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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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이야기(2)-불법
부처님께서 열반에 든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의 일이다. 마가다국의 대신인 고파카 목갈라나가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의 한명이자 평생 부처님을 모셨던 아난 존자에게 물었다.
“존자 아난이시여, 세존께서 ‘이 사람은 내가 열반에 든 후에 너희들이 의지할 곳이다’라고 임명한 사람이 있습니까?”
“세존께 그런 임명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승가에 의해 합의되었거나 장로들에 의해 지명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대신 고파카여, 우리들에게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의지할 곳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법이 우리들이 의지할 곳입니다”
부처님께서 열반 한 이후에도 우리들이 법에 의지해야 함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불교도들이 귀의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법은 바로 부처님께서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혹은 청정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베푸셨던 가르침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 “법에 대해 굳은 신념을 품노라. 법은 세존에 의해 능히 설명되었도다. 그 법은 현실적으로 효과가 있는 것이며, 때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며, 지혜로운 사람에 의해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삼보의 하나가 법이란 점에서 법은 불교도들의 신행활동에서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되며, 가치의 판단과 불교적 윤리를 형성하는 근본이다. 그렇지만 법이란 용어는 우리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쉬운 단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법이란 용어는 매우 다의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불교를 어렵다고 느끼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도 법이란 용어가 지니고 있는 다의성때문이다.
불교에서 법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는 보통 세 가지 경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삼법인에서 제법무아(諸法無我)할 때의 법인데 이 경우는 ‘존재 일반’을 지칭한다. 따라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의 존재들, 그것이 유형이든 무형이든 혹은 구체적이든 관념적이든 관계없이 궁극적인 본질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일체의 존재란 결국 우리들의 의식을 포함해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 전체를 포괄한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들을 관찰해 보면 그곳에는 하나의 법칙성이 내재되어 있다.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여래가 이 세상에 나오든 혹은 이 세상에 나오지 않든 이것은 결정되어 있으며, 법으로 확립되어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법칙성이란 의미의 법이 두 번째 용법이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성취하고, 그것을 중생들에게 설명하게 되는데 그때 깨달음의 내용을 달리 표현하자면 법칙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때의 법칙성은 다름 아닌 연기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부니카야>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가르침이 있다. 기원정사에 계실 때 어부의 아들인 사티에게 내린 법문이다. “비구들이여, 만일 그대들의 견해가 명확하고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에만 집착하고 매달린다면 ‘내가 말한 법은 마치 강물을 건네주는 뗏목과 같아서 강을 건너면 뗏목도 놓아버려야 한다’는 비유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는 내용이다. 이것은 ‘뗏목의 가르침’으로 알려진 것이며, <금강경>에서는 무집착의 공사상을 강조하기 위해 이 가르침을 인용하고 있다. 문제는 이상의 가르침에서 법을 뗏목에 비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뗏목이란 강을 건너는 수단이다. 강을 건넘과 동시에 뗏목을 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경전에 절대성을 부여한다든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금과옥조처럼 교조화할 이유도 필요성도 없다는 점을 알아야한다.
세 가지로 설명한 법이란 말은 존재 일반, 법칙성,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의미를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일체의 존재는 법칙성에 의해 나타나게 되며, 그러한 사실 즉 법칙성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그런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들에게 대단한 의미와 권위를 지닐 수 없다. 그냥 뗏목의 역할로 끝나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부처님께서는 법 역시 공한 것이라 말한다. <잡아함경>에서 “부처님, 어떤 것을 세간이 공한 것이라 합니까?” “눈이 공한 것이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공한 것이며, 내 것이라는 것도 공한 것이다. 이것은 존재의 본질이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으로 보고 느끼는 것 역시 그러하니라.” 일체를 있는 그대로 인식할 뿐 거기에 마음이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마지막까지 잊어서는 안된다. 법칙성을 깨닫게 된다면 강을 건넌 뒤에 뗏목을 버리듯이 경전의 문구에 집착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2003-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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