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사원에 대한 열망
인도의 기후는 매우 더운데다 습기까지 많이 머금고 있다. 이러한 기후 조건을 견디려면 산중턱에 석굴을 뚫어야 시원한 예배장소가 된다. 인도의 석굴사원은 인도만의 독특한 자연환경에서 비롯된 산물이다. 그러나 석굴사원은 인도에만 머물지 않고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퍼져나갔다. 석굴사원은 더 이상 기후의 산물이 아니라 문화의 산물이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나라다. 우리는 인도처럼 암반이 넓게 발달하지도 않고 또 인도처럼 부드러운 사암도 아닌, 좀처럼 정이 들어가지 않는 견고한 화강암이어서 깊은 굴을 뚫는다는 것은 엄두를 낼 형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석굴사원을 만들었다. 인도나 중국처럼 광대한 규모가 아니고 온전한 석굴도 아니지만 석굴사원의 형식과 분위기를 내는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네모난 돌기둥에 각 면마다 불상을 새긴 사방불이다.
원래 인도에서는 챠이티야(caitiya)라 하여 말발굽 모양의 길쭉한 석굴 끝에 반구형의 스투파를 설치하였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석굴 안의 스투파는 바깥에 불상이 새겨졌고 급기야 엘로라 석굴(Ellora Cave)에서는 네모난 돌기둥이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의 석굴사원에서는 바로 엘로라식으로 석굴 가운데 탑주(塔柱)라 하여 천장까지 닫는 네모난 기둥을 세우고 동서남북의 면에 불상을 안치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탑주 형식은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중국처럼 석굴을 뚫는 일이 여의치 못하자 네모난 돌기둥에 불상을 새기되 그 위는 목조건물을 씌워 석굴사원의 모습을 갖추었다. 예산 사방불, 경주 굴불사지 사방불상, 경주남산 칠불암 등이 그러한 예이다. 석굴사원의 형식을 따랐지만, 반은 석굴사원이고 반은 목조건축인 것이다.
석굴암도 마찬가지이다. 석굴을 뚫을만한 자연조건이 되지 않자 굴을 뚫는 대신 산 중턱에 돌로 굴을 쌓아 올려 석굴사원을 조성하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더군다나 석굴암은 인공적으로 쌓은 석굴이기에 신라의 정밀한 기하학으로 구성하여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창출할 수 있었다. 이미 일제강점기 때 요네다미요지(米田美代治)가 그 기하학적 원리를 발견하였고, 강우방 교수와 문명대 교수가 그 기하학적 원리를 불교 교리와 연계시켜 해석하려는 시도를 행한 바 있다. 그리하여 인도에서 시작된 석굴사원의 형식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의 끝자락인 신라에서 마감하는 석굴사원의 벨트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석굴사원에 대한 열망은 인도와 다른 자연환경일지라도 우리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꿩 대신 닭이라고 석굴이 불가능하자 석조와 목조를 혼합하여 사방불 중심의 금당을 만들었고, 치밀한 기하학적인 원리로 석굴암을 세계에서 가장 조화롭고 아름다운 석굴사원으로 만들었다. 사방불과 석굴암. 이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석굴사원에 대한 열망이 강한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경주대 문화재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