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 종합 > 기사보기
조금 어렵더라도 잘 넘기면서 직발로 활을 쏘는 심력을 길러야
국내외 정세가 너무 혼란해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행위를 지켜보면서 북한의 문제에 대해서 온 국민이 걱정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이곳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간절하나 저희들의 힘이 너무도 미약하고 믿음이 약해 혼란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내야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할 수 있을는지요?

늘 얘기하듯이 물도 나요 불도 나요 바람도 나요, 어느 것 하나 나 아님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일체를 둘로 보지 않는다면 여여하게 지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란한 속에서 자아 완성을 못한다면 안되지요. 나를 내가 몰라가지고는 그거는 도저히 나를 이끌어 갈 수도 없고 남을 이끌어 갈 수도 없어요. 마음은 체가 없어서 천리만리도 멀다 가깝다 이런 게 없다고 그랬죠? 능히 할 수 있다고. 크다 작다를 떠나서 한생각인데 그 뭐 그렇게 주저합니까. 한생각인데 말입니다. 한생각 먹기에 달렸는데…. 한생각을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서, 지혜 있는 사람은 능가할 거고 지혜 없는 사람은 능가를 못한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그렇게 진실한 한생각에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각자 자기 마음의 안테나로부터 일체가 다 공존되고 또는 통신이 되고 행이 이루어집니다. 자기 안테나를 세우지 않고는 레이다 망에서 오고가는 거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내면의 주인공 안테나를 꼭 세워서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조그마한 것부터 큰 것까지 더하고 덜함이 없는 겁니다. 우리가 달나라에 갔다 오는 거리와 지금 한 발짝 요기 나서는 거리하고 똑같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빛보다도 더 빠른 것입니다. 하여튼 우리의 마음은 광대무변하기도 하고 이 세상을 다 덮고도 남을 수 있는, 그래서 한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위대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실험해 보십시오. 그러면 생활 속에서 하나 하나 닥치는 것을 체험하고 넘어설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이 즉 말하자면 와선이나 입선, 행선 좌선을 모두 참선으로 돌려서 생활 속에서 해 나가는 일상생활 참선법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이 참선 아닌 게 없고, 도 아닌 게 없고, 부처님 법 아닌 게 없고, 하나하나 해 나가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거기서 바로 실험하고 체험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관리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의 심부름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몸이 헐어져도 내 주인이 집을 고쳐가지고 건강하게 하는 것이지 심부름꾼인 몸이 집을 고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네 몸이니까 네가 건강하게 해서 끌고 가야 하잖아. 네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도 너 자체밖엔 없어.” 하고 모든 것을 용도에 따라서 거기다가 맡겨 놓는다면 아프면 약사로 응해 주실 거고, 또는 약사로 나투어 주실 거고, 가난하면 관세음으로 응해 주실 거고, 그러니까 한마음 속에서 용도에 따라 부처님의 이름이 그렇게 자동적으로 많은 겁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마음을 자유스럽게 쓸 수 있고 실험을 통해서 체험을 할 수 있다면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한생각이 그대로 지름길이 될 것이고, 부처님의 뜻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잘 받아들여서 행하는 법이 될 것입니다.
부처님이 49년 설하시고 가르쳐주신 것은 우리 생활이 그대로 부처님 법이며, 인간 마음 자체가 그대로 부처님 마음이며, 우리가 움죽거리는 것이 그대로 부처님 법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신 겁니다. 그러니 네가 이 세상에 나왔다면 모든 걸 네 탓으로 돌리고 네 마음으로 너를 다스리면서 잘 행해 나간다면 자생중생들이 화해서 천백억화신으로서 보살로 화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벌어질 수 있는 일에 대해서 미리 걱정을 하거나 불안해하지도 말고 그렇게 불안한 마음이 들거든 그 생각을 잘 다스려서 한마음 자리에서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자꾸자꾸 거기에 일임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부처님과 중생이 둘이라고 자꾸 나누니까 이게 잘 돌아가질 않습니다. 부처님과 중생이 둘 아니게 모두가 한마음으로 돌아간다면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한마음으로서 동참을 해주는데, 그렇게 하질 않고 둘로 나눠서 갈라놓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다면 동참을 하고 분담을 해서 그 일을 해결을 하고, 또는 좋은 일이 있다면 동참을 해서 더 좋은 경사가 되도록 만들어 나가야 하는데, 주인공에다 모든 걸 맡기고 해 나가라고 하니까 어떤 분들은 그러면 사회생활을 어떻게 해 나가느냐고 하는데 그건 절대적으로 자기 근본의 참 맛을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여러분과 부처님의 마음이 한마음으로 구성이 돼서 돌아가기 때문에 네 일이고 내 일이고 둘로 보지를 않고 그대로 해 나가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역시 그렇습니다. 또 사찰에서도 그렇고 그대로 공용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생으로서 공식화하고 잘 돌아가는데 어째서 끄달리고 안 돌아간다 잘 돌아간다는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생활 속에서 더군다나 더 실험을 해 보시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전력이나 자력을 충만하게 재료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 재료가 같이 하나로 해줘서 아주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꼭 증명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우리가 맘먹기에 달렸습니다. 우리가 맘먹기에 달렸으니깐 부질없이 크게 벌어질 일은 쪼끄맣게 만들고 쪼끄만 일은 아주 없애게끔 할 수도 있고, 그러니깐 이렇게 말하는 걸 우습게 생각을 하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는 게 법입니다. 우주간 법계의 법입니다. 그러니깐 불안해하거나 자신이 미약하다고 생각한다면 점점 더 미약해지는 겁니다. 그러니 일체를 근본에 맡기고 그럴수록에 더 열심히 관하면서 밝은 마음으로 편안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수행자란?

수행자는 어떠한 마음자세로 살아야 하는지요? 진정한 수행자는 스님들을 모델로 삼고 스님처럼 마음 쓰고 살아야 한다고 관을 하곤 했는데 어떠한 자세로 사는 것이 진정한 수행자인가 하는 생각이 나서 질문올립니다.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것은 가는 것 잡지 않고 오는 것 막지 않고 무조건 하나로 몰아가는 겁니다. 하다못해 지금 내 앞에 부처가 온다 하더라도 꿀떡 삼킬 수 있고, 또는 마구니가 온다 하더라도 꿀떡 삼킬 수 있어야만 됩니다. 소를 한마리 잡아 가지고 왔다 하더라도 꿀떡 삼킬 줄 알아야 됩니다. 자기가 깨닫지 않으면 그 도리를 납득을 못합니다. 가는 것 잡지 않고, 오는 것 막지 않는다는 뜻을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표현을 하자면, 어떠한 거든지 걸려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냥 놓고 가는데, 가는 것도 오는 것도 그대로 법인데 뭣 때문에 간다 온다 하고 야단법석을 하느냐는 겁니다. 공부하는 수행자는 그렇다 이겁니다.
그리고 이것을 학술적으로나 지식적으로 배운다면 낱낱이 벌려가지고 그 이름을 배워야 하지만 진정한 수행자는 참선(參禪)을 하는 겁니다. 선에는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습니다. 모든 거를 한데 집어넣습니다. 공부할 때도 내면 한군데로 모아서 놔라 이런 뜻입니다. 한군데로 놓으면 모아지듯이 일체 돌아가는 것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로 돌아가는 건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천차만별의 일들을 이름으로 어떻게 말을 하겠습니까마는 일거수일투족을 다 한마음에 집어넣으면 거기에서만이 일체가 돌아갑니다.
항상 누적되지 않게 겁내지 말고 모든 거를 거기다 놓으라고 그랬습니다. 진짜로 믿고 거기다 놓으면 그냥 움죽거리게 된다구요. 또 움죽거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안 움죽거리는 것도 움죽거리는 것도 똑같습니다. 무엇을 해나가려면 잠시라도 안 움죽거리게 할 수 있어야만이 움죽거리게 할 수 있는 겁니다.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면서, 즉 말하자면 이어지면서 한 바퀴 돌아서 이어지는 겁니다. 또 미래도 한 바퀴 돌아서 미래가 이어지고 하기 때문에 과거도 현실로 미래도 현실로, 일초 전 일초 후 이렇게 생각하시면 아주 간단할 겁니다. 그래서 삼세를 둘 아니게 넘어갈 수 있어야만이 우주의 모든 것을 그냥 한군데 하나로 생각할 수 있고, 하나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둘 셋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할 수 있다 이겁니다. 그건 왜냐하면 한군데로 하나로 뭉쳐서 해낼 수 있기 때문에, 동시에 어디서 벌어지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천차만별의 것에서 어떠한 문제가 생긴다, 어떠한 용도가 생긴다, 어떠한 일이 벌어진다 할 때에 그것을 생각하고 할 수 있다 이런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제각기 놓고 제각기 배우는 게 아니라 무조건 자기 불성 주인공을 진짜로 믿고 거기다 놓기만 하면 앞서입력된 건 다 없어지고 새로이 입력되는 것이 현실로 나오게 돼 있다는 겁니다. 나오게 돼 있는 그 원력이 바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겁니다. 능력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결하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 예를 들어서 군인이 전진을 하다가 후퇴를 해야 하기도 하고 후퇴를 했다가 전진을 하기도 하듯이 후퇴하는 것도 전진하는 것도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거는 우리가 말만 들어서 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진실히 믿고 그렇게 체험해 가야만 내면에서 가르치는 자기의 뜻이 길잡이가 되어 나오게 돼 있습니다. 내 마음의 길잡이가 나와서 이 속의 자생 중생들을 둘 아니게 하나로 제도해야 어디에도 걸림없는 자유인이 되지 않겠습니까?

미망에 빠지지 않으려면…

부처님께서 모든 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다는 실유불성(悉有佛性)의 도리를 말씀 하셨는데, 비록 불성이 자기에게 있음을 체험하고,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다가도, 조금만 등한시하게 되면 다시 미망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 어떤 이유이며, 그러한 미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움죽거리는 자체가 무엇으로 인해서 움죽거리면서 살고 있습니까? 만약에 생명의 근본이 없다면 그건 무효입니다. 육신이 없어도 무효고 생각 내는 게 없어도 목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근·육진·육식이 움죽거리는 게 다 우주의 혹성과도 같은 거죠.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이게 없어도 아니 되고 저게 없어도 아니 되니까 그래서 그것이 종합된 근본 불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이 어떠한 것이냐?”고 물으니까 “이리 오너라. 가르쳐 줄께.” 그러고는 멱살을 쥐고 발길로 차고선 주먹으로 한방 지르니까, “아이구!” 하고 쓰러져서, “요놈! 지금 아이구 하는 그 놈이 누구냐?” 하고 다시 묻는 그 소리에 바로 깨우쳤다는 옛 스님들의 일화가 있듯이 생각을 내는 것이 즉 법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정신세계의 50%를 모르고 그냥 물질세계로만 끄달린다면 그것이 바로 망상입니다. 유의 세계와 무의 세계를 한데 합쳐서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거기서 들이고 낸다는 것을 실감한다면 그게 바로 법이 되는 겁니다. 과거에도 끌고 다녔고 지금도 끌고 다니고 미래에도 끌고 다닐 거라는 것을 안다면 끄달릴 것이 없습니다. 과거는, 한 시간 전도 과거고 조금 전도 과거입니다.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깐 없는 것이고 과거는 지나갔으니깐 없고 현실은 공해서 돌아가니깐 없는 겁니다.
모든 것이 한 발 들고 한 발 놓고 한 발 들고 한 발 놓고, 그저 자나 깨나 맥박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거와 같이 움죽거리기 때문에 어떤 거를 할 때 내가 했다고 할 수 없어서 공했다고 하는 거고 무(無)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없다는 뜻의 무가 아니라 꽉 차서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죠.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모든 게 종합된 자체에서 생활하고 들이고 내고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불성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근본 불성 자체가 돌아가게 하고, 말하게 하고, 행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그렇게 일체를 들이고 내는 걸 어찌 알았으리까?” 하는 거죠. 자기가 자기를 모르면 그 도리를 모르거든요.
유마힐거사가 ‘나는 중생들이 다 병이 나아야 내 병이 낫는다.’고 했는데 내 몸 속에 들어 있는 중생들이 지금 작용을 안 해주면 이 몸이 쓰러지죠? 내 속의 중생들이 다 작용을 해서 병이 나아야 내가 병이 낫는 거죠? 그러니까 모든 게 둘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는 것도 바로 그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성이란, 왜 이런 게 있죠? 자동차가 갈 때에 딱 고정되게 있는 거는 구르지를 않아요. 바퀴만 구르지 그거는 구르지를 않는 거죠. 심봉이란 그와 같은 겁니다. 인간의 뿌리란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놓을 수도 없고 보일 수도 없고 빛깔도 없지만, 허공은 허공대로 있듯이 마음도 그렇게 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딴 데서 찾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길을 가다 엎어지면 그 땅을 짚고 일어나지 허공을 허우적거려서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와 같이 다 그 속에서 나오는 겁니다.
빗방울이 수없이 쏟아졌어도 바다에 들어갔다면 한 바다지 빗방울이 따로따로 있는 게 아니죠. 그래서 우리들의 마음은 창살 없는 감옥에다가, 즉 말하자면 살아나가면서 보는 습관, 듣는 습관으로 인해서 모두 꼼짝 하지 못하고 묶여서 있지 말고, 마음을 탁 틔워라 이겁니다. 마음은 체가 없고 광대무변해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았어도 어디든 갔다 올 수 있는 겁니다. 또 지구 바깥을 벗어날 수가 있는 겁니다. 마음이라는 게 그렇게 광대무변한 겁니다, 아주.
그러니까 우리가 불성이 발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없다고 하지 말고, 자기가 진짜로 자고 깨고 먹고 눕고 일하고 이러는 게 그대로 자기 불성이 있기 때문에 일체를 움죽거린다는 걸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지금 미망에 빠졌다는 그 생각까지도 몰록 내려놓고 진실하게 믿고 맡기다 보면 걸림이 없이 자유스러워지는 것이니까 흔들림 없이 정진해 나가세요.

하기 싫은 일을 해야 되는데

저는 이번에 중학교에 입학한 남학생입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다닐 때는 집이나 학교에서 어떤 일을 시켜도 싫다는 생각이 들지를 않았는데 중학교에 입학을 하고 부터는 어른들이 일을 시키면 저도 모르게 하기 싫은 생각이 자꾸 나옵니다. 그럴 때 물론 하기 싫어도 일을 꼭 해야 되는데 어떻게 관해야 되는지요?

그것도 결국은 너의 한생각에 달려있는 거지. 누가 주고 뺏고 하는 게 아니거든. 물건도 사람들이 필요에 따라서 쓸 수 있게끔 가공돼서 나오듯이, 내가 꼭 해야 된다는 생각이 나면은 바로 주인공에 맡겨 놓고 하면 돼. 즉 말하자면 운전을 할 때에 차를 움직여야 바퀴가 돌아가는데 운전대를 쥐고만 있으면 바퀴가 돌아가지 않지? 그러니깐 싫다는 생각이 날 때 주인공에 맡기라고 하는 거야. 너의 안 보이는 운전수한테다 맡겨라 이거야. 맡기면 그대로 행하게 되는 거야. 그것이 법이야.
그런데 사람에게는 좋은 일을 했으면 한 대로, 악한 일을 했으면 악한 일을 한 대로 악업 선업이 엄연히 입력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자기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자기한테 주어지기 때문에 어떨 때는 심부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나서 즐거운 마음으로 하게 되고, 또 어떨 때는 괜히 하기 싫다는 생각이 나기도 하는 거거든.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봐. 지금도 그렇게 하기 싫다는 생각만 하면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안 한다면 지금 당장은 편할지 몰라도 나중에 어떻게 되겠어? 그렇지? 너도 생각해 보니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지? 학교에서 하는 공부도 마찬가지지만 이 마음공부를 하는 것도 똑 같애.
그러니까 하기 싫다는 생각이 나올 때마다 그 생각도 주인공에서 나오는 거니까 하게끔 하는 것도 주인공이라고 거기에 맡기면, 저절로 조금 전에 생각했던 것으로 대치해서 생각이 들어가니까 바뀌어 지는 거야. 그러니 어떤 생각이든지 주인공에 맡기고 지켜보는 수행을 열심히 하도록 해. 알았지?

기복이 되지 않으려면…

저희 집은 엄마하고 제 밑으로 네 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지금 칠 년째 관절염으로 병상에 계세요. 저는 다른 일보다도 엄마나 동생들 생각을 많이 하는데 나와 남이 둘이 아니고 또 저와 엄마가 둘이 아니고 동생들과도 둘이 아니고 일체가 다 한자리에서 돌아간다는 것을 저도 알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관하고 맡기다 보면은 제 자신이 기복으로 흘러간다는 걸 가끔 느껴요.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해야 되는지요?

기복이라는 건 상대를 두고 비는 거를 말하는 겁니다. 상대를 두고 바깥으로 믿는다면 그건 기복입니다. 누구나가 전력은 같습니다. 생명의 근본이 다 똑같다 이겁니다. 다 똑같은데 마음 쓰는 거라든가 차원이나 모습이 다른 것이죠.
그러니까 엄마는 엄마대로 받을 수 있는, 즉 말하자면 물을 이쪽 컵에다가 부을 때에 컵을 들고 있어야 그 물이 받아지거든요. 그러면 이쪽 컵에 있는 물을 저쪽 컵으로 한데 옮기면 그냥 한 그릇이 돼 버리죠? 마음도 역시 그래요. 그래서 엄마도 동생들도 다 받는 거예요. 이걸 모르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관하는 도리는 가르쳐 줘야 돼요. 그러고 항상 관할 때에 저쪽에서 만약에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그쪽으로 내 마음을 주고, 이게 바로 손을 폈다가 오그렸다 하는 도리요, 이게 중용입니다. 그냥 작용이 아니고 그냥 활용이 아니라 바로 모두를 살리는 중용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엄마한테 가면은 엄마로 하나가 돼 버리고, 엄마 마음을 나한테로 넣으면 나로 하나가 돼 버리니까 더불어 가벼워지는 거예요. 이 도리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은 겁니다.
그러니까 마음이라는 것은 수만 개를 갖다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수만 개를 꺼내도 줄지 않고요. 그러기 때문에 이 도리를 실험하고 체험하고 알아야 되겠기에 자기 주인공에 일체를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진짜로 믿고 놓는 작업을 해라 이거죠. 나를 발견하지 못해서 父와 子가 한데 상봉을 못한다면 어떻게 父로 하나가 되고 子로 하나가 될 수 있느냐 이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부처가 되고, 생각을 내면 법신이 되고, 몸을 움죽거리면 화신이 되는데 그 도리를 모르니까 그 도리를 알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공부를 하는 겁니다. 모두가 전부 나와 도반으로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전깃줄과 전깃줄이 한데 합쳐지니까 불이 들어오더라는 소리죠. 이게 한 쪽만 가지고는 절대로 될 수가 없어요. 갖다 이어놔야 불이 들어오죠. 그러니까 엄마한테도 관하는 법을 가르쳐 드리고 동생들한테도 관하는 법을 똑똑히 가르쳐 주도록 하세요.
가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경계를 다 거기다 놓고 용도에 따라서 굴릴 줄 아느냐 이겁니다. 항상 얘기하듯이 근본에다 맡기되, 믿으면 맡길 수가 있지만 믿지 못하면 맡길 수가 없다 이 소리입니다. 그리고 만날 “주인공! 해 주시오. 주인공! 이렇게 나 좀 해 주시오.” 한다면 그건 어불성설입니다. 그건 있을 수가 없어요. 그건 상대성이기 때문이 자활(自活)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조금은 어렵더라도 잘 넘기면서 직발로 활을 쏘는 심력을 기르도록 하세요.

환자를 위한 관법

저는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입니다. 마음공부 한 지는 오래 되지 않아서 스님 말씀하시는 것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스님께서는 주인공을 무조건 믿고 몰록 맡기라고 하시는데 제가 환자들을 간호하면서 “주인공! 저 사람들 얼른 낫게 해줘.” 아니면 “당신이 낫게 해 줘야 될 거 아냐?” 이렇게 관하는 방법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궁금해서 질문드립니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만, 낫게 해달라고 하는 건 벌써 둘로 나누는 겁니다.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너만이 이끌어 나가고 병도 낫게 할 수가 있어.” 하고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환자들과 둘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까지도 거기다 맡겨야 해요.
왜냐 하면은 우리가 모르니깐 지금 맡겨라 굴려라 이러는 거지 본래 내가 보고 듣고 말하고 행하고 만나고 이러는 게 그대로 법입니다. 사람이 육신이 만나는 게 문제가 아니거든요.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게 문제죠. 말을 해서 마음이 통하고 마음이 통하면 행동으로 개시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이라는 것이 참 묘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실험을 통해서 체험을 하다보면 저절로 문제가 해결이 되는 거지 매달려서 해 달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생활 속에서도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좌선이라는 것도 마음이 안정돼야 좌선이지 마음은 온통 끄달려서 산란한데 육신만 앉혀 놓는다고 해서 그게 좌선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냥 좌선이지 참선이 될 수가 없다 이 소리입니다. 행선이나 와선이나 입선, 즉 말하자면 일을 할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서 있을 때나 다 참선이 되게 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놓고 가라고 하는 것은 본래 우리가 고정됨이 없이 화해서 나투면서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이 부르면 금방 아버지 노릇 하고, 부모님이 부르면 금방 아들 노릇 하고, 또 아우가 부르면 금방 형님 노릇 하고, 형님이 부르면 순간 아우 노릇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찰나찰나 돌아가는 자체가 그대로 여여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냥 여여하게 가는데 마음으로 집착을 해 가지고 못하느니 잘하느니 하면서 야단법석들을 하니까 그게 바로 창살 없는 감옥에 갇힌 셈이나 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걸리지 말고 그렇게 열심히 해 보세요.
그리고 남을 간호를 한다고 해서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알고 보면. 저 사람이라고 그러면 벌써 상대가 되잖아요? 그런데 모습은 둘일지언정 어찌 마음이야 둘이겠느냐 이겁니다. 전구는 여러 개가 있지만 전력이 어찌 둘이겠느냐 이거예요. 그러니까 모습을 보지 말고 ‘너만이 이끌어 줄 수 있어!’ 하면 되는 겁니다. 자기가 안 그랬을 때와 그랬을 때는 그냥 판이하게 달라지는 겁니다, 전부.
열심히 공부하면서 실험을 통해서 체험을 해 보세요. 얼마나 교교하고 묘하고 광대무변한지 스스로 알게 돼 있습니다. 내가 왜 놓으라고 그러는 줄 아세요? 이것은 그냥 현실에 떨어진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내가 그 차원을 가지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그 차원에 의해서 죽어도 업식은 꼭 따라다니거든요. 업식이 고만 조절이 돼 가지고는 현재 사는 걸로 나오는 거예요. 물질적인 컴퓨터는 입력을 해서 빼 쓰지만은 자동적인 컴퓨터는 그냥 자동적으로 입력이 돼 버려요. 그래서 입력된 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고대로 내 앞에 다가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되돌려서 입력을 한다면 앞서의 입력이 없어질 것 아닙니까? 얼마나 쉽고 빠른 길입니까? 이 마음의 길을 걷지 않고는 그 도리를 알 수 없을 겁니다.

목석과 무심의 경지

목석 같은 마음하고 무심으로 산다는 것하고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목석같은 마음은 발전할 수 있도록 마음을 내지 않고 그냥 포기하고 사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해보지도 않고 그냥 포기하는 거 말입니다. 그런데 이거는 포기가 아닙니다. 포기가 아니라 재생의 중용입니다. 창조의 중용을 말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용광로에 넣기만 하면 재생이 돼서 나가게끔 다 만들어져 있으니까, 자동적으로 그렇게 돼 있으니까 그걸 알기 때문에 거기다 맡기는 거예요. 맡겨 놔야지 포기한다면 그냥 한데로 떨어지고 마는 거죠. 그러니까 맡겨 놓는다면, 우주와 직결이 돼 있고 세상과 가설이 돼 있는 근본에 맡겨 놓는다면 하나도 빈틈없이 돌아가서 딱딱 맞춰지지만 포기를 한다면 그냥 내버리는 거나 한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없는 사람은 목석이요, 어떠한 게 자꾸 생각난다 하더라도 공부할 수 있는 재료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돌려놓는다면 그게 바로 무심으로 사는 거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나를 승화시킬 수 있는 재료라는 거죠. 이 몸 속에 의식들이 다 팥죽 솥의 팥죽방울 처럼 그렇게 나와도 한 팥죽 솥에서 나오는 방울이지 딴 데서 오는 게 아니거든요. 그와 같이 인간의 몸이 팥죽 솥이라면 이 몸 속에서 다 나오는 건데 나오는 대로 되돌려 놓는다면 얼마나 대기권에서 이탈되지 않게끔 잘 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법계라고 하지만은 세포 하나하나에 바로 대기권을 상징하는 거라고도 볼 수 있죠. 의식들이 다 바깥이고 안이고 나왔다 들어갔다 하고 모습들은 거기 있으면서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딴 세균을 끌어들일 수도 있고, 유전성으로 인해서 끌어들일 수도 있고, 영계성으로 인해서 끌어들일 수도 있고, 또는 영계성으로 인해서 유전이 될 수도 있고, 인과로 인해서 유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병이 생기는 것이 천차만별입니다.
그래서 철학이든지 천문학이든지 또는 의학이든지 천체물리학이든지 모두가 전부 한마음 안에서 나가는 겁니다. 이름 없는 마음 말입니다. 마음이라는 이름 이전 참자기 말입니다. 똥 누러 갈 때는 마음이라는 생각도 없죠? 똥이 마려워서 급하면 그냥 허겁지겁 화장실 문 열고 들어가서 펑 눌 뿐이죠? 그럴 때 무슨 마음이라는 이름이 있습니까? 배가 고플 때도 그렇고 말입니다. 마음이라는 게 뭐 있어서 그 이름을 부를 새도 없죠. 그거는 이후예요.
이거를 배우려니까 마음이다 주인공이다 이러지 벌써 마음이라는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주인공이 있다고 찾고 거기다 맡기고 가는데, 으레 주인공이 그대로 죽든 살든 일체 만법을 내고 살아나가는 근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다 안 믿는다 할 게 없는 겁니다. 어렵고 쉽고 할 것도 없구요. 그러니까 ‘네 몸 네가 알아서 끌고 가라’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자기 조상이예요, 얼른 쉽게 말해서. 자기가 나오기 이전 자기 조상입니다.
우리가 배가 고플 때는 집에 들어가면서 배고프다는 소리가 먼저 나오지 주인공 소리가 먼저 나오지 않습니다. 배고프게 하는 놈도 바로 그 놈이기 때문에, 한데 합쳐서 작용을 하는 근본이 돌아가기 때문에 배가 고픈 것도 아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냥 밥 먹는 거지, ‘주인공! 밥을 먹어야 되겠습니까, 안 먹어야 되겠습니까?’ 이러고 먹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대로, 내가 만약에 달구지를 끌고 가는데 달구지가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서 잘 다스려서, 왜 사람이라면 나쁜 거 좋은 거를 다 잘 알지 않습니까? 이거를 하면 나쁘고, 이거를 하면 남에게 피해를 주니까 나쁘고, 이 일은 좋은 일이니까 해도 되고, 이 일은 안 하는 게 좋은 거라는 걸 모두 잘 알고 있죠? 그러니까 잘 알고 있다면 행을 그렇게 못하죠. 그러니까 잘못되는 때는 ‘이렇게 가게 하는 것도 너니까 안 가게 하는 것도 너 아니야? 마음을 그렇게 나지 않게 하는 것도 너 아니야?’ 하고 거기다 맡겨 놓고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다면 엄연히 생각도 바꿔지고 몸 속에 있는 생명 전체가 다 바꿔져서 하나가 되니까 그때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목석으로 사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자체에 걸리지 않고 무심으로 살게 되는 겁니다.

생각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사람이 살면서 호흡을 멈출 수 없듯이 생각도 호흡과 똑같은 그런 작용을 하는 거 같습니다. 생각이 계속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데 생각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요?

생각을 멈추면 목석입니다. 생각이 끊이지 않는 자체가 살아 있다는 증거요, 또한 공부할 수 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일어나는 대로 끄달려서 괴로워하느냐, 아니면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지 다시 나온 거기에 맡기는 작업을 하느냐 하는 데에 따라서 같은 생각이라 할지라도 망상이 되느냐 아니면 한생각이 되느냐 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가끔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생각을 건전하게 하느냐, 생각을 이무렇게나 막 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냥 생각이 나는 게 아니라 나무가 흔들리는데 바람이 이쪽으로 불면 이쪽으로 흔들리고, 바람이 저쪽으로 불면 나무가 저쪽으로 흔들리는 걸 눈으로 보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은, ‘아, 저 나무도 바람이 이쪽으로 불든 저쪽으로 불든 상관하지 않고 바람 부는 대로 쓸리면서 아무리 모진 바람을 쐬어도 말 한마디 없이 저렇게 인내하면서 가는 구나.’ 합니다. 또 어떤 때 비가 쏟아질 때는 ‘저렇게 비를 맞고도 의연하게 서 있구나. 그러니 저 나무들도 전부 스승 아닌 게 없구나. 모두 나같이 살라고 하는구나.’ 그러면서 ‘나무들아! 나를 봐라. 너는 나를 보고 배우고 나는 너를 보고 배운다.’ 그러면서 서로 주고받곤 합니다. 그러니 스승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또 가을철에나 겨울철에 차를 타고 가면서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을 보면 생각이 나기를, 보면 보는 대로 그런 거예요. 인간이라면 아주 정이 많죠? 모두 사랑 아니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놈의 사랑 때문에 울고불고 웃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런 걸 볼 때에 그런 생각이 들어요. 너는 옷을 다 벗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서 그렇게 추워서 벌벌 떨면서도 봄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인내를 가지고 임이 오기를 기다려 주는구나. 너는 잎새가 다시 필 때를 기다리면서 그렇게 모진 바람에 휘달리고 눈보라에 휘달리면서도 조금도 군말 없이 의연하게 가는데 사람들은 조금만 일이 생겨도 뛰고, 조금만 화가 나도 이런 게 치민다고 하고 화를 내면서 내던져 부수고 때리고 쥐어박고 하는데 나무는 그 모진 고생을 묵묵히 견디면서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이게 도무지 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생각이라는 게 꼬리에 꼬리를 물더라도 그렇게 생각을 내게 하는 것도 좀 피곤하니까 생각 좀 이렇게 안 하게끔 하라고 거기다가 맡겨 놓고 묵묵히 그냥 하세요. 그리고 정히 생각할 게 있으면 하면서도 하지 않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너무 그러니까는 그렇게 자주, 마음이 게을러서 여유가 있어서 그렇게 자꾸 생각이 나는지는 몰라요. 마음이 여유가 있으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꾸 딴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마음이 여유가 없을 때는, 꽉 차서 돌아갈 때는 여유가 없어서 딴 생각할 틈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주인공에 그냥 꽉 맡기고 생각 날 때마다 ‘너 알아서 해’ 그러고 진짜 생각을 해야 할 거는 ‘너만이 할 수 있지 않아?’ 하고 그렇게 해 놓으면, 그렇게 하다보면 아주 마음이 편안하게 됩니다. 그걸 느끼게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마음부터 편안해져요, 벌써.
왜냐? 가정의 애고가 줄어드니까 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까 어떤 상황이 생겨도 남의 탓을 안 하고 남 원망을 안 하게 됩니다. 모두가 자기 탓이니까요. 깡통이 열개가 모여서 소리가 났다 하더라도 그건 깡통 자기 탓이지 누구 탓이 아닙니다. 자기가 깡통이니까 깡통하고 부딪혀서 소리가 나는 겁니다. 자기가 금이라면 깡통하고 부딪친들 어떻게 소리가 나겠습니까? 그러니깐 깡통 자기 탓이죠. 전부 자기 탓입니다. 누구의 탓이 아니예요. 그러니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하지 마시고, ‘모든 건 다 내 탓이로다’ 이렇게 생각하고 모든 거를 거기다가 맡겨 놓아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나가려면 가정에서나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 때문에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꾸 달아납니다. 그런데 꿈꾼 생각을 하는 것도 또 꿈이거든요. 그래서 꿈에서나 생시나 꿈을 건전하게 꿔야 합니다. 그렇게 산만하게 꿈을 꾸지 마세요. 모든 거는 그냥 다 집어넣어버려요. 그렇게 집어넣다 보면 편안하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2003-04-23
 
 
   
   
2024. 11.2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