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
문
항상 싱그럽게 살라고 법을 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몸에서 벗어나야 자기를 굴린다고 하셨고, 창살 없는 창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마음의 항아리를 굴릴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다 마음을 가지고 있고 마음을 내고 들이면서 살고 있습니다. 마음을 들이고 내고 하면서 살고 있는 그 자체가 마음의 항아리를 굴리고 있는 것이고, 누구나 마음이 있어 몸이 움직여지는 것인데 굳이 몸에서 벗어나라고 하시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답
우리가 왜 마음공부를 해서 벗어나야 하는가를 늘 말씀드립니다만, 우리는 우리 몸 안의 자생중생들과 더불어 같이 한데 뭉쳐진 혹성이라고 할까, 그 안에서 모두 별성이 움죽거리는 것과 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 몸 하나가 우주라고 해도 되고 별성이라고 해도 됩니다. 모두가 몸 안에서 벗어나야 마음대로 움죽거릴 수 있는 자재권을 가질 수 있다 이겁니다. 여러분 몸 속에서 그 자생중생들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악업 선업이 서로 뭉쳐지고 영혼의 뿌리와 더불어 자기를 형성시키기 위해서, 즉 말하자면 정자 난자를 빌어서 이 세상에 형성시켜서 자기가 끌고 다니는 겁니다.
보십시오! 나무의 싹을 말입니다. 나무의 싹이 제 뿌리를 믿지 않는다면 그 싹은 죽고 말 겁니다. 제 뿌리를 믿어야 합니다. 뿌리가 없으면 싹이 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싹은 제 뿌리를 믿어야만이 그 뿌리에서 수분과 철분, 모든 것을 올려보내기 때문에 나무는 푸르르게 살 수 있고 또 그 싹은 태양열과 공기를 흡수해서 내려보낸다 이겁니다. 이렇게 올리고 내리고, 즉 모든 것이 귀합이 돼서 정맥 동맥이 돌아가듯 사람이 밝게 움죽거릴 수가 있고 자유권을 얻을 수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보는 것 듣는 것 아는 것, 즉 말하자면 오신통이라고 이름합니다. 듣는 것, 보는 것, 가고 옴이 없이 가고 오는 것, 남의 속을 빤하게 알 수 있는 것, 또 어디서 왔는지 아는 이 다섯 가지를 여러분이 다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통 속에서는 자유롭게 굴릴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바깥으로 탁 나와야 내 몸을 자유스럽게 굴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쓸 수도 없거니와 마음대로 마음을 쓸 수 없기 때문에 몸을 마음대로 움죽거릴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몸에서 벗어나야 되고, 둘째는 우리가 물주머니에서 벗어나야 지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고기들이 물 바깥에 나오면 죽기 때문에 물을 벗어나지 못하듯이 우리도 물주머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격이나 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각자 자기 통신 안테나를 먼저 세워놔야 통신을 받을 수도 있고 통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니 너 자신부터 알고 너부터 깨우쳐라. 과거 ‘부’와 현재 ‘자’가 서로 상봉하라.”고 하신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이 모든 진리를, 넓게 마음을 가지고 파악하셔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지금 시점의 어려운 과정을 타파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해주는 게 아닙니다. 누가 밥을 대신 먹어서 배부르게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대신 죽어줄 수도 없는 것이고 대신 누가 아파 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각자 여러분이 다 알아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그 깊은 뜻을, 그 오묘한 도리를 체득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뜻을 모른다면 우리가 불제자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사실 불제자든 불제자가 아니든 전부 불제자이지 불제자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 뜻을 잘 알아야 합니다.
고정된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리를, 지금 참구하고 진리를 배우고 있는 겁니다. 부처님 법이 진리에서 벗어나는 게 없으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그저 이름이나 형상을 보고 빌러 다니고 기도하러 다니는 그러한 공부를 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한 철 살면서 그렇게 공부를 하게 되면 세세생생에 자유로움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어떤 분들은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고 하지만 죽어서 요다음에 태어나도 자기가 아는 것만큼만 가지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똑똑함이 천하없어도 아량과 둥그런 진리를 모른다면 대통령 노릇도 못한다는 거죠. 부모의 은혜로 대통령이 됐어도 자기의 은혜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의 공덕이 아니기 때문에 부모의 공덕으로써 그렇게 된 사람은 나중에 회향을 아주 거북하게 하게 되기도 합니다. 욕을 먹고 그렇게 회향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본인 빼놓고 대신 밥 먹어주고 대신 살아주고 대신 똥 눠주고 대신 잠자주고 대신 아파 주고 대신 죽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진리를 깨닫는 것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항상 내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자기 뿌리인 주인공을 진실히 믿고 걱정을 하지 말라고 그럽니다. 하늘이 무너진다 하더라도 무너지게 하는 것도 그 자리고, 또 그걸 한 손가락으로 들어서 무너지지 않게 하는 것도 그 자리니까 거기에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진짜로 믿는다면 걱정할 게 하나도 없어요. 죽고 사는 생사를 다 버렸거든요. 생사를 가지고 논의(論議)한다면 항상 내 목숨이 살아야 한다고 하고 집착하고 끄달리기 때문에 모든 게 진행이 좋게 돌아가는 게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내 주인공 뿌리에 합쳐서 둘 아니게 거기다 놓는다면, 그리고 어떠한 일이 생겨도 감사하게 놓는다면 그게 둘이 아니게 운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 철 사는 동안 이 마음 도리를 공부해서 우리 몸 안에서 벗어나고, 지구 안에서 벗어나고, 우주 안에서 벗어나야 우리는 인간이라고 하고 불제자라고 자부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자유자재할 수 있는 그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우리는 이 세상을 모두 탐험해가면서 앉아서 죽어 가는 고목의 소리라도 들을 수 있습니다.
놓치지 않고 공부하려면…
문
주인공이라는 반야줄을 항상 놓치지 않고 수행해 나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생활해 나가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순간순간 놓치지 않고 잘해 나가는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답
그냥 그대로 여여하게 사는 건데 놓치고 안 놓치고가 어디 있습니까? 아니, 자나깨나 모두 각자 주인공으로 인해 움직이면서 살아가는 건데 놓칠 게 어디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거는 잘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자기 생각일 뿐이죠. 그냥 생각일 뿐입니다. 주인공은 본래 줄창 나를 이끌어 가고 있어요. 과거에도 이끌어 왔고 현재도 이끌어 가고 미래에도 또 이끌어 갈 겁니다. 그런데 생각으로 ‘아이구! 요 줄을 꼭 붙들고 놓치지 말아야 할 텐데.’ 하고 생각한다면 그거는 오히려 공부하는 데 군더더기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맘 턱 놓고 ‘내가 하나하나 움죽거리고 보고 듣고 말하고 사는 것이 그대로 주인공에서 굴리는 거로구나. 주인공으로 인해 그냥 사는 거로구나.’ 하면은 바로 제 나무에서 제 뿌리를 믿는 게 되는 거고, 제 뿌리를 믿어야 모든 에너지를 올려보내서 나무에서 꽃도 피고 열매도 맺으니 모두를 먹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모두 그렇게 믿지를 못하는 겁니다. 열매가 제 나무에서 무르익어야만이 과일 하나에서도 만 가지 맛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꼭 붙들고선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건 자기 사량이요 관념일 뿐입니다. 놓치고 안 놓치고가 없어요. 본래 하고 있으니까요. 반야줄이라는 건 자기 마음 줄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재를 지내거나 하더라도, 또 무슨 천도재니 무슨 천도재니 할 것도 없이 그냥 반야재(般若齋)입니다. 그러고 모든 것에 감사한 줄을 알아야 합니다. 감사한 줄을 모르고 살면 충분히 주어지질 않습니다.
우리가 단 몇 시간도 물이 없어서 못 마시면 못 살고, 불이 없어도 못 살고, 바람이 없어도 못 살고, 공기가 없어도 못 살고, 흙이 없어도 못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매사에 감사한 줄을 모르니 어떻게 합니까? 모든 일체 만물이 다 스승 아닌 게 없어요. 왜? 독불장군은 없으니까요. 내가 세상에 나와 보니까 모두 있더라 이겁니다. 그래서 모두 다 내 스승 아님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움죽거리는 것들, 보이는 것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내가 그걸 보지 않았으면 배울 수가 없고, 머리가 안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모두 있어 주니까 내가 알고 배울 수가 있는 거죠. 그러기 때문에 돌 한 쪼가리도 내 스승 아닌 게 없다 이 소리입니다. 그렇게 겸손하게 둘 아니게 살아야 합니다. 일체에 감사한 줄 알고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마음을 넓히고 산다면, 우리 몸 속에는 은하계의 샛별처럼 자생중생들이 돌아가고 있어요. 그게 다 우주하고도 직결이 돼 있고 수레가 돌듯이 우리가 돌아가는 것도 다 직결이 돼 있고, 연결이 돼 있고 가설이 돼 있다는 말입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살면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가 말한 걸 남이 못 들었다고 해서 다 모르려니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일체가 다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직결이 돼 있기 때문에 다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도를 이루면은 전체가 다 통신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말입니다. 돌도 생명이 있어서 말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붙들고 말고도 없이 그냥 순간순간 놓치지 않고 반야줄을 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좌선시 관하는 방법
문
한마음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불자입니다. 스님께서는 일상생활 중에 늘 주인공에 관하라고 하십니다. 그럼 좌선을 할 때도 주인공을 화두 삼아 들고 있으면 되는지요? 저는 좌선을 즐겨 하는 편인데 좌선의 방법을 자세히 알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답
모든 것이 한군데 주처에서 나고 든다는 것만 알면 그냥 가만히 앉아서 뜻으로 다 통하게 됩니다. 왜 뜻으로 “참 광대무변하구나. 참 그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구나. 참 신비하구나!” 하는 그런 환희심을 느끼실 때가 있죠.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급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렇고, 참 이 자리에서는 천차만별로 돌아가면서 갖은 행을 다 하기 때문에 어떠한 힘만이 있다고 할 수가 없는 거죠. 그게 원심력입니다. 원동력 말입니다. 주처 말입니다. 그게 바로 오신통을 굴릴 수 있는 능력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이름지어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무거운 뜻이 있다. 예전에는 “이 뭣고?” 하고서 관했는데 지금 세상에는 너무 아는 게 많아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정말이지 너무 훌쩍 뛰어넘어가리만큼 아주 머리가 선명해지고 정말 많은 지혜를 얻고 세상물리가 터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아는 게 많기 때문에 지금 세상에는 “이 뭣고?” 해서는 생 맷돌 돌아가는 거와 같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뜻으로 본다면 이게 들이고 내는 데 문이 없어서 들어갈 문도 없고 나올 문도 없이 나고 든다는 걸 안다면, 이게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잘하든 못하든 자기가 하는 거지 누가 하는 겁니까? 근데 자기가 아니라 진짜 자기를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놓을 수 없는 나가 있어요. 거기서 다 들이고 내고 천만가지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든, 또 보이는 세계든 육신과 더불어 같이 회전하면서 하고 있으니까, 하고 알고 있으면 그 알고 있는 묵지룩한 심력이 있어 작용을 한다는 얘깁니다.
그 심력을 딱 인정하고 관한다 하면은 거기에서 언제나 힘이 배출이 되는 것이며, 거기만 지금 보고 있습니다. 육신의 눈은 더 뜨지도 않고 내려뜨지도 않는데 이 마음의 눈은 거기를 지금 향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마음의 눈이 거길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장이라고 그랬거든요, 지장. 지장은 땅 속에 묻혀있는 보배를 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몸 속에 묻혀있는 보배를 말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 보배가 바깥으로 나와서 광을 내면 바로 관세음입니다. 그러니까 관세음이 따로 있고 지장이 따로 있고 뭐가 따로 있고 뭐가 따로 있다고 하면 어지러워서 종교를 어떻게 믿습니까? 귀찮아서 어떻게 불교를 공부하겠느냐는 겁니다. 나같이 게으른 사람들에게 “야, 산신 찾으러 가라, 칠성 찾으러 가라.” 이런다면 그 못 믿을 겁니다. 내가 피곤해서 죽겠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여기 가야 되고 저기 가야 되고, 여기 놔야 되고 저기 놔야 되고, 그렇게 못하면 또 온통 끄달려서 괴로워하게 되는데 그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예 그런 것을 우리는 다 타파하고 부처님 한 분 모셔놓고, 그 몸이 내 몸이고 그 마음이 내 마음이고 그 생명이 내 생명이니 둘이 아닌 그 점을, 도리를 아시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일체 만물의 근원과 물질과 모든 이름과 허공의 이치를, 유생 무생을 다 알 수 있고 다 말할 수 있고, 조그만 풀잎하고도 같이 말할 수 있고 송장하고도 말할 수 있고, 말 없이도 말할 수 있고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눈으로, 보이는 눈은 건당 뜨고 마음의 눈으로 거기를 지켜보면서 관하세요. 각자 여러분 마음의 눈 말입니다.
깨달음을 얻었다 해도
문
참선 등으로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해도 깨닫기 전에 자신을 괴롭히던 상황들이 여전히 계속된다면 어찌해야 하는지요? 자기는 변했으나 상대방은 변하지 않으면 어찌해야 하는 겁니까? 어떤 사람은 이런 것을 빗대어 불교는 바위에 계란 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하였습니다. 가르침 바랍니다.
답
모두가 내 몸 아님이 없고, 내 아픔 아님이 없고, 내 형상 아님이 없는데 상대를 밟고 사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도리를 다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법은 없을까요? 그래서 삼천 년 전에 부처님께서 그 뜻을 일러 주셨고 지금까지도 일러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도리를 깨달았다 해도 각각 있는 게 아니에요. 이 도리를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마음은 체가 없어서 깨달은 사람들의 마음이 아무리 많이 마음을 통해서 들어와도 두드러지지 않고, 여러 부처님들의 마음이 바닷물 내놓듯이 다 내놔져도 줄지 않아요. 이렇게 광대무변하고 묘한 도리가 우리들에게 다 주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체가 시공을 초월해서 돌아가는 진리를, 하나로 묶여서 더불어 같이 돌아가고 같이 살고, 말과 마음이 이어지고 돌아가는 것을 바로 여래라고 하죠. 그리고 공덕이라고 하고요. 일을 할 때에 한 사람이 하는 것도 있겠지만, 문제가 생기면 거기에 관여가 된 사람들은 전부 모여야 해결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럿이 모이지 않곤 혼자 해결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주 쉽게 얘기를 한다면, 더불어 같이 모여서 공동 분담으로 해결을 하는 것을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주인공! 우리가 공(空)해서 전체가 다 이어져서 돌아가니까, 내 주인을 근본으로 치고 내 마음의 주인으로 인해서 모두 보풀어져서 더불어 같이 돌아가는 그 자체를 주인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천차만별의 그 광대한 법은 누가 죽는다 안 죽는다, 잘 먹고 산다 못 먹고 산다 이런 걸 떠나서 지구를 집을 삼아서 살고 있는 생명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도리를 웬만큼 납득하고 이해하기 이전이라도‘진짜로 내가 나를 움죽거리게 하는구나. 나를 살리는구나. 나를 형성시켰구나.’ 하는 걸 아신다면 어떤 것도 부럽지 않고,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건 왜냐하면 내가 그토록 알고 믿고 당당하니까 어떤 게 온다 하더라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게 되는 거죠. 잘되는 것만이 부처님 법이 아닙니다. 잘되고 못되고 간에 양 갈래 길을 다 자기 한 손에 쥐어야만이 그걸 부처님 공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냥 아무렇게나 사는 것 같고 우연히 사는 것 같지만, 팔자 운명으로 사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닙니다. 아까 말을 잘못했다면 그 잘못한 게 그대로 나한테 돌아올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침착하게 한생각을 잘 해서 말을 잘 하고 행을 잘 해라, 이런 뜻입니다. 그 도리를 모르고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해서 내 앞에 닥쳐오는 것은 팔자 운명의 탓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탓입니다.
팔자 운명이 어디 붙어 있습니까. 돌 하나도 나무 한 그루도 우리 인생들도 다 쉴 사이 없이 돌아가고 있는데 거기 뭐가 팔자니 운명이니 하고 붙을 게 있겠습니까? 다만 살아가면서 내가 생각을 잘 못하고, 행동을 잘 못하고, 계산을 잘 못해서 그런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머리로 계산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눈뜨고 있지 않습니까. 귀 열고 있지 않습니까. 발 움죽거리고 냄새 맡지 않습니까. 다 이렇게 뚫어 놨단 말입니다. 그래서 앞뒤를 다 살펴보고, 그냥 스쳐 가는 대로 앞뒤를 보고 행해라, 이런 뜻이에요. 그것이 그대로 연기법이며 그대로 공법이며 그대로 세상 법입니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살아오던 습이 있어서 마음으로 그 습을 놓질 못하는 겁니다. 그 습을 뗄래야 뗄 수가 없는 게 예전부터 그렇게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면서 한다 못한다라는 이유가 너무나 많고, 또 알면서도 습이 나오는 그대로 그냥 행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실천을 해 볼 생각도 안 하고 말입니다. 난 지금 여러분의 인생살이에 극치적으로 들어가서 말을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공부함으로써 지구라는 집 하나가 달라집니다. 옛날에는 물로 죽고 불로 죽고 이렇게 세계가 극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사람들 마음에 의해서 모든 것을 전멸시킬 수도 있고 전부 살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그렇게 하는 한편 세세생생을 얻게 돼서 불국토를 만들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러니 진짜로 나를 믿는다면, 각자 나를 믿는다면 거기에서 힘이 배출돼 나오기 때문에 육체적인 나는 걱정할 게 하나도 없어요. 걱정할 게 요만큼도 없습니다. 나라 걱정도 할 게 없고, 하늘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 할 게 없고, 지구의 오존층이 파괴돼서 다 죽는다 하더라도 아무 걱정이 없어요. 그런 힘이 있으면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힘이 없기 때문에 온통 걱정을 하고 돌아치는 겁니다. 자기에게 그런 힘이 있다면 아무 걱정이 없으면서도 그것은 다 대치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법당에만 부처님 법이 있는 게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또 불교라는 것이 목탁만 두들기는 게 불교가 아닙니다. 불(佛)이라는 건 일체 생명을 뜻하고 교(敎)는 서로 전달하고 말하고 돌아가는 자체를 말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활 자체가 그냥 불교입니다. 우리가 모두 죽고 살고 생활하고 이러는 것이 그냥 그대로 불교요 종교입니다. 여여하게 그냥 자유스럽게 살라고 해서 인간으로 진화돼서 태어났고 인간이 되면 만물의 영장이다, 이렇게 말을 하고 또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부처다, 이렇게 말을 했어요. 그런데 그런 구실을 바로 하면 좋겠는데 그 구실을 못하는 거죠. 그래서 예전에도 얘기했습니다. 그냥 소를 타고 피리 불면서 여여하게 돌아가는 것이 진리이고 도다 이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디 가서 찾으려고 헤매는지 모르겠습니다. 나한테다 두고 어디 가서 도를 찾습니까?
그래서 지금 부족한 거는 마음의 정신세계를 판단치 못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가 애를 쓰는 겁니다. 우리가 이 공부를 해서 지금 일체 만물만생이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이치를 포착했다면 과학자들한테 가고 옴이 없이 전달을 하게끔 돼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지구 안에만 사는 게 아니라 집을 딴 데다 지어서 살 수 있는 계기가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이 아닙니다. 지구 안에서 부족한 재료를 딴 데서 끌어들이기도 할 수 있는 그런 여건도 되는 겁니다. 수명이 짧은 것을 길게 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으로선 첨단의 진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가정에서 한 몸뚱이도 지탱을 못 하고 이렇게 간대서야 어떻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름을 듣겠습니까? 그러니 내면의 심봉을 붙들고 하루하루 생활해 가면서 우리가 마음의 진화를 하고 마음의 계발을 해야 됩니다.
올바른 기도 방법인지요?
문
저는 잠자리에 들기 직전 또는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일체 주인공이 하는 건데, 주인공! 당신이 하는 거니까 당신의 뜻대로 운영하십시오.’ 이렇게 기도하는데 이것이 올바르게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
당신 뜻대로 하라고 하는 건 벌써 둘로 나누는 겁니다. 기도를 하는 건 둘이 되지 않습니까? 상대를 두고 누구더러 뜻대로 하라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상대를 두고 기도를 하는 건 이미 나와 나를 둘로 보고 생각을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어떤 일이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대로 나를 성숙시키기 위한 수련과정이다 생각하고 감사하게 놓고, 되는 것은 되는 것대로 감사하게 돌려놓으라는 겁니다. 그러니 양면이 다 감사한 겁니다. 오늘도 그저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서 모든 걸 그 뜻으로 다 거기서 나고 든다는 거를 알면은 뜻으로 감개무량하게 감사한 일이니 뭐 매일 매일이 감사한 겁니다. 그러니 만날 오늘이죠 뭐, 오늘. 그렇게 해 나가시는 거지 기도 드린다는 둥 뭐 당신 뜻대로 하라든가, 뜻대로 하긴 뭘 뜻대로 합니까?
예를 들어서 정성을 지극하게 들인답시고 하다가 보면, 만약에 기계 고리가 말입니다. 지금 나는 이 고리에다가 이 물건을 달아줘야 됩니다. 근데 기계 고리가 수천 개가 지금 돌아가고 있습니다. 고리가 저절로 자동적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근데 고리에다 달아야만 되거든요. 그렇게 쉴 사이 없이 수없이 돌아가는데 들어서 척척 걸어줘야 돌아가는데 이거를 잘해서 달아준다고, 이걸 정성껏 잘해서 하려고 그러다 보면은 벌써 빈 고리가 저만치 다 가버리는데 어떻게 그걸 달아줍니까. 우리가 벌써 생각했다고 하면요, 생각했다고 보면 벌써 그 생각한 거는 뒤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뭐든지 발견했다 하거나 생각했다 하면 벌써 그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저녁이든 아침이든 잠시 잠깐이라도, 단 5분이라도 조용히 앉아서 마음을 착 가라앉히고 둥글리면서 해나가는 만법의 그 기준을, 내가 타의의 상대방과 만나는 기준과 모든 점에 의해서 “당신을 믿어. 당신이 형성시킨 이 몸이 아프니깐 당신이 해결을 해야지. 당신밖엔 해결할 수 없잖아.” 하고 믿고 놓는다면 낫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게 되게 해주시오. 저게 되게 해주시오.” 하고 비는 기도로 알기 때문에 그 언어를 좀 바꾼 겁니다. 언어에 따라서 행동도 나오기 때문에, 저는 기도라는 말을 쓰지 않고 관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도라고 하는 것은 직접 자기가 자기한테 맡기는 게 아니라 타의에서 구하는 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인식이 돼가고 있습니다. 기도라는 그 말 자체가 좋긴 좋은데 지금 모두들 그렇게 하지를 않기 때문에, 상대방에 비는 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말을 관하는 걸로 바꿔서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될 수 있다면 우리가, 일체만법이 다라고 그랬죠? 하여튼 몸이 아프거나 한다면, 지금 내 몸 속에는 공장장들이 여간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나의 근본, 선장이 회장입니다. 그 회장이 사장과 더불어 같이 공장장들을 죄 이끌고 나가는 선도자입니다, 내 마음 하나가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생각하기를 다 한마음으로 돌려서 거기에서 나오는 거 거기에다 놓는다면 자기가 자기 죽이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생활과학입니다. 이것을 하나하나 체험을 해서 돌아간다면 그대로 천체물리학을 짐작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니깐 그런 줄 아시고 이 마음의 도리를 터득해서 자유스럽게들 사시기 바랍니다.
놓는 법과 굴려놓는 법
문
현대불교신문을 통해 마음공부를 접하게 된 불자입니다. 스님께서는 어떤 어려운 경계가 닥쳤을 때 무조건 주인공에 놓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굴려서 놓아야 한다고 하시는데 저는 초발심자인지라 많이 헷갈립니다. 놓는 법을 자세히 알려주십시오.
답
마음을 닦는 법이란 먼저 마음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고 마음을 다스릴 줄 안다면 바로 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굴려놓을 줄을 안다면 굴려놓고서 다시 끄집어내서 착을 가지고 쥐고 놓질 못해서 다시 쥐고 나오는 그러한 문제가 없도록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이것이 진실로 들어가는 지름길입니다. 가정에 어떠한 애고가 닥쳐도 타파해나갈 수 있는 것이 바로 놓고 가는 도리입니다. 지혜롭게 바로 돌려놓는 그 자체를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굴려놓는다고 하니까 다른 뜻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마음이라는 것은 체가 없기 때문에 경계가 닥쳐오는 것도 체가 없는 데서부터 체가 있는 데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이 꼬여 들어가는 것도 마음으로부터 일이 벌어져 가지고 바깥으로 어지럽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어떠한 일이든 그것은 마음으로 하는 거니까, 마음으로 꼬여진 거니까, 마음에서 모든 게 벌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상대가 되고, 상대가 벌어지고 얽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 해결을 할 수밖엔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생활 속에서 어떠한 문제가 닥쳐오더라도 미리미리 대처를 해서 카바를 해나갈 수 있는 그런 여건이 필요하다 이겁니다. 버스 지나간 뒤에는 이미 늦어지는 겁니다. 버스가 이미 지나갔는데 아무리 버스 보고 다시 돌아와서 내 앞에 서라고 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도 당당하고 에누리가 없고 지혜롭게 하라고 가르치셨지 허무맹랑한 걸 가르쳐 주신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리하게 욕심을 내거나 아무 생각 없이 보증을 서거나 아무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지 말고 자기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장소도 마련하고, 어떻게 해야 사람이 많이 다니는지, 요런 물자는 어느 지점에다 가게를 내야 잘 될 건지, 지금 현 사회에서는 어떠한 것이 제일 잘 먹혀 들어가는지, 어떠한 것을 잘 쓰고 들어가는지를 모두 잘 살피면서 모든 것을 해나가야지 그것도 보지 않고 아무 데나 그냥 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돈 꾸고 뭐 해서 그냥 딸깍 망해 가지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살고 있는 집까지 다 뺏기게 되는 그런 행동은 없어야 되겠죠. 이것이 모두 여러분이 지혜롭지 못한 탓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부를 하면서 내 마음을 다스려 나가면 벌써 스스로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끔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만드는 겁니다. 이건 자동적입니다. 그러니깐 이 마음공부 하고 가는 사람들에 한해서는, 당신이 마음먹는 데에 따라서 법이 된다 이 소립니다. 그런데 믿고 맡기고 그냥 하지 못하고, 믿고 맡겼다고 하면서도 불안하니까 그거를 다시 끌고 나와서 또 그거를 생각합니다. 놨음에도 불구하고, 맡겼으면 맡긴 대로 지켜봐야 할 텐데,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에게 일을 부탁할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을 믿고 맡겨야 그걸 받은 사람이 일을 알맞게 충실히 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일을 맡겼다 다시 뺏고 또 일을 맡겼다 다시 뺏고 이러면 일을 제대로 해낼 수가 없지 않습니까? 바로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깐 다시 말해서 이미 맡겼다면 그대로 지켜볼 일이지 그거를 도로 뺏어들고 나오지 말라 이 소립니다.
여러분이 될 수 있으면 잘 집어먹고 잘 알아듣고 수행을 잘 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겁니다. 부처님께서 삼천 년 전 그 때 그 시절의 용어를 가지고 말씀하신 것이 우리 지금 시대 사람들에겐 상당히 어려워서 그걸 뜻으로 파악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지금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은 지금 용어로써 보고 나가고 듣고 나가는 데서 그냥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 말로만 듣고서 그냥 넘기지 마시고 나라에 위기가 닥쳤든, 가정에 위기가 닥쳤든, 어떠한 개인적인 문제로 위기가 닥쳤든 그거는 마음먹기에 달렸지 않겠습니까? 다가오는 걸 타파해나가고 실천을 하려면 지혜롭게 굴려서 자꾸 갈아 써야 합니다. 갈아놓고 갈아 써야죠. 사람 몸도 헐면 다른 새 옷으로 갈아입으려고 죽는 겁니다. 기계도 녹이 슬고 망가지면 다른 기계로 바꿔서 새로 들여놓습니다. 그러니까 녹이 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좀더 열심히 일체를 내려놓고 관하면서 지켜보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옷을 갈아입고 싶다고 할 때까지 어디에도 녹이 슬지 않고 입을 수 있게, 빛 바래지 않고 녹슬지 않고 오래 쓸 수 있게끔 모든 것을 다 몰록 그 자리에 돌려놓는 작업을 하면서 더 열심히 마음공부를 하시라는 겁니다. 그걸로 인해서 온 가정이 다 살 수 있는 건데 녹이 슬게 하고 빛이 바래게 하고 잘 돌아가지 않게 만들어 놓는다면 어떻게 한 가정인들 다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좀 놔둘 기계라면 미리미리 기름을 발라서 녹이 안 슬게 하듯이 우리 마음도 역시 그렇게 미리미리 단도리를 하라는 겁니다. 이렇게 복잡한 세상 속에서 세파를 겪으면서 살아나가려면 너무나 닥치는 게 많으니까 ‘그런 일들이 모두 닥치지 않게 하는 것도 너밖에 없다.’ 하고 미리 봉을 박아놓는 겁니다. 봉을 박아놨어도 앞서에 봉을 박지 못해서 오는 것은 다가오게 돼 있지만 닥치는 대로 오고 난 뒤에 봉을 박아도 되는 겁니다, 진실로 맡겨놓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니까 거기다 자꾸자꾸 돌려놓고, 나쁜 것이 돌아올 때도 거기다가 굴려놓는 겁니다. 자꾸 돌려놓는 겁니다. 내 기준에 맞게 좋게 생각을 해서 굴려놓는 겁니다.
예전에도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만, 이성계가 꿈을 아주 나쁘게 꾸고 나서 무학대사를 찾아가서 그 꿈 얘기를 물으니까 지혜로운 무학대사는 그 꿈 얘기를 듣고서 묵묵히 한참 있다가 대답을 하기를, 꽃이 피었다가 우수수 떨어지는 꿈을 꿨으니 그 얼마나 언짢습니까? 까마귀가 그냥 울고 가는 꿈을 꿨고, 대문에 허수아비 모가지를 매서 대롱대롱 매달아놓은 걸 봤고, 색경이 걸렸던 것이 그냥 와르르르 떨어져서 깨지는 꿈을 꾸고 그랬으니, 생각해보십시오. 이성계가 얼마나 언짢게 생각했겠는가 말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서는 비할 수 없이 언짢은 꿈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거꾸로 다니고 바로 다니고가 없습니다. 이거 우리가 바로 다닌다고 볼 수는 없는 겁니다. 때로는 거꾸로도 되고 때로는 바로도 됩니다. 그러니 꿈조차, 꿈이 고정됨이 있겠습니까? 그건 마음먹기에 달려있죠. 그러니까 까마귀가 울고 간 것은 지금으로 친다면 청와대에 들 꿈이고, 가옥 가옥이니까 말입니다. 색경이 와르르 깨진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소문이 난다는 것이고, 꽃이 피었다가 우수수 떨어진 것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고, 허수아비가 목을 매서 대문 밖에 대롱대롱 매달린 것은 모든 만민이 쳐다본다는 것이라고 무학대사께서 이렇게 꿈 해몽을 해줬더랍니다. 하하하. 그러니 그렇게 해서 임금이 되기도 했더랍니다.
그런 것과 같이 우리가 구정물을 새 물로 바꿔서 먹으려고 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물뿐이 아닙니다. 물은 어디에도 들어갑니다. 물 안 들어가는 데 없지요? 일체가 물 안 들어가는 데가 없습니다. 인간도 피가 없으면 바로 죽습니다. 피도 물이니까요. 모두가 물 안 들어가는 데가 없듯이 우리 마음 자체가 바로 굴려서 놓고 바꿔놓는 데 의미가 있고 묘미가 있고 아주 지혜로운 실천이 나오는 겁니다. 놨으면 진짜로 믿고, 도로 뺏어 가지고 나오진 마십시오. 허허허. 진짜로 믿어야 합니다. 누굴 믿습니까? 허공을 믿습니까, 이름을 믿습니까? 뭘 믿습니까? 못났든 잘났든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 마음의 주인을 진짜로 믿어야죠. 자기 마음의 주인만이 자기를 이끌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이겁니다. 그거부터 알아야 모든 일체제불의 마음도 거기에 한 찰나에 들고나고 들고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일체를 놓고 가는데, 초심자들에게 돌려놓으라고 하는 것은 놓고 난 후에 벌어지는 결과에 대해 믿지를 못하니까 안 되는 일은 되게끔 돌려놓고, 언짢은 일은 좋게 잘 돌아가도록 돌려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내면에 굳건히 내 주인공을 세우고 나쁘고 악한 거든지, 그런 게 다가올 때는 마음 한생각을 잘 내서 굴려서 거기 놓고, 자기가 선행을 했든 좋은 일이 생겼든 모두를 감사하게 생각을 해서 굴려놓고, 그 자리에서 물러서지 말고 매사를 다 그렇게 한군데서 들고 나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