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0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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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해서 여성으로 태어난다
필자는 프랑스의 여성 철학자 시몬 드 보바르 여사의 다음과 같은 말에 깊은 감명을 받은 바가 있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실 이런 선언은 여성들에게 무한대의 가능성과 희망을 제공했다. 보이지 않는 관습과 윤리 도덕에 얽매여 자신의 무궁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여성들에게 이 보다 더 아름다운 선물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보바르 여사 보다 훨씬 오랜 시간 이전에 이미 부처님께서 여성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선사했다. 그것은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었다. 여성이란 고정된 실체나 속성이 없기 때문에 노력 여하에 따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 오히려 현대의 여성들에게 호소력이 있다. 과거와 달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사슬들이 많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과학과 사회학의 발달로 정보의 교류가 빈번해지고 권위나 관습의 허구성과 비실체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대승불교가 발달하면서 여성들에 대한 일반의 편견을 극복하기 위한 불교도들의 노력은 바로 현대 사회학 내지 과학의 세계관에 입각해 남녀의 차별을 철폐하고자 하는 노력과 상통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여성과 남성의 실체성이 없기 때문에 어딘가에 편견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집착이요 비불교적인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대승의 법에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고 <무구현녀경>은 선언한다. <보녀소문경>에서는 “남자의 법도 없고, 여자의 법도 없다. 일체 모든 존재의 핵심을 구족하여 가고 옴이 없다”고 말한다. <유마경>에서는 문수보살이 천녀가 뿌린 꽃이 자신의 옷에 붙어 떨어지지 않자 당황하게 된다. 이 때 유마거사는 문수보살에게 ‘아직도 남녀의 차별상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꽃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충고한다. 이런 충고를 듣고 정신을 차리자 꽃은 저절로 떨어졌다고 한다. 원래 출가자는 꽃으로 자신의 몸을 장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율장>에 있다. <율장>에 따르는 한 문수보살은 원칙을 잘 지킨 것이다. 그럼에도 핀잔을 듣게 된 이유는 남녀를 차별하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승불교도들 중에서 일부는 좀더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입장을 선택한다. <보녀소문경>에서는 사리불이 질문하고 부처님이 대답하는 문답이 있다. “이 보녀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여인의 몸을 받았습니까?” “보살은 죄로 인해 여인의 몸을 받는 것이 아니다. 보살은 지혜, 신통, 훌륭한 방편, 성스러운 지혜 등을 지니기 때문에 여인의 몸을 나투어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인의 몸을 받는다고 말한다.
<대보적경>권99 ‘무외덕보살회’에서는 아사세 왕의 땅인 무외덕이 부처님 앞에서 사자후를 토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서 사리불과 부처님은 다시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이 여인은 능히 여자의 몸을 바꿀 수 있습니까?” “너는 그녀를 여자로 보지만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된다. 이유가 무엇인가? 이 보살은 발원의 힘 때문에 여인의 몸을 보여 중생을 제도하고 있는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상의 대화가 끝나자 무외덕이 맹서하며 “만일 일체의 법이 남자도 여자도 아니라면 내 이제 장부의 몸을 나투어 일체 중생이 모두 보게 하리라”고 말하며, 말이 끝나자마자 장부의 몸을 보이며 허공으로 올라가 그곳에 머물며 내려오지 않았다.
대승불교의 이론에 의하면 인간이란 모두 이미 전생에 깨달음을 완성한 존재들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사바세계에서 할 일이 있기 때문에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말한다. 불국정토를 장엄하는 일이 그것이며, 사홍서원을 완성하는 일이 그것이다. 때문에 장엄과 서원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취사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여성의 몸을 받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란 생각이다.
혹자들은 말하길 불교는 여전히 남녀를 차별한다고 말한다. 불교사 속에서 분명 그러한 이론이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수많은 불교인들이 남녀의 평등과 동일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보녀소문경>이나 <대보적경>처럼 오히려 여성의 존재의의를 근본적으로 확장시켜주는 가르침도 있다. 불교이론이 발달하면 할수록 여성의 존재의의를 극대화시켜 주고 있으며,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최대한의 의미를 부여해 주고 있다.
여성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남자나 사회에 의해 그렇게 규정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도 아직 남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생물학적 의식에 집착하고 있는 불교도가 있다면 미안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의식을 바꾸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여성이 없었으면 필자나 여러분들 역시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을 전제해야만 한다.
<본지 상임논설위원·불교학 박사>
2003-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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