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4.1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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틱낫한 스님 통해 한국불교 읽기
진철
전 마곡사 주지

농촌 어귀에 작은 집을 짓고 들어온 지 3년째다. 사람 만나는 일을 줄이고 ‘나’를 만나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생각에 들어 온 토굴이다. 내 나름대로 정한 규칙에 따라 정진하고 먹고 자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싫다고 극구 사양했건만 어떤 사람이 방 문 위에 ‘두산선실(斗山禪室)’이란 현판을 걸어 주어 꼼짝없이 내가 정한 규칙이나마 지키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분명한 구속이다. 어느 정도의 구속도 없이 살 수는 없다. 다만 스스로 구속되는 구속이 있고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이 부릴 수 있는 구속이 있다.
지금 한국에 와서 ‘걷기명상’과 ‘화’를 잠재우는 강연으로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틱낫한 스님은 외부로부터 혹은 내부로부터 쳐들어오는 구속을 조용히 잠재우고 스스로 평화로워 지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생명의 존엄과 인류의 평화, 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가르침을 펼치며 전국을 누비고 있는 그의 행보는 연일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나는 한 수행자로서 그의 행보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 그와 동시에 한국 땅에 사는 승려로서 느끼는 일련의 자괴감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는 수없이 많은 고승대덕들이 있고 1600년의 긴 역사를 거쳐 다져진 값진 수행전통이 있다. 그런데 환경, 전쟁, 북핵 등이 초미의 관심으로 떠오른 이 시점에서 틱낫한 스님은 이 땅에 거대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데 한국의 고승대덕들은 왜 침묵하고 있는가?
큰스님들이 황금 같은 침묵으로 토해내는 ‘무언의 설법’을 듣지 못하는 대중의 우매함을 아쉬워해야 할까? 그렇다면 ‘화’ 내지 않는 평화로움을 얘기하는 저 이방의 수행자에게 쏠리는 눈과 귀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땅에도 큰스님은 참으로 많이 계신다. 다만 큰 스님들의 큰 가르침을 대중 속으로 전하는 기술이 부족하다. 표현력 부족이라는 현실을 나는 틱낫한 스님을 통해 너무나 명료하게 읽었다. 그것은 우리 한국불교의 세계화를 위한 당면 과제이기도 하다.
한국불교가 무엇보다 먼저 극복해야 할 문제는 언어의 벽이다. 언제까지 한자의 난해함에 갇혀 있어야 하고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도외시할 것인가?
우리들의 큰스님이 전하는 훌륭한 가르침들을 쉬운 일상 언어로 풀어 세계인이 함께 읽고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마,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건 “한국 스님에게 이렇게 아름다운 가르침을 배웠다”고 감동하며 한국 스님 초청하기에 바쁠 것이다. 그리고 각국 유수의 출판사들이 한국 스님들의 책을 펴내어 돈도 벌고 정신문화 고양도 하려는 기획을 할 것이다. 외국 출판사의 초청을 받은 한국 스님은 강연(한국의 스님들은 무료강연이 아니면 나설 수 없다는 보살심을 분명하게 보여 줄 것이다) 때마다 “한국불교의 전통 수행법이야말로 인류를 구하는 가장 완벽한 길”임을 역설할 것이다. 그리고 걷지 않고 조용히 앉아 화두를 참구하는 참선 수행을 가르칠 것이다.
수행공동체란 개념은 이미 부처님 당시부터 있었고 한국불교도 어느 나라 못지않게 착실히 그 기능을 유지하고 있다. 틱닛한 스님이 이끄는 플럼 빌리지와 우리의 승가공동체 또한 다를 것이 없다.
한국불교는 말로만 세계화를 떠들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인재불사와 구체적인 전략을 통해 세계화로 향한 문을 열어야 한다. 틱낫한 스님의 방한은 국민대중에게 마음공부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고 나 같은 사람에게는 우리 종단의 지향점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였다.
2003-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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