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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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5)전망속에 펼친 화엄의 뜻
문무왕의 명을 받은 의상대사는 소백산 줄기인 봉황산에서 제일 먼저 화엄의 교지를 펼치려 하였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소승 잡배들이 차지하고 있어 그 건립이 여의치 못하였다. 그때 중국에서 의상대사를 사모한 선묘(善妙)가 용으로 변신하여 따라와서 부석(浮石), 즉 돌을 띄우는 기적을 행하여 그들을 쫓아내고, 676년에 드디어 이곳에 절을 세우게 되었다. 이것이 부석사를 세우게 된 연유이다.
이 사찰의 압권은 전망이다. 무량수전에 오르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고 잠깐 뒤를 돌아보면 소백산의 작은 봉우리들이 물결치는 광활한 평야가 한눈에 잡힌다. 바다같이 넓은 산하를 부석사의 마당처럼 품을 수 있는 스케일은 천하를 굽어보는 듯한 통쾌함을 넘어 아련함까지 느끼게 한다.
부석사는 의상대사 이후 조선시대까지 신축과 중축을 거듭하였다. 통일신라의 유물로는 당간지주, 석축, 석등이 남아 있고, 고려시대에는 무량수전과 조사당, 조선시대에는 안양루, 범종각 등 여러 전각들이 건립되어 그 역사의 두께가 결코 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에 계획하여 지은 것처럼 공간의 짜임새가 조화롭다.
비탈길과 계단을 번갈아 오르는 경사 속에서 조였다 푸는 공간구성은 드라마처럼 극적이다. 천왕문은 이미 단을 높여 계단으로 오르게 되어 있고 이곳부터 범종루 사이에는 다시 두 단의 석축을 두어 공간의 위계를 나누었다. 특히 이 석축은 불국사 석축과 더불어 통일신라 석조미술을 대표한다. 큰 돌로 자유롭게 짜 맞춘 뒤 그 사이사이를 작은 돌로 채워놓은 짜임은 대비의 구성이 돋보인다.
범종각을 들어서면 그 진입이 예사롭지 않다. 이 건물이 가로가 아닌 세로로 놓여 있어 누 밑을 길게 지나 계단을 오르게 되어 있는데, 들어갈 때는 팔작지붕이지만 나올 때는 맞배지붕이다. 공간의 마디에 해당하는 범종각에서 바짝 조여지다가 취현암과 유물관이 좌우로 늘어선 마당으로 풀어지고, 안양루에서 다시 한번 조여져 그 밑을 지나 이 사찰의 중심건물인 무량수전으로 오르게 되어 있다. 더군다나 범종루까지 직선으로 전개되던 동선이 안양루 앞에서 왼쪽으로 살짝 꺾어져 공간의 변화를 맛볼 수 있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웅장한 건물이다. 다양하게 엮어진 진입로의 구성은 이 건물을 위한 전주곡에 불과하다. 유난히 크게 보이는 지붕은 무겁게 내려누르지만, 살짝 치켜 올라간 처마와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기둥이 그 중량감을 시각적으로 가볍게 해주고 있다. 그런데 무량수전 안을 들어가 보면 매우 특이한 불상의 배치를 볼 수 있다. 건물은 봉황산에 기대어 남향을 하고 있지만 그 안의 아미타불은 동향을 하고 있다. 건물의 앉음새보다는 아미타불이 계신 서방극락의 의미를 살려 서쪽을 배경으로 취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부석사 건축의 절정을 만나게 된다.
의상이 펼친 화엄의 큰 뜻은 결코 후세에도 굴절되지 않고 오히려 사찰을 가꾸는 정성으로 상승되어 오늘날 건축적으로 가장 찬사를 받는 사찰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경주대 문화재학부
2003-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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