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정말 계신지요?
문
스님, 죄송합니다만 단도직입적으로 질문드립니다. 부처님이 정말 계신 겁니까? 계시다면 어디에 계십니까?
답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부처님이 계신 것이고 부처님이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이 있는 거 아니겠소? 여러분이 하는 대로 도(道)가 되기도 하고 사(邪)가 되기도 하는 거지 다른 게 없어요. 그러니깐 따지고 보면 아주 간편합니다.
그래서 부처는 없다, 부처가 없기 때문에 삼라만상 대천세계에 꽉 찼다 이겁니다. 만약에 부처 하나로서 규정되어 있다면 그것은 부처님이 가르친 뜻이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가 없기 때문에 부처가 꽉 찼지 만약에 부처가 있다면 부처가 꽉 찼을 수도 없고, 과거 현재 미래 삼세를 넘나들면서 그대로 부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라는 것은 이름이요, 그것은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세계의 왕과도 바꿀 수 없는 그런 보배입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이 허공에 꽉 찼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없다면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근데 여러분이 계시기 때문에 부처님이 허공에 꽉 찼다는 거죠. 그러니 딴 세상에 부처님이 계신 줄 알지 마시고 여러분 가까이, 여러분 계신 바로 그곳에 부처님이 계시다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이 타력신앙으로서 산신을 따로 찾는다거나 칠성을 따로 찾는다거나 지장을 따로 찾는다거나 한다면 그건 여러분이 지어서 미신으로 사는 겁니다. 그렇게 살기 때문에 죽어서도 그 업식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또 귀신으로 등장을 해야 하니 그 업식을 또 갖고 나와서 수억겁을 거치는 겁니다.
그래서 법당에 수만 부처님을 모셨다 하더라도 둘이 아니요, 내 주인공 안에 다 계시니 그 몸은 내 몸이요, 그 마음은 내 마음이니 어찌 둘이겠느냐는 겁니다. 어딜 가더라도 그 자리가 내 자리요, 내 자리가 그 자리인데 어디 딴 자리가 따로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부처님의 길을 따르지 않고 부처님의 길을 터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항상 중생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모습만 가지고 중생이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하다못해 벌레도 중생이니까요. 그러니 그러한 모습으로 태어나서 억겁을 통해도 그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퇴보입니다. 가만히 보면 자식들을 그냥 그렇게, 부모들이 살아나가면서 그렇게 끄달렸기 때문에 죽어도 끄달린다는 말입니다. 그래가지고 자식들한테 해(害)를 주지 않나, 그렇게 위하던 자식들한테 해를 주고 머리가 돌게 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의학적으로 본다면 여러 가지거든요.
자기가 신경을 써서 오는 병이 있고, 영계성으로 오는 병이 있고, 또는 세균성으로 오는 병이 있고, 여러 가지로 오니까 그 여러 가지로 오는 것을 대치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시라 이겁니다. 그러니 관하는 공부는 천체 심성 물리학이라고 해도 됩니다. 심성 빼놓고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모습을 가지고 나오시기 이전에도 길을 가르치셨고, 그 길에서 가셔서 다시 그 길로 모습을 가지고 왕자로서 태어나셔서 또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니 예전에만 부처님이 계셨던 게 아니라 지금도 부처님이 모습을 가지고 등장해서 계십니다.
그러니 일체만물은 부처님한테 배우고 부처님은 일체만물한테 배워서 모든 게 구비되고 한마음 한뜻으로서 공생하고 공용하고 공체로서 공식화하고 있으니 모든 건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이 있다면 부처님도 계신 거니까 어디에도 걸리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시고, 타력신앙이 아니라 자력신앙으로 항상 밝게 사셔야 합니다.
그리고 올해로 봐서는 이 지구에 바람과 뜨거운 기운과 물 속에서, 사람이 잘못 먹으면 체하듯이 모두 체해서 정상적으로 물이 고르르 내려가지 못하기 때문에 살기가 참 어렵고 머리 돌리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연등을 밝게 밝히듯이 항상 마음의 불을 밝히면서, 공식(共食)으로 관하면서 그대로 살아가시기를 당부합니다.
에너지로 화하는 도리
문
선원 달력 법어에 보면 ‘끊임없이 나오는 생각 되돌리면 에너지로 화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의 좁은 소견으로는 정말 내 한생각 되돌려 놓는 것에 그러한 에너지가 충만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어서 질문을 드립니다.
답
애당초 조그만 씨앗에서 싹이 나오듯, 물에서 조그만 생물체가 나오듯이, 즉 말하자면 그것이 자기의 에너지입니다. 자기의 주인공이라는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임신을 해서 어린애를 낳을 때는 반드시 정신계의 자기라는, 애당초에 태어난 그 존재가 거기에 같이 혼합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정자 난자와 같이 합해서 끊임없이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끊임없이 나오는 그 에너지가 뭐냐? 불성이라는 겁니다, 불성. 그 불성이 즉 말하자면 에너지로 화해서 나옵니다. 그래서 누구나가 다 에너지가 자기한테 있고, 부처님 말씀대로 불성이 자기한테 있으니까 항시 자기를 먼저 믿고 그 뜻을 알아서 거기에 관하라는 얘기입니다. 거기다 관해서 애당초부터 끝까지 살아나가는데 거기를 믿고 거기다 일거수 일투족을 다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고 놓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냥 껍데기로만 사는 겁니다.
그러니 열심히 관하라는 게 어떤 거냐 하면, 당신만이 나 아닌 나니깐 내가 아닌 당신이 모든 걸 해 나가니까 주인공 당신만이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고 관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심장과 소장 대장 눈 귀 코가 모두 열려야 됩니다. 눈도 떠져야 되고 귀도 뜨여서 들려야 되고 모두 둘 아니게 함유돼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둘 아니게 돼야만이 그 때 가서는 물질적인 나의 모습과 정신계의 나의 보이지 않는 모습이 둘 아니게 하나가 되는 겁니다. 하나가 돼 버리니깐 그 때는 거칠 게 없고, 말하자면 공생이나 공심이나 또 공체나 공용이나 전부 걸림 없이 둘 아니게 되니까 모두가 보이지 않는 데도 보이는 데도 둘 아니게 온화하게 한 도량을 지켜나갈 수 있단 얘기입니다. 한 도량 하면은 전체를 따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도리를 알게 되면 전체가 다 둘이 아니고 전체가 다 같이 움죽거린다는 얘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에너지 불성이라고 하는 그 자리에서 다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도리를 진짜로 믿고 진실하게 관하시면 모든 게 다 둘이 아니게 조화가 돼서 자연스럽게 돌아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에 임제스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지 않았습니까? “네가 주장자가 있다면 내 주장자를 너에게 줄 것이로되, 네가 만약 주장자가 없다면 너의 주장자를 뺏을 것이다.”라고요. 그러니까 임제스님이 주장자를 줘도 형체가 없기 때문에 준 사이가 없이 주는 겁니다. 준 사이가 없이 주었으니 받은 사이가 없이 받았다 이거죠. 둘이 아니니까 그냥 하나라는 겁니다.
그런데 네가 주장자가 있다면 내 주장자를 너에게 줄 것이로되 네 주장자가 없다면 오히려 뺏어 올 것이라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누구나가 다 자기 주장자를, 자기 자신을 이끌어 가는 자기 주인공을 진짜로 믿어야지 믿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거예요. 왜 우리가 생리적으로 따져 볼 때도 모든 일체 의식이 더불어 한데 합쳐서 살고 있지 않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공체다 이겁니다, 공체(共體). 부처님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누진이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오관이 다 한데 합쳐서 한 덩어리다 이거예요. 그래서 에너지는 정수리로 인해서 내가 생각하는 대로 들고 나게 되어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그냥 무조건 자기를 믿고 잡아나가요. 진실로 믿는다면 거기에서 에너지가, 즉 말하자면 밤이 돼서 날이 캄캄하면 에너지 창고가 되고 날이 밝으면 그 에너지로 인해서 밝음이 온다 이겁니다. 태양도 에너지로 인해서 또 밝아지는 것 아니냐는 거죠. 그러니까 모든 게 각자 생명체가 있다 하면 그건 에너지로 인해서 생긴 거니까요. 그래서 물을 조금만 주고 거름을 조금만 줘도 꽃이 살아나잖아요. 그것도 에너지이다 이겁니다.
그래서 그냥 앉았다 일어나는 것도 참선이고 섰다 앉았는 것도 참선이고 일하는 것도 참선이니 참선 아닌 게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건 걸림이 없다 이 소리예요. 그렇지만 내면의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은 에너지가 따로 있어서 나오겠지 이러지만 따로 있어서 나오는 게 아니라 내 한생각에 의해서 그냥 에너지로 화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승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현실 삶이 따로 있다 할 것도 없고, 그냥 내 자유로 자유스럽게 에너지고 뭐고 어떤 모습이든 자기가 다 될 수 있는 그런 여건이 되는 게 바로 마음공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공부는 마음의 중심을 세워서, 중심이 즉 부처지 딴 데 있는 게 아니다. 중심이 주장자요 중심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래서 기둥이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마음이, 생각나기 이전의 그 마음 중심이 바로 기둥이다 이겁니다. 여러분의 기둥이다. 그러면 그 기둥은 전체적인 기둥이지 개별적인 기둥이 아니죠. 그러니까 전체적인 그 기둥은 뭐든지 내가 요구하는 대로 불을 켠다든가 라디오를 켠다든가 물을 끓인다든가 밥을 짓는다든가 또는 발전기를 돌린다든가, 하여간 어떤 경우에도 다양하게 쓸 수 있는 그 기능의 주장자는 전체적인 걸 갖고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걸 내가 쓸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의 중심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진짜로 믿는다면 그것은 첨단의 언덕을 넘고도 남음이 있고 내 한생각을 용도에 따라서 지혜롭게 되돌리면 불성이, 즉 말하자면 에너지로 화해서 나가는 겁니다.
항상 깨어 있으려면…
문
우매한 질문을 드립니다. 요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어느 스님의 “항상 깨어 있어라.”는 말씀을 듣고 난 후부터 항상 깨어 있으려고 더욱 자신을 의식하게 됩니다.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다가도 자신을 의식하게 되어 얘기가 끊기기도 하고, 워드를 치다가도 자신을 의식하게 되어 빠르게 워드를 못 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런 뜻이 아닌 것 같은데, 이것은 착인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자꾸 그렇게 됩니다.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주인공에 모두 놓고 지켜보는 거와 깨어있으라는 뜻과 집중하는 것, 삼매에 드는 것 그리고 집착과의 차이점을 알고 싶습니다.
답
그래 알고 보면 예수님께서 “나를 믿어라. 타의의 신을 믿으면 그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느니라.” 하신 것도 여러분 자신을 찾으라고 한 겁니다. 자신이 하는 것이니 ‘자는 부가 하는 것을 지켜보라. 자와 부가 둘이 아니게끔 서로 상응하면서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면서 이렇게도 나투고 저렇게도 나투면서 그렇게 지금 걸어가는 그 길을 지켜보라.’ 이런 말이죠. 무겁게 짐 진 거를 다 놔 버려라. 네 마음으로써 짐을 지어놓고 무겁게 왜 짊어지고 다니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그러지 않으셨습니까? “모든 것을 놔버리고 쉬라. 그대로 돌아가면서 여여하니라.” 이런 말의 뜻을 우리가 새겨서 거름으로 알고 주춧돌로 알고 기둥으로 알고 참고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면서 생활하는 것을 지켜본다면 바로 생활이 종교요, 종교가 생활이라는 그 뜻을 알게 될 겁니다.
그래서 이 가르침이 높다 저 가르침이 높다 한들 높은 게 따로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고에 허덕이고 물에 빠져서 허덕이는 사람을 보신다면, 여러분도 누가 물에 빠져서 헤매고 있을 때 그 보는 순간 손을 잡아서 끌어주고 건져주는 그게 부처님이 아닐까요? 부처님은 가만히 있어야만 부처님이냐 이겁니다. 부처님의 마음일수록 더 고통받는 사람들을 건져줘야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깐 부처님 법이 따로 있고 예수님 법이 따로 있다고 가릴 게 아니라, 여러분이 생활하면서 지금 그대로 행을 하는 게 부처님 법이에요. 그러니까 마음을 잘 써라 이겁니다. 한생각을 잘 내라는 겁니다. 부적을 안 붙여서 요거 잘못 돼 돌아가면 어쩌나. 이사를 이렇게 가라고 했는데 요렇게 갔기 때문에 잘못되는 거 아닌가 하고 끄달리고, 자기 마음 자체를 그렇게 못 믿으면 안 돼요. 일체 만물만생이 다 공했는데, 우주 법계가 공했는데 그걸 무시하고 자기 마음속에 있는 부처를 무시하고서는 아니, 조금만 어디가 이상해도 방방방방 뛰면서 병원으로 어디로 닦달하듯 달려간다면 자활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이 부처인 것이고, 법신인 것이고, 여러분의 한생각이 바로 법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근본을 믿기가 상당히 어렵다고들 얘기하지만, 난 그렇게 어렵다고 보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남의 이름에 끄달리고, 남의 육에 끄달리고, 허공에 끄달리고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요. 못났든 잘났든 자기 마음의 주인이 제일인 것이죠. 마음의 주인이 모든 일체를 하고 있어요.
그것을 모르겠거든 하루하루 해나가면서 누가 하는가 지켜보라 이겁니다. 그러면 알 바가 있을 테니까요. 누가 똥을 싸고 누가 잠을 자고, 누가 말을 하고, 누가 생각을 하고, 누가 생각을 잘못해서 구덩이에 빠져서 우는가를 한번 잘 지켜보라 이겁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마음도 헤아릴 수 있을 겁니다.
급한 일이 닥칠수록 마음의 주인한테 일임시켜 탁 놔버리면 그대로 편안하고 일은 일대로 해결됩니다. 그렇다고 몸을 가만히 두라는 게 아닙니다. 몸은 그대로 따라다니면서 일을 하되 함이 없이 해라 이겁니다. 주인이 하는 거니까. 그냥 주인에 따라서 함이 없이 그냥 따라만 다니는 종이나 마찬가지예요. 육신은 마음의 그림자와 같아요, 자기 마음의 그림자. 그래 시자라고 하는 거죠, 시자! 심부름하는 시자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몸을 까딱하지 않고 방 안에 들어앉아서 문 걸어 잠그고 지켜보라는 게 아니에요. 방 안이나 방 바깥이나, 들이나 산이나 똑같은 자리예요. 자기가 앉은 자리가 바로 법당이니까요. 그래서 공부한다고 해서 꼭 저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는 거는 거푸장한 짓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이 소리예요. 산 속으로 들어가면 마음이 달라지고 들로 나오면 마음이 달라지나요? 자기 몸이 있는 자리에 그냥 있는 거니까,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움죽거려라 이거지요. 믿지 못하면 편안하지 않을 것이고 믿으면 편안할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재차 말을 하지만, 우리가 일을 하면서도 ‘그 누가 하는가?’ 생각을 하면서 일을 해라 이거예요. ‘주처, 주인공이 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지금 웃으면서도 찾을 수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왜 그냥 상을 찌푸리고 그냥 고달프게 하고 찾아요? 웃으면서 즐겁게 하면서 찾아요. ‘야! 이거 웃는 것도 주인공이 하는구나. 주인공! 당신이 이렇게 하고 있구나. 일체를 다 주인공이 하고 있구나.’ 이렇게.
또, 지금 일을 죽도록 하다 잊어버렸다 하더라도 ‘아, 이거 잊어버리고 이렇게 여직껏 한 것도 바로 당신이, 주처에서 한 거로구나.’ 하고선 자꾸 하나만 붙들고 늘어져요. ‘하나에서 이렇게 모두 하고 있구나. 하나로 모든 게, 일체만법이 하나로 드는 구나. 하나에서 모든 것 하는구나.’ 이것만 알면 웃는 것도 ‘허허, 이거 주인공이 또 웃게 하는군.’ 이렇게 웃으면서도 나의 주인, 주처를 찾을 수 있다 이겁니다. 그게 바로 놔버리는 방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