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 비구가 12년 간 대해를 관찰하면서 터득한 것은 변화무쌍한 생사의 바다인 현실세계가 바로 진리의 세계요, 부처님의 세계라는 사실이다. 해운 비구가 12년 동안 큰 바다를 관찰하다가 그 속에서 큰 연꽃이 아름답게 피어나 바다를 장엄한 것을 보게 된 것은 지혜로써 생사의 바다를 관찰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생멸변화하는 생사의 바다도 지혜의 눈으로 바라보면 무수한 인연으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법계인 것이다.
지혜의 광명은 모든 존재의 진실한 모습을 비추어 낸다. 지혜에 의해 비춰 나온 진실한 세계는 모든 것이 진리를 따라 변화하는 진리의 세계로서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가 된다. 무수한 세계바다[世界海]는 광대무변해서 ‘무한’이라는 말로 나타낼 수밖에는 없다. 이같은 광대한 세계바다의 속에서 비춰 나오는 일체의 것은 서로 관계를 맺어서 커다란 조화와 융화 속에서 살아간다.
세계 속에서 하나의 사상(事象: 사물과 형상)은 다른 사상과 교류하고 있으며 교류하는 것은 또 다른 사상과 무한히 교류한다. 이같은 서로의 관통과 융합은 바로 비로자나불에 의지한 것이다. 해운 비구가 바다를 아름답게 장엄하는 연꽃 위에서 부처님이 가부좌하고 계신 것을 발견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깨달은 입장에서 보면 한없는 상관관계로서 끊임없이 생멸변화하면서 존재하는 삼라만상 일체의 모습이 그대로 진리가 나타난 것이므로, 이 현실세계가 바로 법신불의 모습이다. 법신불은 본래 어떠한 형태도 갖지 않지만 신력에 의해 일체 국토에서 한량없는 부처님을 나타내어 법륜을 굴리며 일체 세계에 편만(遍滿)한 온갖 모습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화엄경>에서는 천지만물까지도 그대로 부처님이 나타난 것으로 본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부처님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우주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지금 살아간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도, 실제로는 부처님의 한 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인연을 따라 업을 따라 이렇게도 변하고 저렇게도 변하며, 삶과 죽음을 되풀이하면서 우리들 자체가 부처님의 한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부처님 자신은 눈에 보이지 않고, 형체와 색깔, 모습이 없는 법신불이다. 형체가 없는 부처님이므로 음성으로 설법하지도 않는다. 지금 우리의 귀에는 들리지 않고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비로자나불은 끊임없이 설법을 계속하고 있다. 생사의 바다 속 일체의 시간과 장소에서 부처님의 법문은 영원무궁토록 이어진다. 그러므로 해운 비구는 바닷물로 먹을 삼고 수미산으로 붓을 삼아서 쓴다 해도 이 보안법문의 한 품(一品) 가운데 한 문장이나 한 구절조차도 쓸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보안법문이요, 또한 진실한 <화엄경>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화엄경>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방편으로써 모습을 나타낸 <화엄경>을 배우는 것이다. 이런 부처님 속에서 살고 있음을 깊이 인식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제각기 임무를 수행하며 이 생애를 살아가는 것이 구도자의 목적이요, <화엄경>의 목적이다.
보안법문은 지혜의 눈으로 두루 세상의 모든 존재의 모습을 꿰뚫어 본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보안법문을 통해 현실세계 배후에 영원불멸한 부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보안법문은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열어 보이고 모든 보살의 진실한 행을 실천하게 하는 근원이 되며, 모든 부처님의 묘법을 열어 밝히는 모든 진리의 가르침이 그 가운데에 들어 있다. 이 때문에 해운 비구는 보안법문이 모든 외도의 삿된 이론을 타파하고 모든 마귀의 무리를 없애게 하여 중생들을 기쁘게 하며, 모든 중생의 근성을 분명히 알아 중생들의 마음을 깨닫게 한다고 설하고 있다.
생사의 바다인 현실세계 속에서 항상 부처님을 만나고 그 가르침을 듣고 수지하는 것은 과연 어떠한 의의를 갖는가? 생사의 바다에서 영원무궁토록 부사의한 활동을 계속하는 부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우리의 몸을 생사의 바다 한 가운데에 두고 있으면서도, 생사를 초월해 영원하면서도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생사의 바다에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법계의 장엄도 발견해낼 수 있다. 이런 지혜의 눈이 열릴 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진정한 생존의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금강대 불교문화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