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 종합 > 기사보기
결코 물러서지 않는 믿음으로 어떤 경계에도 굴하지 않고 녹여나가야
여러분을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한 달 만에 다시 한자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시 같은 한자리에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서로 사는 처소가 각자 다르고 모습이 각자 다를지라도 지금 이 모습이 나오기 이전의 근본자리에서 본다면 항시 한자리를 하고 있는 것이요, 모두가 한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볼 때에는 너와 내가 따로 있어서 다르다고 하지만 마음의 눈으로 볼 때에는 시공을 초월하여 생사가 따로 없이 늘 한 모습으로써 한자리를 하기 때문에 한마음의 도리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이 여여한 자유인으로써 진정한 복락을 얻어서 생사 없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은 바로 여러분이 스스로 마음도리를 깨우침으로써 성취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마음도리를 공부해 나가면서 자기 내면을 밝히기 위한 첫 단계로 처음에는 어떠한 작업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 마음도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우선 각오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공부의 첫째 과제는 마음의 용광로에 무조건 일체를 집어넣는 작업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헌 쇠든 새 쇠든 다 집어넣은 용광로에서 쇳물이 벌겋게 끓어오르는 것과 같이 결코 물러서지 않는 믿음으로 어떠한 경계에도 굴하지 않고 녹여나가겠다는 견고한 신심을 가져야만이 물러남이 없이 꾸준히 공부해 나갈 수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집을 지으려면 무엇보다도 그 기초공사를 튼튼하게 해야 좋은 집을 지을 수가 있듯이, 이 마음공부를 함에 있어서도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경계를 뛰어넘고 생사를 초월하며, 자기의 몸까지도 다 거기에 놓을 수 있는 진실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되게 하는 것도 그 자리이요, 안되게 하는 것도 다 그 자리이니 되건 안되건 몽땅 그 자리에 일임을 하고, 외롭다고 생각이 들 때나 괴롭다는 생각이 들 때나, 설령 지금 당장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오직 자기 근본 자리를 굳건히 믿고 거기에다 일체를 돌려서 맡겨 놓을 때 비로소 하나하나 스스로 체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자기가 체험을 해봐야 다음에 그와 비슷한 경계가 닥쳐온다 하더라도 끄달리거나 거기에 빠지지 않고 훌훌 털어버리고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 어느 것도 영구히 고정된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찰나 생(生)하는 것이요, 찰나 멸(滅)하는 것으로서 찰나찰나 쉼 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말하면 여기 계신 여러분 중에 지금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할지라도 그 괴롭다는 생각도 한 찰나요, 아무리 즐거운 일이 생겨서 즐겁다고 좋아해도 그 즐거움 또한 한 찰나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와 같은 찰나의 실체를 안다면 괴로울 것도 없고 즐거울 것도 없고, 괴롭다고 거기에 빠져서 헤맬 것도 없고 즐겁다고 거기에 집착할 것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어려움이 닥쳐서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계시겠지만, 안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길게 붙잡고 괴로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자체를 몰록 거기에 놓고 그 자리에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지켜보라고 하는 겁니다. ‘안되는 것도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되게 하는 것도 바로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고 내려놓고 지켜보라는 말입니다. 길을 가다가 자기가 엎어졌다면 ‘어이쿠!’ 하고 일어나는 놈도 자기이지 누가 대신 나를 일으켜주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여러분이 잘된다 안된다 하는 그 양면을 다 마음의 용광로, 즉 주인공에 믿고 맡겨 놓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며, 또 그래야 과거에 자기가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하나하나 나오는 것이 해결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과 놓음은 둘이 아닙니다. 철저히 믿을 수 있다면 철저히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다면 곧 놓을 수가 있고, 몰록 놓을 수 있다는 자체가 바로 자기 자신을 믿는다는 증거입니다. 믿음과 놓음이 하나가 되고, 그 하나마저도 다 녹여버릴 때 비로소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할 수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이 어떤 일이 된다 안된다 하는 양면을 다 놓고 돌릴 수 있을 때 그 공덕은 이루 말로는 할 수 없는 무한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서 말할 수가 있는데 첫째는 오무간(五無間) 지옥이 다 무너집니다. 둘째는 인연 따라 억겁 전생부터 내려온 모든 습(習)이 다 녹아 내립니다. 셋째는 번뇌망상으로 꽉 찼던 마음 그릇이 다 비어지게 되면서 마침내 빈 것도 없고 담긴 것도 없는 그러한 경지가 되어 바로 참된 ‘나’가 발현이 되는 겁니다. 참나를 발현한다는 것은 그때부터 기초가 튼튼해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기초가 튼튼히 되었다면 이제부터는 거기에다 집을 짓는 기둥을 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잘 참구하셔야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집을 짓는다고 하면서 이것은 기둥이고 이것은 서까래고, 또 이것은 벽돌이고, 이것은 대들보이고 하면서 이렇게 집 짓는 재료의 이름은 하나하나 줄줄 외우고만 있지 정녕 집을 지을 줄은 모른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집을 지을 때에도 재료의 이름을 하나하나 외우거나 찾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만약 벽돌이 필요하다면 벽돌이라는 이름을 부르기 이전에 필요에 따라 그냥 탁 집어다가 작업을 하는 그 실천이, 그런 믿음과 행이 참으로 우선되어야 하고 또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할 때 그 이름을 일일이 불러가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듯이 단지 남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면 ‘저 서까래 가져오너라. 저기 있는 벽돌 가져오너라.’ 하고 일일이 이름을 부르겠지만 자기가 직접 쓰고자 할 때에는 말하기 이전에 한생각 냈다 하면 벌써 서까래도 벽돌도 다 집어다가 그냥 쓰게 되는 겁니다. 쓴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필요한 곳에 쓸 뿐입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먹고 싶다면 냉장고 문을 열고 그냥 물을 꺼내서 마실 뿐입니다. 그것이 즉석에서 요리하는 방법이고, 즉석에서 먹는 방법입니다. 우물쭈물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께서는 지금 이 대목을 잘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집 짓는데 지붕을 올리게 되었다면 일꾼들이 벌써 서까래를 갖다가 설치해 놓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냥 집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집은 이렇게 짓는 것처럼 마음공부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대들보가 올라가기 위해서는 사전에 기둥이 서야 된다든지 거기에 간접적으로 붙어 돌아가는 재료가 많이 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가 이 공부를 함에 있어서도 우리 몸뚱이 하나로 인해서 간접적으로 많은 재료가 붙어 돌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오신통이 오신통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각자의 공부재료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을 지음에 있어서 어느 재료 하나에만 특별히 집착을 한다면 전체적인 균형이 깨지듯이 여러분이 이 공부를 함에 있어서도 오신통이라는 어느 재료에 집착하거나 묶이지 말고, 거기에서도 벗어나야 됩니다. 어느 재료에 집착하거나 묶이지 않는다 함은 그 재료가 크건 작건 좋건 나쁘건 다 쓸 곳에 평등하게 쓴다는 뜻입니다. 크거나 좋다고 택하고 작고 나쁘다고 버리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집을 지으려면 아주 쬐그만 재료들까지도 다 모여야만 마침내 대들보가 올라갈 수 있듯이, 또 탑의 마지막 봉우리를 올리기 위해서는 많은 종류의 받침돌이 필요하듯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망상이라고 걸리지도 마시고, 분별이나 악행이라고 하는 데에도 걸리지 마시고 오히려 그것들이 나를 성장시키는데 꼭 필요한 재료라는 것을 아시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되돌려서 놓아야 합니다. 망상과 분별 그리고 마음의 악행이 있었기에 내가 선한 사람이 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리고 마음의 봉우리, 마음의 대들보도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을 알면 그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로울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그런 것을 싫다는 마음으로 피하려고만 하거나 그 모두를 버리려고만 한다면 진정한 해탈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께서 공부를 한다는 것은 마치 집을 짓는 것과도 같은 것임을 깊이 알고, 그 기초를 튼튼히 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 나간다면 앞에서 얘기한 세 가지, 즉 오무간 지옥이 무너지고 습을 녹이고 그리고 ‘나’라는 틀이 무너지는 사이 없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앞의 두 가지가 무너진다면 스스로 참나를 발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과정인 것이며, 사람으로 태어나서 기필코 이루어야만 하는 아주 큰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처럼 막중한 시기에, 어떤 분들은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엉뚱한 걱정을 하고 또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이가 멀쩡히 학교에 잘 갔는데도 ‘아이가 학교에 잘 갔을까? 집에는 잘 돌아올까? 또, 나는 일이 잘 안되니까…. 나는 가난하니까….’ 하고 온 정신이 다 그런 데에만 쏠려 있는 겁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한다면서, 정말로 걱정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렇다면 진짜 해결사한테 밀어던져 주어야만 그것들이 해결이 될 텐데, 진짜 자기 해결사한테는 마음을 두지 않고 안된다는 생각과 벌어진 일만 붙들고 늘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자기의 진짜 해결사는 벌써 자기가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는 것을 다 알고 해결할 준비를 이미 다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사량으로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진짜 해결사한테 일임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로지 자기 해결사에게 다 맡겨 놓을 생각을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하지는 않고 바깥으로만 해결사의 이름을 외우고 부르며 모든 것이 잘 해결되기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으니 그것이 원만히 해결이 되겠습니까?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흔히 여러분은 주인공을 진실히 믿는데도 일이 잘 안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보면 자기의 해결사 주인공을 진실히 믿기는커녕 바깥으로 온통 이름을 부르고 여기저기 찾아다니는데 언제 자기 등불이 밝혀지겠습니까? 바로 이런 분들을 저는 많이 보았습니다. 그럴 때는 참 슬픈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이 울면 저도 울고 여러분이 웃으면 저도 웃습니다. 둘이 아닌 까닭입니다. 그러면 왜 둘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겠습니까?
여러분은 흔히 육근(六根)이다 육경(六境)이다 육식(六識)이다 18계(界)다 하면서 그 내용이 무엇 무엇이라고 일일이 따라 외우곤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외우기만 하는 것은 마치 집 짓는 재료의 이름만을 외우고 있는 경우나 똑같습니다. 집을 짓는 기술은 배우지 않고 집을 지을 때 필요한 재료의 이름들만 배우고 있는 셈이란 말입니다. 육근은 서로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눈이 가는 데에 귀가 가고 귀가 가는 데에 눈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무엇을 집으려고 할 때 다섯 손가락이 다 함께 가서 잡게 되는 것이지 한 손가락만 가서 물건을 집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육근을 꼭 여섯 가지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이 모두 일심으로 통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로지 일심(一心)이요 한마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일심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경계가 여섯 가지라면 그것은 단지 여섯 가지만이 아니라 일체인 것입니다. 또 바깥에서 안으로 들이는 게 여섯 가지라면 그 또한 일체인 것입니다. 육경 육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다 의식으로 한데 뭉쳐서 일심으로 들이고 낸다 이겁니다.
그러므로 분잡하고 고달프게 이름을 따로따로 배우려고 하지 말고 지식으로 알려고도 하지 말고, 또 아는 것을 쓰려고도 하지도 말고, 다만 일심(一心)으로 자기 근본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체가 다 나오는 곳도 거기이고 들어가는 곳도 거기입니다. 때문에 가지각색의 모든 것이 각각 그 모습이 다르다고 해서 결코 둘이 아니요 셋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만 있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과 행, 즉 보는 것, 듣는 것, 움죽거리는 것 모든 것이 다 하나도 고정된 바가 없습니다. 고정된 바가 없으니 하나라고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선지식들께서 ‘멈추지 않는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멈추지 않는다’라는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 끄달리지 않는다, 여여하다, 걸리지 않는다’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걸리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다’는 말은 둘로 보지 않는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둘로 보지 않기 때문에 걸림이 없지 둘로 본다면 벌써 걸림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까지도 둘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둘로 보지 않는 도리를 어떻게 하면 잘 행할 수 있는가? 바로 일체가 오로지 한마음에서 나가고 한마음으로 다시 드는 것임을 깊이 알고, 의식적으로라도 모든 것을 하나도 버림 없이 다 받아들여서 자기 주인공에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현재의식과 잠재의식을 동시에 활용하게 되면서, 그것도 또한 공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께서는 물질로 구성된 이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몸 속에 내재된 그 모든 것을 100% 다 쓰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기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모든 것을 한데 뭉쳐서 한곳으로 놓아야 됩니다.
팔정도도 또한 그렇습니다. 팔정도는 여덟 가지 실천수행을 이르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여러분이 여덟 가지 마음이 따로따로 있어서 그 마음을 내고 팔정도를 행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아니라 다 한마음 속에서 옳은 견해를 내고, 생각을 바르게 하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열심히 정진하라는 의미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모두가 다 둘이 아닙니다. 팔정도도 다 한마음 속에서 들고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마음 속에서 팔정도의 여덟 가지가 나온다는 것은 바로 무심·유심이 같이 합해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것마저도 없는 것입니다. 그냥 수레바퀴처럼 굴러갈 뿐입니다. 우리가 팔정도를 팔정도로만 본다면 여덟 가지다 하고 말을 하겠지만, 그 여덟 가지가 한 가지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공이 없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이치를 똑바로만 안다면 우리는 그 이치를 나의 자성불 또는 불바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무의 세계와 유의 세계를 같이 동일하게 굴린다는 뜻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러한 이치를 바깥으로만 찾거나 이론으로만 배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이 뜻을 올바로 알아서 안으로 잡고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바로 심성과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리는 결코 생활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생활이자 참선이요, 참선이자 생활입니다. 또 육바라밀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육바라밀이라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이 깨달은 본각심에서 마치 불바퀴와 같이 굴리는 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음으로나 양으로나 마음 한생각을 내주면 물질 하나 주는 것보다도 한 생각 내주는 그 보시가 참으로 크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여섯 가지는 바로 한 본각심에서 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섯 가지가 여섯 가지가 아니라 하늘 땅 인간 등 전체를 한데 합친 그런 본각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는 모든 것에 얽매이지도 않고 멈추지도 않고, 그냥 슬슬 무궁무진하게 여여하게 돌아가므로 취할 것도 없고 안 취할 것도 없고, 닥치면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고 응해 주는 그런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해 주는 것이 바로 보살의 육바라밀 행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것을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이렇게 하나하나 낱낱이 뜯어서 배우려고 하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그것을 일일이 나눠서 하나하나 배우려고 든다면 어느 천년에 그것을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 이름을 배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기 이전에 육바라밀을 행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갖기 위해서 먼저 당당하고 떳떳할 수 있는 참다운 자유인이 되십시오. 참다운 자유인이 된다면 육바라밀은 자연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옛날, 어느 사찰에서 참선하시는 대중 스님들이 쭈욱 벽을 보고 돌아앉아서 좌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스님께서 들어와 쓰윽 한번 돌아보더니 하시는 말씀이 “그 얼굴 참 잘 생겼구먼. 그 얼굴이, 그 사진이 벽에 딱딱 박혀 있구먼. 그러나 사실 그 사진은 거기에 있는 것인데 다시 어디에서 또 사진을 찾는단 말인가?”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자기 사진은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서 벽에 무슨 사진이 붙어 있다고 벽을 쳐다보고 앉아 있느냐 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대중 스님들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한마디 한마디 하시는 말씀이 모두 정곡을 찔러 주시는 말씀이라 마침내 이 스님을 주지 스님으로 올려 모시고 직접 가르침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새로 된 주지 스님께서 대중 스님들에게 메밀 씨를 갖다 주면서 심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대중 스님들은 그 메밀 씨를 모두 밭에 심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주지 스님한테 여쭤 보기를 “이제는 메밀국수나 메밀떡, 메밀장국은 틀림없이 먹을 수 있겠습니다.” 하니까 그 얘기를 들은 주지스님께서는 “두고 봐야 알지” 하시는 겁니다. 그 후 또 여러 날이 지나 밭에 메밀 싹이 나와 꽃이 피게 되니까 대중 스님들이 다시 주지스님에게 “이제는 메밀떡을 꼭 먹을 수 있겠죠?” 하니까, “그것도 먹어봐야 알지” 하시는 겁니다. 그 후 다시 메밀꽃이 시들고 열매가 맺을 때가 되어서 “이제는 틀림없이 다 익었으니까 먹을 수 있겠죠?” 하고 또 여쭈니까 “그것도 먹어 봐야 알지”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대중 스님들이 이번에는 아예 메밀을 다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놓고 여쭈었습니다. “스님! 메밀을 다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래도 못 먹겠습니까?” “그래도 먹어 봐야 알지.” 그러니까 대중 스님들은 메밀가루를 반죽해서 진짜 장떡을 만들어 제일 먼저 주지스님 그릇에다 담아 드린 후 다시 여쭈었습니다. “스님! 이래도 못 드시겠습니까?” “먹어 봐야 안다.” 그러는 겁니다. 하는 수 없이 대중 스님들이 전부 모여 발우 공양을 하는데 모두들 한 그릇씩 떠서 각자 앞에다 놓고 일제히 한 숟갈씩 입에다 넣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주지스님께서 크게 호령을 하였습니다. “삼키지도 말고 뱉지도 말라!” 그러니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이라면 과연 어떻게 해야만 그 메밀 장떡을 잘 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뜨끈뜨끈한 것을 입에다 넣고 삼키지도 못하고 뱉지도 못하고 있으니까 그냥 입 속에서 슬슬 녹아서 넘어가는 겁니다. 다시 주지스님께서, “그 떡이 그대로 있느냐?”고 묻자 “조금 남았습니다” 하는 스님도 있고, 또 어떤 스님은 “어휴! 어떻게 하다 보니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럽니다. 그러니까 주지스님께서 “그렇다면 너희들은 그것을 어찌 생각하느냐?” “네, 삼킨다는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도리를 알겠느냐?” 이때서야 비로소 그 스님들이 딱 깨우쳤습니다. “아하! 이것이 생떡국이 아니고, 넘어가는 게 넘어 가는 게 아니고, 뱉는 게 뱉는 것이 아니로구나. 모든 것이 다 그대로구나.” 이렇게 해서 수행하시는 대중 스님들이 다 성불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넘길 수도 없고 뱉을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는 이 공부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어느 날, 노스님께서 대중 스님들을 쭈욱 앉혀 놓고 차례로 물었습니다. “너는 쌀 아닌 쌀을 아느냐?” 하시는데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그러면 너는 쌀을 씻어서 밥을 하지 않고 밥을 할 줄 아느냐?” 그러니까 “저는 밥 아닌 밥은 아직 잘 모릅니다마는 그저 잡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음, 너는 그래도 좀 뼈다귀라도 얻은 듯하구나. 다른 대중들은 가죽도 얻지 못해서 그렇고….” 하시면서 노스님은 다시 다른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먹은 사이 없이 먹을 줄 아느냐?” 그러니까 그 스님은 아무 소리 없이 나가더니 수박 한 통을 쪼개 가지고 와서 노스님 앞에 놓고는 삼배를 올리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노스님께서 “너는 골수를 얻었구나” 하면서 껄껄 웃으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러니 이것이 서로 얼마만큼 차이가 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 도리를 공부하면서 책을 보게 되면 벌써 심심하게 느껴집니다. 책을 몇 구절 읽게 되면 ‘이것은 이런 뜻이고 저거는 저런 뜻이고….’ 하고 뜻으로 나오지 말이나 이론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또 이론으로 배우려고 하지도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이 공부하는 분들은 살림에도 끄달리지 마시고 항상 넉넉한 마음으로 닥쳐오는 어떠한 경계에도 속지 않고 문득 뛰어넘을 수 있는 큰 용기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또 어떤 분들은 말하기를, “저는 진정코 간절하게 믿는데 왜 이리 일이 풀리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죽겠습니다.” 이럽니다. 그러면 저는 그게 모두 당신네들 탓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가만히 여러분을 보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진짜로 자기 주인공, 자성 부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믿는 마음의 정도, 그 한생각이 자기를 올려놓기도 하고 자기를 구덩이에 빠지게도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이 투철하지 못하면 마음이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흔들리면 하고자 하는 일도 흔들려서 흐지부지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니 하는 일이 잘 안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러나 늦게라도 이러한 이치를 알게 된 사람에게는 안되는 것이 안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가 참자기를 믿지 않으니까 참자기가 자기를 똑바로 가르치려고 시험을 주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모르면 안되는 것이 병이라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안되는 것이 오히려 약이며 자비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일이 안된다 해도 그 모든 것이 다 자기를 성숙시키고 지도해 나가기 위한 것임을 반드시 알고 믿어서 한생각 크게 내어 돌릴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께서 한생각 크게 내어 돌릴 줄 아는 공부가 된다면 어떤 구렁텅이에 갔다 놓아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당당해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좀 그렇게 해 보세요. 그리고 진정 믿음이 투철하다면 한생각을 잘 내시기 바랍니다. 티끌이 모여 태산이 되듯이 모든 것은 다 한생각에서부터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한생각이 계속 순일하고 여일하다면 어떤 시험이 왔다고 해도 그냥 스쳐 지나갈 뿐입니다. 그러면 시험이 그냥 시험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성장시키는 촉진제일 뿐입니다. 나무가 잘 자라려면 비바람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조금만 바람이 불어대도 겁부터 내고 부처님을 의심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의심하고, 불교를 의심하고 그럽니다. 여러분이 그러고도 어떻게 자기의 주인공 자성불을 믿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진정으로 한마음의 본래 자성불을 견고한 마음으로 철저히 믿고 행한다고 한다면 그 어떠한 것도 아니 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고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와서 자기 몸에서 벗어나고 고에서 벗어난다면 얼마나 자유스럽겠습니까? 그렇다면 바람이 불어도 시원하고 비가 들이쳐도 오히려 시원할 뿐입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들이치면 오히려 모든 나쁜 공기와 먼지 그리고 더러운 것들을 다 청소시켜 주기 때문에 비바람은 오히려 자기를 정화시켜 주는 공부의 재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이렇게만 될 수 있다면, 설사 무엇이 오더라도 하나도 겁낼 것이 없고 거기에 속을 리도 없고 걸릴 것도 없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어디를 가든지 그냥 털퍼덕 앉아도 걱정이 하나도 없고, 먼지 앉을까봐 걱정도 없고, 때가 묻을까봐 걱정도 없고, 좋지 않은 것이 와서 내 무릎에 안겨도 걱정이 없습니다. 내 마음은 물들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고 걸리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사랑한다고 한 번만 안기면 그냥 붙들고 죽자 사자 하니 사고가 나는 겁니다.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바보입니다. 사람 사는 게 그렇게 편리하고 남을 이익 되게 할 수도 있는데 왜 힘들고 어렵게 살겠습니까?
전에 어떤 스님께서 이렇게 했다고 합니다. 어느 마을에 너무나 가난한 집이 있었는데 가련하게도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딸은 늙은 어머니 때문에 시집도 못 가고 살면서도 그렇게 착하고 효성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스님께서 이 집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홀어머니를 모시는 사는 딸이 어찌나 극진히 어머니를 모시는지 그 광경을 보고는 참으로 불쌍하고 안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나 뜻으로 그냥 보시를 듬뿍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집을 떠났습니다. 그 후부터 그 딸에게 태기가 있어 마침 아들 하나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장성해서 장원급제를 하고 집안을 크게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이익 되는 일을 많이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거야말로 진짜 보시이며, 그렇게 하는 마음의 보시가 진정 마음의 보시입니다. 여러분이 보시를 할 때, 보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쪽은 이쪽대로 병들게 하고 저쪽은 저쪽대로 병들게 하는 그런 마구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진짜 보시는 그런 게 아닙니다. 원효대사가 파계했다고 그러지만 그것이 보시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생각하면서 뛰고 뛰면서 생각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공부한답시고 다리만 꼬고 들어앉아 있으면 다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나가서 돌아다니라는 것도 아닙니다. 눈 뜨고 뛰면서 푹 쉴 줄을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선진국이라고 하는 다른 나라에서 오히려 무척이나 이 마음공부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들보다도 더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정말 간절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절마다 기복적으로 죄를 덧씌워 주는 기도를 하라고 하고 있으니, 그렇게 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최첨단 과학문명 시대입니다. 인간이 저 우주 혹성을 왔다 갔다 하는 그러한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공부를 하게 되어 마음을 내면, 우리 한생각에 다른 혹성의 모든 보살들이 다 여기에 찰나찰나 들고남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 자체가, 그렇게 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뛰며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진짜 보살이며 진짜 부처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 계신 여러분이 다 깨우쳐도 부처님은 한 부처님입니다. 모두가 한자리이므로 둘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제부터라도 자기를 믿는 마음을 튼튼하게 해서 물러서지 않는 당당한 마음으로 공부해 나간다면 안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지옥고도 풀릴 것이고 억겁 전부터 쌓여온 모든 습도 녹아져 버릴 것이고, 그리고 마침내 자기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러서지 않는 당당한 마음과 믿음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끝으로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이 움직이고 뛰며 생활하면서도 항상 삼매에 드는 도리를 꼭 알고 행을 하시라는 겁니다.
가만히 앉아서, 또는 눈 감고 앉아서 삼매에 드는 것만이 삼매가 아닙니다. 눈을 뜨고, 치켜 뜨지도 내려 뜨지도 않는 도리, 즉 중도의 행이 바로 삼매입니다. 그렇다고 보이는 눈을 꼭 그렇게 뜨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그렇게 스스로 가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일상생활 속에서 참선이나 화두, 그리고 삼매에 들 수 있는 그러한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이 몸은 여기 그대로 있으면서 마음은 어디든지 나툴 수 있는 화신으로 나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수없이 나툴 수가 있기 때문에 천백억 화신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불가사의한 법, 불가사의한 도리를 모르고 여러분이 그냥 지나가신다면 정말이지 너무나 억울하고 원통한 일입니다.
당시 원효대사께서 의상대사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무니까 어느 움막에 들어가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원효대사가 한참 곤히 잠을 자다가 별안간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려고 깨어 보니 마침 옆에 물이 고여 있길래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아주 달게 마셨습니다. 그리고 또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날이 밝아 원효대사가 깨어 보니 움막은 바로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를 버리는 움막이었고, 간밤에 달게 마신 물은 벌레가 득실거리는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이었습니다. 이를 본 순간 원효대사는 그만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원효대사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아하! 물은 같은 그 물이건만 내가 간밤에는 생각 없이 마셨으므로 달게 마셨고, 지금은 그것을 보고 생각을 하니 구역질이 나는구나. 그러니 바로 이 생각이 탈이로구나.’ 이렇게 깨달은 원효대사는 마침내 의상대사만을 중국으로 보내고 자신은 가지를 않았습니다. 굳이 멀리서 법을 구할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배우기도 전에 일부러 화두를 받아 갖고 공부를 하려고 하지 말고 바로 이처럼 자기 몸뚱이를 화두로 알아야 합니다.
또, 대안대사에 대한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늑대새끼가 죽었기에 좋은 데로 가라고 염불을 하려고 하는데 대안대사께서 거기에다 젖을 턱 갖다 놓더니 젖을 먹이더란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게 바로 천도라고 그러는 겁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이것도 화두가 될 수 있고 관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과연 왜 그랬겠습니까?
내가 항시 그 요령을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젖을 먹이는 것은 방편인 것이고, 만약 내가 그 죽은 늑대 새끼의 의식의 물방울을 내 마음의 바닷물에 넣었다고 본다면, 그래서 둘이 아니게 되었다면 그 늑대 새끼는 무명만 죽었지 바로 내가 된 것입니다. 내 속에 넣었으니 내가 된 것입니다. 한 바닷물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넣어도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는다고 항상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만약 좋은 데로 가게 하려고 한다면, 내 주인공에 넣으면 그대로입니다. 그러면 벌써 요리가 되어서 거기에서 한 바퀴 굴려서, 천도가 되어 나가는 겁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나가도 또 줄어드는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틀이 없어서 넣어도 두드러지지 않고 꺼내도 줄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까지 자세히 떠 먹여드리는데도 그래도 모르시겠습니까? 아무리 자세하게 떠 넣어도 자기 자신들이 먹어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헛거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이러한 도리를 인식을 하고 얼른 아셔야 합니다. 인간이 되었다면 그쯤은 알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본래 자성불인 애비와 현재 의식인 자식이 함께 꼭 상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모두들 자기 부와 자가 상봉을 하도록 열심히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마치 남과 북이 갈라져서 가족들간에 상봉을 해야 되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한 몸 안에 부와 자가 있으면서 따로따로 산다면, 한 몸 안에서 그게 될 일입니까? 그러니 여러분이 과거 부와 현재 자가 꼭 상봉하시기를 바라면서 오늘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26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2003-04-16
 
 
   
   
2024. 11.2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