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자비’ 다 충족하는 길 모색
조계종의 멸빈자 사면 논란 속에, ‘멸빈’ 징계 폐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가 최근 들어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아직까지 본격적인 논의가 되고 있지는 않지만, 이 같은 견해가 나온 것은 그만큼 멸빈 징계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종단 유지를 위해 멸빈 징계를 없앨 수는 없다는 반론도 거세다. 엇갈리고 있는 양쪽의 견해를 들어본다. <편집자>
현각스님
조계종 법규위원
비정치적 논리에 입각한 징계 필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멸빈 징계는 필요하다. 어느 집단이든 다수의 이익을 위해서는 일정한 규율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질서유지가 힘들어진다. 멸빈 징계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멸빈 징계 외에 다른 방법으로 질서를 유지할 수 있지 않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지만 교단을 어지럽히고 다수의 이익을 침해하는 경우라면 법의 준엄함이 어떤 것인지를 일깨워 주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멸빈 징계가 자비문중에 맞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는데, 자비문중과 징계는 별개의 문제다. 법이란 모두가 자율적으로 책임과 의무를 다 할 때 불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회도 법으로 여러 가지 형벌을 규정하고 있다. 즉, 집단을 운영하기 위한 법질서와 불교의 이념은 전혀 다른 측면이다. 이것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물론 멸빈 징계와 관련해 보완해야 할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98년 징계자의 경우 정치적으로 불이익을 당한 측면도 있고, 또 징계를 해놓고 자꾸 사면을 거론함으로써 종헌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도 문제다.
따라서 멸빈 징계를 신중히 하면서도 비정치적 논리에 입각해 실행해야 한다.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징계의 근본취지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법타스님
은해사 주지
화합중요, 제적강화 등 불교이념 맞춰야
세계적으로도 사형제가 폐지되고 있는 마당에 종교집단에서 사형이나 마찬가지인 멸빈 징계를 두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멸빈 징계 자체를 폐지해야 마땅하다. 대신 제적이나 공권정지 징계를 강화하면 된다. 삼보정재를 탕진했거나 파렴치범 등 승단의 권위를 추락시킨 사람들은 제적을 하면 되고, 제적 기간이 끝나도 공직에 취임하지 못하도록 하면 교단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
종단은 하나의 집단이고, 따라서 무엇보다 화합이 중요하다. 종책이나 종단의 대소사에 의견을 달리할 수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정치적인 보복 차원에서 징계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멸빈 징계에서 이런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적 이해에 따라 사면 얘기가 나오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면 얘기가 계속해 나오는 것은 자칫 종헌의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징계를 하고 필요에 의해 사면을 할 바에는 아예 멸빈 징계 자체를 폐지하는 것이 낫다는 말도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현재의 종헌ㆍ종법은 지나치게 사회법 흉내를 내고 있다. 원론적으로는 모든 징계가 계율에 입각해 이뤄져야 한다. 계율에 멸빈이라는 징계는 없다.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인 이상 나도, 남도 깨우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멸빈제도문제 ‘종특위’에서 다룰듯
종헌 명문화는 62년 통합종단 이후
‘멸빈 징계’가 조계종 종헌에 명문화된 것은 1962년 통합종단 출범과 함께 종헌이 제정되면서부터다. 그러나 당시에는 ‘멸빈’이 아닌 ‘체탈도첩’이라는 용어가 사용됐다. 그러다가 94년 종단 개혁때 종헌이 개정되면서 ‘체탈도첩’을 ‘멸빈’이라는 용어로 바꾸었다. 용어의 차이는 있지만 ‘승려증을 박탈하고 승적을 말소한다’는 의미는 같다.
멸빈 징계의 유래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시대 국가가 승려에게 허가증을 발급해 주는 제도, 즉 ‘도첩제’가 시행됐고, 체탈도첩(도첩을 박탈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 유래된 말이다. ‘멸빈’은 최소한 고려시대부터 시작돼 현재까지 유지돼 오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최근 멸빈 징계자 사면이 조계종의 최고 핫이슈로 떠오르면서 ‘멸빈제’ 자체의 유효성 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이 논란의 중심에는 ‘멸빈’이 불교의 자비사상과 맞지 않다는 점, 그리고 멸빈 징계 후 사면 필요성이 계속해 대두됨으로써 종헌 질서가 무너질 우려가 있다는 두 가지 측면이 자리 잡고 있다.
지난 4월 조계종 중앙종회에서 구성된 종헌종법개정특별위원회 위원장 중원스님은 “멸빈제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의견 수렴 중”이라고 말했다. 한명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