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나무 묻으며‘좋은세상’ 염원
전쟁은 지옥중생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래서 전쟁은 지옥의 풍경을 연출한다. 오랫동안 지옥 세상에 본적을 두고 살아 아수라(阿修羅)의 습성이 몸에 밴 사람들이 수시로 이 세상에 출몰하며 파괴와 살상을 일삼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화해와 용서의 언어가 없으며, 오직 ‘충격과 공포’의 무기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편가르기와 패싸움에만 능숙할 뿐이며, 총구와 포신의 방향만이 역사를 개척하는 이정표인 것이다. 인간 세상 어딘들 전쟁의 그을음이 없으랴만 또 다시 사막의 모래알들이 피로 물을 들이니 거기에 대물림하는 증오와 분노의 씨앗들이 안타까운 것이다.
당진 땅 안국사 터는 그저 편안한 곳이다. 작아서 좋고, 절이 아닌 절터라서 좋다. 안국사터에 가면 이미 전쟁의 그을음은 지워지고, 할미꽃 꽃다지가 그 자리를 대신한다. 안국사 터에 가면 ‘탕약(湯藥)’ 냄새가 난다. 향화(香火)가 끊긴 대신 탕약으로 나라와 민생들의 통증을 달래주는 것이다. 오천년이면 이 나라의 역사도 늙었다. 나무로 치면 노송쯤 되며, 바위로 치면 첩첩 이끼를 거적 삼아 두른 너럭바위쯤 될 것이다. 보약을 먹을 때도 된 것이다. 전쟁도 겪을 만큼 겪었기에 용포를 두른 사람이라면 구국도생(救國度生)의 요령도 알 것이고, 겁탈과 굴종의 수모도 당할 만큼 당했기에 이 땅의 백성들이라면 말발굽 소리만 들려도 베개를 높이는 법쯤은 알 것이다.
안국사 터에는 매향비(埋香碑)가 있다. 조상들의 타임 캡슐인 ‘침향(沈香)’을 묻었다는 매향에 관한 기록이 빛바랜 세월 속에서도 진한 관솔 향내를 품기고 있는 것이다. 안국사 터 매향비는 거대한 몸집의 범선(帆船)처럼 생긴 ‘배바위’이다. 어떻게 세월의 풍랑에 떠밀려 여기까지 왔는지, 조그만 절 터에는 어울리지 않는 큰 몸집이다. 이 배바위에는 뱃머리와 꼬리 부분에 음각의 글씨들이 줄을 맞추고 있다. “경오년(庚午年) 2월에 북쪽 ‘천구’라고 하는 포구 동쪽에 향을 묻었으며 화주승과 주민들의 힘으로 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경오년의 가장 최근은 1990년이므로 그로부터 60년 전씩 몇 번의 갑자를 거스른 어느 해 경오년에 이 비를 세웠을 것이다.
매향비는 미륵이 이 땅에 내려와 극락을 이루어 주길 기원하면서 향을 묻고 빌었다는 미륵신앙의 산물이다. ‘미륵하생 신앙’은 곧 변혁의 세상을 꿈꾸는 것이기에 매향비를 세우는 일은 비밀결사처럼 은밀하게 추진되었을 것이다. 매향비는 이 곳 안국사지 뿐 아니라 당진에서 조금 떨어진 해미에서도 발견되었고, 고창 선운사, 영광의 법성포와 영암 엄길리, 해남 맹진, 장흥 삼십포, 신안 암태도, 금강산 삼일포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향은 신에게 바치는 으뜸의 공물이다. 향의 종교이기도 한 불교에서 ‘침향’의 존재는 ‘향 문화’상징하는 꽃인 것이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개펄에 참나무 또는 향나무를 묻어두면 천년의 세월을 거쳐 단단하게 응고된다. 침향이 된 향나무는 강철처럼 단단해서 두드리면 쇳소리가 난다고 한다. 구효서는 <나무남자의 아내>에서 침향에 관해 미당의 안목을 빌렸다. 미당(서정주)은 침향을 가리켜 ‘물속에서 몇 백년을 묵었다가 떠 오른 참나무를 말린 것’이라 하였다. ‘물도 그냥 물이 아니라, 동쪽 노령산맥에서 흘러내리는 육수(陸水)와 산협 사이를 10여리 거슬러 올라오는 황해 조류가 서로 만나 합수가 되는 장수강(長水江)이란 곳에 묻혀있던 것’이라고 한다. 미당은 그 냄새를 일컬어 ‘실파와 생강과 미나리와 새빨간 동백꽃, 거기에 바다 복지느러미의 냄새를 합친 듯한 미묘한 향내’라고 하였다.
한국불교의 침향처럼 여겨지는 안국사 터는 작고 소담하지만 눈여겨볼수록 향내 나는 것들이 많다. 절 터 중턱에 위치한 삼존불 입상은 보물 제 100호로 월악산 미륵대원지의 미륵대불 입상을 닮았다. 방형의 보관을 쓴 본존불은 아미타불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을 하였는데, 손가락은 굵고 입은 작으며 코는 마멸되었으나 예의 ‘충청인의 미소’를 머금고 있다. 좌우 협시보살은 조각 수법은 본존불을 닮았으나, 오른쪽 보살은 무릎 아래가 땅 속에 묻혔고, 왼쪽 보살은 얼굴의 절반 이상이 파손된 상태이나 오종종한 모습들이 조금도 불편한 기색이 없다.
보물 제101호인 안국사지 오층석탑은 돌로 쌓은 2단의 축대 중 아랫단에 위치하고 있다. 석탑 역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몸돌이 틀어지고 하대석이 주저앉은 듯하나 소박한 솜씨를 그대로 간직한 아담한 몸매는 전형적인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석탑 옆으로는 절 터를 돌보는 듯한 암자 같은 민가가 한 채 있는데, 절 터에 진동하는 탕약 냄새의 진원지는 바로 이 곳이다. 안국사 터에는 탕약재 뿐 아니라 1백여 개에 달하는 항아리들이 절 터를 꽉 채우고 있다. 항아리들은 이 절에 머물던 대중들의 빈자리를 메우려는 듯 어떤 것은 포대화상으로, 어떤 것은 동자승 모습으로 불쑥 내민 복장(腹藏)마다 된장 고추장을 담고 민중들의 양식이 될 날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나라 백성들에게 폐허가 된 이후에도 보약을 먹여 정신 차리게 하고, 된장을 달여 살찌우고 싶은 것이 안국사지의 바람인 셈이다.
살펴보면 안국사지 주변은 누군가에 의해 계획적으로 유원지로 다듬어지고 있는 듯하다. 절 터 뒷 기슭에 수없이 잘려나간 소나무 그루터기와, 근래에 새로 지은 듯한 대나무 울타리의 ‘토굴’ 한 채가 그렇게 보인다. 출입금지 팻말을 걸고, 사립문을 닫은 토굴 안에는 어느 눈 푸른 납자가 면벽을 하고 있는지 인기척을 하여도 반응이 없다. 안국사 터에는 엄나무가 눈에 띈다. 엄나무는 한약재로 쓰일 뿐 더러 무속에서는 귀신을 막는 주술적인 도구로도 쓰인다. 이 땅은 수많은 전쟁을 치러 왔기에 온갖 귀신, 도깨비들을 물리치기 위해 온 몸에 가시가 돋친 엄나무들이 자생하는 것이다.
초등학생들의 소풍지로 적당한 안국사 터가 술 냄새, 화장품 냄새로 뒤범벅된 관광지로 전락하는 것은 곤란하다. 언제나 찾아가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고, 나라의 고마움과 불가의 넉넉함을 깨닫는 절 터, 안국사지는 안국사지로 남는 것이 옳다.
<시인·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
다음은 부여 정림사지 편
사진=고영배 기자
안국사터 가는길
안국사 터는 당진군 정미면 수당리에 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이용, 서산·당진IC에서 내려 당진에서 32번 국도로 서산방향 7.9㎞를 가면 안국사 표지판이 나온다. 안국사 터는 수당리 네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저수지를 끼고 골짜기 안으로 올라가면 오른쪽 산 밑에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