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 종합 > 기사보기
서암스님
죽비경책 자임…용맹정진 몰두케
생활검약·전형적인 수행자 모습

지난 3월 30일, 문경 봉암사 큰방에서 나는 만장을 쓰고 있었다. 밖에서는 영결식 준비하랴, 문상객을 맞으랴 스님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만장 쓰는 장면을 촬영하려는 기자들의 셔터소리가 울릴 때마다 나는 이 시대를 살다간 위대한 스승과의, 짧지도 길지도 않았던 기억들의 사진첩을 한 장씩 넘기고 있었다.
황금을 황금이라 말하지 않아도 누구나 진짜 금인줄 알 듯, 서암 큰스님을 모르는 불자들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다 하는 것은 그분의 실체 보다는 언론에 비춰진 그분의 이미지인 경우가 많기에, 나는 곁에서 그분을 모시고 공부한 인연의 한 자락을 여기서 펼쳐 보이고 싶다.
84년 가을, 봉암사행 완행버스는 지루하도록 오지 않았다. 3시간 가까이 기다린 끝에야 봉암사행 버스에 올라탄 나는 가을빛이 완연한 희양산 물길을 따라 봉암사에 들어섰다. 송광사에서 구산스님을 모시고 참선을 시작한 지 5~6년이 되는 때였다. 이젠 제법 선방 장판때가 묻었다는 나름의 자부심을 지닌 20대의 한창 젊은 혈기가 들끓는 때였다. 먼저 조실 스님인 서암스님께 입방인사를 드리러 조실채로 갔다.
“수좌는 어디서 왔나?”
분명 격외의 일대사 소식을 묻는 것임을 번연히 알면서도 대답을 못했다. 그런 나를 보시더니 빙긋 웃으시며 그만 내려가 정진이나 열심히 하라 하셨다.
겨울에도 스님의 방은 온기가 없었다. 조금만 불을 많이 지피어 방이 더우면 시자를 불러 주의를 주곤 하셨다. 찬 기운이 냉냉한 방에 나무판을 깔고 그 위에 좌복을 놓은 채 참선을 하시곤 했다. 밤늦게 밖을 나가다 조실채를 보면 늘 불이 켜져 있어 정진중임을 알수 있었다.
그해 겨울, 대중들은 결제 반철부터 용맹정진을 하기로 했다. 자지 않고 눕지 않으며 목욕과 삭발도 않은 채 조사의 관문을 뚫기 위하여 온몸을 내던졌는데 대중스님들의 정진열기에 감복하신 조실스님께서는 죽비경책의 인례를 자임하셨다. 경책은 혹독하여 조금이라도 조는 기색이 있으면 장군죽비로 무릎을 툭툭 치거나, 잠에 빠진 수좌에게는 힘차게 죽비경책을 내리어 우리의 정진에 힘을 보태 주셨다. 이때부터 나는, 망월사에서 참선의 맛을 본 뒤부터 불붙기 시작한 불가사의한 선(禪)의 세계에 빠져 정진의 힘을 얻게 되었으니 이는 서암 스님으로부터 힘입은 바 크다.
가끔 스님께서 붓글씨를 쓰는 날에는 먹을 가는 시봉을 해드렸는데 시간을 절약하려고 급하게 먹을 갈라치면 “수좌가 무에 그리 급할게 있어? 마음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갈아.” 하셨다.
서암 스님은 평소 무척 소탈하셨다. 법상에 오르셔도 알기 어려운 선문답이나 옛 조사를 흉내내어 게송을 읊는 등의 행위는 하시지 않았다. 그저 간절히 공부하라고 일러주실 뿐이었다.
또 전형적인 수행자의 모습으로 일관하셨다. 조실이니 주지니 하는, 자리에서 올 수도 있는 권위적인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실이란 자리도 부득이 후학들을 위해 맡으셨을 뿐이다. 그저 대중의 한 사람으로 행동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매양 검소하기 이를데 없었다. 다른 스님들이 가은까지 가는 30리 길을 택시를 타도 스님은 걸어서 가은까지 가시고 버스를 타고 김천까지 가시고 그런 다음 기차로 전국 여기저기로 법문을 다니시거나 일을 보러 다녔다. 한번은 김용사에서 예수재에 스님을 법사로 청했다. 내가 스님을 시봉하게 되었는데, 시골 완행버스를 몇 번씩이나 갈아 타며 가시는 것이었다.
이후에도 나는 종종 봉암사로 스님을 찾아뵙거나 인천에 법문을 오실 때 찾아뵙거나 했다.
서암스님은 93년 조계종 종정에 오르셨다가 서의현 전 총무원장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종정을 사임하시고 조계종을 탈퇴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시더니 홀연히 산으로 들어가셨다.
그때 나는 팔공산 제2석굴암에 머무시던 스님을 신도들과 찾아뵙게 되었는데 많이 수척해진 모습임에도 방에서 나오셔서 신도들을 위하여 법문을 들려주셨다. 그때 다른 신도 일행이 찾아오자 스님께서는 지친 노구를 마다 않으시고 다시 법문을 하시는 것이었다.
지인무기(至人無己)요 성인무명(聖人無名)이라 했던가.
지극한 도에 이른 사람은 자신을 내세우지 아니하고 성인은 아예 이름마저도 초탈한다.
서암 스님이야말로 이런 경지에서 유유자적하며 화광동진의 교화를 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서울 정법사 주지
2003-06-11
 
 
   
   
2024. 11.2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