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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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도 이루는 3단계 공부방법
하나, 모든 것 감사하는 마음으로 놓고
둘, 둘 아닌 도리 알기 위해 또 놓으면
셋, 나툼의 이치 깨닫고 구경각에 도달

무심으로 양면을 껴잡아서
중용 할 수 있어야 멋있는 자유인
▲스님: 이렇게 첫째 일요일에 형제 법우님들과 같이 한자리를 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은 우리가 질문과 토론을 같이 할 수 있길 바라면서 시작합시다.
▲질문자1: 이 도량에 오시는 불자님들이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점입니다. 스님께서는 불법의 공부 과정을 3단계로 나누어서 첫째는 참나의 발견과 완성, 둘째 모두와 하나가 되는 것, 즉 전체 속에 자기가 있음을 깨닫는 것, 그리고 셋째는 이런 수행을 거쳐 보살도를 완성해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평소 스님 법문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아 왔지만 우둔한 저희들은 아직까지 미혹한 가운데 있습니다. 차제에 이 3단계의 공부과정에 대해 다시 한 번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여러분한테 항상 말씀드리는 데도 그게 그렇게 이해가 안되는 모양이죠. 물론 체험하고 가시는 분들도 많습니다만, 그것은 이름해서 삼정지각 불이법이라고 합니다. 난 그냥 나오는 대로 얘기하는 것이니 잘 참작해서 들으세요. 육이법도 있고 팔정도법도 있고 십이지법 등이 있지만 그것을 떠나서, 떠나는 게 아니라 한마음에 놓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첫째도 죽어야 나를 볼 수가 있고, 둘째도 죽어야 나와 더불어 둘이 아님을 알 수 있고, 셋째도 죽어야 나하고 둘이 아닌 바로 나툼의 도리를 알 수 있어서 구경지를 이루게 됩니다. 그것도 이름해서 말입니다. 이 세 단계를 체험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항상 여러분한테 말씀드렸지요. 내가 나왔기 때문에 일체만법이 나로 인해 돌아간다고 말입니다. 모든 것이 나로 인해 벌어지니 나를 다스리면서, 바깥 경계도 내면에 놓고 안의 경계도 내면에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에는 무조건 용광로에다 헌쇠 넣듯, 모든 것을 거기서 하게끔 감사하는 마음으로 놓아야 합니다. 나를 이끌어 가는 것도 거기요, 일체만법 역시 거기서 들고나는 것이니까요.
그리하여 일단계 참나를 발견하게 되면 둘이 아닌 도리를 알기 위해서 거기에다 또 놓고 가야 합니다. 그때 안에서 어떠한 뜻이 나오더라도 해서 되는 것은 하되 나오는 대로 맹종하진 마세요. 즉 참나를 발견하고 나면 지혜를 넓혀서 생사윤회에 끄달리지 않게 하기 위해 이것도 나오고 저것도 나오며,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하고 주장하는 그런 안의 경계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니 그 경계에 맹종하지 말고 누(累)가 되지 않을 일은 하고, 누가 될 일은 하지 마세요. 나를 테스트 해보려고 그러는 것이니 감사하구나 생각하고 거기 또 놓으세요. 만일 안의 경계에 맹종하여 거기서 시키는 대로 한다면 안으로 기울어지고, 밖의 경계에 끄달리면 밖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그러니 안에나 밖에나 맹종하지 말고 모든 이치를 바로 알아서 올바르게 결정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그 양면은 하나가 되어 그대로 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모든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생각하면서도 걸림 없이 그대로 자기 주장자를 올바로 세우고 이끌어 나가는 공부라 하겠습니다.
세 번째는 둘이 아닌 까닭을 알았기 때문에 둘이 아닌 나툼을 하게 됩니다. 그 나툼이란 열반계를 말합니다. 즉 열반각지, 구경각지를 말합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구경각지인가? 여러분이 알아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항상 드는 비유입니다만, 여러분은 여러 가지의 이름을 가지고 계시죠? 이름이 많으시죠? 한 분이 남편, 사위, 아버지, 아들, 아우, 할아버지 등 많은 이름들을 가지고 계십니다. 사회에 나가면 또 사회에서 맡은 직책이 있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갖가지의 이름이 될 때마다 그에 맞는 행을 저절로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아들을 만나면 아버지로서의 생각과 행과 말이 아주 선명하게 나가게 되는 것이지요. 부처님의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없고 남도 없다라고 한 것은, 일체가 내 아님이 없고 일체가 내 도량 아님이 없고 일체가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부처 아님이 없고 중생 아님이 없으며, 모두가 한자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부처도 없는 것이 부처다.’라고 하신 것은, 그릇에 따라서 종지에 응해 주기를 원하면 종지가 돼 주시고 사발에 응해 주기를 원하면 사발이 돼 주시기 때문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그래서 달마대사도 구렁이가 됐다가 금방 다시 달마대사로 됐던 것이지요. 나도 그런 많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그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어떤 때는 이렇게들 호소합니다. ‘병원에서는 아무 병도 없다는데 나는 죽겠습니다. 어디가 아프긴 아픈데 몸져눕지도 않고 이렇게 아프기만 합니다.’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부처님의 뜻은 알지 못하고 그냥 밖으로만 끄달리는 분들, 이런 분들이 천차만별로 많은데 인간사회만 그런 게 아닙니다. 만약에 구렁이가 구원해 달라고 한다면 부처님은 어떻게 하느냐? 부처님의 마음은 구렁이 속으로 들어가서 모든 문을 활짝 열고 안아 들이시니 두드러지지도 않으면서 바로 구렁이가 되어 버렸죠. 그리고 사람이 건져달라고 할 땐 사람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가 되고, 돼지가 건져달라고 하면 돼지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가 되고, 소 속으로도 들어가고, 말 속으로도 들어가고 그럽니다. 또 하다못해 풀 속으로 나무 속으로도 들어가고 구더기 속으로 들어가서 구더기도 되고 하니, 어떤 게 될 때 나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부처다 이겁니다.
그걸 바로 이름해서 구경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삼계를 통달했다는 얘깁니다.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을 다 통달하고 과거 현재 미래세계를 다 통달했다는, 그래서 자유자재한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될 때 나라고 할 수 없고 어느 미물이 될 때 나라고 할 수 없고, 어느 목신 지신 용신이 될 때 나라고 할 수 없이 일체 만물만생으로 화하여 돌아갑니다. 그래서 부처님이라 이름해서 부르는 겁니다. 이런 각을 이룬 마음이라야 무심의 도리인 중용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한생각은 체가 없어서 저 바깥에 나가는 것도 문지방 넘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앞뒤 뚫린 텅 빈 불바퀴 속을 서슴없이 들고 날 때 비로소 우리는 우주삼라 대천세계를 그대로 자유스럽게 들고 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처럼 경을 많이 읽지 않아 경전의 용어를 인용하지 않기 때문에 좀 답답하시겠지요. 그러나 난 우주 천하가 그대로, 큰 불바퀴 작은 불바퀴 둘이 아닌 그대로 과학적으로 증명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부처님께서 3천년 전에 말씀하셨지만 지금 현재도 말씀하고 계시고 미래에도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말씀이 법이 되어 끊임없이 여러분과 더불어 언제나 함이 없이 하고 계신다는 그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자기로부터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있으니까 상대성 원리로서 일체만법을 서로 공심으로 공용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가 공용을 할 때 찰나찰나 변하고 화하여 찰나찰나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면서 끊어짐이 없습니다. 광력, 전력과 같이 자력으로서 우리들은 통신력을 충만히 두루 하면서 이렇게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과학적으로 본다 해도 그렇고 3단계의 문제가 바로 우리에게 아주 극치적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과거는 지나갔으나 즉 내가 짊어지고 나왔으니 없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없고, 현재는 짊어진 것이 붙을 자리가 없기 때문에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마음도 고정됨이 없고 몸뚱이도 고정됨이 없으며 듣는 것 보는 것 먹는 것 모두 고정됨이 없으니 어떤 것을 먹을 때 누구를 만날 때, 어떤 것을 들을 때 어떤 것을 볼 때 어떤 것을 말할 때 나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변해서 찰나찰나 돌아가는 그 시점에서 여러분의 모습, 말, 뜻 모든 것이 화하듯 그렇게 응해 주시는 천백억화신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3단계의 모든 이치를 생각할 때 우리가 지금 놓으라는 말은 재차 하는 소리지만 여러분은 놓고 가질 않습니다. 마음으로 붙들고 있습니다. 착을 두고 욕심을 내고 아집과 아상으로 ‘내가 내가’ 모두 ‘내가’로 돌아가니 어려움에 부딪치는 거죠.
여러분은 누군가를 만났다 금방 다른 이를 만나고 또 다른 이를 만나고 그럽니다. 그러나 둘이 아닌 까닭에 너는 너대로 있고 나는 나대로 뚜렷하다 이 소립니다. 전력이 둘이 아닌 까닭에 어느 불이나 불은 똑같지만 전구는 각각이듯이. 그러므로 그 도리를 3단계로 나눈 것입니다. 그렇게 나누었어도 결국은 삼계를 통달한다면 모두를 그대로 요리할 수 있어서 아무런 나누어짐 없이 스스로, 3단계는 이미 3단계가 아닌 것입니다.
3단계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나도 아니요 너도 아니요 모두가 아닐 때, 나 아님이 없다는 도리가 거기에서 선명하게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옳으냐, 저것이 옳으냐, 내면세계가 옳으냐 바깥세계가 옳으냐, 이론이냐 마음이냐 이런 것도 다 통달하게 되면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이법은, 예를 들어서 ‘이게 옳습니까 저게 옳습니까’ 한다면 말로 해서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말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정에서 불을 켜기 위해서 스위치를 누를 때 ‘불을 켜야 옳겠습니까’ 하고 불을 켭니까? 안 그러시죠? 전력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전구가 모두 가설되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대로 아무 소리 없이 불을 켤 뿐입니다. 방바닥에 물이 떨어졌으면 아무 소리 없이 걸레를 갖다가 닦을 뿐입니다.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말라도 아무 소리 없이 그저 냉장고 열고 꺼내 먹거나 ‘나 물 좀 줘’ 해서 그냥 마실 뿐입니다.
거기 무슨 이유가 붙습니까? 목이 말라서 물 달라는데 무슨 이유가 붙느냔 말입니다. ‘내가 먹어야 옳으냐 안 먹어야 옳으냐’ 하고 누구에게 물어봐야 합니까? 물에게 물어봅니까? 내가 너를 먹어야 하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고 물어보고 먹습니까? 목마르면 그냥 마실 뿐입니다. 이유가 붙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불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라는 걸 내세우지 않는 데서 바로 구경지를 이루어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망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의 관습에 의해서 망상이라고 하는 것이지 아니, 생각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목석이지 그게 어디 사람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좌선을 한다고 몇 시간 앉아 있는 것만이 좌선이 아닙니다. 일분일초도 하지 않았다, 했다는 소리 없이 일상생활이 그대로 참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좌선이요, 참선입니다.
내 마음 편안하게 끄달림 없이, 망상이 일어날지라도 아랑곳없이 일어나는 그 마음을 가만히 관해 보는 것입니다. 수많은 의식에 모두 마음들이 있어 이렇게도 나오고 저렇게도 나오는 것이니 지켜보고 옳은 것은 옳은 것대로 그른 것은 그른 것대로 다 쓸 수 있는 그릇이 되게끔 몰아 넣는다면 그것이 바로 올바르게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는 지도 방법입니다.
그리고 지금 보십시오. 모두가 마음이 수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가, 젊은 청년들, 학생들, 모두가 마음 일어나는 대로 행을 하고 있습니다. 강도질은 누가 시켰으며 선행은 누가 시켰습니까. 그것이 바로 자기 마음을 다스리면서 자기 주처에 놓는 수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대학문제도 그래요. 나오는 문은 좁히고 들어가는 문은 넓혀서 기술계 고등학생들도 일하면서 그 방면으로 계속 성장하도록 해주고, 한편 월급도 대졸 고졸 가리지 말고 자기 능력대로 지급된다면 꼭 대학에 가려고 애쓰지도 않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대학 들어가기 위한 부정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됐느냐? 이게 다 수행을 하지 않기 때문에 넓지 못하고, 또 남의 소릴 듣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바깥으로만 끄달리기 때문에 과감하게 이런 처리들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진국이 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역사를 가져온 것도 바로 그 탓 아닙니까? 불교를 등한시하고 유교만을 중시했기 때문에 바깥으로 끄달리고, 관습에 얽매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이죠. 이런 문제들을 짊어진 한국이지만 우리가 앞으로 근본 수행을 하여 유무를 한데 합친 한마음 속에서 모든 일을 해 나간다면 제일가는 나라를 이룰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하나, 의학·과학·노동 등 모든 것이 정신노동, 정신과학, 정신의학, 이렇게 모두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모든 걸 해나간다면 부정부패 같은 건 없을 겁니다. 부질없는 싸움들도 안 할 겁니다. 남을 물에 끌어다 넣으려면 자기도 물에 들어가야 하거든요. 그러니 자기 죽는 짓을 누가 하겠습니까. 자기와 남이 더불어 살 수 있는 그런 발전이어야 합니다.
내가 이런 말 하면 여러분은 ‘에이, 뭘 그럴까?’ 하실지 모르지만, 우리 마음에 의해서 입력이 되어 곧바로 나오는 그런 시대가 온다면 손을 대지 않아도 차가 그냥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으로 한다면 차 사고도 그렇게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시대가 오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을 적게 쓰고도 많은 인력을 쓴 것보다 몇 곱절 더 이익을 볼 수 있고, 경제난에 허덕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방에 앉아서 세계를 탐험할 수 있고 우주법계를 다 탐험하고 결정지어서 마음으로 쓸 수 있는 그런 단계가 오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우린 이런 공부를 하지 않고는 안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니 아까 3단계의 문제가, 바로 3단계가 3단계가 아닌 도리로 3단계도 없고 1단계도 없다는 그 사실을 그대로…. 여러분이 자기 탄생을 한다면 삼계를 통달한 여러분이 될 수 있으며, 바로 ‘삼계 통달’이라는 이름도 없는 그런 통달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그 경지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여러분 가슴에 닿게 말씀을 해드렸습니까?
▲신도일동: 예, 감사합니다.
▲질문자2: 저도 천도재를 올렸습니다. 도량에 가면 조상님이나 살아 계신 분들을 위해 천도를 하는데 거기에 대해 명확하게 가르쳐 주시고 곁들여서 영의 세계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스님: 그 얘기를 하면 영(靈)도 들어가는데 뭘 또 붙였습니까, 하하하. 그것도 세 차원이 있습니다. 첫 단계는 모르는 사람이 그냥 천도식을 하는 것입니다. 흉내를 내는 거지요. 삼천 년 전에 부처님께서 ‘이렇게라도 해라’ 하고 말씀해 놓으신 것을 말로만 따라 외우면서 그렇게 해주는 천도식이 있습니다.
또 한 단계는 이 도리를 공부하면서 주인공에 모든 것을 다 맡기고 가시는 분들도 그렇고 처음 오신 분들도 그렇고, 스님네들이 그 마음의 도리라도 알아서 떡 한 그릇 차려놓고라도 함이 없이 했을 때 비로소 영령들이 그 마음 안에 들어옵니다. 전체가 내 아님이 없는 도리에 들어온 것입니다. 어떤 것을 먹고 어떤 것을 갖고 어떤 것을 할 게 없이 전체가 자기 것이니까, 즉 스님네들의 마음내는 능력에 따라서 영령들도 천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또 신도님들은 그러한 스님에게서 천도를 해야 조상들의 은혜도 갚을 수 있고 자손들도 잘된다더라 하는 생각으로 천도재를 지내려 합니다. 모든 걸 거기다 맡겨놓고서 천도할 때, 일체제불의 마음과 조상님들의 자식 위하는 마음이 한데 합쳐집니다. 마음과 마음이 합쳐짐으로써 아주 큰 밝은 불이 되었을 때 ‘아이구, 내가 추워서 여기 있었는데, 저기 큰 밝은 불이 있으니 가서 따뜻하게 살아야겠다.’ 하고 가는 것이 천도인 것입니다.
부모가 마음도리를 알지도 못하고 끄달리면서 살다가 돌아가시면 그 차원의 그릇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사발이나 종지 등 천차만별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하나의 큰그릇으로 만들어 놓으면 개미 지나가는 것도 볼 수 있는 밝음을 그대로 맛볼 수 있고, 모든 게 내 아님이 없고 내 먹을 것 아닌 게 없으니 그렇게 해서 한 찰나에 천도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한 단계는 여러분이 공부를 해서 정말이지 당당하고 원력이 있게 되었을 때 ‘아하, 일체제불의 마음과 모든 조상들의 마음이 둘이 아닌 까닭에, 한자리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나고 드는 것이니 여러 가지 차려놓고 빌고 하는 것만이 아니지 않나.’ 하고 생각을 한다면, 촛불 하나 안 켜놔도 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밝은 인등을 켜니까 그 인등 속에서 다 이루어지는 겁니다. 한마음 속에서 온 누리를 다 덮고도 남음이 있으니 그 온 누리에 통신 아니 됨이 없고, 온 누리에 한마음으로 바로 공심으로서 돌아갈 때, 그 조상의 마음도 거기 한자리 하는 거죠. 그러니 뭘 또 따로 지내고 자시고 할 게 없지 않습니까.
여기서도 천도재를 많이들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기서 천도재를 하고 우린 이러이러했다고 하니까, 여기 와서 천도를 하면 부모님들이 잘 천도되겠지 하고 생각들을 하나 봅니다. 그래서 요사이 지방의 신도들이 천도재를 합니다만 어떤 때는 빼놓는 영가가 있습니다. 그럴 땐 “이렇게 이렇게 살던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넣어서 해!” 합니다. 그 한 사람으로 인해서 문제가 생긴 걸 빼놓고 하면 어떡합니까. 그러니 그런 걸 챙겨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천도재에 드는 재비는 물론 집안 형편대로 합니다. 왜냐하면 가정에서도 가난하면 부모님들께 용돈을 적게 드리고, 부자는 부자대로 많이 드리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상 차려 놓고 천도시키는데 돈이 많이 드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돈이 있는 사람은 많이 가져와도 됩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고생 고생 하면서 자식들을 위해서 벌어 놓고 간 것, 부모를 위해서 좀 쓴들 어떻습니까.
또 한 가지는 그것을 진실하게 생각하고 부모를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다시 나올 때 가지고 나오는 무심의 통장이 됩니다. 정말입니다. 깨우치질 못해서 참 공덕은 받지 못하나 자식의 공덕으로서 부모가 무의 세계에서 그 정성으로 통장을 해가지고 이 세상에 출현하게 되는 것이죠. 자식들로 인해 공덕을 받았으니 무식한 사람 안되고 당당한 사람으로서 나온다는 겁니다. 살면서 지은 죄는 어쩔 수 없지만, 자식의 공덕으로 천도된 분들은 복주머니 안가지고 나오는 분은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내 이런 얘기 하나 할까요? 어느 분이 살아 생전 아주 착하게 살다가 죽었는데 어디로 가자고 하여 따라가 보니 촛불을 주욱 켜놨는데 거기에 복주머니들이 주렁주렁 달려있고 이름 석자가 모든 것에 붙어있더라는 겁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촛불이 가느다란 것 긴, 것, 금방 꺼질 듯한 것 등 여러 가지가 있더래요. 그러고는 그분이 ‘어이구, 내가 잘못한 죄로 자식들을 고생시켰노라’고 하니까, ‘당신은 마음이 착해서 이렇게 해 줄 테니 한번 해봐라’ 하더랍니다. ‘이 촛불은 긴 것이니 오래 있다가 죽을 것이다. 이것을 빌려 줄 테니 이 복주머니를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좋은 일을 하라. 이 주머니에서 빌려간 돈을 다 갚고도 이익이 남아서 좋은 일을 더 할 수 있고, 복주머니는 다시 찰 것이다. 착하게 살았으니 나가서 그렇게 해보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분은 다시 내보내져서 도로 깨어났단 말입니다. 그렇게 깨어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삼일장 또는 칠일장을 지내기도 하는 겁니다. 만약에 삼일장을 지냈는데, 나흘 만에나 닷새 만에 깨어나서 자기 집이 없으면 딴 집으로 들어가야 되니까 말입니다. 자기 몸이 없으면 살아날 수 없으니까요. 그런 영혼은 다시 나와도 들어갈 곳이 없으니 다른 사람 몸으로 들어가서 살게 됨으로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이죠. 한 몸에 둘이 살게 되니까요.
그래서 타의 영계로 인해 혼동을 일으켜 병원에 있는 사람들도 많고, 유전으로 인해서 그런 사람도 많은데 그런 것을 어떻게 의사가 고칩니까. 생각해 보세요. 딴 소리 하거든요. ‘난 아무개야!’ 하면서. 그러나 그게 딴 소리가 아닌데 제삼자가 듣기에 그렇게 듣고 미쳤다고 갖다 넣는 거지요. 여간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예전에 원주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어요. 이북에서 나왔다는 어느 처사님이 7남매를 두었는데 그 부인이 말입니다. 항상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고만 있으니 애들을 거둘 수도 없을 뿐 아니라 밥도 떠 넣어줘야 먹고 그러는 겁니다. “어이구, 무서워! 아이구, 무서워!” 하면서 달달 떨고만 사는 거예요. 7년을 그렇게 살다 보니 별의별 굿은 물론 병원에 입원도 했지만 안 낫는 겁니다.
그래 그 남편이 날 찾아온 거예요. 하도 기가 막히니까 자기 시계를 풀어놓고는 “아무 것도 없고 이 시계밖에 없으니 받으시고 제 아내 좀 살려 주십시오.” 하는 겁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그 시계는 받아서 뭘 합니까. 내 몸도 주체 못해서 죽겠는데 시계는 왜 끌고 다닙니까. 그래 도로 주니 안 돌봐주려고 그러는 줄 알고 그걸 받아야만이 가겠다고 합니다. 할 수 없어서 “정히 그렇다면 지금 주머니에 얼마 들었소?” 하니까 뭐 3천 원인가 4천 원이 있다 길래 그럼 5백 원어치의 사탕이라도 사오라고 그랬습니다. 그거라도 주고 가라고.
그랬더니 사탕 한 봉지를 사가지고 와선 우는 겁니다. 그래 그걸 놓고 떡 부러지게 잔치를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그 처사가 이북에서 월남을 했는데 그 쪽에서 어머니를 붙들어다가 어떻게 죽였느냐 하면 치마를 씌우고선 총질을 했단 말입니다. 그러니 죽은 그대로 흉내를 내는 겁니다. 며느리가 말이에요. 할 수 없어서 그분들을 사탕을 가지고 일체 다 천도를 했습니다. 천도를 하고 나니 그 이튿날 씻은 듯이 나은 거예요. 그러고는 그 후에 아들들 다 대학 보내고 집도 사서 떵떵거리며 잘 살았습니다.
잘 살면서 몇 해가 지나고 월남 전쟁이 일어났을 때입니다. 그 부인이 몰라볼 정도로 세련되어 가지고 왔습니다. 난 몰라 봤다구요. 와서 뭐라고 하느냐면요, 우리 남편이 진급되게끔 해 달라는 겁니다. 그래 정성을 지극하게 자기 딴에는 한다고 했습니다. 주인공을 믿으라고 그래도 그런 것은 아랑곳없이 스님이 사탕 몇 개 가지고도 다 해결을 해주셨는데 그게 뭐 그렇게 걱정이냐 이겁니다. 그땐 불쌍해서 그랬는데 말입니다.
아, 그런데 남편이 진급이 안되고 딴 사람이 돼서 월남에 갔습니다. 그랬다고 와서 행패를 하는 겁니다. 능히 해주고도 남음이 있는 스님인데 우릴 밉게 봐서 진급이 될 것을 안 해줬다 이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안되는 것도 법, 되는 것도 법이다. 싸움터에 나가서 후퇴를 하는 것도 법이야. 전술의 법이야. 그러니까 전진하는 것만 법이 아니라 후퇴하는 것도 법이다.” 이런 말을 해줬더니 그런 것도 아랑곳없습니다. 그러고는 갔습니다.
그런데 몇 달 있다가 다시 왔습니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똑같은 지위에서 진급을 한 사람이 월남에 가서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가 그때서야 ‘아이구, 진급 안되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겁니다. 그래서 후퇴도 바로 법이다라는 것을 알았다는 얘기죠. 그러나 그렇게 하고 가선 종무소식이예요. 편안해졌거든요.
부처님이 하시는 일, 천차만별의 그 뜻, 그 나툼, 이런 걸 여러분이 어떻게 다 아시겠습니까? 전력이 들어오는 걸 못 보듯이 그저 불 들어온 것만 보시지 전력이 오고 가고 천차만별로 그저 달라는 대로 씀씀이대로 전력이 간다는 건 모르죠. 그러니까 가고 오고 있다는 것만 알지 그걸 실제로 보진 못하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부처님이 천차만별로 천백억화신으로서 나투면서 또 진화시키고 이끌어 나가는 그 나툼의 중용을 여러분은 다 아시지 못합니다. 말로는 다 할 수 없습니다.
전에 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처사님이 가발회사를 조그맣게 했는데 하면 망하고 하면 망하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절에 다니면서 부모님 천도재를 지냈는데, 꿈에 부모님들이 보따리 가지고 나갔다가는 도로 들어오곤 하더랍니다. 꼭 천도재를 지낸 그 날 저녁에 꿈을 꾸면 도로 들어오거든요.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형제들, 난리통에 죽은 사람 할것 없이 그냥 보따리 갖고 도로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니 아직 천도가 안됐다는 걸 본인 자신이 알고는 다른 절로 가서 또 지내도 역시 그런 꿈을 꾸게 되고, 그러다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분이 찾아와서 “천도를 하러 왔습니다.” 그러길래 나는 무심코 “당신 앉은 방석에다 놓고 가시오!” 했습니다. 당신 앉은 방석에 놓고 삼배하고 가라고 그랬더니 고개를 갸우뚱하곤 나갔다 다시 들어와선 방석에 얼마를 놓고 갔습니다. 하도 속아서 인제는 그냥 이렇게라도 해보자 하는, 그냥 안되면 안되고 되면 되고 한 거지요. 그렇게 하고 갔는데 그 날 저녁에 꿈을 꾸니까요 구름을 타고 올라가면서 “얘야, 250원이 모자라서 내가 그 스님한테 꾸어가니 갖다가 갚아라.”고 하더래요. 그 이튿날 와서 고맙다고 250원을 내면서 좋다고 절을 하고 갔습니다. 그러고부터 가발공장이 부쩍부쩍 일어나서 돈깨나 벌었죠.
그런데 그 사촌동생이 원주에서 구멍탄 들이고 내는 데서 사무를 봤습니다. 그런데 남편 월급만으로는 살 수 없으니까 부인이 화장품 장사도 하고 그랬는데 남편은 폐결핵이 걸려서 피를 쏟고 그랬습니다. 언제 절에 올라왔길래 8천 원인가 시주를 하라고 그랬습니다. 8천 원을 시주하라 그랬더니 그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합니까? 그렇지만 “당신 남편을 위해서는 당신이 화장품 장사 하면서 벌어서 버선 속에 넣어둔 거 가져와, 남편을 살리려면!” 그러니까 버선 속에 넣은 걸 어떻게 아느냐는 겁니다. 하도 가진 게 없어서 못한다니까 할 수 없죠. 그 딱한 사람을 어떡합니까.
예를 들어서 법정에서 벌금을 물고 빼내오는 것처럼 벌금을 물은 셈이죠. 그렇게 해서 병이 나았습니다. 자기가 잘했던지, 뭐 어떻게 했던지 병이 나아서 서울에 있는 가발회사 지점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다리가 삐끗해서 약국에 가서 동침을 맞았대요. 발목 뼈에다 맞았는데 그게 썩어 들어갔던 거죠. 병원에 가니까 자르라고 그런답니다. 병원에서는 내일 아침까지 자르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는 그 부인이 어린애를 업고 와서 막 우는 겁니다, 그래서 낫거든 25만 원을 시주하라 그랬습니다.
그때는 그 정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고는 다시 진찰을 하니 아무 일도 없는 거예요. 그래 그때에 다리 절단하는 것을 그만둔 거죠. 의사들이 “아, 우리가 오진은 안 했는데 이거 무슨 일이냐?”고 “뭘 믿느냐?”고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불교 믿는다고 그러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하면서 내보내더랍니다. 발목만 조금 아프지 괜찮아졌는데, 돈 25만 원을 부인이 꼬깃꼬깃 손에다 쥐어주면서 갖다 드리라고 했는데 그걸 모두 시주하기에는 아까웠던 모양입니다. 5만 원은 빼고 20만 원만 보시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발목이 5만 원어치는 영 안 낫는 거예요.
그 후 몇 해가 지났는데 다시 와서는 “5만 원어치를 마저 낫게 해주십시오.” 하면서 5만 원을 그때야 가져왔습니다. 몇 해가 지났는데 5만 원을 도로 갖다 시주한 뒤에야 그 발목이 마저 다 나았다는 얘깁니다. 이게 전설 같지만 실지로 있었던 얘깁니다. 지금 아마 이 집(앞에 앉아있는 처사님 지칭) 부인은 다 아실 거예요.
그것뿐입니까, 어디? 왜 내가 이런 얘길 하느냐 하면 보이지 않는 데서 일하는 건 여러분이 못 보기 때문입니다. 언제 일을 ‘이렇게 한다 저렇게 한다’ 고 말하고 합니까? 그러기에 부처님께서는 시시때때 찰나찰나 화하시기 때문에 이게 옳으냐 저게 옳으냐, 가야 옳으냐 안가야 옳으냐 하는 분별을 하지 않는 겁니다.
돈오돈수다 돈오점수다 하는 것도 돈오돈수가 옳다는 사람은 돈오돈수에 걸린 사람이고 돈오점수가 옳다는 사람은 돈오점수에 걸린 사람이지, 그것도 아니고 그것도 아니다라는 얘깁니다. 그것도 아니고 그것도 아니면 뭐냐, 아무 소리 없이 주먹만 내밀었죠. 그러니 그렇게 흉내를 내려고 하지 말고 자기 원력을, 자기 능력을 스스로 길러야 합니다.
지금 과학적으로도 많이 나타나는 문제들을 해결한다 해도 그것은 한계점이 있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우주법계가 돌아간다는 그 사실, 살림살이가 그대로 돌아간다는 것과 내 마음 속의 그 의식들이 전부 내가 마음내는 대로 돌아간다는 그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영계도 여러분이 그저 이 보이지 않는, 항상 내가 이런 말을 하죠. 마음은 체가 없어서 원자 속에서 입자로 화해서 분신이 돼 가지고 천백억화신으로 화한다. 내가 이런 모습을 하고 이런 무기를 들고 들어가야만 일을 하겠다 하면 그 모습으로 화해 가지고 들어가거든요, 그러니까 부처님의 한마음, 깨달은 사람의 한마음이 그렇게 천차만별로 화해서 나툰다 이 소립니다.
나툼! 이걸로도 되고 저걸로도 되고 그렇게 나투면서 일을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이라크 문제가 벌어졌는데 스님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고 묻고, 또 어떤 사람은 “왜 싸움을 일어나게 했습니까?” 합니다. 허허. 아니, 욕심 많은 자는 부처님도 거둘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싸움을 하라고 그랬습니까? 하지 말라고 그랬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한마음으로 뭉쳐서 모든 것을 잘 해낸다면 끝낼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생각만 잘하면 석 달 안에라도 다 해결이 날 수도 있죠. 잘해 보세요. 참 멋있는 법입니다. 하도 멋있고 희한해서 묘법이라고 그랬죠. 그리고 여러분한테 영계의 말씀을 많이 해드려도 실감이 나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이 맛을 봐야지만 실감이 나겠지요.
어떤 때는 선연해요. 영가 천도를 하려고 하면 주욱 옵니다. 이것은 수원에 사는 일가의 이야기인데, 천도를 하려고 돈을 갖다 맡기고 갔습니다. 그런데 돈 맡기고 간 걸 알기 때문에 그날 저녁에 그 집 영가들이 오는데 말입니다. 하늘을 쳐다보니까, 왜 후욱 불면 불어지는 거 있죠? 그것이 수없이 오는 거예요. 수없이 오더니 우리 이 절 중턱에서 내리더니만 전부 사람으로 화하는 겁니다. 그러더니 뭘 가지고 오느냐 하면, 색깔 있는 담요로 둘둘 말아서는 들것에 담아서 들어오는 겁니다, 송장을. 그래서 왜 그렇게 들것에다 담아서 왔느냐 하고 물으니까, 자식들이 부모를 편히 장사 지내지 못해서 그런다는 겁니다. 염은 하지 못하더라도, 죽을 때에 불에 타기도 했지만 똥오줌 고름 묻은 것을 둘둘 말아서 그냥 묻은 거예요.
그랬으니 그게 어디 자식된 도리입니까? 그러니 눈만 떴다 하면 형제들끼리, 3형제인데 막대기를 들고 싸우는 겁니다. 싸우기만 하면 그래도 괜찮은데 되는 노릇이 없고, 3형제가 다 의절을 한 거예요. 그렇게 했다고 얘기를 해요. 자식들이 자식이 아닌 것을 죽어서야 알았다는 겁니다. 기르고 공부시켜서 그렇게 해 놓으니 이렇게 불효하더라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튿날 왔길래 호통을 쳤습니다. “왜 돌아가신 부모님을 담요에 둘둘 말아서 묻었느냐? 그리고 여기까지 들것에다 들고 오게 만들었느냐? 네가 한 그대로 들것에다 들고 왔더라.”고 하니 깜짝 놀라면서 “담요가 어느 색깔이에요?” (일동웃음) 아이구, 거기다 대고요. 그래도 못 믿어서 그렇게 묻는 겁니다. 그래서 “동네 아무개하고 너희 친척이 갔지 않았느냐? 그것도 자식들이 손수 한 게 아니라 남을 시켜서 그렇게 갖다 팽개치듯 하고, 지금 산소도 어디 있는지 찾지 못했지?” 했더니, “잘못했습니다.” 하고 백배 사죄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천도재를 지내려 하는데 말입니다. 영가들이 들어와서 요것도 사고 조것도 사러 같이 나가자는 거예요, 하하하. 그래서 내가 시장 보는 스님한테 그랬죠. “얘, 손 닿는 대로 사되, 물건 가격을 깍지 말고 네 마음 내키는 대로 사거라.” 그랬더니 정말 가서 좋은 걸로만 집어지고 많이 사고 싶어서 그대로 장만해가지고 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영가님이 자기가 노비를 가져가야 할 테니까 조금 남겨달라는 겁니다. 남겨준다는 건 뭐냐 하면 이 세상에 나올 때 노비를 해가지고 나와야 된다는 겁니다. 독불장군 없어요. 모두가 서로 나오기도 하고 들어가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해서 한 상 차리고 영가님 해달라는 대로 해주었지요. 그렇게 하고 나니 가정은 화목해지고 형제간에 우애 있어 지고 하는 일마다 잘되며, 자녀들을 외국으로 유학도 보내고 아주 괜찮아졌죠.
그 이유는 한생각의 악의 씨가 수만 개로도 벌어질 수가 있어서 집안을 어지럽힐 수도 있고, 선의 씨 또한 수만 개가 되어 부자를 만들어 놓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씨가 영이기에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천만 개를 집어넣어도 둘이 아니니 구태여 둘 셋으로 보지 마시고, 주인공에다 모든 것을, 조상들도 다 자기와 둘이 아니니 거기다 맡겨 놓으시고, 그렇게만 하신다면 영가님들이 부질없이 헤매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신 것도 못 봤지만 지금 그분들은 내가 이렇게 있는 이상 살아계시죠. 항상 더불어 같이 살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그분들만 같이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공생 공심 공체 공용 공식화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잘 아셔야 될 겁니다. 이 세상의 도리는 서로 주고 받고 합니다. 나무들이 공기를 좋게 해서 우리에게 주고, 우리는 또 나무들이 먹게끔 내놔주고 하듯이 말입니다.
괜히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개구리 한 마리, 올챙이 하나도 그냥 괜히 태어난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과거의 미생물에서부터 수없는 나날을 거치면서 진화해서 인간까지 되었다는 증명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뱃속을 보십시오. 그 생김새가 얼마나 천차만별로 다르게 생겼습니까? 그 과정을 다 거쳐서 나왔다는 증거입니다, 바로. 그 인연에 따라서 인과로써 생긴 그 뭉치가 바로 혹성입니다. 그 의식들이 별성이라고 해도 되고요.
우리 마음의 그 별성은 바로 생명의 밝음인지도 모르죠. 그래서 ‘별 하나 나 하나 별 둘 나 둘’ 그전엔 하늘을 쳐다보고 그렇게 하기도 했습니다. ‘너와 나와 직결되어 있구나. 모든 생명들이 내 생명과 더불어 직결되어있구나.’ 하고 느꼈어요. 그런 것을 스스로 알고 느낄 때에 비로소 안다 모른다는 소리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금 부탁할 것은, 나를 발견했을 때 안에서 시키는 대로 하지 말라는 것, 시켜서 좋을 일이라면 할 것이고 해서 누가 될 일이라면 ‘나를 테스트하려고 그러는 거로구나.’ 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거기 다시 놔야 합니다. 바깥에 끄달리면서 남의 말을 듣지 말고, 자기 마음에 의해서 해야만이 그것이 바로 정이며, 정심이며, 옳게 들어가는 공부입니다.
그러니 어디에도 노예가 되지 말고 어디에도 국한되어 있지 말며, 여러분이 수없이 나투면서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되고 이렇듯이 그렇게 나투는 생활을 지금 여러분은 하고 계십니다. 무심으로 양면을 껴잡아서 중용을 할 수 있어야 멋있는 자유인이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들어가야만 돼요. 여러분이 없으면 모두가 없는 겁니다. 상대성 원리도 내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겁니다. 그러니 둘로 보지 마시고 3단계 없는 3단계를 다 입수하셔서 하나도 없는 마음의 도리, 그런 나툼을 깨달으십시오. 그럼 감사합니다.
2003-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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