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실체에 대해서
문
사람이 세상을 사는 데 있어서 업보도 지은 게 없고 원죄도 없이 찰나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찰나가 모여서 영원의 실체가 되는 건데 찰나의 삶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니까 제 자신의 삶이 허무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삶의 실체가 무엇인지요?
답
여러분이 본래 공했기 때문에, 『반야심경』에 ‘고정됨이 없이’ 이렇게 했죠? 고정됨이 없어서 색(色)이 공(空)이고 공이 색이라고 했습니다. 고정됨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보고 듣는 거, 말하는 거, 가고 오는 거, 만나는 거, 차를 타는 거, 도착해도 종점이 없는 거, 시발점이 종점이고 종점이 시발점이니까. 하여튼 이렇게 돌아가는 그 자체가 바로 그대로 한군데서, 한군데라고 해도 한군데라고도 할 수 없는 데서, 쥘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데서 그 모두가 나온다는 것을, 자동적으로 여여하게 나고 든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이 땅에 발을 붙이고 지금 살고 있다고 하지만 사는 게 고정됨이 없이 찰나찰나 돌아갑니다. 그래서 그것을 표현할 때, 자식이 부르면 금방 아버지 노릇을 하고 아내가 부르면 금방 남편 노릇을 하고 또 부모님이 부를 때는 금방 자식 노릇을 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렇게 마음은 체가 없어서 찰나찰나 돌아가는데 거기 업보 붙을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업보가 있다 하면은 여러분이 마음 내는 데에 따라서 업보가 붙는 거지 거기 어떻게 업보가 붙습니까?
과거는 바로 현재에 짊어지고 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현재도 공해서 돌아갑니다. 그런데 거기 업보가 붙을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모든 것에 끄달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끄달린다면 3차원의 차원도 4차원의 차원도 어렵습니다. 그러니 업보가 붙을 자리가 있다면 그 사실을 여러분이 한번 내놔 보십시오, 거기 붙을 자리가 있나. 순간 아버지 노릇하고 순간 남편 노릇하고 순간 자식 노릇을 하는데, 방귀 뀌면은 소리는 났는데 도대체 간 곳이 없습니다.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 병 붙을 자리가 없다고 하는 그 뜻을 터득을 하시고 물리가 터지려면 나부터 발견하십시오. 나부터 믿고, 그 믿는 마음에서 물러서지 마세요. ‘주여, 잘되게 해 주십시오.’ ‘부처님이여, 잘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하면 벌써 둘이 되는 겁니다. 자기 근본에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과 더불어 둘이 아니어야 되죠. 납득이 안 가십니까?
그리고 자꾸 생각을 내는 데서 ‘이것이 될까, 안 될까?’ ‘뭘 어떻게 해야 옳을까?’ ‘이거 잘 하는 걸까? 망하지나 않을까?’ 이러한 마음 때문에 걸림이 있는 것이지 그 마음내기 이전 영원한 생명의 근본은 거기에 아무것도 붙을 데가 없습니다.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고, 나온 것도 없어서 갈 것도 없고, 그래서 바로 이 자리가 천당이고 이 자리가 지옥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잘 알고 자기를 잘 터득할 수 있다면 환히 밝아져서 저절로 발현이 되는 것입니다.
생활선이 되게 하려면
문
모든 스승님들께서 끊어짐이 없는 생활선을 항상 말씀하시는데 저는 평상시에 이 생활 자체가 선인 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못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끊어트리지 않고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생활을 하다 보면 또 그 자체가 어떤 집착이 되는 것 같고, 상당히 좀 미묘한 그런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생활 속에서 참선을 할 수 있는 좀더 구체적인 어떤 실천 방안을 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답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살지 마세요. 돈벌레가 다리가 많은데 그것이 어디에고 걸리지 않고 잘 가다가 ‘너는 다리가 많은데 왜 이렇게 걸리지도 않고 잘 가니?’ 그러니까 딱 걸리더라는 거예요. 그런 거와 같이 여러분은 잘 하다가도 어렵다는 생각을 하는데, 유유하게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주인공이라면, 주인공 죽는 법은 없어요. 더하고 덜함도 없고 영원한 겁니다. 그러니 거기에다가 모든 일체를, 내가 지금 움죽거리는 거나 용도에 따라서 어떠한 어려움이 오거나 회사에서 생기는 일이나 모든 일이 내가 있으니까 일어나는 겁니다. 내가 있으니까 상대도 있는 거고 내가 있으니까 모두 나한테 비비는 거고 부딪치는 거니까 해결하는 것도 내 근본 주처, 주인공 당신밖에 할 수 없다고 하든지, 한마음 너밖에 없다 이러든지, 또 영원한 친구, 너밖에 없다고 하든지 아무래도 좋아요. 그것은 이름이니까 아버지라고 해도 좋구요. 그렇게 모든 것을 거기에다가 맡기고 거기서밖에 해결할 수 없다 하고 실험을 좀 해 보시라는 겁니다. 오늘부터 그렇게 실천해 보시면 생활이 얼마나 윤택해지는지를 느끼게 될 겁니다.
벌써 한 찰나에 바꿔지는 중용이니까 그렇게 꼭 실험해 보세요. 그러면 얼마나 살기 좋고 얼마나 즐거운가 알게 됩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왜 즐겁게 살수가 없겠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갈림길에 서 계신 거예요. 차원이 올라가서 모든 게 나 아님이 없는 도리를 아느냐, 그렇지 않으면 아예 눈도 뜨지 못하고 귀도 뜨지 못하고 그런 의식만 있어 가지고 보지를 못하니까 차원이 낮은 데로 떨어지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 있는 겁니다. 여러분이 지금 그런 차원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올라간다 내려간다 하는 것도 걱정하지 마시고 모든 걸 한군데다, 맷돌도 중심을 잘 잡고 물건을 갈아야 맷돌이 이탈이 안돼서 잘 갈려 나오지 심봉을 딱 꽂지 않고 맷돌을 돌려보세요. 제대로 위 아래가 맞지 않으면 서로 이탈이 됩니다. 그러니까 중심을 딱 세우고 ‘주인공, 당신만이 할 수 있어.’ 하고 믿고 놓을 때, 그렇게 진실로 믿을 때 해결이 나는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나하나 실험하고 체험하다 보면 나중에 탑 봉우라지가 턱 올라갈 때 홀연히 벗어나는 겁니다.
공부에 진척이 없어
문
마음법을 공부해 온 지도 오래 됐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한 번도 부정적으로 생각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제가 이 육신이 다하는 날까지 공부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부에 진척이 없고 늦어지는 듯한 생각이 자꾸 듭니다. 한 발 떼어놓을 수 있도록 가르침 주십시오.
답
그런데 마음 공부는 늦어도 늦은 게 아니고 일러도 이른 게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도 없습니다. 둥글게 돌아간다 하면은 어디를 문이라고 생각하고 어디를 문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니 늦은 것도 없고 이른 것도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 도리를 완전히 안다면 마음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를 알 겁니다.
지구가 돌아가는 속도보다도 더 빨리 돌아갈 수가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고 구정물을 맑은 물로 바꿔서 쓰라고 하는데 대부분 그렇게 안 되나 봐요. 내 안에서 나오는 즉시 생각이 나서, 그 당시에 바꿔 놓으면 찰나찰나 바뀌어서 돌아가게 되는데 그게 안되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내 주인이 번연히 모든 것을 다 하고 가는 것이니까 그 주인을 진짜로 믿고 추구를 할 생각을 해야지, 왜 나의 근본을 등한시하고 따로 자기를 세워서 더디다 빠르다 하면서 근심 걱정을 해요? 만약에 어디가 아프다거나 잘못됐다거나 이런 문제가 있어도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당신이 일체를 다 하는 거니까….’ 하고 맡겨 놓아야지 ‘이거를 빨리 나아야 할 텐데 이게 더디다. 정말 주인공이 하기는 하는 것일까?’ 하는 이런 생각이 없어야 돼요. ‘빨리 낫게 하는 것도, 질질 끌어서 더디게 하는 것도 너니까 너 알아서 해.’ 하고 그렇게 믿고 들어가지 않으면 죽은 세상을 들어갈 수가가 없어요. 산 몸이 어떻게 죽은 세상에 들어갈 수 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구녘으로, 나왔던 구녘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건 알 수가 없는 거거든요.
늦어도 늦은 게 없고 빨라도 빠른 게 없어요. 그거를 비관하시지 마시고 항상, 너만이 너가 있음을 증명하고 너만이 가정을 화목하게 웃고 살게 할 수 있다고 자꾸 그 자리에 밀어 던지세요.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이건 자기 육신의 일이건, 또 직장에서 생기는 문제이건 모두 근본에 맡기세요. 우리가 지금만 사는 게 아닙니다. 다음에 재생을 할 때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 재생 값이 있게 되는 거니까 답답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답답하고 모르고 그러는 것도 도니깐, 모르고 답답하고 말도 안되고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공부했어도 ‘이게 뭔가?’ 하고 한탄이 되더라도 모든 걸 근본에다 밀어 던지세요. ‘한탄하게 하는 것도 너고, 답답하게 하는 것도 너고, 모두가 너다.’ 하구선 거기다 놓는 것이 인제 습관이 되면은 어떤 거든지 다 거기다 놓구선 가게되고 실험을 통하고 또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러면은 자연적으로 그것이 문이 열리게 되거든요. 그러니 어떤 생각에도 끄달리지 말고 무조건 믿고 일체를 맡기다 보면은 하나하나 알게 될 겁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의 경지
문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 솔직히 한 시간만이라도 여일하게 그런 상태가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다가 24시간 내내 여일한 마음을 가지기란 사실 너무도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예전 선지식들이 말씀하신 행주좌와 어묵동정의 경지에 이르려면 과연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요?
답
어떤 분은 대화를 하다 보면 선이 끊어진다고 하기도 하던데 그렇게 대화를 하게 된 자체가 바로 자기 주인공으로 인해서 대화를 나누는 겁니다. 대화를 나누는 그것이 바로 증거예요. 송장이라면 말도 못할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의식을 할 필요도 없이 그대로 순수하게 하면 됩니다.
누구와 얘기를 했다면 하긴 했는데 한 사이가 없습니다. 말을 하긴 했는데 한 사이가 없다는 얘깁니다. 그것이 바로 증거란 말입니다. 자기가 있다는 증거란 말입니다. 대화를 한 것도 살아나가는 것도 자기가 있기 때문이지 자기가 없으면 뭐가 있습니까? 그래서 자기 주인이 자기를 형성시켜 놓고 그 앞장세워 놓은 물질로 인해서 다니는 겁니다. 내가 차를 샀다면 차를 앞장세우고 다니듯이 말입니다.
하루 24시간 주인공 생각을 안 하고 일에만 몰두했어도, 24시간은 사람이 만들어 놓은 거죠. 24시간을 생각을 안 하고 일에 몰두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고 24시간 이외에 일을 다 끝마치고 나면 바로 24시간은 없는 겁니다. 그러면 24시간 몰두를 하고 일을 하고 났는데 문뜩 생각났다 이거예요. 생각난 그 자체가 바로 24시간을 몰락 해 버린 자체이기 때문에 그냥 찰나다 이겁니다.
생각을 좀 넓히세요. 색으로만 본다면 24시간은 고대로 있고, 또 내가 몰두하고 일한 긴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틀 사흘을 몰두를 하느라고 생각을 안 했다 할지라도 한번 생각났을 때 벌써 사흘이고 이틀이고 하루고 몰두했던 그 자체가 바로 한 찰나에 한데 합쳐지는 겁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저 그렇게 24시간 몰두하고 24시간 편안했다는 징조거든요. 왜? 나한테 급한 일이 없으니깐 그 생각이 안 났다는 얘깁니다. 급한 일이 없는데 왜 생각이 나겠습니까? 그냥 이거 하고 저거 하고 아주 재미있게 일하다가 보면 재미있어도 생각 안 날 때가 있고 재미가 없이 몰두하느라고 생각 안 날 때도 있고, 아주 급한 일이 생겨서 또 생각 안 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급한 일이 생기거나 우환이 생기거나 아프거나 그러면 제일 먼저 생각이 나는 법입니다. 좋은 일이 생겨도 제일 먼저 감사하다는 생각이 납니다.
그래서 몇 초가 아니라 24시간를 1초로 생각하시면 돼요. 1초도 24시간이 되고 24시간이 1초도 될 수 있으니까 자기 마음대로 그것을 정해 놓고 끄달리지 말라 이겁니다. 왜 그거를 정해 놓습니까? 왜 긁어서 부스럼을 내놓고선 피를 냅니까. 그러니까 아파도 당신이 해결할 수 있다 하고 탁 맡겨 놓고 지켜보는 거예요. 뭐든지 그렇습니다.
진짜로 믿어지지가 않아
문
일체를 근본에 맡길 때 어떤 때는 진짜 믿어지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잘 모르니까 그냥 답이 나올 거다 하는 믿음은 없으면서도 떼를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다가 일체를 받아들이듯이 집어삼키라고 하시는데, 저 같은 경우는 받아들이려면 속이 메스껍다든지 더부룩한 그런 느낌이 생깁니다.
답
색경을 보면은 그 속에 내 모습이 껍데기이면서도 그것은 또 껍데기 환상이 나왔잖아요. 그런데 색경 속에 있는 것이 자기일까요? 색경 바깥에 있는 자기를 자기라고 할까요? 자기라고 할 수 없죠? 둘 다 모두. 그런데 그 가운데 영원한 자기 생명의 근본 뿌리가 있단 얘기입니다. 그거는 죽는다 산다도 없어요. 그거를 찾으려고 애를 쓰고 공부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만 찾기는 뭘 찾습니까, 본래 가지고 있는 건데.
저 나무들처럼 자기 뿌리가 있는데 그걸 모르니깐 거기에다가 집중해서 모든 거를 일임하고 감사하고 일거수일투족 거기서 살고 몸은 내 주인의 시자로 살아야 된다는 소리예요.
그리고 속에서 메스꺼운 느낌이 든다고 했는데, 나를 이끌어 가는 나를 무시하기 때문에 그런 반응이 나오는 거지 진짜로 자기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렇게 반응을 안 합니다. 수없는 겁을 거듭거듭 화해서 형성된 건데 어떻게 거부를 합니까? 자기가 자기를 거부하면은 자기 싹이 뿌리를 잘라버리는 것과 같은 건데 어떻게 거부를 하느냐는 겁니다.
자기 껍데기는 모두들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왜 자기를 형성시킨 참자기는 못 믿느냐는 얘기입니다. 세상에 타의에서 누가 나를 구해 주는 것도 아니고 타의에서 누가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자기를 못 믿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얼마만큼 노력하느냐, 얼마만큼 진실하게 실천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게 오는 겁니다. 하다못해 요만한 벌레도 자기를 승화시키기 위해서 그 살을 찢는다고 그랬잖습니까. 그런 걸 볼 때에 참, 사람만 불쌍한 게 아니라 짐승이나 미생물에 대해서도 역시, 물에서 사는 거든 질척한 데서 사는 거든 허공에서 사는 거든 다들 보면은 그만한 고통이 따르고 그만한 괴로움이 따르고 그런 아픔이 따릅니다. 그럴 때 잡아먹고 잡아먹히고 하는 그 광경을 볼 때 우리 인간도 지금 정신계에서 정신을 잡아먹고 정신을 잡아먹히고 있지 않나, 있지 않나가 아니라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깐 인간은 사람을 잡아먹지는 않아도 역시 정신계에서 정신을 잡아먹고 정신을 잡아먹히고 이렇게 산다는 얘기죠.
그러니깐 결국은 자기를 리드해나가는 자기의 주인공을 진짜로 믿어야 된다는 얘기죠. 왜 믿어야 되느냐. 보이지 않는 데서 다가오는 거는 칼을 들고 와도 그걸 대치를 못할 거니까요. 몽둥이를 들고 와도 대치를 못해요. 병균이 닥쳐와도 대치를 못하고 영계성이 닥쳐와도 대치를 못해요. 그러니까 자기 근본 주처를 믿고 거기에 일체를 놓고 나가다 보면 한생각에서 다 진화돼서 나오는 거죠.
삼독심의 역할
문
예전에 어느 스님의 말씀에 ‘지옥이 무서운 곳이 아니라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탐진치(貪瞋癡) 삼독심(三毒心)이 가장 무서운 곳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삼독심이 과연 우리가 공부해 나가는데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는지 가르침 바랍니다.
답
남의 걸 탐을 내고 집착하고 욕심을 부리고,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 분수를 모르고 뛰다가 물에 빠지는 거를 삼독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그러한 생각을 뛰어넘어야 된다 이겁니다. 내가 어리석어서 남의 것을 탐내고 욕심부리고 집착하는 그 모든 걸 그렇지 않도록 하는 것도 거기다 하고 일체를 내려놓고 관해야 합니다.
이렇게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쩔 수 없이 삼독심을 내야 살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러다 언제 우리가 벗어날 수 있겠어요. 그렇게 산다면 이 생이 다하고 또 살다가 죽어도 그 도리를 모를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생각이 올라온다 하더라도 자기 주인공을 관하면서 체험을 하게 되면 자기와 자기가 통신이 됩니다. 그러면 환하게 알아져요.
그러니 빛보다 더 빨리 초월해서 돌아가는 이 시대에 그것을 언제 일일이 다 배워서 가렵니까? 그러니까 사람이 본래 욕심부린다는 것도 알고 있고, 집착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잘못된다는 것도 알고 있고, 이렇게 하면 나쁜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전부 알고 계시죠? 그러니까 일일이 끄달리지 말고 ‘주인공, 나쁜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 건데 너만이 그렇게 안 하게 이끌어줄 수 있잖아.’ 하고 거기다 일임하는 겁니다, 그러면 좋은 생각이 입력이 되는 겁니다. 아직 일어나는 대로 놓지도 못하면서 생각으로만 삼독심을 끊어야 한다고 한다면 언제 벗어납니까?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고는 남을 건질 수가 없어요. 내가 모르는데 어떻게 남의 길을 인도하겠습니까! 아직 내가 장님이라면 모르는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일체를 다 나오는 그 자리에 다시 놓고 지켜보세요. ‘삼독심이 공부하는데 무슨 역할을 하나’ 하고 말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건 두말 할 것도 없이 녹이고 가야 하는 거죠.
항상 이렇게 이날까지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하고 왔는데 그냥 알음알이로만 알고 흘려버려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실천을 직접 해보고 자기 자신을 알아서 용법으로써, 어떻게 해나가야 대처가 될 수 있고 어떻게 해야 악과 선을 대치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도의 길을 직접 걸어가 봐야 만이 되는 겁니다.
벗어날 수 있는지?
문
얼마 전 현대불교신문에서 이 몸을 벗게 되면 내 안의 의식을 벗어나야 하고 강을 건너야 하고 불바퀴를 벗어나야 한다고 하셨는데, 살아생전에 나의 근본을 진짜로 믿고 마음도리를 지극하게만 해 나간다면 몸을 벗고 나서의 단계 아닌 세 단계를 정말 벗어날 수 있는 것인지요?
답
사람이 살아 있을 때 물에 빠지면 죽죠? 육신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사람이 살아 있을 동안에 빠진다는 생각에 잡혀 있는 거예요. 물에 빠지면 죽는다는 의식에 잡혀 있는 거죠. 그러고 불구덩이에 들어가면 타 죽는다는 의식이 있고 총을 맞으면 죽는다는 게 의식적으로 돼 있고요. 그런데 이 공부는 물질적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공부를 해서 물질로다 나올 때 조금도 거침없이 착을 두지 않게끔 하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어서 내 안의 의식에서 벗어나야 하고 물을 건너가야 되고 불바퀴를 넘어 가야 하는데, 얼른 쉽게 말해서 부처님께서도 ‘인간이 하나가 나오면은 허허바다에 배 한 척 띄워 놓음과 같으니라.’ 했어요. 그래서 배 안에 많은 중생들이 타고 있는데 비바람이 치고 파도가 치고 한다면 전부 일어서서 살려달라고 하는데 그러지 말고 침착하게 앉아서 노 젓는 뱃사공, 즉 말하자면 선장한테 한마음으로 마음을 이어준다면 가려고 하는 목적지까지 무난히 갈 수 있다는 이런 표현을 하셨단 말입니다.
우리가 또 거기서 한 번 점프해서 넘어가 본다면 마음이 체가 없는데 물이 어디 있으며 물이 없는데 배가 어디 있을 거냐 이겁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마음이 체가 없는데 바다가 어딨으며 바다가 없는데 배가 어딨겠느냐. 한생각이면 강도 없고 불도 없는 거죠. 생각하기에 달렸으니깐 말입니다. 이거는 마음이기 때문에 체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는다. 우리가 이 공부를 해서 벗어난다면 태산도 뚫고 나가고 땅 속 물 속도 못 들어가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살아 있을 때 강도 없고 벽도 없고 봇장도 없고 문도 없고, 마음이라는 건 문을 찾아다니지 않죠? 지금 앉은 곳에서 예전에 다녀온 곳을 한번 갔다 와 봐요? 문이 있나요? 문을 열고 다니나요? 마음으로 갔다 올 수 있는 거죠? 그거와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문도 없고 바다도 없고 산도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살아서 그렇게 할 수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게 뭐냐 하면은, 모두 여러 사람들은 자기 차원에 따라서 가정을 이끌어 나가고 자기를 이끌어 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살아서 그렇게 한다면…. 그냥 성불이라고 하는 것이, 불(佛)은 생명이요, 즉 생명의 근본 불입니다. 곤충 하나도 풀 한 포기도 생명이 있으니깐 전부 불이죠. 그러고 교(敎)는 바로 수레가 돌아가는 대로 우리가 배우고 나가는 것이, 우리가 지금 배우고 나가는 것이 교거든요. 그러니까 모두가 불교 아닌 게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겁니다. 어느 한 군데 국한돼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불교예요, 그냥. 그러니까 살아생전에 알지 못하면 죽어서도 빠져 죽는 줄 알고 강을 못 건너가고, 타죽는 줄 알고 불바퀴를 못 지나가니 이걸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떠돌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니 여러분 모두가 정말 이 마음의 근본을 발현해서 이 한 생을 헛되이 사시지 마시고, 다가오는 세세생생을 지금 이 한 생에 그냥 메꿔 버리시고 그 불쌍한 사람들, 불쌍한 고기들, 불쌍하게…. 하여튼 하천세계의 동물이나 생물이나 전부 불쌍하고, 닭도 하루에 몇 마리씩 그냥 저이 뜨거운 물에 들어가고 그러지 않습니까? 이게 모두 지옥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이 한 생 동안 열심히 공부하셔서 그 불쌍한 생명들을 모두 지옥에서 건져내도록 하시면은 얼마나 좋습니까. 그것뿐만 아니라 조상대대로 얽히고 설킨 인연들을 모두 건지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은 자식들한테 대대로 손손이 또 이끌어지게 되고 얼마나 좋습니까? 이거 정말이지 이거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거고, 이 세상을 다 준대도 살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 열심히 하셔야 합니다.
동생을 살릴 수 없는지
문
이렇게 질문을 올리게 된 연유는 동생을 위해서 제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여쭙기 위해서 입니다. 동생이 지금 암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거든요. 그런데 의사선생님들 얘기로는 너무 늦어서 몇 개월밖에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제가 동생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되고, 동생을 살리려면 어떻게 관해야 합니까?
답
그거는 우선 옆의 사람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뭉쳐야 합니다. 먹이는 것도 그렇고, 의사의 손도 그렇고 말입니다.
그런데 암이라는 이름을 떠나서 ‘죽이는 것도 너고 살리는 것도 너다.’ 하고 그냥 한군데로 몰아서 넣어 가면서 먹는 거라든가 보조하는 사람들이 다 한마음으로 뭉쳐서 잘 해 주어야 하는 게 우선입니다. 병원에서 몇 달 못 산다고 정리하라고 했던 사람들 중에도 괜찮게 지금 살고 있는 분들도 있어요.
그거는 왜 그러냐? 마음공부를 해서 집념이 강하니까, 모두 그렇게 이끌어 주니까 그 사람이 살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깐 그거는 내가 의사도 아니고, 의사라도 또 그것을 담당할 수가 없어요. 만약에 의사가 40%다 하면 60%는 자기 자신들이 알아서 대처를 해야 되는 거죠.
어떤 분들 가만히 보면 ‘아휴, 그까짓 것 아무리 해보면 뭘 해? 이제는 죽는다는데 기다리고나 있을 뿐이지.’ 이러거든요. 그러면 죽는 거예요. 자기 마음이 죽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죽는 거죠.
그러니까 관하는 것도 평상시에 가르쳐 줘야 합니다. 지금 우리 집은 모두들 괜찮다고 생각하고 그냥 살지 마세요. 사람이 어떠한 일이 생길지 몰라요. 그냥 어디를 가다고 무너지고 불이 나고 그래서 사람이 다 죽듯이 어떠한 일이 생길지 모르고 그냥 살아나가는 거와 같으니까 늘상 관하는 도리를 가르쳐줘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마음공부를 나를 위해서, 여기 오게 하기 위해서 얘기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생활하면서 그대로 하라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관하는 도리를 배워서 미리미리 하다 보면은 이리로 갈 것도 저리로 가게 만들고 그래서 아무 일이 안 생기는 거죠. 마음이 벌써 자기를 이끌고 갈 때 잘 이끌고 가거든요.
그러니깐 미리미리 자식들한테, 하다 못해 감기가 들더라도 “너 감기 낫게 하는 거 네 주인공밖에 없다. 너 주인공한테 관해.” 이렇게 자꾸 가르쳐주면은 은연중에 어린애들이 체험을 하게 되는 거예요. 어떨 때는 어른보다도 나아요. 그렇게 돼서 자기 일들을 자기가 해결하고 나가게 해야 합니다. 그건 어른이 가르치기에 달려 있어요. 그래야 제 밥 제가 먹고 살지, 그렇지 않으면은 부모가 해다 줘서 먹는 게 되죠. 부처님 밥도 그대로 내가 먹어야 제대로 공부하는 거지 부처님 밥을 내려 먹는다고 생각하면 그거는 제 밥을 제가 먹을 수가 없는 거죠. 이 말이 무척 뜻이 깊은 말이에요.
그렇게 미리미리 가르쳐 줬는데도 왜 그렇게 안 합니까? 미리미리 자식들한테 가르쳐 주세요. 자기가 해 나가게끔 하면은 사고는 안 겪을 거 아니에요? 지금 허공에 보이지 않는 데서 세균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집안에도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구요? 이 몸뚱이가 집이거든요. 집 안에 주인이 없으면은 함부로 막 드나들어요. 들어왔다 나갔다 하구요. 그리고 안에서도 막 친구들을 끌어들입니다. 이래서 집을 망가뜨리는 거죠. 이 말을 잘 알고 명심해서 미리미리들 아이들이 대치하면서 자유스럽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부딪침이 많은데
문
저의 아상이 커서일까요? 내 자신 스스로는 모든 것을 참으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건만 너무나 사사건건 부딪치는 것이 많아 정말 힘이 듭니다. 도대체 저에게 무엇이 문제일까요?
답
그 잘한다는 생각 때문에 다 놔버리지 못하니까 무명이다 아상이다 하는 게 나오는 겁니다. 근본에 완전히 맡기지 못하고 자기라는 걸 세우기 때문에 아상이 생기는 거고 또 믿지 못하기 때문에 무명이 생기는 겁니다.
나무들도 자기 뿌리로 인해서 살고 있으면서도 흙이 가려 있기 때문에 자기 뿌리를 못 보거든요. 등잔 밑이 어둡다고 자기 뿌리를 못 보니까 믿지 못하는 겁니다. 우리는 나무의 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보고 있지만 나무의 싹은 흙이라는 무명이 가려서 자기 뿌리를 보지 못하는 겁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나에게 뿌리가 있다는 거를 전제하고 들어가야 믿어지는 거지 믿지 않으니까 거기에서 달리 나가는 거죠.
그러고 싹이나 이파리가 제 뿌리는 생각 안 하고 무명에 가려서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싹이 자기라고 하고 이파리가 자기라고 하는 겁니다. 싹이 자기라고 그럴 때는 그게 아상이죠. 자기 뿌리를 모르니까 이파리가 빳빳해져서 나라는 존재를 세우니까 거기에는 아상이니 인상이니 중생상이니 수자상이니 거기 다 붙는 거죠. 싹은 뿌리로 인해서 생긴 거니까 싹은 뿌리에다 전부 일임을 해서 믿고 맡기고 피어만 있어라 이겁니다. 원동력이 뿌리가 되는 거니까요.
그와 같이 우리도 싹이 자기라고 하는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자기를 세우는 거죠. 그러나 자기를 세울 게 아니라 항상 싹은 뿌리로 인해서 있다는 인식을 중간에서 한다면…. 그래서 ‘계향’ ‘정향’ ‘혜향’을 말했습니다. ‘계향’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인 상식과 기본적인 계법에 의해서 모든 것을 정돈하고, 즉 말하자면 부작위한 일을 이루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나쁜 일을 한다는 것도 알고 좋은 일을 한다는 것도 다 알기 때문에 자기 질서를 지킨다 이겁니다. 그래서 질서를 지키는 거를 한마디로 요약해서, 질서를 지키는 인간이 돼야 계법에 적응이 되거든요. 이것은 인간으로서 계법에 적응이 되니까 계향이라고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항상 내 마음이 정돈된 그 자체 중간에 정(靜)으로서 내가 한 중간을 가지고 있는 게 지금 마음을 내는 겁니다. 이리로 가느냐 저리로 가느냐 하는 나침반에 속해 있는 것이 바로 정입니다, 정에 들었느냐 하는 소립니다. 그러니까 우주를 전체 싸고도는 정에 들었느냐, 아니면 지금 생활하는 데에 그냥 우리가 사사로운 사량심으로써 내가 똑바로 산다, 인간으로서 거짓없이 내가 똑바로 산다는 정에 들었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를 끼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나툼으로써 어디다가 세울 수 없는 정이 되죠. 우주를 전체 싼 정이 돼 버리고…. 어떠한 개별적으로 자기가 생활하면서 살아나가는 정은 남한테 손가락질 받지 않고 고지식하게 아무 속임 없이 인간답게 사는 그러한 정이고, 우주를 싸고 있는 지혜를 낸다면 바로 그건 전체를 싸고 있는 그런 정이죠.
그러니까 모든 것을 관해 보고 관해 듣고 전체를 볼 수 있는 그런 정이라 이겁니다. 그러면 정이라고 하는 그 자체를 세웠다가 나중에는 그 자체도 세울 게 없더라 할 때 비로소 인제 타파가 되는 거죠. 전부 내가 되니까. 그래서 싹도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의 자체가 뿌리라면은 그 생각을 내는 거는 바로 중간에서 싹을 이끌어 가지고 가는, 생각 내는 데에 달려 있다. 싹을 잘 이끌어 가지고 가려면 바로 자기 뿌리를 생각을 해야 싹은 잘 소생될 수 있고 좀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다 하더라도 잘될 수가 있다, 바로 세울 수가 있다 이거죠.
그러니까 우리 마음이 같기 때문에, 저런 나무들도 생명이 있는 거기 때문에, 사람들 눈을 즐겁게 해주고 즐거운 마음을 갖게 해주는 어떠한 표본이기 때문에 나와 둘이 아니다 이겁니다. 나를 즐겁게 해주기 때문에 내가 즐겁기 위해서 또 거기다 거름을 주고 물을 줍니다. 그런데도 그게 어떻게 둘입니까? 모두가 둘이 아닙니다. 같이 살고 있는 겁니다. 서로가 서로를 먹여주고 입혀주고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면서 하나도 따로 떨어진 게 없이 지금 같이 걸어서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체가 없는 그 공(空)의 위치의 식(識)은 항상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죠. 그러니까 그것을 부처님이니 법신이니 화신이니 이런 걸로 표현을 한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도 다 누구나가 생활에서 모든 걸 몰락 일임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있기 때문에 주인이라고 했습니다. 주인이라는 그 자체도 공했기 때문에 ‘공’이요, 그래서 ‘주인공’이라고 한 거죠. 그러니까 주인이라는 자체가 공에서 나왔다가 공에서 사라지니 바로 전체가 주인공이 아니겠는가 하는 겁니다.
전체 속에 내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나가 아니다 이겁니다. 이것은 형성된 하나의 그림자인 것이죠. 그러니 이 그림자가 어떻게 살 수 있겠냐, 그저 쫓아다니는 거밖엔 안되니 당신이 다 알아서 하라고 하고 내밀었을 때 놔버리는 겁니다. 그것도 이름해서 공이라고 세워놓는 것뿐이죠. 그렇게 해서 몰락 다 놔버렸을 때 비로소 거기에서는 몸이 아프다거나 집안에 어떤 일을 계획을 세운다든가 할 때 모든 걸 거기에서 하고 있다는 거를 전제함으로써 그것은 함이 없이 한 겁니다. 자기가 공이기 때문에 생각도 공이요, 또 우리가 추구하고 들어가는 것도 공이요, 모두가 삼합이 다 공이 돼버리고 마는 거죠.
그러니까 자기가 무엇을 잘 하고 있다고 하는 그 생각부터 내려놓아야 해요. 모두가 한 마당의 공이기 때문에 자기라고 국한 지어서 생각하는 건 아상만 커지는 겁니다. 그러니 일체를 다 내려놓고 둥글려서 한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