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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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중석 스님
좌충우돌 과격하지만 천진·순박
남다른 효상좌…선방 열심히 다녀

바다 가운데 솟아 있는 바위는 얼마나 많은 파도와 부딪쳐야 둥글어 질까. 둥근 것은 고사하고 하루도 충돌의 도전이 없는 날이 없는 그 바위는 얼마나 고달플까. 오늘도 다시 추억 여행을 떠나볼 일이다.
공군법사를 마치고 통도사 강원에 방부를 들이는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인도 성지순례를 서너 달 하고 돌아와 보니 방부가 끝났다고 했다. 하지만 억지를 부려서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통도사승가대학의 일원이 되었다. 그리고 함께 공부할 도반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때 유난히 트집을 잡고 기득권을 강조한 스님이 있었다. 바로 해중석 스님이다. 한마디로 방장스님 상좌라는, 보이지 않는 기득권에 괴팍한 정의파라고 하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될 것 같다. 말 그대로 망망한 바다 가운데 물위로 솟은 바위 같았다. 겸손하거나 자중하는 모습보다는 강당생활 조금 한 것을 가지고 대단한 유세를 떠는 유별난 스님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스님이 반장까지 되어 반의 규칙을 이야기 하는데, 법랍이 더 많았던 나로서는 심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해중석 스님과는 편치 않은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막상 만나 같이 공부를 하면서 서로 동화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거칠던 해중석 스님도 시간이 흐르면서 해풍과 파도에 뭉뚱그려진 바위처럼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도반들의 애정 어린 질책의 파도가 크게 작용했다. 서로 부딪치기도 많이 했고 조언과 타협을 무수히 한 결과였다. 그래서 졸업에 임박해서는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사실 알고 보면 심성이 악하거나 삐뚤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면세계가 너무 부드러워서 남에게는 거칠게 어필한다는 것이 어울릴 것 같다. 때때로 어떤 상황에서 멋적어 할 때는 영락없는 개구쟁이 어린 아이 같았다. 얼마나 천진스러운가 하면 삭발을 하고 난 뒤에 머리가 자라면 흰머리가 보기 싫다고 염색을 했다. 그런데 그 짧은 머리가 하루 자고 나면 길고, 하루 자고 나면 자라나기 때문에 염색이 소용없는 일이었지만 전혀 아랑곳 하지 않을 만큼 해중석 스님은 순박했다.
그런 순박함 만큼이나 신통한 것은 은사스님에 대한 지극한 마음이다. 시간만 나면 방장스님 방에 가서 청소도 하고 글씨를 쓰실 때에는 먹을 갈아드리는 정성을 다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건강을 걱정하고 뭐든 해드리고자 하는 모습은 지극하기 이를 데 없었다. 강원에 있을 때도 유난스러웠지만 몇 년 전 방장스님께서 입원하시는 동안에도 앞장서서 병실을 지켰다. 사실이지 피를 나눈 자식도 그렇게 지극하기가 쉽지 않을 터인데 스님은 남다른 효상좌였다.
세월이 흘러 강원을 졸업할 때 인도로 수학여행을 떠났는데. 인도를 두세 번 다녀온 내가 전적으로 인솔을 해서 네팔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숙소가 정해지고 시간이 조금 남아서 시내로 간식에 필요한 과일을 사러 갔다. 모두 네 명이 택시를 타고 중심가에 내려 가게로 들어가는데 맨 나중에 내린 해중석 스님에게 거지들이 달라붙은 것이다. 해외여행이 처음이던 스님이 당황해서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우리는 가게로 들어가 버리고 해중석 스님의 시야에서 우리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열심히 간식거리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스님을 전혀 생각지도 않고 말이다. 참 난감한 일이었다. 그러나 기다리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일곱 시간이 지난 후에야 핼쑥한 얼굴로 돌아왔다. 얼마나 놀랐을까하고 그 심정을 생각하면 미안하기 이를 데 없고, 그 성격을 생각하면 어떻게 반응하나 하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런데 무사히 돌아온 것에 대한 감사로 별 무리 없이 마무리 되었다.
많은 추억을 남기고 강원을 졸업한 후에는 선방으로 정진하러 갔다. 천성이 좀 과격하고 무대뽀이긴 해도 워낙 단순하고 순박한 성격이라 하심하고 정진하면 잘 수행할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선방에서도 바뀐 환경을 수용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던 모양이다. 통도사라는 문중 안에서의 생활이 전부였던 입장에서 새로운 세상인 선방이 호락호락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원에 살 때 도반들의 배려가 얼마나 컸었는지도 절실히 느꼈을 일이다. 그러나 고마운 것은 지금도 선방을 다니는 일을 우선적으로 여기는 마음이다. 정진하는 일을 마음에서 잃지 않는 자세가 중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도 철부지 어린 아이 같기도 하고 호기심 많은 사춘기 소년 같기도 하지만, 해중석 스님의 그 순수함이 언젠가는 반드시 깨침으로 꽃 피우리라 기대한다.
■(사)한나래문화재단 이사장
2003-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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