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때 나라의 사정이 어려워지자 당나라에 유학 간 자장율사는 급히 귀국하였다. 자장율사는 경주로 돌아오면서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가사를 모셔왔다. 이것은 한국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진신사리를 모셔와 부처님께 직접 예배함으로써 사리신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선덕여왕 당시 퍼져있던, 신라가 불국토(佛國土)라는 믿음을 확고하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자장율사는 진신사리를 셋으로 나누어 각기 황룡사, 태화사, 통도사에 안치하였다. 황룡사에서는 이 진신사리를 9층목탑에 모셨고, 태화사는 폐허가 되어 진신사리를 어떻게 모셨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런데 통도사에서는 2층의 계단(戒壇)을 설치하고 진신사리와 가사를 봉안하였다. 세상의 무엇으로도 깨뜨리지 못한다는 금강석에 비유한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여 진신사리를 모심으로써 통도사는 불보(佛寶)의 사찰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 이곳에서 계를 받는 것은 곧 부처님으로부터 계를 받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스님들이 정통으로 수계를 받는 장소로 자리 잡은 것이다. 신라시대에는 통도사를 비롯하여 태백산 정암사, 영월 법흥사,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에 5대 금강계단이 설치되었고, 고려시대에는 김제 금산사, 개성 불일사에 금강계단이 세워졌다.
통도사 창건에 관해서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흥미로운 설화가 전한다. 문수보살이 자장율사에게 진신사리와 가사를 주면서 취서산(鷲栖山, 영취산의 옛 이름) 기슭에 사는 독룡(毒龍)이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니 그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쌓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三災)를 면할 것이라 하였다. 이상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내용이고, 속전(俗傳)에 그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자장에게 항복한 독룡은 모두 아홉 마리인데, 그 가운데 한 마리만은 굳이 그곳에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맹세하여 자장은 그 용의 청을 들어주었다. 지금 그곳이 금강계단 옆의 구룡지(九龍池)이다.
그러면 자장이 세운 금강계단은 어떤 모습일까? <삼국유사>에는 그 형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통도사 계단은 두 층이 있는데, 위층 가운데에는 돌 뚜껑을 안치하여 마치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과 같다.” 지금 남아 있는 금강계단은 이 기록처럼 2단의 기단 위에 가마솥 모양이라기보다는 종 모양에 가까운 탑이 놓여있다. 그런데 1997년 문명대 교수(동국대)의 세밀한 조사에 의하면, 지금의 금강계단은 여러 차례 중수가 이루어져 자장율사 당시의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종모양의 탑은 고려시대의 것이고, 기단은 조선후기의 특징이 보이며, 아치형의 돌문과 석등은 일제시대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2층의 계단 위에 탑’이라는 신라시대의 형식은 간직하고 있지만, 지금은 아쉽게도 고려시대부터 일제시대까지의 조형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계단을 설치한 통도사가 갖고 있는 명성과 역사는 결코 중수(?)되지 않는 것이다. ■경주대 문화재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