘하면 자기 몸을 잘 끌고 다닐 수가 있고, 한생각을 잘못하면 자기 몸을 구덩이에 빠뜨릴 수도 있다, 이런 게 있습니다. 여러분이 차를 운전하고 가실 때에 잘 끌고 가면 차도 성하고 일이 잘 성사가 되지만 잘못 끌고 가서 어디 들이받기라도 하면 몸이 다치고 이렇듯이 사람 몸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어떠한 쇼크를 받았다거나 이래도 그 몸은 망가질 수가 있습니다, 화기가 치밀어서 말입니다. 병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마음 자체를 어떻게 먹어야만 되느냐 하는 겁니다. 내가 나고서부터 세상은 일어난 거니까, 나로부터 화두가 되며, 나로부터 근원을 밝혀내야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사대성인이 이렇게 말을 했죠, 자신을 알라고요. 자신을 알아야 남을 알고 남을 알아야 서로 공생 공용하는 거를 알게 됩니다. 그럼으로써 한마음이 선장이라고 한다면, 모든 중생들은 지금 배에 태워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다면 어느 종교를 나누어서 찾을 게 아니라, 전체 우리는 바로 공생이며 공용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까도 얘기했듯이 이 우주의 근본자체가 여러분 마음에 직결되어 있다, 이런 거는 여러분 몸이 오대양 육대주도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속 내용을 보시고 뇌를 보세요. 얼마나 복잡하고 거대하게 되어 있나. 그것을 볼 때에 여러분이 나로부터 알고 간다면 이것을, 우리가 맘대로 좀 오래 살려면 오래 살고 이젠 옷을 벗어야겠다 하면 벗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주천하 만물만생이 다, 즉 말하자면 벌레에서부터 진화되는 것은 생각, 마음에 의해서 진화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의식 자체가 바로 요런 거다 하고 모르면, 귀도 먹고 그러면 벌레는 벌레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가 어떻게 가다 보면 벗어나게 되겠죠. 인간도 그렇습니다. 살다보면 차원에 따라 전체가 차원이 높고 낮은 관계상 ‘아, 눈이 뜨여지고 귀가 트여지는가?’ 이러한 문제에 의해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여러분이 될 수도 있고 편안치 못하게 사는 여러분도 있는 것이 바로 중생이다 부처다 하는 백지장 하나 사이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복잡하게 먼저 생각하지 마시고 마음공부를 진짜 하려면, 무조건 자기를 끌고다니는 자기 주인공을 진짜로 믿고 거기다 일체 만법, 생활을 다 맡겨 놓고 ‘당신만이 해결할 수 있고, 당신만이 나를 끌고다닐 수 있고, 당신만이 내 가정을 이끌어 갈 수 있고, 내 몸을 건강하게 다니게 할 수 있는 건 주인공 당신밖에 없다. 대신 가줄 사람도 없고 대신 먹어줄 사람도 없다. 내가 혼자 와서 혼자 지금 길을 걷고 있다.’ 이런 걸 아셔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참나를 발견하고 감응이 될 때, 그때에 하늘 한번 쳐다보고 울고 땅을 한번 내려다보고 땅을 치며 울 때 그때 바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진짜! 자유인 말입니다.
우리 그렇게 모두 아는 것도, 알려고 하는 것도 다 놓으십시오. 내가 여러분한테 이 뜻을 몰라서 답변을 안 해드리는 게 아니라, 바로 내 동생 같고 자식 같고 형제 같은 겁니다, 모두. 또한 연세가 높으신 분은 내 부모 같고 모두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일 년이 되든 한 달이 되든 우리 정해 놓지 말고, 그것은 여러분의 그 차원에 따라서 빨리 싹이 날 수도 있고 빨리 더 클 수도 있고 아주 밑에서 싹도 나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열반이라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콩이 익었을 때, 콩 말입니다. 콩에 비유하는 겁니다. 콩이 익었을 때 아주 잘 익었다면 그냥 이렇게 건드리기만 해도 탁 벌어지죠. 그런데 덜 익은 거는 속껍데기가 짝짝 붙어 가지고는 아무리 까려고 해도 안 까집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죽음에 의해서 고생을 하고 죽는다는 뜻입니다. 그거 까지기는 해야 할 텐데 안 까지거든요. 그래서 아픔을 그렇게 견디지 못하고 애쓰다가 결국은 우리는 몸을 벗는다는 이치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그냥 가고 싶으면 툭 건드리기만 해도 콩깍지가 탁 벗어지게끔 할 수 있는 자유스러운 생활을 하시도록 노력하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타 종교인의 불교공부

가족 모두가 교회에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불교교리와 참선에 관심이 생겨서 가끔씩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생깁니다. 타 종교를 계속 믿으면서 불교를 배우는 것이 죄가 되지는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괜찮습니다. 배우세요. 그런데 단 한 가지, 이론으로만 글로만 경을 보는 거는 말로 이론적으로만 알게끔 되는 겁니다. 학설이라는 건 대기설법으로 그 책을 보고선 읽어 주지마는 스스로깨달아서 삼라만상, 모든 유생과 무생이 다 보이지 않는 데서도 대화를 할 수 있고, 저 날아다니는 새들의 말도 들을 수 있고, 어느 풀포기 하나의 말도 들을 수 있고, 서로가 대화를 할 수 있고, 보이지 않는 죽은 사람의 마음도 서로 대화를 할 수 있고, 그 모습으로 나타내서 나투어 다니면서 모든 걸 이익을 줄 수 있고, 산 사람에게도 이익을 줄 수 있고, 죽은 사람에게도 이익을 줄 수 있는 이러한, 즉 말하자면 무와 유가 둘이 아닌 하나의 마음으로서 자유자재할 수 있는 자유인이 되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나는 여기에서 기도교를 믿지말고 불교로 오너라 이런 식의 어리석은 그런 소린 안 합니다. 단지, 어느 교를 막론하고 ‘네 마음을 깨달아라. 네 마음의 주인공을, 바로 주처를 찾아라. 네 주처를 찾지 않는 이상에는 대공의 이치를 아예 모른다.’ 이겁니다. 그런데 모르면 사랑할 수도 없는 거죠. 물질적으로 요거 조금 사랑하는 거요? 그러나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부처님 도량에는 부처님의 모습이 조성되어 있는데, 그렇지만 난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 부처님의 모습이 너의 몸이요, 그 생명이 너의 생명이요, 그 마음이 네 마음이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교회에 예수님의 고상이 걸렸어도 그것은 이 세상 돌아감을 뜻해서 바로 인간이 이렇게 돌아가는 이치를 그대로 그려놓은 거다 이거예요. ‘거기에다 집착하지 말라. 바로 자기니라.’ 이렇게 해 준 거예요. 성모마리아 상이 모셔져 있다 해도 그것이, 그 형상이 바로 너의 몸이요, 그 마음이 바로 너의 마음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고 이렇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신도들 중에 천주교를 믿는 친척들이 있어서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린다고 해도 거기 가지 못하게 하지 않습니다. 거기 가더라도 바로 자기의 심주(心柱)는 그대로 자기 심주니까요. 그 심주 속에서는 모든 전체, 예수 부처 유생 무생이 다 그 안에 들었으니까 걸릴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넓게 가르쳤지 좁게 가르친 게 아닙니다. 바로 자기 앉아 있는 바로 거기에 부처님이 있고 예수님이 있는 거지 어느 개체를 만들어 놓고 거기 있는 게 아닙니다.
저 나무를 보세요. 나무 이파리가 자기 뿌리를 볼 수 있나요? 흙에 가려서 못 보죠? 사람도 그와 같이 자기 신을 못 보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 자신을 믿어라 이 소립니다. 포괄된 전체 신이라는 건 하나로 돌아가니까 그 신을 믿어라 이거예요. 그럼 전체의 신이 한데 합쳐진 대공이다 이거예요.
뭐 부처님께선 옆구리로 나셨다고 하지만, 옆구리로 났다는 건 어떠한 뜻에서 옆구리로 났다고 하느냐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도 이해해야 돼요. 잘 살펴야 돼요. 부처님 경전에 그렇게 있다고 해서 고렇게만 들어서도 안 돼요, 또. 옆구리로 나왔다 하는 것이나 기독교에서 갈빗대를 추려서 났다 하는 거는 중도를 말하는 거예요, 중도! 아래도 아니고 위도 아니다. 전체의 대공을 말하는 거예요.
마음이라는 것은 체가 없어요. 그대로 영이에요. 그러나 영원한 생명의 실상이라는 거는 평등하면서도 살아있다는 얘기예요. 영에 빠지지 마라. 보이지 않는 거를 영이라고 한다. 그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우린 여여하게 하고 있지 않느냐. 아마 모두들 방귀 뀌어보지 않은 분은 없을 거예요, 그렇죠? 그렇게 방귀는 여여하게 뀌었는데 잡을 수도 없고 빛깔도 보이지 않았다 이겁니다. 방귀는 뀌긴 뀌었죠? 그거예요, 바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영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소리는 났는데 그 소리가 난 자체가 바로 영원한 대공의 이치예요. 붙잡을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으면서도 여여하게 그렇게 소리를 냈다 이 소리거든요.
그래서 여기 다니는 분들은 모두 ‘한마음주인공, 당신이시여! 모든 것은 일체 당신이 하는 거지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참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일체 먹는 것을 모두에게 다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하고 관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감사함도 거기다 감사하고, 일체 혼자 해 먹는 게 없거든요. 물이 없어도 해 먹을 수 없고, 불이 없어도 해 먹을 수 없고, 땅이 없어도 우리가 걸어다닐 수가 없고, 공기가 없어도 살 수가 없고, 산소나 또는 바람이 없어도 살 수가 없으니 그 모두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모든 사람의 손 인력이 다 감사한 겁니다. 그 외에 자기가 손을 놀려서 번 게 감사한 겁니다. 그건 모두가 원동력이 하나다 이거예요. 그럼 전체 감사하지 않은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모둠으로 해서 결국은 그걸 하나님이라 존칭할 수도 있고, 주인공이라 할 수도 있고, 그 주처를 마련해 놓고 공부하는 겁니다. 전체 개별적인 주처가 아니라 포괄적인 주처 말입니다.
그래서 포괄적인 주처에다가 개별적인 자기가 사량으로서의 말을 해서 자꾸 잠재해 있는 자기 실상을 계발하는 거죠. 그래 놓고 보면 눈으로도 그 능력이 나가고 귀로도 나가고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도 있고 들을 수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판단해서 냄새를 맡을 수도 있고, 모든 보이지 않는 데 맛도 알 수 있고, 그래서 오관을 통해서 오신통이라고 하죠. 그 오신통은 마음의 부속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오신통을 통해도 도가 아니라고 했어요. 그건 부속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그걸 이렇게 말을 해보죠. 만약에 참나, 영원한 실상의 마음이 아니었더라면 어찌 오관을 통해서 들이고 낼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을 인군이라고 하고, 오관을 통해서 하는 걸 나라고 한다면 나 없어도 안 되고 신하가 없어도 안 되고, 인군이 없어도 안 되죠. 그래, 고게 합쳐진 것이 지금 사람 하나예요. 인체로 비유한다면, 보이지 않는 참나가 있고 보이는 나가 있다 이거예요. 근데 보이는 나는 안 보이는 나의 생리적인 작용밖엔 해 줄 수 없어요. 여러분의 마음이 움죽거리지 않는데 육체가 움죽거립디까?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형식에 끄달리는 모든 이름을 떼어버린 채, 우상화하는 이름을 떼어버리고 자기 자신들을 모두 알라 이런 소리예요. 그건 이름뿐이에요. 자기 마음과 남의 마음이 얼마나 통하고 있는가를 한번 시험해 보시라는 겁니다. ‘내가 친구를 꼭 만나야 할 텐데 꼭 친구를 만나게 해!’ 라든가 이렇게 한번 자기 주인공에 놓고 지켜보는 노력을 하시라는 겁니다. 종교라는 이름에 끄달리고 형상에 끄달리지 말고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가든지 바로 자기가 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자유롭게 사시기 바랍니다.
2003-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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