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원 인천전문대 교수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보여준 일련의 외교적 행보에 대하여 굴욕외교라고 질타하는 목소리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일본 방문 후에는 다시 ‘등신외교’라는 신조어가 탄생했다. 이는 일본 방문 일정을 무리하게 조정한 후유증이며, 국내의 비난여론은 우리 국민들의 대일 감정과 일본의 교묘한 상황 연출이 맞물려 있는 것 같다.
노대통령은 이번 방일 정상 외교에 임하는 우리 정부의 입장이 ‘과거사에 얽매이기보다 미래지향적 관계가 중요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밝혔다. 아마도 대통령은 시급한 현안으로 부상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그 과정에서 우리 정부의 역할 공간 확보에 최우선 순위를 부여하고, 이에 대한 일본의 동의를 유도하기 위한 일종의 반대급부로 과거사 문제에 유연한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총론적인 입장에서 볼 때, 우리 민족의 생존과 번영의 기본 틀을 남북관계의 정상화로 보고 이를 위하여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주변 4강 외교의 핵심과제로 보는 대통령의 입장은 하등의 잘못이 없다. 또한 외교 행위가 국민감정의 카타르시스 행위가 아닐진대, 차라리 과거는 그냥 존재하는 역사로 두고 새로운 미래의 개척을 위하여 공동의 노력을 하자는 것도 자존심은 상하지만 하나의 실리적인 비전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외교란 어차피 자국의 안전과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일종의 정치행위이다. 따라서 일본은 일본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한국과의 관계에서 자국의 이익을 최대화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자신들의 외교 전략을 수립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에 대응하는 우리의 전략 부재는 총론적 당위성을 상당 부분 훼손하였음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필이면 현충일에 이루어진 일본 방문, 그리고 TV 화면을 통하여 전달된 일본 국왕과의 만찬 광경은 아침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에게 묵념을 올린 국민들의 대일 감정에 대한 고려가 없는 미숙성의 상징처럼 보였다. 뿐만 아니라 과거 피해 당사국의 대통령이 도착하자마자 일본 참의원이 유사법제 법안을 통과시킨 것은 일본의 외교적 결례이며 오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세계전략과 동일 궤도 위에서 최근 북한 때리기의 강도를 높이고 있는 일본을 상대로 한 회담 후의 공동성명에서 ‘추가적 조치’와 ‘더욱 강경한 조처’라는 이전의 표현보다는 온건한 ‘북한이 사태 악화를 초래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선으로 정리된 외교적 성과도 있었지만, 앞에서 언급된 악재들이 빛을 바래게 하고 있다. 또한 비켜간 과거사에 대한 국내 여론의 역풍은 결국 대통령으로 하여금 보도진에게 미리 배포한 일본 국회에서의 연설문 내용 중 일부를 수정하게 했다.
필자는 대통령에게 외교나 국방은 내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는 부처님의 7불퇴법을 알려주고 싶다. 성공적인 내치가 외교역량의 기반이요, 강력한 국방력으로 전쟁 억지력을 확보하는 길이라는 가르침은 2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적실성을 갖는 혜안이다. 그리고 여야 정치인들에게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 조정의 터무니없는 대응상황과 오늘의 상황을 비교해 보기를 간곡히 권하고 싶다. 또한 타성과 전통에 자신의 논거를 의존하고 있는 여론 주도층에게 고답적인 의리와 명분론으로 광해군의 실리외교가 좌절된 후 민족이 겪은 두 번의 대 참화를 생각해 보기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