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 종합 > 기사보기
부여 정림사지
‘문화왕국’ 꿈꾸던 백제의 중심사찰

아카시 향기에 취해 한바탕 봄꿈에 빠져드는 백마강. 5월 그 하루도 무덥던 날. 낙화암 절벽에 하롱하롱 춤추는 아카시 꽃잎은 푸른 강물에 몸을 던지던 백제 여인들의 몸짓을 닮았다. 충절과 절개란 얼마나 눈부신 것인가. 조국 백제의 흥망과 함께 이승의 미련을 훌훌 떨고 희디흰 꽃잎 되어 검푸른 강물에 흩어지던 여인들의 뒷모습은 저토록 아름다웠을 것이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들의 뒷모습은 언제나 시공을 초월하여 긴 여운을 남긴다.

잊혀진 왕도, 부여 땅. 그 어디에서도 옛 사람들의 흔적을 쉽게 더듬을 길 없지만 능산리 솔밭 길에도, 부소산 돌담 아래도 때 되면 옛사람 닮은 할미꽃 민들레가 피어나 그 공백을 메워주는 것이다. 잊혀진 절터에도 구절초 꽃들이 텃밭을 이룬다. 세월의 물결에 휩쓸린 꽃향기는 싸리비질 선명했던 역사의 안마당에 침전하여 문화가 되고 유적이 되는 모양이다. 텅 빈 사지(寺址) 한 가운데 흐린 연못에는 부용이 졸고, 어느새 온 몸에 연꽃 문양을 한 비단잉어들은 흰 구름을 좇으며 유영하고 있다.
백제는 ‘문화 왕국’이었다. 반도의 중심에 자리 잡은 까닭에 바람 잘 날 없었지만, 안으로는 활활 장작불을 지펴, 무쇠를 녹이고 금은을 다듬었던 것이다. 영원불멸의 문화유산은 여유와 평온에서 나온다. 도읍을 세 번씩이나 옮기며 나라의 운명을 힘겹게 끌고 갔지만 ‘공주의당금동보살입상’과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민족의 유산으로 물려줄 정도로 백제인들의 창조적 열정은 대단했고, 예술적 슬기는 놀라웠다. 백제가 아니면 누가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만들었겠는가. 백제가 아니면 어떻게 이 땅이 ‘금동용봉봉래산향로’를 지닐 수 있었겠는가.
백제 문화의 특징은 진취적 선진문화의 수용과 더불어 결코 신라와 고구려에 뒤지지 않을 만큼 지극한 불심으로 특유의 원만하고 여유로운 화합형의 문화를 일군 것이다. 좁은 반도에서 토닥거리기보다 중국이나, 일본 등 더 큰 세계로 눈 돌렸던 나라. 그래서 오히려 더 넓은 동북아의 역사 속에 해동의 제국으로, 조상의 나라로 섬김을 받았던 나라. 부여는 그 백제 왕국의 마지막 수도기였기에, 야속한 나당연합군 군사들에게 화려하고 장엄한 정림사 금당이 불 탈 때까지 123년간 사비백제 (538~660)시대를 열며 영원한 백제의 부흥을 꿈꾸었던 것이다.
육당 최남선은 <삼국고적순례>에서 부여를 두고 “보드랍고 훗훗하고 정답고 알뜰한 맛은 부여 아닌 다른 옛 도읍에서 도무지 얻어 맛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왕국의 패망 이후, 향기로운 유적과 유물들은 철저히 파괴되었으나, 천혜의 자연과 인심이 조화된 환경, 그 무늬와 색조만은 어쩌지 못해 오늘도 고졸한 ‘부여팔경’의 멋을 간직하고 있다. 이른바 백제탑의 낙조, 부소산의 해맞이, 고란사의 새벽종, 백마강의 봄빛, 낙화암의 소쩍새, 궁남지의 버들 숲, 규암나루 돛단배, 만광지의 추련(秋蓮) 등 꿈꾸듯 아련한 추억거리가 그것들이다.
정림사지(사적 제301호)가 있어 비로소 부여는 부여답다.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 9호)이 숱한 역사의 풍상 속에서도 굳건히 부여를 지키고 있어 부여는 비로소 왕도의 체면을 지키고 있다. 부여가 부여다운 것은 나라도 절터도 무너졌지만 영욕의 이 ‘백제탑’만은 끝까지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단순한 돌탑이 아니라 백제의 자존심이다. 나라는 무너졌어도 끝내 무너질 수 없었던 것, 그것은 백제의 예술 혼이었고, 기막힌 문화 민족의 자긍심이었다. 그 피는 지금 우리의 몸속에도 맥맥히 흐르고 있다. 이 뜨거운 유전자가 있어 우리는 오늘도 육자배기를 부르고 전주대사슴놀이를 하고 있다.
정림사 터는 일찍부터 일본인들이 주목하여 1942년부터 3,4년에 걸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때 ‘정림사(定林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편이 출토되어 그 때까지 알 수 없었던 절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명문의 연대가 고려 헌종 19년인 1028년을 가리키고 있어, 백제 때의 절 이름이 그러했는지는 여전히 알 길이 없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백제탑’으로 불려져야 한다는 것이 더 설득력을 얻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또한 ‘평제탑(平濟塔)’이라고도 불렸다. 소정방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오층석탑 탑신에 ‘대당평제국비명(大唐平濟國碑銘)’이라는 글씨를 새겨 백제를 정복한 전승기념비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 오층석탑은 이렇듯 백제인의 신앙적 결정체이면서도 조국을 멸망시킨 적장의 공적을 몸에 지니는 치욕의 사연을 간직한 채 묵묵히 1,400여년을 버텨온 것이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익산의 미륵사 터 탑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백제 최고의 석탑이다. 또한 목탑을 석탑으로 번안하여 조성된 최초의 석탑이라는 점에서 높은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목탑에서 석탑으로 번안된 것임을 밝혀낸 것은 우리나라 미술학사의 태두인 우현 고유섭 선생(1905~1944)에 의해서다. 선생은 우리나라 석탑을 그 생김새의 변천에 따라 연대적으로 추정하여 백제에서는 목탑에서 석탑을, 신라에서는 전탑에서 석탑을 만들었고 마침내 이 두 계보가 통일신라에 이르러 감은사 터 탑과 같은 완결미로 정립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정림사 터 탑은 8.33m나 되는 대탑임에도 육중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원근은 물론, 사방 어디에서 보아도 경쾌하면서도 장중하여 보는 이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웅혼한 기백이 넘치는 고구려의 유적이나 화려하고 세련된 신라의 그것과 달리 온화하면서도 완벽하여 안정감과 해탈의 기분을 맛보게 하는 것이 백제 예술의 다른 점이다.
1979년과 1980년에 본격적인 발굴을 통해 정림사지는 백제 시대의 다른 절들처럼 남북 자오선상에 중문과 탑과 금당과 강당이 차례대로 배열된 일탑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다만 특이한 것은 중문과 탑 사이에 연못이 있었는데, 최근까지 지하에 묻혀있던 것을 지반을 돋궈 복원하여 오색의 비단잉어들을 풀어 놓은 것이다. 석불보호각의 석불좌상(보물 제 108호)은 본래 강당 터에 놓여있던 것을 전각을 복원하여 옮겨놓은 것이다. 이 석불은 얼굴이나 몸체가 비바람에 마모되어 형체를 거의 알아 볼 수 없으나 수인(手印)의 윤곽으로 보아 비로자나불임이 분명하다. 몸체와 달리 석불의 좌대는 안상이며 연꽃 조각이 분명하고 당당하여 이 또한 오층석탑과 함께 정림사지의 마지막 주인공임을 짐작하게 한다. <시인·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
다음은 보령 성주사 터 편
사진=고영배 기자

정림사지 가는길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 소재한 정림사지를 찾아가는 길은 서울에서 경부 고속도로를 이용, 천안 나들목을 나와 공주를 거쳐가는 길이 편리하다. 공주에서 40번 국도를 타면 논산에서 들어오는 4번 국도와 합쳐져서 부여 시내로 들어가게 된다.
2003-05-28
 
 
   
   
2024. 11.2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