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8.19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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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3)백제의 웅혼한 기상
백제 미술하면 우아함을 떠올린다. 백제의 기와나 불상에서 그러한 특징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아함에는 아담하고 온화한 이미지가 깔려 있다. 그런데 최근에 발굴이 끝난 미륵사지와 몇 년 전에 발견된 백제금동향로를 보면 우아함만으로 백제 미술 전체를 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미륵사지에서 보이는 웅대함과 금동향로에서 보이는 섬세함은 백제미술의 스케일과 디테일에 대하여 다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미륵사는 삼국의 사찰을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사찰이다. 신라 황룡사의 2배에 가까운 면적이고, 정릉사도 전체면적은 미륵사보다 넓지만 고구려 때의 사역은 그보다 작다. 평야지대인 익산에서, 우뚝 솟은 약 430m의 용화산을 배경으로 하기에 더욱 그 위용이 웅장하게 느껴진다. 산에 의지하여 넓은 전망을 갖도록 하는 사찰의 배치는 우리 나라 사찰에서 가장 널리 애용되는 방식이다. 과연 이렇게 거대한 사찰을 당시 수도인 부여가 아니고 익산에 세운 까닭은 무엇인가? 수도를 부여에서 익산으로 옮기기 위한 조처라는 천도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밖에 신라를 대응하기 위해 건립했다는 주장과 전라남도 지역민을 통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세웠다는 의견 등이 제시되고 있다.
이 대규모의 프로젝트는 의외로 백제의 마동과 신라의 선화공주 사이의 국경을 넘는 사랑에서 비롯된다. 마를 캐어 파는 마동은 신라의 선화공주와 혼인하기 위해 신라에 가서 서동요를 퍼트려 선화공주를 백제로 쫓겨나게 한다. 마동은 선화공주가 가져온 금을 보고는 자신이 마를 캔 곳에 쌓아둔 돌이 귀중한 황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 일로 말미암아 마동은 마침내 임금에 오르게 되니 그가 바로 백제의 30대 임금인 무왕인 것이다. 무왕은 부인이 된 선화공주와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는 도중 용화산 밑의 큰 못에서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난 것을 보고 이곳에 큰 절을 세우기로 하였다. 이 절은 미륵삼회(彌勒三會)를 모방하여 전과 탑과 회랑을 각각 세 곳에 세웠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 이상이 미륵사 창건에 대한 <삼국유사>의 내용이다.
설화에 나타나듯이 이 사찰은 무엇보다도 미륵삼회〔龍華三會〕라는 불교신앙을 건축으로 체계화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발굴 결과 미륵사는 금당과 탑과 회랑을 한 세트로 3개를 배치한, 3원(院)식 배치임이 밝혀져 <삼국유사>의 기록을 그대로 입증했다. 가운데 중원은 좌우의 서원과 동원과 크기와 재료로써 구분하였다. 즉 중원의 금당은 2층, 서원과 동원의 금당은 1층 건물이며, 중원의 탑은 목탑, 서원과 동원은 석탑을 세웠다. 이러한 위계적인 구분 속에서 중원은 회랑으로 둘러싸고 동원과 서원은 뒤에 위치한 강당의 공간과 연결시킴으로써 위계적 구분과 더불어 연결의 조화를 꾀하였다. 3원의 짜임새는 1원 안에 1탑 3금당을 세운 고구려나 신라의 배치와는 다른, 백제만의 독특한 공간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경주대 문화재학부
2003-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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