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이론·기복만으로 살기 어려워
실천 수행이 아니고는 앞장설 수 없어
여러분과 같이 한자리 한 것이 오랜만인 듯 합니다. 다녀온 일을 상세히 얘기할 수 없지만 여러분이 한마음 내주셔서 잘 다녀오지 않았나 생각하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오라 하니 갔고 그 곳에서 그렇게 해주니까 그냥 그렇게 하고 왔습니다.
여러분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이 길을 어떻게 걸어왔겠습니까? 일체 만물 만생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뜻을 이루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니 늘 여러분에게 고맙게 생각하며, 풀 한 포기도 저버리지 않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한마음이란 열반으로 들어가는 길이며 해탈이며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이건 물질세계로만 치닫는 이 시점에서 앞으로는 정신세계가 앞장서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물론 한국에도 심성개발을 위해 열심히 수행 정진 하시는 분들이 계시지만, 미국에 계시는 많은 불자들도 마음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번에 가서 더 절실히 느낀 것은 지금 시대에는 기복이나 이론만으로는 도저히 이끌어가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실천수행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앞장설 수 없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얘기를 한번 해볼까 합니다. 여러분은 사대에 대해 너무나 잘 아시죠? 색은 물질계이고 수상행식은 정신계라고 합니다. 정신계와 물질계인 사대가 합쳐지니까 몸과 마음이 형성됩니다. 몸과 마음에는 눈, 귀, 코, 혀, 몸, 의식이라는 육근이 대두되는 겁니다. 그리고 또 거기에 육진인 색성향미촉법이 대두가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를 이론적으로만 나누어서 생각하지 마시고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모두 네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네 가지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갯수 아닌 갯수, 숫자 아닌숫자입니다. 몸과 마음이 하나라면 그 하나에 육근을 더하면 둘이 됩니다. 그런데 둘이 되면서 하나라는 것은 벌써 과거로 돌아가서 절대적이 되는 거죠. 그래서 둘 할 때 벌써 아까 하나는 둘이라는 것에 포함되니 하나는 없어지면서 둘이 하나가 되는 겁니다. 상대성이 절대성으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육진으로 다시 들면 셋이 되는데 이것 또한 하나입니다. 여러분이 이 도리를 아셔야 결정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육식으로 다시금 혼합을 한다면 십팔계가 되면서 이것 또한 하나입니다.
그런데 십팔계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십’이 진리라고 하면 우리들이 응용하는 중용은 바로 ‘팔’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걸 이해시켜 드리고 싶어서 그냥 내 의견대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것을 완전히 벗어난다면 벗어나는 그 자체가, 하나 없는 하나가 그냥 한마음입니다. 한마음. 하나라는 것도 세울 게 없기 때문에 한마음입니다.
대강 이해하시겠습니까? 다시 비유하건대 만약에 몸과 마음이 솥이라면 쌀을 씻어 놓고 물을 부어서 불을 붙입니다. 그러면 쌀이 다 익은 후에 우리는 밥을 먹게 됩니다. 솥, 쌀, 물, 불이 합쳐져서 밥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식까지, 깊은 속에까지 들어가서 굴러 나와야 밥을 먹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론으로 그 과정을 설명한다 해도 스위치를 꽂아서 밥을 익히지 않는다면 밥은 결코 우리 입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이치입니다. 묵조선이니 간화선이니 하는 것도 둘이 아닙니다. 밥 짓는 이론상의 그 과정과 실제로 불을 붙여서 익혀 먹는 것이 혼합되어 하나이기 때문에 이것저것 생각으로 따지거나 말로 따지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밥을 해서 먹는 걸 배우는 것이니 그 과정이야 여러분이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 과정을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분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바로 먹을 수 있는 방법을 배우자, 시기가 있는 것이 아니냐, 몸을 가지고 살아 있을 때 이 뜻을 모른다면 천년 만년 가도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누차 말씀드리는 겁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밥을 먹을 수가 없다면 고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에다 하나를 넣어도 하나요, 또 하나를 넣어도 하나요, 그래서 밥을 한 솥 해놓고 먹어도 그 하나마저도 없더라, 모두 나누어서 먹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여러 재료들을 사용해서 밥을 했는데 쌀이 했다, 불이 했다, 물이 했다고 꼬집어서 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쌀이 될 때 나라고 할 수도 없고, 물이 될 때 나라고 할 수도 없고, 불이 될 때 나라고 할 수 없으니 그게 바로 한마음이며, 그 한마음마저도 집착하지 말라는 겁니다. 한마음으로 찰나 생활을 자유스럽게 해 나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기르라는 겁니다.
또 계(戒), 정(靜), 혜(慧), 해탈(解脫), 해탈지견(解脫知見)이라 하였습니다. 다섯 가지입니다. 그러면 계, 정 할 때에 벌써 앞의 하나는 없어집니다. 절대성으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상대성 원리가 원형으로 모이면서 하나가 일어서는 거죠. 그렇게 해서 해탈까지 가서 해탈지견, 다시 말하자면 소견으로 쓰지 않고 지혜로서의 지견으로 쓰게 되는 겁니다. 깊은 곳에서 굴러 나와서 하나로 뭉쳐 돌아가니까‘해탈지견’했던 겁니다. 그렇게 되면 계율을 지키려고 하지 않아도 그것이 포함된 능력의 중용이기 때문에 지킨다 안 지킨다 할 것 없이 질서 정연하게 해 나갈 수 있는 겁니다.
유위법에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위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위법에서나 유위법에서나 생각이 있는 중생이나 생각이 없는 중생 등을 다 포함해서 이끌어 나갈 수 있으며, 나로 될 수 있고 상대로도 될 수 있어서 그대로 자유자재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가 셋이 되고 셋이 하나가 되고 또 하나가 아홉이 되고 아홉이 셋이 되듯이 바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한번 당겨서 절대성으로 놔두었다가 상대성으로 옮겨 놓고 다시 절대성으로 오게 하는 자유권을 지니고 자유자재 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자유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몸 속에 수많은 중생들이 들어 있는데 이 중생들은 다름 아닌 자기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중생들은 숫자가 많으면서도 많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의식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마저도 없다고 하는 도리를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겁니다. 이 도리를 모른다면 중심이 없고, 내 주인을 모른다면 껍데기만 있는 빈 집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전에 선지식들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주장자가 있다면 내 주장자를 너에게 줄 것이로되 네 주장자가 서 있지 않다면 네 주장자를 뺏어 올 것이니라’ 하고 말했던 것입니다. 뺏는다는 문제를 덧붙인 게 아니라 가르치시느라고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주인이 없다면 영계성, 유전성, 세균성, 업보성이 드나들면서 뒤집어 놓습니다.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하고 성나게도 하고 아프게도 하고 모든 일을 그르치게도 하는데 과거로부터 자기가 짊어지고 나온 것이니 어쩔 수가 없는 거죠.
숙명통이라는 건 입력된 컴퓨터와 같은 겁니다. 컴퓨터에 입력이 되어 있는 대로 나오기 때문에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팔자니 운명이니 하고 울고불고 야단들인데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런 까닭 때문입니다. 그런데 입력되어 나오는 데에다 다시 입력시키면, 즉 놓으면 앞의 것은 지워져서 무너질텐데도 맡겨 놓지 못하는 겁니다.
과거에 살던 의식까지도 하나로 뭉쳐져 있기 때문에 거기에 뭉쳐 놓으면 자동적으로 과거의 것은 없어집니다. 넣으면 없어지기 때문에 항상 그릇이 비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순간마다 닥쳐오는 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감당하시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너 자신을 알고 나면 둘이 아닌 도리를 알게 되느니라. 둘이 아닌 도리를 알고 너 하나마저도 없을 때 비로소 네 속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전부 천백억화신으로 화하느니라” 하셨던 겁니다.
마음이 그렇다면 속의 모든 중생들이 전부 알게 됩니다. 내가 마음을 좋게 쓴다면 그들 역시 그대로 따라 주게 됩니다. 모두 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평화로우면 남한테 부드럽게 대하면서 편안하게 해주게 되는데 내 마음이 언짢으면 남에게 괜히 신경질을 내게 되며 말도 짜증 섞인 말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있으니까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로부터 내 주처를 완성해야만 집이 튼튼하고 빛이 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32상이 구족하다는 얘기죠. 그래서 그와 같이 구족함으로써 행하는 것이 중용으로 평등하고 부드럽고 모든 걸 포용해서 응해줄 수 있는 자비와 지혜, 즉 해탈지견으로서 쓸 수 있다는 겁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경계를 들여보낼 사이도 없이 그냥 모두 내놓는다면 그게 마(魔)가 되는 거예요.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행하는 모든 것이 새끼 꼬이듯 뒤틀리고 맙니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나오니까 보이는 데에도 전부 걸리는 겁니다. 안으로 놓으라고 했는데 자꾸 바깥으로 끄달리면서 살고 있으니, 그래서 자기를 다스리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우주의 근본은 인간의 마음에 직결이 되어 있고 세상의 모든 살림살이는 전부 가설이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위로도 하나요, 아래에 가설이 되어 있는 것도 근본은 하나이며 중도입니다. 중심은 우리가 보통 말하지만 ‘중도’ 하면 포함된 걸 말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내 집이 비면 지구의 집도 빈 겁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지구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은 지금 지구라는 한 버스를 타고 순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속에 있는 중생들은 지금 우리가 어디로 다니는지 모르고 우리들은 지구가 어디로 돌아가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내 집에 주인이 없으면 지구의 집에도 주인이 없는 겁니다.
우리들 속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화해서 천백억화신이 된다면 털구멍을 통해서 들고나면서 모든 것을 정확하게 마음에서 두뇌로 올라가서 다시 대뇌로 전달됩니다. 대뇌라는 건 누진통이라고 그럽니다. 또 누진통을 레이더망으로 표현합니다. 들어오고 나가는 걸 점검을 해서 좋은 데로 방향을 돌려줍니다. 모든 것이 들고나면서 우주로도 통하고 세간으로도 통하니 삼라만상입니다. 그래서 우주 삼라만상을 한 주먹에 쥐고 자유스럽게 자재하게 되니 이것을 해탈이라고도 하고 열반이라고도 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도 하는 겁니다.
몸을 지탱하려면 내 집의 주인이 레이더망을 통해서 영계성·윤회성·업보성·유전성 등 인과로 인해서 감당할 수 없으리만큼 부딪쳐 오는 모든 문제들을 막아 줍니다. 들일 건 들이고 버릴 건 버립니다. 우리들이 먹을 건 먹고 쓰레기는 버리는 것과 같이 그와 같은 작용이 여러분한테 본래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미생물에서부터 쫓고 쫓기며 수 억겁 광년을 거쳐오면서 진화해서 인간으로 태어났는데도 지금도 쫓기고 쫓는 형국입니다. 현상계에서 무기를 사용해서 싸움을 해야만 싸우는 게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데서 싸움을 하니 보이는 데로 나오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그냥 끝이 나는데, 왜냐하면 우리들은 빈 껍데기로 화면 속의 배우마냥 주어진 배역에 따라 연기하다가 극이 끝나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이치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극을 만드는 연출자가 되어야만이 진실되고 참되며, 방편으로 보람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겁니다. 물질만능으로 치닫고 있는 이 시대에서 우리들이 껍질로만 남게 되면 우주계에서나 다른 혹성계에서 의식들이 싸움을 할 때는 어떻게 대처해 나갈 수 있겠느냐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모든 문제들을 앉아서 해결할 수 있다면 일체제불이 한 찰나에 들어서 주장자를 주시고 비밀스런 법문을 설하시곤 금방 나투시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로 쓸 일이면 하나로 쓰고, 뭉쳐서 쓸 일이라면 뭉쳐서 쓰고, 둘로 쓰려면 둘로 쓰고, 셋으로 쓰려면 셋으로 쓰기도 하는 그 무기가 무엇인가? 다름 아닌 한마음입니다.
이 소리를 말로만 듣지 마시고 잘들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110V의 전력에 220V의 전력을 접전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잡아먹히겠죠. 한 치의 인정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냥 안이하게만 살지 마시고 우리가 어떻게 땅바닥을 딛고 다닐 수 있는 건가 생각해 보세요. 자력이나 광력, 통신력, 전력이 여러분에게 재료로 주어져 있는 건 지수화풍 사대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땅에도 자력이 있고 우리들에게도 자력이 있기 때문에 붙는 겁니다.
공기가 왜 있는 줄 아십니까? 우리들에게 생명체가 없다면 공기도 없을 겁니다. 이 우주에 혹성들이 헤아릴 수 없으리만큼 있습니다만, 하나하나가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전체 뭉쳐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건 모두 버렸기 때문입니다. 전체 버려야 전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그때는 스스로 항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전체 얻을 수 있어야 마음대로 하나로도 쓰고 둘로도 쓸 수가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태양이 지구를 집어먹는다 해도, 의식 자체가 전부 내가 된다면 통신도 잘해 줄 것이고, 부패되는 것도 막을 것이고, 줄어드는 것도 막을 것이고 서로 상응해서 그대로 생존할 게 아닙니까? 핼리혜성이 와서 지구를 친다 할 때 핼리혜성이 내가 된다면 부딪치지 않게 다른 곳에다 끌어다 놓고 올 거 아닙니까?
법당에 계시는 부처님 형상이 바로 여러분의 모습입니다. 부처님의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왜 불상을 조성해서 모셨을까? 부처님은 통달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을 가르치기 위해서 방편으로 그 분 모습을 조성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형상에 집착한다면 그건 부처님 공부를 올바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이론으로, 지식으로 하는 공부도 아닙니다.
예전에 타종교에서 말하기를 불로 심판을 한다고 했습니다. 나 어려서도 그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자기가 자기를 심판하는 것이지 달리 심판받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심판받는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 있는 거지 남의 말만 듣고 무슨 종말이 온 것마냥 생각하여 ‘머지않아 죽는다는데 인생살이 그렇고 그렇지’ 하고 허무하다고 생각하여 허랑방탕하게 살면 절대 안 됩니다. 지금 당장 죽는다 할지라도 미래의 씨를 위해서, 미래의 자기를 위해서 무슨 일이 다가오든지 바른 길을 가야 합니다. 죽는다고 해서 뿌리조차도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낙엽이 떨어졌을 뿐 봄이 오면 잎은 다시 필 텐데요.
또 한 가지, 수박을 놓고 보세요. 수박씨는 바로 수박 속에 들어 있습니다. 현재의 수박 속에 들어있는 수박씨는 미래에 또 먹을 겁니다. 부처님께서 밥 한 그릇으로 유의 생명들과 무의 생명들을 다 먹이고도 되남느니라 하셨듯이, 봄이 오면 수박씨를 심어서 내내 먹고 내년에 또 심어서 먹고 하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말도 할 것이 없는 거죠. 여러분은 그대로 수박이 되었으니 수박 안에 들어 있는 수박씨를 믿어야 공덕이 되지, 만약에 수박씨를 찾는다고 바깥으로 헤맨다면 아무런 공덕도 이익도 없을 겁니다.
우주 천지의 근본은 인간 마음의 근본에 직결되어 있고 세상사는 인간의 마음에 가설되어 있다 했습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상대도 있고, 종교도 있고,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없는데 무엇이 존재하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 자신부터 믿고 일체를 맡겨 놓고 연구하고 실험을 해서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 제자나 유발 제자들을 똑같이 가르치셨습니다. 진실이자 방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부처님과 유마힐 거사가 몸과 이름은 각각이지만 오고 가는 사이 없이 마음은 한마음, 바로 한 주장자가 됐던 거죠. 그래서 일부러 발병하게 해서 보살들을 보내려 했던 것도 공부를 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던 겁니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유마힐 거사의 병문안을 가라고 말씀하시니, 사리불은 유마힐 거사의 병문안을 가는 데 자기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말씀드리기를 “제가 숲 속 나무 밑에서 좌선을 하고 있을 때 유마힐이 찾아와 저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앉아 있다고 해서 그것을 좌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좌선이라고 하는 것은 삼계에 있으면서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멸진정에서 일어나지 아니하고도 온갖 행동을 하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안에도 바깥에도 머무르지 않는 것을 좌선이라고 합니다. 망상을 끊지 않고 열반에 드는 것을 좌선이라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좌선하는 이라야만이 부처님께서 인가하실 겁니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항상 말씀드리지만 보는 것, 듣는 것, 먹는 것, 말하는 것 등 사는 것이 고정되지 않으니 안에도 바깥에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겁니다. 나는 경에 나온 말을 그대로 읽어서 여러분한테 얘기해 주는 건 아니지만 아마 뜻으로는 알아듣기 더 쉬울 거예요. 망상을 끊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좌선이라 했는데, 가만히 보면 번뇌 망상을 끊어야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끄달려 돌아가니, 망상을 끊겠다고 애를 쓰는 자체가 또한 망상이니 그게 어디 끊어지겠습니까. 끊어버리는 게 아니라 그냥 놓고 가는 겁니다. 마음은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도 묶여진 게 없습니다. 나쁘고 좋은 것 모두를 놓고 가는 겁니다. 그러한 고로 끊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만이 오직 좌선하는 겁니다. 곧 해탈 길로 들어가며 열반에 드는 것이란 말이죠. 이렇게 좌선하는 이라야만이 부처님이 인가하실 것이다라고 말을 하였다면서 병문안 가기를 꺼려했다는 겁니다.
내가 차근차근 조리 있게 말씀드리지 못한다 해도 여러분이 잘 새겨서 듣고 열심히 노력하세요. 계율을 지킨다 범한다는 말 없이도 한 발짝도 헛되게 떼 놓지 말고, 말 한 마디 헛되게 떨어뜨리지 않고, 한 생각도 평등한 마음 아님 없는 그러한 행을 하는 것이 참된 인간의 도리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오랜만에 이렇게 만났으니 질문하실 분 계시면 질문하세요. 어떠한 거든지 느끼시고 궁금하신 대로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질문자1: 불성은 주인공이자 참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범부들은 왜 불성을 볼 수 없는지요? 참나를 찾고 싶고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나타나지 않는 참나를 어떻게 해야 만이 찾을 수 있습니까?
▲스님: 늘 말씀드리지만 이끌어 드리는 대로 행하시면서 지켜보신다면 그대로 체험이 되실 겁니다. 본래 여러분에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지수화풍으로 인해 광력, 전력, 자력, 통신력이 충만하게 재료로 있고, 오신통 중의 숙명통은 과거로부터 짊어지고 나온 것이기 때문에 모든 걸 거기에 놓는다면 자동적으로 과거의 지은 바는 녹아버리게 됩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 나가야지 조급한 마음으로 찾으려고 한다면 옳은 방법이 아니에요. 자기한테 본래 주어져 있는데 뭘 찾습니까? 그러니 꾸준히 정진하셔서 본래 있는 참나를 발견하세요.
▲질문자2: 스님께서 지금까지 저희들에게 설법하신 약 마흔 개의 테이프를 오늘 총괄해서 제가 가져온 하나의 공 테이프에 복습하는 그런 시간이 된 듯합니다. 미국에 다녀오셔서 서양 사람들의 물질문명이 우리 동양의 정신문명을 알고 싶어하고 정신문명의 필요성을 찾아서 갈구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염려하셨듯이 법에 귀의하되 사람에 귀의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를테면 법등명, 자등명인 것이죠.
그런데 분명히 물질문명보다는 정신문명이 앞서야 되겠고, 앞으로 우리 동양권에서 반드시 정신문명으로 앞서서 서양의 물질문명을 지배하리라고 미천한 중생도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물질문명을 정신문명이 지배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불자들이 많이 행을 해야 되겠는데요. 이를테면 자기 정신 순화와 그 순한 마음의 기지를 우리 부처님 법에 의지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만,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라는 말은 제 생각으로는 기복으로 믿지 말라는, 여타의 종교에서는 교주에 의지해서 밖으로 찾는 걸 많이 느끼게 되는데 그렇게 하지 말라는 뜻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우리 불자들이 정진하며 생활하는 과정에서 우리 고유의 다도로써 정신을 찾는다든지, 부모님들을 한 가정에서 모시면서 잃어가는 옛 정신문화를 찾을 수 있는 그런 방향으로 스님께서 저희 미천한 중생들에게 깊이 있는 법문을 많이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신세계에서 우리 국민성이 앞장설 수 있는 말씀을 앞으로 많이 들려주십사 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한 말씀 올립니다.
▲스님: 예. 지금도 그렇게 이끌어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믿지 말라고 했지 따르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가정에서도 조화를 이루고 한마음 한뜻이 되어서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랑과 지혜를 가지고 살아간다면, 바깥 경계들을 안으로 들여서 지혜롭게 쓸 수 있는 그런 자비가 생길 겁니다. 한편 자기도 빨리 발견할 겁니다.
그러나 소견으로만 사람을 믿지 말랬는데 생각하고는 딱 끊어버리는 경향이 많습니다. 끊어버리라는 게 아니라 착을 두지 말라는 거죠. 지금 말씀하신 거와 마찬가지로 정신계로 발전이 된다면, 과거에는 몸을 도구로 사용해서 모든 것을 해결했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 가만히 앉아서 지휘하는 그런 한 주먹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건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몸으로 뛰어다녀서 될 일이 아니고 곳곳마다 나 없는 데가 없어야 되겠죠. 세상천지 어느 곳이든 내가 없는 데 없이 있어야만이 리드해 나갈 수 있고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질문자3: 저는 오늘 스님을 처음 뵙습니다. 처음 뵙는데도 오래 전부터 뵈온 것처럼 친근감을 느끼고, 여쭈어 볼 것은 스님께서는 참자기를 발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참자기는 거짓자기를 죽이고 나를 내세우지 않는 데서 발견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무아(無我)라는 것은 결국 자기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은데, 거짓 자기가 없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참자기도 없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둘 다 없다는 이야기인지 모르겠고 참자기는 무엇이며 결국 무아는 뭘 말하는 건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없다는 건 공한 것을 말하는 겁니다. 처사님은 모든 것을 고정되게 한 소리만 듣고 사십니까? 생활하시는 데 고정되어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쉴 사이 없이 공해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세울 게 있겠습니까. 세울 게 없는 그 자체가 바로 없는 겁니다. 마이크를 잡고 말했던 장본인 바로 그겁니다.
물론 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예전 스님네들은 판치생모(板齒生毛)라고도 했습니다. 어떤 모습일 때를 가려서 나라고 할 수 없으니 없는 거죠. 그러나 자유권은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중생이라는 겁니다. 자기 소견으로 나쁘다 좋다 분별할 뿐, 본래 구분 지어진 것 없이 자기가 할 따름입니다. 거울 앞에 서서 한쪽 팔을 들어 보십시오. 거울에 비춰진 자기 모습이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그래서 자기부터 알아야 둘이 아닌 도리를 알게 되고, 둘이 아닌 도리를 알아야 둘 아니게 나투는 도리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인생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고,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불은 어디 있다는 건가 하고 의문을 가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옛날에 누가 그랬대요. “불(佛)은 어떤 겁니까?” 하니까, 해골을 던지면서 “이놈아, 이거다!” 하거든요. 그게 무슨 뜻인가 하고 몇 해를 생각하다 보니 하루는 해골이 말을 하더랍니다. “야, 이놈아! 너도 나처럼 눈도 빼버리고 귀도 빼버리고 코도 빼버리고 혀도 빼버리고 몸뚱이도 없어야지.” 그러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해골을 붙잡고 싸우다가 홀연히 알게 되었더래요.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의식만 빼면 송장인데 해골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러니 육근·육진·육식이니 하는 모든 작용을 놓고 간다면 둘이 아니게 참자기를 발견할 겁니다. 과거의 자기와 현재의 자기가 상봉할 겁니다.
▲질문자3: 제가 스님 법문을 듣고서 다른 사람들에게 옮긴다면 그것은 제 수준과 이해도 또는 능력에 맞추어 왜곡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불교의 전반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 과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석존 입멸 이후에 곧 바로 불교경전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구전으로 내려오다가 경전으로 엮어지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과연 석존의 근본적인 가르침이 어느 정도 진실되게 내려오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불교에서 큰 문제로 여기는 것은 여성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기의 잘못된 견해를 내세우면서 그것의 정당한 근거로 불경의 내용을 인용합니다. 여성 차별시하는 내용들을, 불교가 왜곡되는 과정이 있었다면 이것을 빨리 바로 잡는 과정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불교가 학문적으로만 치우친다고 말합니다만 저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문적으로도 여전히 캄캄합니다. 그러한 잘못된 과정은 명명백백히 밝혀졌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적극적인 역할은 스님 같은 분들께서 해 주셔야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스님의 법문을 듣거나 책을 읽노라면 높은 경지를 이룬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불교가 왜곡되는 과정이 있었다면 바로 잡는 적극적인 역할을 스님께서 해 주시기 바라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스님: 부처님 법은 바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살던 것을 짊어지고 이 자리에 앉아 있듯이, 부처님 법은 삼천 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조금 전에 하나 둘 할 때 둘로 합쳐진다고 했죠. 그것도 하나라구요. 그래서 부처님 법에서는 삼천 년 전이라 할지라도 바로 지금입니다. 미래라 할지라도 미래는 없고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영원한 겁니다. 설사 역대 편집된 모든 것이 왜곡되었다 할지라도 그 나름대로 정성을 다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걸 탓할 수가 없습니다. 그 과정을 탓하기 이전에 나부터 알아야 그것도 고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완벽하게 편집이 되었다 할지라도 시대가 변천하는 대로 경전의 내용을 고쳐도 된다는 내용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백지를 모르고는 글을 쓸 수도 없고 고칠 수는 더욱 없습니다. 글씨를 쓰려면 종이가 없이는 불가능하듯이 먼저 나부터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백지부터 들어야 쓸 수 있으니 각자 다 나부터 들어야 된다는 것이죠. 백지는 진리를 뜻하는 것이고 연필은 작용을 말합니다. 즉 어떻게 하겠다는 중심입니다. 이렇게 고루 갖추어지지 않으면 쓸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니까 무엇이 잘못되었으니 내가 고쳐야겠다 하는 사람이라면 올바로 고치지 못하거니와, 참다운 부처님의 제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죠. 고친다 안 고친다를 떠나서 봄이 오면 스스로 얼음이 녹고 싹이 움터 꽃이 피지 않을까요?
▲질문자3: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항상 마음속에 불교를 대하면서 간직하고 있던 질문인데 스님의 법문을 듣거나 책을 읽으면 제가 하고자 하는 질문들이 다 하찮게 느껴집니다. 제가 하찮게 느껴졌어요. 질문할 의욕조차 없어졌는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서는 분명히 영향을 받거든요. 저는 불교 서적을 처음 보게 되었을 때, 제가 이러한 책을 접할 수 있는 게 참으로 고마운 일이구나 생각하면서 읽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한테 해당된다고 생각하면서, 거기에 어떤 역사의 찌꺼기가 끼었다면 그것이 현재의 모든 사람들까지 어리석게 만드는 역할 또한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님께 이렇게 질문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스님: 법우가 백지만 얻어요. 그러면 연필은 내가 줄 테니까. 어때요? 정말 장한 질문이었어. 그렇지!
▲질문자4: 저는 나름대로 단학 같은 것에 무척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방황을 하던 중에 제가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알고자 했던 마음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모든 분들을 만났을 때 저는 그 분들이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뭔가 미심쩍은 점이 많았었습니다. 저는 오늘로 스님을 두 번째 친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책을 통해서나 비디오를 통해서 스님을 친견하는 동안은 제 자신이 아주 왜소하게 느껴지고 그 순간은 정말로 부모님 이상으로 뜨거운 눈물도 나오는 걸 느꼈습니다. 제 나름대로 느끼는 이 세상의 어떤 흐름을 볼 때 옳고 그름이 올바르게 서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제 자신이 중심이 서있지 않습니다.
스님의 법문이 이해는 되나 제 자신이 정착되지 못한 것은, 제 것이 되어야만이 제 스스로 일어나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텐데 그렇지 못하는 것은 제가 중심이 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나름대로 말을 배우고 있고 생각을 배우고 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습니다. 주인공한테 맡기면서 공부해 봤을 때, 과연 진짜 주인공인가도 모르면서 그렇게 해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는 불경은 잘은 모릅니다만 불경도 하나의 끄달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인연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스님: 불교가 국한된 종교인 줄 아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불(佛)은 영원한 생명의 근본을 말하고, 교(敎)는 교훈이 되는 말을 뜻하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국한된 개별적인 용어가 붙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인연이라 하면 간단히 말해서, 눈으로 본다면 귀로 듣는데, 그럴 때 눈과 귀가 한 인연이 되는 겁니다. 한 버스 안에 나고 있는 것도 인연이구요.
내가 가끔 비행기 프로펠러로 표현을 합니다. 프로펠러가 돌아가고 있는데 거기에 무엇이 붙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죽는다고 하는데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가을에 잎 떨어지는 거와 같다고 그럽니다. 가을 잎 떨어진다고 해서 나무뿌리가 죽고 나무가 죽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무뿌리를 볼 수 있지만 나무는 자기 뿌리를 볼 수 없듯이,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뿌리는 체가 없기 때문에 지금 말을 하고 또 이 자리에 앉아 있지 않습니까. 마음내는 게 없다면 어떻게 질문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불·법·승 삼보가 자기한테 있는 것이니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자기부터 알아야 합니다. 소용돌이 속에서 돌아가는데 이것 보고 저것 끄달리고 하면 순응해서 따라갈 수가 없어요. 그러니 매사에 걸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여러분이 그와 같이 걸리기 때문에 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겁니다. 여북하면 내가 그럽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다 해도 눈도 깜짝하지 말아라, 네가 공해서 없는데 무엇이 개입될 게 있느냐고 말하는 겁니다. 이 도리를 안다면 그대로 자유스러운데 말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모두 법신이자 보신, 화신이지 않습니까. 달리 어디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한생각에 문수도 있고 보현도 있는 겁니다. 한생각에 관음도 있고 지장도 있습니다. 그래서 삼천 년 전의 한생각이 지금의 한생각이고, 지금의 한생각이 미래의 한생각입니다.
그러니 과거를 알고 미래를 알 수 있다는 거죠. 과거에 자기가 산 대로 짊어지고 나왔는데 거기에 다시 입력을 한다면 과거에 지은 것은 다 지워져서 없어지는 겁니다. 오죽하면 모르는 컴퓨터까지 대동했겠습니까. 나는 이 날까지 내가 잘한다는 생각과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못한다는 걱정을 해본 적도 없습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누가 좋다 나쁘다 하든 간에 상관 않고 못났으면 못난 대로 살아갑니다. 진실되게 사는데 누가 뭐라고 하든 무슨 상관입니까. 느낀 대로, 실험하고 체험한 그대로를 얘기합니다.
부처님 법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백지 속에 있으니 연필을 드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쓸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34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
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