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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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것 작은 것 가릴 사이 없으니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한자리를 하였습니다. 여러분과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서 서로 도반으로서 토론도 하고 질문도 하지만, 여러분이 질문을 해도 한 사이가 없고 내가 대답을 해도 대답한 사이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는 도리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달에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다시 얘기해서 그 어떤 것도 다 그렇지만 특히 말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습니다. 하긴 했으나 자취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 소리가 난 것은 마치 귀신 방귀와도 같다고 하는 겁니다. 분명히 내가 방귀를 뀌긴 뀌었는데 온데간데가 없습니다. 말이란 그와 같습니다. 내가 말을 하면 여러분이 듣고 여러분이 말을 하면 내가 들었을 뿐, 이 법당 안 어디에도 남은 자취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분명히 여러분이 먹었고 내가 먹었을 뿐입니다.
그것은 마치 여러분한테 내가 살구 한 개씩을 드렸는데 그것을 여러분이 먹으면 없어지듯이, 또 반대로 여러분이 나에게 준 살구를 내가 먹어 버린다면 그 살구가 없어지듯이, 그와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이 질문을 하여도 질문한 사이가 없고, 내가 들어도 들은 사이가 없고, 말을 해도 말한 사이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서는, ‘내가 질문을 했다, 내가 질문할 것은 이러한 것이다’ 하는 데 신경 쓰지 마시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대로 자연스럽게 질문을 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의 얘기를 들어보면, ‘이런 내용은 하찮은 질문일 텐데 어떻게 질문을 하나?’ 하고 망설인다든지, 또 어떤 분들은 ‘아니야, 이러한 질문 자체가 바로 분별심이고 망상이야!’ 하고 속단하고 그대로 주저앉고 마는데 그러지 마시라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그야말로 천금 만금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이 세상을 다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그런 막중한 공부를 하는 마당에서 작은 것 큰 것 가릴 사이가 없습니다. 닥치는 대로 뚫고 나가야 하고,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고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작은 것이 오면 작은 대로, 큰 것이 오면 큰 대로 먹어치우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와 같이 하기 위해서는 작다 크다 하는 분별을 몰록 놓고 나갈 때, 어떠한 큰 것이 와도 다 먹어치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크다는 생각도 없어야 비로소 그것도 먹어치울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렇다 저렇다, 옳다 그르다, 유다 무다 하는 양면을 몽땅 놓으라는, 즉 먹어치워 버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려면 모든 분별을 놓고 일체를 둘로 보지 않아야만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또, 여러분은 툭하면 분별이니 망상이니 하면서 분별을 끊어야 한다 망상을 버려야 한다고 하는데, 끊지 못하고 버리지 못해 애쓰는데 그것이 그렇게 끊자고 해서 끊어지고 버리자고 해서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끊으려고 하면 더 일어나고, 버리려고 하면 더 달라붙습니다.
분별이다 망상이다 하지만 그것이 본래 공해서 따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자기 마음에서 지은 환인 줄 깊이 안다면, 그대로 녹아버리고 말 것을, 실체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끊으려 애를 쓰고 버리려 애를 쓴다면, 오히려 그것이 다시 분별심이 되고 망상심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분별이다 망상이다 하고 걱정할 것도 없고 겁낼 것도 없습니다. 분별은 바로 우리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밑거름으로써 구름 같기도 하고 우리 마음을 진화시키는 촉진제가 되는 것입니다. 분별이 일어남으로 인해서 오히려 마음의 지혜가 밝아지고 넓어질 수도 있고 부처를 이룰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생각 자체를 겁을 내며 생각나는 건 모두 분별이며 망상이라고 생각하시니까, 오히려 그 생각에 걸려서 망상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항상 생각나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르게 내셔야 합니다. 모두가 다 생각에 의해서 상천세계로 올라가기도 하고 하천세계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생각을 바르게 낸다는 것은 어떠한 입장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어떠한 생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에 휩쓸리지 말고, 주인공을 진실히 믿고 거기에다 일체를 맡겨 놓아서 한번 돌리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그리하면 샘물이 솟아나듯이 밝은 지혜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오는 지혜가 바른 생각입니다. 이와 같이 해 나간다면 여러분의 바른 생각에 의해서 자기 몸 속의 수많은 세포의 중생들도 다 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바른 생각을 낼 수 있도록 오로지 마음공부를 열심히 하심으로써, 지킨다는 생각도 없이 질서와 계율도 지키게 되고, 사랑과 의리, 도의 그리고 시간도 지키게 되는 실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그런 가운데 스스로 자유권을 얻게 되어 모두가 자유스럽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얘기하지만, 바다에 가 보십시오. 바다는 맑은 호수처럼 조용하다가도 집채만한 파도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닷물과 파도가 다르지 않습니다. 바람이 일면 파도가 일어나고 바람이 잠잠해지면 바다는 그냥 조용해집니다. 바닷물이든 파도이든 한 바다요, 다 같은 물입니다. 그 물은 파도도 될 수 있고 때로는 얼음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젖는 것은 다 똑같습니다. 이처럼 바닷물의 여러 모습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요 그리고 진리와 도의 모습과 같은 것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마치 바람이 자면 바다가 조용하듯이 마음이 조용해지면 망상이 가라앉았다고 하고, 바람이 일면 파도가 일듯이 마음이 산란하면 망상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정말 그와 같이 생각하신다면 일상생활 속에서 참선을 어떻게 해 나가시렵니까? 바다와 파도의 근본이 둘이 아니듯, 본래 망상과 보리도 둘이 아니므로 망상이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그것을 분별하지 않고 모두 놓아버려야만 진정 나도 없고, 분별 망상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분별을 다 놓고, 놓는다는 것마저도 다 놓고 푹 쉬지 못한다면, 일일이 모든 것에 끄달리게 되어서 보는 대로 분별이고, 보는 대로 망상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본래는 쉬는 것도 없고 망상이 일어남도 없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도대체 망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무엇이며 가라앉는다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그것이 다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항상 말씀드립니다만 여러분 각자가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더라면 고도 없고 멸도 없고, 세상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온 그 자체가 바로 태초입니다. 내 몸이 나온 이 자체가 바로 화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도 걸리지 말고 미래에도 걸리지 말고, 즉 과거도 놓고 미래도 놓고, 오로지 영원의 오늘 지금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의 소리에 따라 이쪽으로 치우치지도 말고 저쪽으로 치우치지도 마세요. 모든 일체가 다 같이 공생 공용 공식하는 한마음의 나툼이기 때문입니다. 한마음은 개별적으로 따로따로 있는 그런 마음이 아니라 포괄적이며 전체적인, 그러면서도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다 같이 하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한마음이기 때문에 손가락을 하나 들어도 일체가 다 같이 들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도리를 진실히 믿고 그대로 해 나가는 실천궁행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분별하고 고집하고 그런다면, 언제 여러분이 바로 보고, 바로 생각하고 실천궁행하는 그러한 무심법행을 할 수 있겠으며, 또 언제 여러분이 인간 세상 이 통 속에 갇혀 사는 그런 노예의 삶이 아니라 통 밖에서 통의 주인으로서 당당하게 통을 굴리며 사는 참다운 자유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야 됩니다.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참다운 자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밖으로 쏠리는 모든 분별을 놓고 쉬어서, 무심이 되어 참다운 본심에 계합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무심을 종으로 삼아 불심을 닦아 나가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무심의 행을 여여하게 할 수 있다면 그대로 살아서 열반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보아도 본 바가 없고, 들어도 들은 바가 없고, 해도 한 바가 없는 무심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든지 보는 대로, 듣는 대로, 하는 대로, 본 바가 있고 들은 바가 있고 한 바가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분별과 집착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게도 되고 병고에 시달리게도 되고, 그래서 하다 못해 부적도 갖다 붙이고 온통 그렇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미신 짓을 하지 않는다면 미신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올라가는 것도 여러분 마음이요 내려가는 것도 여러분 마음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르게 내라, 마음을 바르게 쓰라고 하는 겁니다. 오직 여러분 마음의 주인공을 믿고, 모든 것을 다 주인공에 맡겨 놓고 무심법행으로 생활해 나가는 이것이 도에 이르는 길입니다.
옛날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나도 예전에 어느 큰스님께 들었습니다. 아마 조선시대 광해군 시절인가 봅니다. 어느 마을에 김진사 댁이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삼대째 독자로 내려왔는데, 그만 김진사 대에 와서는 나이 50이 넘도록 아들을 두지 못하여 대마저 끊기게 될 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부인이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러 다니는데 안 다닌 절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인이 어느 절에를 가니까, 그 절에 계신 큰스님께서 그 부인에게 하시는 말씀이 “여지껏 절에를 다녔어도 다닌 사이가 없고, 불공을 드렸어도 드린 사이가 없느니라. 그러니 오늘부터는 진짜 불공을 드리도록 하여라! 일체가 다 거기에서 나온 것이니까 일체를 다 거기에다 맡겨 놓아라! 생남을 못한 것도 손이 끊긴 것도 다 거기에서 나온 것이니 그것도 거기에다 추구해야지 다른 데에다 추구해서는 안 되느니라. 이것이 진짜로 불공을 드리는 법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많은 이익은 물론 원하는 득남도 하게 될 것이니라.”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 자력신앙으로 나가야 진짜 불공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그 스님께서 다시 하시는 말씀이, “먼 데 밖으로 찾아다니지 말라! 법당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니라. 절의 법당이든 네 집 안방이든 마당이든 변소 안이든 네가 있는 그 곳이 바로 대법당이니라.” 이러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은 그 부인은 얼른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큰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인 만큼 그대로 진실히 믿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얼마 안 있다가 바로 임신이 되었습니다. 여기 오시는 신도님들 중에도 이와 같은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모두 자력신앙으로 진실히 믿고 행을 한 덕분입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부인이 해산을 하였는데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늦게 본 자식이라 불면 꺼질세라 아주 귀하게 키우는데 어느덧 그 아이가 열살이 가까워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아이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는 겁니다. 통 먹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옴짝달싹도 하지 않는 것이 다 죽게 생겼습니다. 그러니 김진사 부부는 물론 집안이 온통 난리가 났으나 속수무책입니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어느 날, 탁발 나온 어느 스님이 이 집 문 밖에 서서 목탁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집안에 있던 이 집의 머슴이 화를 내면서, “우리 도련님이 지금 다 돌아가시게 생겼는데 남의 사정도 모르고 밖에서 목탁 치는 저 놈은 어떤 놈이냐?” 하고 소리를 치면서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러나 탁발 나온 그 스님은 머슴한테 코가 땅에 닿도록 공손히 절을 하면서, “안녕하십니까?” 그러는 겁니다.
그러자 이 머슴이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까 여지껏 평생을 살아 왔어도 그렇게 존대를 받아 본 예가 없었던지라 눈물이 나도록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지금까지는 사람 대접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받아보니 그만 감격하여 그 자리에 펄썩 주저앉으며 스님께 엎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스님 같으신 분이 어디 또 계시겠습니까? 저는 이 날까지 한번도, 하다 못해 애들한테까지도 존대를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늙도록.”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머슴은 혹시 스님이시라면 이름 모를 병에 죽어 가는 우리 도련님을 낫게 해 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자초지종을 주인 마님께 고했습니다. 그러자 두 부부가 버선발로 뛰어나와 스님께 매달립니다. 그러니까 그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약 이 아이가 병이 낫는다면 나에게 주시겠습니까? 이 아이는 부처님께서 나라를 구하게 하기 위해서 당신한테 주셨던 것입니다. 만약 이를 응낙하셔서 아이의 병이 낫게 되면 닷새 후에 데리러 다시 오겠습니다.” 그러나 두 부부는 너무나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어떻게 해서 낳은 아들인데 스님께 드린다니 그러면 우리 대는 영영 끊어지는 것 아닌가?’ 하고 걱정이 태산 같아집니다.
그런데 아이의 어머니가 하는 말이, “제가 임신하기 전에 태몽을 꾸었는데 그 때 어느 스님께서 조그만 명경을 저에게 주시면서 깨끗이 닦아 소중하게 간직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항상 이 아이가 부처님께서 주신 아이임에 틀림없다고 믿어 왔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스님께서 오셔서 같은 말씀을 하시니 이 아이가 저의 태몽과 꼭 들어맞는 바가 있습니다. 그러하니 이 아이가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부처님께 드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당신께서도 주저하지 마시고 허락하십시오.” 그러니까 김진사는 마침내 쾌히 응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더니 얼마 안 있다가 아이가 숨을 돌리면서 깨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삼일 후에는 정말 거짓말처럼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닷새가 지나니 정말로 그 스님이 다시 오셔서 아이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러고는 세월이 한참 흘렀습니다. 그 도령은 키도 크고 체구도 장대하게 커서 벽암이라는 법명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본래 도령은 아이 적에 각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스님에 의해서 살아나 벽암이라는 행자로서 스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나무도 하고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면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벽암 행자는 글공부를 하고 싶으나 스님께서는 웬지 글공부는 하나도 안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가끔씩 칼이나 활을 쓰는 무술을 연마시켰습니다. 벽암 행자는 무척 속이 상하지만 그래도 무슨 이유가 있겠지 하고 스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착실히 따랐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10여 년, 그때부터서야 스님께서는 벽암 행자에게 글공부도 좀 가르치면서 여러 가지 좋은 말씀도 해주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어느 날, 벽암 행자의 나이가 스무 살이 가까웠을 때, 하루는 스님께서 부르시더니, 금강경과 화엄경 그리고 법화경을 내 놓으시면서 그 날부터 사흘 저녁을 계속하여 설하시었습니다. 처음에 벽암 행자는 그 뜻이 가슴에 잘 와 닿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흘 밤낮을 차례로 세권의 경전을 다 읽어서 그 이치를 알게 되니까 정말 떳떳하게 되더랍니다. 그런데 그 사흘을 지내고 나니 스님께서는 그만 열반을 하셨습니다. 벽암 행자는 너무나 슬퍼 엉엉 울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노스님 한 분이 오시더니, “지금 우리나라가 위태롭다. 오랑캐가 쳐들어와서 백성이 위태롭고 나라가 풍지박산이 나게 되었으니 내려가 보도록 하여라. 너는 무술도 배우고 활 쏘는 것도 배웠으니 내려가서 나라를 건지는 데 너의 모든 것을 다 바치도록 하여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벽암 스님은 한양으로 들어갔습니다. 마침 한양에서는 곧 전국무술대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벽암 스님도 거기에 참가를 하였습니다, 과연 벽암 스님의 무술 솜씨는 훌륭하여 계속 이기고 마지막으로 만난 상대와는 진짜 칼을 들고 생사를 걸고 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상대방은 변장하고 출전한 오랑캐의 장군으로서, 장차 이 나라를 침범하기 위해, 이 나라에서 무술을 잘하는 사람을 미리 없애려고 무술대회에 출전하였기 때문에 상대방인 벽암 스님을 죽이려고 진짜 칼을 들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둘이 대치하여 서로 노려보는데, 벽암 스님은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벽암 스님의 노려보는 눈빛이 그냥 오랑캐 장군의 살로 파고드는 것 같았습니다. 고수들은 벌써 칼을 들고 서 있어 보면 상대방의 검술의 정도가 감지되는 법입니다. 오랑캐 장군은 차마 벽암 스님의 시선의 빛을 그대로 쳐다볼 수가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검을 잡은 팔이 떨려옵니다.
마침내 오랑캐 장군은 더 버티지를 못하고 검을 땅에 떨어뜨린 채 도망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벽암 스님은 한칼에 상대방을 쓰러뜨릴 수도 있었지만 도망가는 상대방을 그대로 살려주었습니다. 이것으로 벽암 스님은 전국무술시합에서 장원으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장원으로 뽑힌 벽암 스님은 광해군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광해군에게 머지않아 오랑캐의 침범이 있을 것 같으니 성도 쌓고 군대 무술훈련도 해야 된다고 허락하여 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은 “지금 이렇게 평화스러운데 성은 무엇 하러 쌓으며 또 오랑캐가 무엇 때문에 쳐들어오겠는가? 그러니 무술이고 훈련이고 할 필요가 없다.” 하고 벽암 스님의 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벽암 스님이 산에서 내려온 것이 장차 일어날 나라의 위난을 구해 보고자 함에 있었는데, 나라의 임금이 이를 허락하지 않으니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다고 생각한 벽암 스님은 이것도 저것도 다 버리고 멀리 산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또 어느 스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불심을 무심종으로 삼지 못하였기에 무심법행으로서 행을 하지 못했느리라. 그것은 아직도 분별심을 놓지 못했고, 그리고 너 자신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니라. 그러니 이 말을 명심해서, 지금이라도 빨리 다시 내려가 나라를 구하도록 하여라.”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벽암 스님은 다시 한양으로 내려갔습니다. 한양으로 들어가니, 이 때는 시대가 바뀌어 광해군은 내쫓기고 인조대왕이 벽암 스님에게 전의 관직을 다시 주면서 빨리 성도 쌓고 훈련도 시키라는 허락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3년 동안 성을 쌓은 것이 지금의 남한산성으로, 나중에 위난이 닥쳤을 때 그곳으로 인조대왕이 급히 피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의 왕실 가족은 미처 피난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랑캐는 남한산성을 다 에워싸고 금방이라도 성을 넘어올 듯 기세가 등등하니 모든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이 때 벽암 스님은 혼자 생각을 하였습니다. ‘내가 먼저 말을 타고 나가 싸운다면 모든 병사들의 사기가 새로 살아날 것이다.’ 이와 같이 결심을 한 벽암 스님은 혼자 말을 타고 쏜살같이 적진을 향해 달려나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적진 앞에는 한 장수가 버티고 서 있는데 벽암스님이 칼을 들고 막 달려들어도 마주 싸울 태세를 취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스님!” 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벽암 스님께서도 말을 멈추고 적장을 똑바로 쳐다보니, 적장이 벽암 스님께 하는 말이, “나는 죽을 것인데 스님께서 나의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스님은 내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군사를 다 데리고 떠나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적장은 바로 벽암 스님이 전국 무술대회에 참가했을 때, 마지막으로 생사를 걸고 싸웠던 그 오랑캐 장군이었습니다. 정말 그는 약속대로 자기의 군사들을 다 철수시키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가 떠나고 난 뒤에 들으니까, 임금의 일가족뿐만이 아니라 너무나도 많은 백성들이 붙들려갔음을 알았습니다. 여기에서 그만 벽암 스님은 한 생각이 탁 떠올랐습니다.
‘아하! 그 때 그 스님께서 불심을 무심종으로 삼고 무심법행을 해야 많은 백성을 건질 수 있다고 하셨는데, 아! 나는 얼마나 옹졸하였는가? 겨우 보이는 성이나 쌓을 줄 알고 보이는 적이나 물리칠 줄 알았지 않았는가? 왜 무심법행으로써 보이지 않는 성을 미리 쌓아서 침범을 미리 막지 못했으며, 또 침범하여 왔으면 더 많은 백성들이 끌려가지 않도록 미리 무심법행을 하지 못하는가? 그 때 그 스님께서 분명히 불심을 무심종으로 삼아라 그러셨거늘. 내가 그 때에는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닿지를 못하였었구나.
그때 스님께서 나에게 당부하시지 않았던가? ‘네가 무심종으로 무심법행을 밀고 나간다면 모든 백성을 건지고, 나라를 건지고, 그리고 많은 중생들에게 전부 불씨를 심어줄 수 있느니라. 네가 그와 같이 해 나간다면 반드시 모든 마무리가 잘 될 것이니라. 그러나 그와 같이 하지 못한다면 회향을 깨끗이 하지 못할 것이니라.’ 하고 말씀하신 그것을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구나.’ 하고 벽암스님은 또 자기 가슴을 치면서 ‘결코 모든 법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닌 것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을 그랬구나. 아하! 이 일을 어쩌나? 임금과 내가 둘이 아니요, 백성과 내가 둘이 아니요, 오랑캐와 내가 둘이 아닌 것을, 아직도 임금을 임금으로 보고, 백성을 백성으로 보고, 오랑캐를 오랑캐로만 보고, 나를 나로만 본 내가 잘못이었구나. 그 때 스님께서 모든 분별을 놓고 너 자신을 버리고 무심법을 실천궁행하라 하셨거늘 그 뜻을 왜 이토록 몰랐던고?’ 하고 뒤늦게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벽암 스님은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셨다고 합니다.
이 얘기는 옛날에 어느 큰스님으로부터 들은 것입니다마는 스님께서는 이 얘기를 마치시면서, “불심을 무심종으로 삼을 때 전 우주가 들리느니라! 그리고 무심법행을 할 때에, 전 우주와 우리가, 일체 만물 만생이 전부 같이 돌아가느니라. 그리고 무심행을 함이 없이 하게 될 때, 그대로 법이 되어 용도에 따라 그대로 이루어지느니라.” 하시면서 “문이 많아서 문이 없고, 문이 없어서 문 찾기 어려우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문이 많아서 문 찾기 어렵고, 문이 없어서 문 찾기 어려우니 이건 무슨 연고이냐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문일 수도 있고 공안일 수도 있고 화두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문이 없어서 문 찾기 어렵고, 문이 많아서 문 찾기 어려운 이 도리는 어인 연고입니까? 말씀 좀 하여 보십시오! 왜 대답이 없으십니까? 가만히 계시는 것도 훌륭한 대답이 될 수 있지만, 그러나 내 안이 확고히 선 후라야 비로소 그것이 당당하고 떳떳하게 주먹을 내밀 수 있는 그러한 이치가 되는 것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또 한가지 옛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다 잘 아시는 일화입니다. 백장 스님께서 설법하실 때마다 많은 대중들 뒤에 한 노인이 와 서 있는데, 하루는 설법이 다 끝나고 대중이 다 물러갔는데도 이 노인네는 가질 않고 그냥 서 있었습니다 백장 스님은 이상히 여겨, “저 노장은 왜 안 가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노인이 하는 말이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옛날에 이 절에 주지로 있었습니다. 그 때 어느 학인이 와서 저에게 묻기를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 하기에 저는 안 떨어진다고 했지요. 그런데 이 말 한마디를 잘못한 것 때문에 저는 이렇게 오백생 동안 여우의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청하건대 스님께서 저의 이 몸을 벗게 하여 주십시오, 하는 겁니다.
그러고는 다시 하는 말이, “제가 그대로 스님께 여쭐 터이니 스님께서 대답하여 주십시오.” 하고 똑같이 묻기를,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인과에 떨어집니까, 안 떨어집니까?” 그러니까 백장 스님이 “인과에 매이지 않느니라.” 하고 가르치자, 그 말에 크게 깨달은 노인이 하는 말이 “저는 이미 여우의 몸을 벗었습니다. 죽은 저의 몸은 뒷산에 있으니 바라옵건대 스님께서 스님들처럼 장례를 치러 주십시오.”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스님들께서 돌아가시면 하는 천도의식을 그대로 해 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백장 스님은 대중에게 고하여서 식후에 상을 차려 뒷산으로 가 바위 밑에서 죽은 여우를 끄집어내 가지고 의식을 하고 화장을 하였습니다. 저녁이 되어 백장 스님은 법당에 모든 대중 스님들을 모아 놓고는 사실대로 모든 인연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때에 대중 가운데에서 황벽 수좌가 일어나서 “고인이 그릇되게 대답하여 오백생 여우의 몸이 되었다면, 만약 그릇되게 대답하지 않았더라면 무엇이 되었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백장스님께서 “이리 가까이 오너라. 그대에게 가르쳐 주리라.” 하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황벽 수좌는 앞으로 나아가 별안간 백장 스님의 뺨을 한 대 후려갈겼습니다. 백장 스님께서 가르쳐 주기도 전에 선수를 친 것입니다.
그러나 백장 스님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박수를 치시며, “오랑캐의 수염은 붉다 하더니 과연 붉은 수염의 오랑캐가 있구나!” 하고 즐겁게 웃으셨답니다. 그러니까 중국에 붉은 꽃이 있다더니 그 붉은 꽃이 피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황벽 스님께서 스승의 뺨을 한 대 올려붙인 것을 백장 스님이 칭찬하였다고 해서, 요즈음 사람들이 스승도 몰라보고 은사도 몰라보고 법상도 막 둘러 메치고 하는 것이 잘 하는 것인 줄 안다면 큰 착각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답변할 수 있고 질문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께서 지금 들려드린 얘기를 한번 잘 참구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즉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인과에 안 떨어지느냐, 인과에 끄달리지 않느냐 하는 이 두가지가 다 관문이고 공안입니다. 그래서 문이 따로 없는 까닭에 전체가 다 문이라고 하는 겁니다.
또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과거 영산회상에서 부처님께서는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셨습니다. 이 때 모든 대중이 그 뜻을 몰라 묵묵히 있기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단 한 사람 가섭 존자만이 빙긋이 미소를 지어 웃었습니다. 이를 본 부처님께서는 ‘아! 백만 대중 가운데 오직 가섭 존자만이 나의 뜻을 알았구나’ 하셨습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어떤 뜻을 나타내 보이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관문이요 공안이요 화두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가섭도 없고 꽃도 없고 그 꽃을 든 분도 계시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과연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이것도 바로 두 번째 관문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나더러 무슨 말인지 어렵게만 말한다고 하실지 모르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번 깊이 참구해 보신다면 한량없는 공덕을 얻게 되실 것입니다. 말이란 것이 억지로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그릇 따라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그릇이 적으면 나도 그렇고, 여러분의 그릇이 크면 나도 크고, 여러분이 만약 바다라고 한다면 나도 깊은 바다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지금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무심으로서 행을 하고 계시는 분이 여러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와 같이 무심으로서 행을 해야 하는 그 도리를 모르고, 부처님께서 전하신 뜻을 이론이나 학설로만 안다면, 설사 팔만장경을 아무리 외로 꿰고 바로 꿴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아무런 공덕도 없고 부처님 제자가 될 자격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 가섭 존자가 대표가 되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결집할 때입니다. 이 때, 아난 존자는 아직 깨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결집하는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난 존자는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에 부처님 말씀을 제일 많이 듣고 기억하는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부처님 말씀을 결집하는 데 자격이 없다고 들어서지도 못하게 하였으니 얼마나 분통이 터졌겠습니까? 아난 존자가 아직 깨우치지 못하였으므로 아무리 총명하게 기억을 잘 하고 있다 하여도 부처님의 말씀을 결집하는 데에는 해당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무위법과 유위법을 같이 설하신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깨우치지 못하였다면 글자 하나를 써도 제대로 돌아가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섭 존자는, 무위 50%와 유위 50%가 맞먹어서 같이 돌아가면서 들려야 하는데, 아난은 한쪽 50%만 이해하고 있으니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아난 존자는 한 쪽밖에는 몰랐기 때문에, 어느 때 가섭 존자에게, “부처님께 금란가사를 받은 외에 또 다른 어떤 것을 받았습니까?” 하고 묻게 되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다 분별심을 놓지 못하니까 그러한 의문도 생기는 것입니다. 분별심을 다 놓는다면 자연히 알게 될 텐데, 금란가사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텐데, 분별심을 놓지 못하니까 그걸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원망이 생기고 그러는 겁니다.
하여튼 아난 존자는 그로부터 두문불출, 침식마저 다 전폐하고 오로지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바깥으로 끄달리지 않고 무조건 안으로만 자력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죽든 살든 모든 일체를, ‘나’라는 것마저도 다 놓고, ‘모든 것이 다 거기에서 나온 거니까 거기에서 해결을 해라. 난 지금 죽든지 살든지 모르겠다.’ 하고는 다 놓은 겁니다. 이와 같이 하니까 마침내 어느 날 밤, 터억 밝아졌습니다. 밝아지니까 아난 존자는 결집장소로 막 달려가 문을 두드리면서 경전 결집에 참여할 수 있도록 가섭존자에게 허락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가섭 존자는 기뻐하며, 그러나 이미 밤도 깊어 문을 열 수 없으니 그대가 들어오려면 문구멍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난 존자는 즉시 문구멍으로 들어가 가섭 존자에게 예배하니, 가섭 존자는 아난 존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 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와 같이 아난 존자가 결집에 참여하게 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내려오는데, 그렇다고 여러분은 그렇게만 꼭 생각을 하여서는 안 됩니다. 무조건 자기의 습도 떼지 않은 채로, 모두 걸리지 않는 여여한 도리만 따지고 있으면 될 일입니까? 먼저 배우지도 않은 채, 자기를 알지도 못한 채, 그게 뭘까 하고만 있다면 천년 만년 그렇게 해도 아무 소득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 도리를 알 수 있겠습니까? 먼저 자기 속을 알아야만 서로 통신이 되는 겁니다. 무선통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뿐이 아닙니다. 자기를 알게 된다면 심안으로 전체를 보게도 되고 듣게 됩니다. 그래서 가섭 존자의 속도 파 볼 수 있게 되고, 또 가섭 존자가 어디에서 나온 줄도 알게 되고,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진정으로 자기를 안다면 본래부터 일체가 다 한마음으로 통해 있음을 알게 되므로 가고 옴이 따로 없음을 또한 알게 됩니다. 그리고 또 진정으로 자기를 안다면 본래부터 일체가 다 한마음으로 통해 있음을 알게 되고, 가고 옴이 따로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가고 옴이 본래 없기에 문구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즉 가고 옴이 없이 문구멍으로 들락날락할 수 있다 이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을 왜 문구멍이라고 했을까요? 한번 잘 참구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아까 문이 많아서 문 찾기 어렵고 또 문이 없어서 문 찾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이 많다면, 즉 전체가 문이라면 문구멍은 무슨 필요가 있겠으며, 또 어디에도 문이 없다면 문구멍은 도대체 어디에 해당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것도 역시 관문이요, 화두요, 공안이다 이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공안 아닌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한번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께서는 지금 문을 찾는다고 하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불법을 공부하면서 문을 찾아서 들어오려고 애쓴다든가 또는 문을 찾아서 나가려고 애쓰는 그런 사람은 보살 될 자격도 없고 불자 될 자격도 없습니다. 문을 찾아 나가려고 하고 또 문을 찾아 들어오려고 하는 그런 사람이 어떻게 감히 부처님 속을 알 수 있겠으며, 일체 만 중생의 속을 알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얘기하는 문이라는 것이 물질이 아닌 바에야 찾아 나갈 문이 어디 있으며, 찾아 나올 문은 또 어디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여 놓으신 그 이론만 알고, 그것을 겉으로 풀이만 하고, 들고나는 게 고정된 양 요건 옳고 저건 그르고, 이건 대승이고 저건 소승이고 하고 가르는 그러한 분별심을 전부 놔야만 비로소 부처님 도리를 알 수 있는 겁니다. 여러분! 문이 없으니 열쇠구멍이 있을리 없고, 일체가 문이어서 열쇠구멍 또한 아랑곳 없으니, 가섭도 없고 아난도 없고 열쇠구멍 또한 없더라 이겁니다. 이 도리를 아시겠습니까?
노송 번개 치니
온 누리에 비 내리네
비 되어 깊은 바다 메우니
크고 작은 고기들
노래하고 춤을 추네

※위 법문은 대행스님 법어집 「한마음」의 내용 중에서 25호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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