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共食)에 대해서…
문
스님께서 자주 공생(共生) 공심(共心) 공용(共用) 공체(共體) 공식(共食)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시는데 공식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서 질문 드립니다. 그냥 내 앞에 닥치는 것 마다하지 말고 하나로 모아서 먹으라는 말씀이신지, 아니면 더 높은 차원의 깊은 뜻이 있으신 것인지 가르침 주십시오.
답
여러분이 각자 자기 몸 하나를 생각한다 하더라도 공생으로 공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치는 다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장육부 세포 하나 하나에도 다 생명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 몸 하나를 봐도 공생으로 살고 공용으로 일체를 하고, 공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외부에 모두를 봐도 전부 공생으로 공식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영을 수만 수십만 개를 한데 합쳐도 영은 영이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달라붙는 게 뭐냐하면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은 없는 게 마음이다.’ 한 것은 마음을 마음이라고 이름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어떤 마음을 내고 어떤 마음을 쓸 때에 마음을 썼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거는 사람이 사는 데에서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자유스럽게 쓰라고, 인간은 자유스럽게 자기 마음대로 마음을 쓰라고 내 놓았는데도 모두 자기 마음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고 모든 것에 걸려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깐 모두 다 차원에 따라서 마음을 쓰게 되는 거죠. 적으면 적은 대로 쓸 거고 크면 큰 대로 쓸 거고 더 크면 더 큰 대로 쓸 거고, 마음이 바다라면 바다 같이 크게 쓸 거고, 그래서 그릇에 따라 크고 작은 대로 그냥 쓰고 살게 마련이거든요. 그러니 어떤 마음을 쓸 때에 진짜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깐 모두 적은 거나 큰 거나 나쁜 거나 좋은 거나 몽땅 한데 합쳐서 한마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좋게 나오든지 언짢게 나오던지 다 한마음 속에서 나오는 거니까 모두가 공생을 하면서 공식을 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근데 한마음 속에서 일체를 하고 있는 거는 알지만 실천하기는 극히 어렵습니다. 진짜로 알고 한다고 하더라도 삼일이 못 가서 그것은 다 폐지가 돼 버리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살행이라는, 보살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들은 날짜를 두지 않고 끝없는 날을 그냥 여여하게 그대로 사는 거죠. 그대로 ‘이것이 이렇게 잘못됐구나, 이걸 잘했구나, 이걸 못했구나’ 하는 게 없이 마음이 그대로 돼 있어요. 마음이 그렇게 돼 있기 때문에 천차만별로, 그대로 뜻으로 마음을 쓰고 살죠.
그러기 때문에 어떠한 문제나 경계가 달려들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둘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도 내 생명같이 생각하고 내 생명같이 존중하고, 내 생명 아닌 생명 같이 생각하는 겁니다. 내 마음 아닌 진짜 마음, 이게 바로 한마음입니다.
살아있는 것은 모습이 천차만별로 다 다릅니다. 모습이 달라요. 근데 산다는, 생명이라는 건 하루만에 죽는 거나 며칠만에 죽는 거나 여든 살에 죽는 거나 백 살에 죽는 거나 생명이라는 자체는 다 똑같습니다. 모습은 다르나 모든 것이 모습이 있다는 점에서 요런 미생물도 다 똑같아요. 또 마음을 천차만별로 쓴다는 것도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보는 거 듣는 게 자기네들 그 통 속에서, 즉 말하자면 자기네들 끼리끼리 살기 때문에 그 습에 젖어서 사람들이 사는 이치를 생각지도 못하는 거죠. 우리가 부처님이나 보살들이 사는 생각을 못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니 모습은 죄 다르지만은 마음 씀씀이야 어디 둘이겠느냐는 겁니다. 이게 바로 공체입니다. 요만한 모습도 움죽거리고 산다는 거죠. 공체(共體). 우리가 전부 공체입니다. 소나 돼지 그 어떤 동물들 배를 갈라놓으면은 참 그거 볼만합디다.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죠. 육신을 잘라서 갈라놓으면 그 육신 속에 있던 생명들도 다 같이 죽게 되죠. 그러니까 공체요 공용이다 이겁니다. 공체이기 때문에 공용(共用)을 한다는 겁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다섯 가지의 문제가 어느 정도 돌아가야 진짜 보살행으로 넘어간단 얘기를 하는 겁니다. 남이 보살이다 보살이 아니다 이러기 이전에 말입니다. 스스로 행동하는 거를 보면 벌써 알아요. 벌써 자기가 마음을 쓰는 대로 행동이 나오는 거니까요. 그러고 그게 공체이기 때문에 공용이다 이겁니다. 공용을 하는 거기 때문에 공식으로 돌아간다, 찰나찰나 환경이 바뀌고 또 환경이 바뀌고, 찰나찰나 바뀌어서 돌아가면서 바뀌는 일들이 그냥 여여하게 바꾸는 대로 바꿔지면서 살아나가고 있는 거예요. 본래 우리가 여여한 생활을 산같이 물같이 여여하게 하고 있는데 마음들이 그렇게 되질 않아서 그걸 인식도 못할 뿐만 아니라 상당히 그걸 어렵게 생각하는 거죠.
이런 말을 정신차려서 듣지 않으신다면 요다음 생에 자기가 훨훨 털고 나설 수가 없어요. 이건 듣고 보는데 있는 게 아니다 라고 하는 그 자체 가운데에 바로 듣고 알 수 있다는 얘기죠. 모습 아닌 모습, 생명 없는 생명, 마음 아닌 마음, 함이 없는 용, 또 함이 없이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먹는 거 없이 먹을 수 있고, 모든 것이 다 바닷물을 삼킨 거와 같습니다. 그런데 바닷물을 삼켰으면 바닷물을 토해낼 줄을 알아야 하는 그 도리가 원식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이걸 말로 공식이라고 해도 되죠. 그러면 바닷물을 다 집어먹었을 때에 그 물 속에 별의별 게 다 들어있지 않습니까. 죽는 것만 들어있는 게 아니라 아픈 것도 들어있고 뭐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이 다 들어있는 거죠. 천차만별로 살아나가는 그 마음속에 별의별 가정이 다 있고, 그 별의별 가정 속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들이 이쪽에는 이런 게 들어있고 저쪽에는 저런 게 들어있는 그 자체가 몽땅 한 바닷물 속에 다 들어있는 거죠. 한 바닷물 속에 들어있는 거를 다 삼킬 수 있어야만 그게 공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공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걸 공식이라고 진짜 할려면 그것도 내 놓을 수도 있어야 된다는 얘기죠. 그 물을 정화시켜서 내 놓을 수 있어야 된다 이런 소리죠.
우리가 그냥 듣고 그냥 보고 그냥 만나고 그냥 헤어지고 이러지만 헤어지든지 만나든지 말을 하던 지 듣든지 잠을 자든지 깨든지 그것만 생각하고 있으라는 게 아닙니다. 살아나가면서 시시때때로 악한 사람도 만나고 선한 사람도 만나고, 악한 일도 생기고 선한 일도 생기는 데서 둘 아닌 도리를 배우시라는 얘기입니다. 악한 것을 만났을 때 그것을 둘로 보지 않는 그 마음으로서 둘이 아니게끔 관해 놓으면 그것이 스스로서 둘이 아니게 처리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행해서 자기가 알고 공부하는 길이거든요.
또 우리가 악한 사람을 만났을 때 악한 문제가 생기게 되면은 그거를 내 탓으로 돌리고 관해 놓으라고 합니다. 그 상대방도 자기이기 때문이죠. 그럼으로써 그것이 성취된다거나 그것이 잘 무마가 된다거나 한다면 그게 바로 경험이자 바로 자기가 걸림 없이 여여하게 걸어가는 길이죠. 이게 모두가 하나서부터 열까지 다 그런 겁니다. 그러니 올해는 더욱 공생으로 살고 공용으로 둘 아니게 실천해 나가면서 공식으로 관하는 걸 거기에 항상 붙여서 하시기 바랍니다.
불성과 무명에 대해서…
문
불교에서는 한편으로 불성을 갖춘 인간이라 말하고 또 한편으로는 무명에 둘러싸인 인간이라고 그러는데 그 두 가지 개념이 상충되는 것 같습니다. 저의 좁은 식견으로는 이렇게 상충되는 부분이 너무도 많기에 불법이 시대에 뒤떨어지고 모순덩어리 이론으로 오해가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가르침 주십시오.
답
이런 걸로 한번 비유해 봅시다. 큰 나무가 있고 작은 나무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왜 작은 나무라고 했고 큰 나무라고 했을까요? 왜 고목이라고 했으며, 왜 그런 단어가 생겼고,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요? 그러고 산도 높은 산이 있고 얕은 산이 있다는 왜 그런 말이 나왔겠습니까? 그런 말이 나온 것은 바로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높은 산이 없다면 얕은 산도 없고, 얕은 산이라는 그 언어도 나오지 않았을 거고 또 얕은 산이 없다면 높은 산이라는 생각도 못 했을 것이고 그런 말이 나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넓게 따지고 본다면 얕은 산도 얕은 산이 아니요, 높은 산도 높은 산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사생의 품성, 만별의 생명들이 있는 거는 다 불성이 있는 법인데, 어째서 그것이 다 어우러지지가 않습니까? 마당에 있는 저 풀도 길고 짧고 그럽디다. 똑같이 잘라 놨는데도 먼저 쓱 나오는 게 있고 나중에 나오는 풀이 있고 그럽디다. 그런 것도 그렇게 조화를 이루면서 어우러지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깐 우리가 진리를 탐구하는데는 얕다 높다, 동이다 서다, 여자다 남자다, 잘못한다 잘한다, 모른다 안다, 불성이다 무명이다 이런 거를 몽땅 놓는 것이 바로 선맥을 바로 이어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분별하는 생각을 놓지 않는다면 어떻게 길 없는 길을 걸을 수 있겠습니까?
요만한 거 하나도 다 나한테서 나오는 거니까 바로 나한테서 해결하고 나한테서 잘 된 거니까 나한테다 감사하고, 내가 갔기 때문에 남을 원망할 게 아니라 내 탓이라는 걸 바로 알면서 그렇게만 한 군데로 뭉쳐 놓는다면, 이 세상을 다 안 가진 게 없고, 또 그 한군데로 뭉쳐놓고 또 놓다보면 나중에는 자기를 홀연히 발견하게 되고, 그때서는 ‘아이구, 알고 보니까 하나도 버릴 게 없구나. 일체가 내 아님이 없구나. 어저께 오늘이 따로 없고 하나가 따로 없고 만도 따로 없구나.’ 하는 걸 알게 됨으로서 부처님께서 행하시는 실상의 중용처럼, 그냥 이걸로도 나투고 저걸로도 나투고 한 찰나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저 한 찰나에 들었다 한 찰나에 귀중한 설법을 하시고 나가시는 겁니다.
그렇게 삼천 년 전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꾸준히, 그리고 모든 것이 평등하게 물이 흐르듯이 흘러 도는 데도 불성이니 무명이니 하고 갈라서 생각하느냐는 겁니다. 그렇게는 생각지 마세요. 하다못해 기어가는 벌레도 생명이 있는 거는 다 불성이 있는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도 그렇구요.
옛날에 선사들께서는 나라의 싸움이 일어난다거나 그런다면 꽃잎파리 하나 하나를 군사로 만들어서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이보경계’ 라고 볼 수 있는 것이 뭐냐하면 급하니까 마음을 내는 게 ‘이보’예요. 한발 내려딛는 거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생겨서 다 죽게 만드는 그런 문제가 생긴다면 땅속에 있는 그 무기들을 전부 녹슬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마음 법입니다. 중단시키고 그런 일을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을 다 부처님의 마음으로 다듬어서 그런 마음이 안 생기게 만들고, 국민들한테 나쁘게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저지르고 자기가 손발 들고 나가게 만들고 말입니다. 그러는 거지 누가 말을 하고 때리고 갖다 가두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훌륭한 법을, 이렇게 광대무변한 법을, 어째서 우리는 외면하고 자기를 발현하려는 노력들을 안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를 왜 외면을 합니까? 제일 중요한 건, 자기의 아픔을 거두어주는 진짜 자기가 얼마나 위대합니까? 길을 지나가다가 엎드러져서 무릎 팍이 깨져 보세요. 거기 남의 손이 가는 게 아니라 바로 자기 손이 얼른 가서, ‘아이쿠 아퍼’ 하면서 어루만져주는 그 손이 바로 십대제자가 거기 가는 거와 같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마음이 십대제자뿐이겠습니까?
그래서 한마디를 하면 봇장이 울려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니깐 또 그런 질문도 나옵니다마는, 우리가 지수화풍이라는 소리를 왜 자꾸 하는지, 지금 전체가 지수화풍 아닌 게 없습니다. 근데 그 지수화풍이, 즉 말하자면 바람과 흙과 물이 한데 합쳐서 혼합이 되니까 온기가 생겼습니다. 온기가 생겨서 불이 나는 건데 그것이 바로 생명의 근원지라고 볼 수 있겠죠. 그렇게 근원지가 되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 몸으로 낫게 만들었거든요. 그러니까 생명의 근원지는 딴 데 가서 찾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고 몸 속에 수 없는 세월을 거쳐서 진화돼서 올라온 그 자체의 근원지를 보라고 바로 인연에 따라서 전부 미생물 모습을 해 가지고 갖가지로 몸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고 나올 때 물 주머니로 나오게 만들었지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지수화풍의 근원지라고 하는 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수화풍의 근원지를 가졌기 때문에 지수화풍을 먹고 살고 있는 겁니다. 또 지수화풍이 아니라면 이 세계가 발달할 수도 없고 연구할 수도 없거니와 과학이라는 그 소리도 안 나왔을 겁니다. 그러고 끝간데 없는 진리가 될 수도 없거니와 말입니다.
그래서 불성과 무명을 다르지 않습니다. 무명이 없다면 어떻게 불성을 발현하려고 노력들을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저런 생각하는 그 자체가 어디를 근거로 해서 일어나는지를 잘 생각해 본다면 일체를 주인공 불성자리에 돌려놓고 무명 업식의 놀음에서 벗어나려고 열심히 관하게 될 겁니다.
외국인을 싫어하는데…
문
여쭤볼 게 한 가지 있어서 질문드립니다. 인간관계에서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외국인들에게 그러는 거 같습니다. 제가 무슨 극우민족주의자도 아닌데 자꾸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 사람들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게끔 제 자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답
벽을 치면 봇장이 울리듯이 이 세상만사가 다 끊임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흐르는 저 물도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안에서도 천차만별로 생명들의 모습들이 뛰고, 밖에서도 천차만별로 돌아가는 상황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끝없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산도 보십시오. 묵묵히 지켜보면서 끝없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살림살이에서는 사람의 마음이 간사해서 낮은 걸 보면 낮다고 생각을 하고 높은 걸 보면 높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좀더 넓고 지혜있게 생각을 한다면 낮은 거에도 끄달리지 않을 거고 높은 거에도 끄달리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아까도 얘기했지만 낮은 게 없으면 높은 것도 없는 것이니까요. 높은 게 있기 때문에 또 낮은 것이 있으니까 알고 보면 어느 거 하나 빠지지 않고 모두가 다 평등한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일체 만물만생이 둘이 아닌 도리, 만물만생이 평등한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곤충을 보더라도 그저 아무 생각없이 밟고 돌아서는 거고, 아무 생각없이 꽃도 꺾어서 버릴 수가 있고, 그것을 꺾으면은 시든다는 거를 생각조차도 못하면서 잠시 그저 자기 생각에만 젖어서 꽃을 마구 꺾게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가 한평생 산다고 해도 흐르는 물과 산이 우리를 본다면 얼마나 가소롭겠습니까? ‘얼마나 살다가 간다고 저렇게들 모두 날뛰나’ 하고 우리를 보면서 얼마나 안타까워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삽니까? 곤충이나 작은 벌레들을 보면서 금방금방 죽고 생하고 죽고 생하는 거를 생각을 안하고, 양면을 생각 안하고 ‘하루살이가 살면 얼마나 살겠어?’ 이렇게 깔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무시하게 되고 그 생명에 대해 무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모든 게 모습은 다르고 길고 짧음은 있을지언정, 길고 짧음은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습이 다르고 생명이 짧고 길고는 있을지언정 주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끊임없는 길을 걷고 있는 겁니다. 하루살이가 하루 살다 죽는다고 해서 또 하루살이가 없어지는 거 아닙니다. 그러니까 일찍 죽고 일찍 태어나고 일찍 죽고 일찍 태어나는 것뿐이죠. 그러나 우리 사람들은 일찍 죽고 일찍 태어나고 이런 인연속에서 거듭거듭 헤매면서 고(苦) 속에서 휘말리고 고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지만 한생각 되돌려 공부하다 보면 그 고통에서 하루속히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일체 경계를 나온 그 자리에 되돌려 놓는 작업을 열심히 해야 된다고 하는 겁니다. 정말 열심히 말입니다. 일체 만법을 닥치는 대로 다 하면서 순간순간 되돌려 놓는 작업이 바로 참선에 직선적으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와선이나 좌선이나 행선이나 입선이나 다 한데 합쳐서 생활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참선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할 건, 참선은 이론적으로 하거나 말로 하거나 지식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참 박식해서 요거는 요렇게 풀으니까 이해가 되고, 조거는 조렇게 풀으니까 이해가 되고 이렇게 하는 분들고 있는데 그건 진정한 참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일어나는 대로 즉시로 집어먹고 집어먹은 즉시 그 맛을 알고 체험하고 들어가야만 참선아닌 참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자리에서만이 아니라 어디를 간다 하더라도 내 몸이 있는 그곳에 바로 부처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 몸이 움죽거리면 화신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 마음이 움죽거리면 법신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잘 아시겠죠?
이렇게 항상 말씀해 드리는 그 뜻은 내가 높다고 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낮다고 해서 또 처질 것도 없지만, 우리가 한 인간으로서 내 부모, 내 형제, 내 자식 아님이 하나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억겁을 통해서 진화돼서 여기까지 올라왔다면, 여기서 금방 한 식구로 살면서 부모로 살다가 자식으로 살다가 형제로 살다가 조카로 살다가 딴 집으로 또 태어나고 그런다면 이거는 도대체 언제 적에 부모이고 언제 적에 자식이며 언제 적에 조카라고 하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모두가 내 형제, 내 부모 이지 않습니까?
억겁을 거쳐 나오면서 이렇게 부모형제로 만나 뒤섞여 살아 나왔으니 어디 따로 있겠습니까? 뒤섞이고 또 뒤섞이면서 오르고 내리고 오르고 내리고, 항상 그런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의 몸뚱이도 정맥 동맥을 통해 피가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어찌 정맥에서만 피가 흐르고 동맥에서만 피가 흐른다고 하겠습니까? 온 누리에, 온 누리라는 것은 온몸 손끝 발끝마다 다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온 몸을 다 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피가 달라서 어느 피가 정맥의 피라고 하고 어느 피가 동맥의 피라고 하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을 자기로 본다면 자기와 같이만 본다면 자비도 나오고 사랑도 나오고 의리도 나오고 도의도 나오고, 거기에서는 무궁무진하게 자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마음으로 일체를 싸안는 자비가 향기와 같이 상대에게까지 풍겨서 에너지와 같이 거기에 바로, 우리가 모두 공체로서 공심으로 공용을 하고 있고 공생을 하고 있으니까 내 한 생각의 향기가 거기까지 퍼져서 너와 나가 더불어 웃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마음의 향기 에너지는 가고 옴이 없이 거기까지도 전해져서 다 밝아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현실에서 뿐만이 아닙니다. 세세생생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현실에 살면서 나쁘다 좋다, 싫다 좋다고 생각했던 게 다 죽어서 끊어진다면 별 문제인데 세세생생에 억겁을 거치면서 얼키고 설키고, 자기 한 대로 고대로 얼키고 설킬 테니 그거를 어떻게 끊으렵니까? 그것이 물질이라면 아예 단번에 끊어버리고 말겠는데 물질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그 질긴 인연 줄인데, 그 인연 줄은 어떤 걸로도 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에서 나온 거는 마음으로 녹일 수밖에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끊는다고 생각을 한다면은 벌써 둘이 되니까 녹인다고 생각을 하라고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자기가 한 거 자기한테 거기다 다시 놓으면서 ‘주인공! 당신이 해결해!’ 하고 진실로 관하면서 놓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왔던 자리로 다시 집어넣는 거죠. 나온 자리에 돌려놓는다면 다시 들어가서 재생이 돼서 하나가 돼 가지고 만법을 응용하게끔 생동력있게 거기에서 개발돼서 다시 현실에 나오는 건데 실천을 해 보지도 않고 어찌 그냥 생각으로만 된다 안된다 하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싫어하고 좋아하는 그 모든 것을 지우려면은 한 군데 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기 주처로 인해서 정수 컴퓨터에 입력이 된 거를 다시 입력을 해야 새롭게 입력된 것이 현실로 나오는 거니까, 상대가 어떻다 저떻다 할 게 없습니다. 그리고 남을 원망하는 게 아니라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 자기 주처에다 다시 입력을 해 버려요. 그러면 앞서의 그 모든 것은 없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심성과학입니다.
사람이 머리로만 해서 한다면은 진실한 마음의 하달이 전신에 전달 되지 않습니다. 마음의 권처에서 바로 두뇌로 올라가는 게 누진입니다. 누진으로서 몸의 사대에 하달을 해서 바깥으로 실질적으로 나올 수 있는 그런 것이 바로 과학입니다. 심성 과학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종합 심성과학이기에 이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공부라고 하는 겁니다. 잘 알아들으셨으리라 믿고, 일체를 나로 보는 공부를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낚시와 나물 캐는 것에 대해
문
저의 남편이 낚시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래서 제가 되도록 살생이니까 하지 말라고 하면 나물 캐고 버섯 따고 하는 것 또한 살생이 아니냐고 오히려 저에게 반문을 해서 할말이 없어집니다. 취미로 동물을 잡는 것과 식생활을 위해서 나물을 캐는 것은 다르다고 얘기를 해주고 싶은데 정리가 잘 안됩니다. 스님께서 가르침 주십시오.
답
우리가 공해서 찰나찰나 고정됨이 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어디 먼지 붙을 자리가 없습니다. 본래 죄 붙을 자리가 없는데 여러분이 관습에 의해서 마음을 그렇게 가지고 가니깐 그렇습니다.
일체 생명들이 다들 천차만별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정물도 그렇고 나물도 그렇고, 어느 거 할 거 없이 다 그렇습니다. 식물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다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가 시금치 한 줄기 생 거를 갖다가 턱 잘라서 생으로 먹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것이 어디로 갑니까? 먹으면 어디로 갑니까? 내 피 한 부분이 되고 내 몸 한 부분이 되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그 생명은 나와 둘이 아니게 되고, 그 시금치라는 체(體)는 내 몸의 한 부분이 됩니다. 즉 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오줌 누고 똥 누면 그게 거름이 돼가지고 또 딴 부분으로 갔다가 다시 나한테로 옵니다. 그렇게 연방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고기를 낚는다, 소를 잡는다, 돼지를 잡는다 하더래도 한마음의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살생이 되고 죄가 되는 겁니다. 이 도리를 모르기 때문에 살생이 되고 죄가 되는 거지, 이 도리를 알면은 죽여도 자비요, 죄도 되지 않습니다. 왜냐? 바로 내 몸의 한 부분이 되고, 내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근본은 수만 개를 넣는다 하더래도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알아듣기 쉽게 영이라고 해도 좋고 혼이라고 해도 좋고 영혼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영혼을 만 개를 집어넣어도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하나입니다. 그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 하나마져도 체가 없는 겁니다. 넣으면은 내 생명이 되고 물질은 바로 내 몸 한 부분이 되니까요. 그래서 내가 한생각을 내면은 무명이, 만약에 소라고 하면 소의 무명을 벗고 사람이 금방 되는 겁니다. 사람의 의식 속에 넣는다면 그 사람의 모든 의식을 배워서 그냥 사람으로 형성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거고 살생을 하는 겁니다. 내가 항상 그러죠. 죄가 있다면 뭐가 죄가 있겠느냐, 강도질을 했다 하더라도 몰라서 죄를 짓는 것이다. 여러분 눈에는 보이는 사람 숫자만 보일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허공에 듣는 분들이 많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여러분 한 분이 듣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러분 속에 수십 억 마리가 지금 같이 듣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염주 알 같이 서로 붙어 돌아가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묘한 도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안에다가 맡겨 놓으면 그걸로 인해서 두뇌로 올라가서 두뇌에 상신이 되면은 바로 같이 작용을 하면서 통신이 돼 가지고 사대로 통신이 됩니다. 그래서 이 공부를 제대로만 한다면 천체 물리학이든지 천체과학이든지, 천체의학이든지, 철학이든지, 천문학이든지 어떠한 거를 막론해 놓고 동시에 작용할 수 있는 겁니다.
마음 한 점이 우주를 싸고도 남고 덮고도 남습니다. 마음공부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도리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할 량으로 노력해야 알게 되는 거지 그 사람이 할려고 안 하는데 어떻게 그게 알아집니까? 그래서 지금 한철 배낭을 짊어지고 나왔다가 그 업식을 홀랑 벗어버리고 우리가 세세생생에 끄달림 없이 돌아가는 자유인이 된다면 정말 시쳇말로 왔다입니다.
그래서 지금 외국 사람들도 이 정신계를 타파할 량으로 그냥 노력들을 하는데 하물며 ‘오십시오, 오십시오.’ 해서 이렇게 말하는 데도 안한다면은 그건 인연이 없다고 봐야죠. 그래 인연 없는 중생은 어떻게 할 수도 없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고기를 잡거나 그래도, 예전의 선지식들께서 고기 한 점을 먹어도 그 고기 한 점에 붙었던 그 소의 무명은 벗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도리를 능가한 사람이 먹는 고기는 그냥 고기가 아니라 그 무명을 벗겨주는 보살행이라는 얘깁니다.
소를 하나 건진다 무명을 벗겨준다 하더라도 소의 마음이 바로 나와 둘이 아니게 딱 한데 합치면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그거는 형체가 없는 거니까 두드러지지 않고 그냥 나로 화해 버리는 거죠. 나의 속을 거쳐서 바로 탄생이 된다는 겁니다. 꺼내도 줄지도 않고 넣어도 두드러지지도 않습니다, 체가 없는 거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한다면 바로 나고 드는 게 없이 내 마음이 항상 물질세계와 정신세계가 합류화 돼가지고 돌아가기 때문에 사무사유를 한데 합쳐서 중용을 하는 격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대로 앉아서 소를 무명을 벗겨줘도 아픔을 느끼지 않으면서 금방 벗어나게 되고 무명이 벗겨지고 그 영혼은 내가 되어 가지고 바로 환생을 시키는 거죠. 그러니깐 그대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 즉시에 무명이 벗겨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취하는 마음으로 죽인다면 그건 살생이 되는 겁니다.
간절해야 하는지?
문
저 나름대로 주인공에 놓고 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스님 말씀 중에도 부와 자가 상봉하기 위해선 간절히 주인공을 그리워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그리움과 간절함도 놓아야 하는 건 아닌지요. 그리고 주인공에 관하다 보니까 왠지 주인공을 보게 해달라고 관하는 것이 제 집착이나 욕심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일부러 하는 게 너무 인위적으로 나가는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답
주인공 속에서 나오는 일체를 다 거기 믿고 놓을 수 있는 그런 믿음이 충실해야 하고, 물러서지 않는 마음이 충실해야 하고, 관하는 마음이 그 무엇보다도 굳건해야 합니다. ‘네 놈이 나를 끌고 다니고 네 놈이 움죽거리게 하고, 말하게 하고, 듣게 하고, 보게 하는 거 아냐. 네가 있다는 증명은 너만이 할 수 있어!’ 하고 관하는 겁니다. 어느 장소를 정해놓고 뭐 틀고 앉아서 뭐를 찾고 뭐를 찾고 뭐를 찾아 봤자, 자기부터 알아야 돼요. 이게 바로 자가발전소의 특징이니까, 통로는 거기밖에 없어요. 미래의 정신세계의 통로는 거기 밖에 없거든요.
그래 생활을 해도 관하는 것이요, 생활을 안 해도 관하는 것이요, 앉아도 관하는 것이요, 똥을 눠도 관하는 것이요, 관하지 않는 게 어디 하나나 있습니까? 아! 그놈이 다하는 건데 어떻게 관하지 않는 겁니까? 함이 없이 관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진실하게 관을 하는게 되는 거죠. 믿지 않는데, 그저 빈 맷돌 돌아가듯 하는데 거기 무슨 심봉이 끼워지겠습니까?
그래서 이게 옳을까, 저게 옳을까하고 사량으로, 빈 껍데기로 그렇게 허망하게 할 게 아니라, 이 세상의 무상한 도리가 바로 실상이고 실상이 무상한 도리인데 모든 것을 놓고 갈 때에 주인공 기둥 중심을 딱 잡고서, 기둥 없는 기둥을 잡고서 거기다 모든 것을 놔야 살아서 죽는 법입니다. 아, 그래야 떳떳하고 당당하죠. 아! 자기의 근본이 분명히 있어서 이렇게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는데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자기의 근본을 무시하고 그럴 수 있어요?
그러니까 무조건 믿으라고 하는 겁니다. 무조건이에요. 자기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 태초요, 자기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 벌어진 것이요, 벌어졌으니 부처가 있는 것이요, 중생이 있는 것이요, 중생 속에 부처가 있고 부처 속에 중생이 있으니 둘 아닌 그 속에서 바로 다스리는 마음이 있지 않는가 하는 겁니다.
그래도 이해를 못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남자다 여자다, 10년을 다녔다 얼마를 다녔다 그런 걸 떠나서 어디든지 턱, 어디든지 엎드러져서 그것을 참구할 수 있는, 둘 아니게 참구할 수 있어야 해요. 높이 보지도 말고 내려보지도 말고 나로만 생각 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중요한 겁니다. 얼마만큼 머리로 알고, 얼마만큼 절에 다니고 이러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로 돌아가면서도 그 하나가 하나가 아니라는 거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가 아니면서도 하나 아닙니까? 그러니 그 한 놈이 모든 일을 작동을 하는데, 그 한 놈을, 모두 그놈이 하는 거니까 그 한 놈한테다 놓아버려야 됩니다. 그리고 그 놈을 진짜로 믿고 그 놈한테다 일체를 맡겨놔야 합니다.
그래서 법당에 들어가면 부처님 안으로 다 들어가 놔 버리고 자기 몸까지 모두 부처님한테 놔 버리고, 나갈 때는 여러분 주인공에 부처님까지도 다 한데 놔 버리십시오. 마음 그 자체가 공이니까요. 그러면서 항상 양면을 놓고 가는 반면에 무심으로서 갈구하는 마음은 아주 간절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행주좌와 어묵동정입니다. 그리고 앉으나 서나 그대로 참선이에요. 우리가 밥을 먹으나 똥을 누나 망상을 하나 망상에서 벗어나나 그대로 참선임을 알고 어떠한 거든지 몰록 다 놓고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그저 올 해우년도 그렇고 내년 해우년도 상당히 빠르게 돌아가고 사람 살기가 복잡하니까 복잡하지 않도록 모두 각자 몸과 가정을 이끌어 나가십시오.
이 지구에 모두 뜨거운 기운이 돌고 물에서도 뜨거운 화풍이 돌기 때문에 모두 사람 살기가 복잡해집니다. 그러니까 복잡하지 않도록 항상 여러분들이 각자 내가 공해서 사는 거기서 다 그것을 해결해야 됩니다.
그러니 내가 말할 때는 이렇게 그냥 하지만, 올 때는 오는 줄도 모르고 가는 줄도 모르게 이렇게 다가오고 이런 문제들이 허상 많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두 여러분들이 그저 살아나가는 데에 마음으로 관하고 이렇게 가시는 데 열심히 하시면은 그런 게 다 흩어지고 좋습니다.
그리고 전에 촛불 세 자루 켜 놓으라고 그랬죠. 그렇게 켜 놓는 것으로 인해서 그게 많이 없어지고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니깐 앞으로도 그것이 아직까지 내년까지 남았으니깐, 내년까지 남았기에 이 지구상으로도 뜨건 기운이 올라오고 물 속에도 뜨건 기운이 올라오고 그럽니다. 그러니깐 여러분들이 제각끔들 관하시고 가정을 관하시고 열심히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