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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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이 항상 비도록
한순간에 깨닫는 방법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마음은 간절하나 이것저것 걸리는 게 많아서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는 저의 모습이 너무도 한심스럽습니다. 저처럼 부족한 사람을 위해서 한순간에 깨닫는 방법이 무엇인지 가르침 주시기 바랍니다.

한순간에 깨닫고 싶다고 하나 어린아이가 태어났을 때에 그냥 응애 하고 우는 거와 같아요. 그래서 자기 근본을 알기 위해서 처음에는 일체를 그 자리에 되돌려 놓고 관해야 하고, 그 도리를 알게 되면은 또 배워야 하기 때문에 일체를 또 그 자리에 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배웠다면 나고 들고 하는 사이 없이 나고 들기 때문에 몰락 없어지면서 훌렁 벗어나서 자유로운 세상이 되는 겁니다.
쌀알이 어디에서부터 생겼을까요? 그게 종자가 되려니깐 농부가 벼씨를 심어서 싹이 나는데, 또 그 벼씨를 만들어 낼 때까지 길러지는 과정이 필요한 겁니다. 그러니까 일심(一心)으로 들어가야만 된단 얘기입니다. 다른 데서 찾은들 안되고 다른 데에 끄달려도 안되고 오직 거기에다가만, 그릇이 항상 비도록 ‘너만이 할 수 있어.’ 또 때에 따라서는, 그건 닥쳐오는 대로니까. ‘너만이 해결해 줄 수 있어. 너만이 보디가드가 돼 줄 수 있고, 너만이 이끌어 갈 수가 있고, 너만이 너가 있다는 걸 증명해 줄 수 있고….’ 이거 그냥 뭐, 모두가 거기죠. 모두가 거기라야만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몇 년, 몇십 년이 가도 자기와 상봉을 못하는가 하면 일년 이년 동안만이라도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한다면 자기와 상봉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거를 무의 세계의 도리로 한다면 한 찰나에 다 알게 된다, 이런 말이죠. 그건 형체가 있는 사람들이 돌아가는 법이 아니라 한 찰나라는 건, 한 찰나에 증득했다는 뜻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보이는 세계로 다시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이렇게 왕래하는 것을 한 찰나라고 그러고, 한 찰나에 그 뜻을 알게 돼서 한 찰나에 굴리는 겁니다.
그런데 배우면서 ‘나는 이러니 저러니, 나는 이렇게 되느니 안되느니….’ 하고 붙들고 늘어지는데 안되는 것도 거기 놓으라고 하는 겁니다. ‘안 되는 것도 거기에서 하는 거고 되게 하는 것도 거기에서 하는 거니까 걱정할 게 뭐 없죠. 하늘이 무너져서 가루가 돼서 떨어진다 하더라도, 내가 지금 죽는다 하더라도 그게 뭐이 걱정입니까? 제 몸 제 맘대로 하라지.’ 하는 겁니다. 제 몸 제 맘대로 하는 건데 왜 일부러 걱정을 하느냐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이렇게 말하게 하는 그 놈이 있으니깐 너 알아서 하라고 하지 왜 괜히 걱정을 하느냐는 겁니다. 자기 몸뚱이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죠. 근데 왜 생각으로 집착을 하고 모든 걸 걱정을 하느냐 이겁니다. 자기 몸뚱이는 자기 근본의 시자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나는 요즘 특히 더 그런 이치가 생겨요. 걷다가 발목이, 그 전 같으면 그렇게 다니면서도 아파서 드러누워 본 예가 없어요. 그런데 지난번에 어디를 가다가 발목이 삐끗했는데, ‘발목 삐끗하면 누구 손해일까? 이렇게 하면 안되잖아. 너 알아서 해!’ 난 그냥 이래요. 그러면 그냥 편안해요. 내가 없는데 편안하지, 그럼 편안하지 않을 게 뭐 있겠어요? 그리고 내 몸을 다스리는 자기가 있는데 뭐, 내가 뭐라고 간섭을 하고 그래요.
어떤 땐 어디가 결릴 때도 있어요. 그런데 사람을 여럿 만날 때는 ‘너 방편으로 모습을 내놓고 하는데, 모습을 그렇게 내놓고 하는데 이렇게 거북하게 하고 힘들게 하면 되겠어?’ 이래버려요. 그러고 ‘의욕이 나게 해야지!’ 그러면 의욕이 그냥 저절로 생기고 그런 거지, 어떻게 좋아서만 사나요? 좋지 않으면 좋게 만들어서 살고 너무 좋으면 또 쪼끔 덜해서 만들어가지고 살고 그러는 겁니다. 정말 이 세상은 재미있어요. 알고 보면은 무척 재미있는 거라구요.
그래서 어떤 부처님께서도 푸른 산은 부처님의 모습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부처님 아닌 게 하나도 없거든요. 그러니 부처님들이라 이거예요. 바닷물이 흘러, 청빈한 바닷물이 흘러 내려가는 것도 모든 진리의 설법이고…. 그러니 우리가 말없이 배우고 말없이 증득(證得)하는 것이 지금 제일 필요로 하는 거예요.

지켜보는 것과 맡겨 놓는 것

마음의 도리를 공부해나가다가 의문이 생겨 질문을 올립니다. 그냥 제가 하는 그 자체를 저 스스로가 지켜보고만 있는 것하고, 제가 행동하는 것을 주인공한테 자꾸 되돌리고 굴려 놓고 맡기고 하는 거하고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그걸 말로 하자니 나누는 것이지 공부를 하다보면 그것 또한 둘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왜냐면 가만히 있으면 부처요, 생각내면 법신이요 보신이라고 했습니다. 즉 지켜본다는 것도 굴려서 맡긴다는 것도 결국은 작용을 표현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 공부하는 분들에게는 무조건 일체를 주인공에 맡겨 놓으라고 하는데 어떨 때 보면 맡겨 놓는 것이 어떤 건지를 몰라서 주저주저 하기도 하는 거 같습니다. 그런데 각자 내 몸 자체가 공했으니까 사대오온(四大五蘊)이 공했고, 상대와 내가 더불어 공체(共體) 공심(共心)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우리 생활 자체가 그대로 공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경계도 그렇고 상대를 통해서 밖에서 들어오는 경계도 모두 나오는 그 자리에 되돌려 놓고 지켜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를 하다 보면은, ‘야, 천차만별로 살아나가는 거를 어떻게 일일이 다 놓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도대체 놓고 맡긴다는 게 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내 몸이 공하고 세상이 다 공했으니 내가 하는 게 다 공한 게 아닌가? 공한 주인공자리에서 다 들이고 내는 것이니 일체를 주인공에 다시 돌려 놓아야 하지 않은가!’ 하고 정말 진실히 믿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믿는 마음이 있을 때는 놓을 것도 없고 안 놓을 것도 없이 그냥 여여하게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 도리를 알고 보면 발자국을 옮겨 놓는 것처럼 본래 우리는 그대로 놓고 살고 있다는 것을 알 겁니다. 그래서 일일이 놓는다 안 놓는다는 생각조차 할 게 없는 것이죠.
단지 내가 살아나가면서 어떤 결과로 인해 몸이 아프거나 아픔이 닥칠 때, 또는 상대방으로 인해서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때, 천차만별의 살림살이가 다 자꾸자꾸 돌아가면서 나한테 부딪칠 때, 진짜로 믿는다면 행하는 거는 행하는 것대로 거기에다가 놓고 감사한 마음이 들면은 감사하게 다시 놓으면서 모든 건 거기서 결정을 짓고 거기서 해나가게 하는 겁니다.
바로 나하고 결부됐기 때문에 잠재의식 그 자체에 내 영원한 마음의 컴퓨터로 인해서 내가 어저께 일을 알고 오늘 일을 알고 내일 일도 생각하게 되니까 모든 걸 거기서 한다는 걸 믿는다면 그렇게 일일이 안 해도 되는 반면에, ‘아무리 공부를 하는데도 이런 일이 부닥치는데…. 에이그, 이것도 그냥 놔버리라는데….” 하는 남의 말만을 믿고선 놔버리겠습니까? 그럴 때 그렇게 벌어진 상황이나 생각을 굴려 놓으란 말입니다. 전체 밀고 나가는 능력이 그 자리에 있는 거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거기에서 해결을 하겠지.’ 하고서 딱 믿고 놓는다면 그게 바로 굴려 놓는 겁니다.
살아가면서 다가오는 모든 일들을 그냥 될 대로 돼라 하고 밀어던지는 거하고, 절대적으로 그 자리에서 한다는 것을 알고 믿는 마음으로 되돌려 놓는 거하고는 천지차이입니다. 될 대로 되라 하고 놓는 거하고 절대적으로 거기서 모든 걸 들이고 낸다는 것을 알아서 믿고 놓는 거하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엄연히 다른 것이죠.
그러니까 항상 끊어지지 않게 하도록 하라는 겁니다. 살아나가면서 일일이 부딪치는데 그걸로 인해서 의식이 가지 어떻게 안 갑니까? 몸이 아파도 벌써 아픈 걸 느끼니까 거기 생각이 가죠? 또 집안에 가환이 닥친다 하더라도 벌써 자기 근본을 절대적으로 믿는다면 ‘이 가환도 거기서 다 해결할 거다.’ 하고 믿고 놓게 되는 거죠. 그러니 일일이 자기가 살림하는 반면에 죽어서 송장이 되지 않는 이상에는 자기 주인공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러고 살림을 하게 되면 일일이 하루 24시간이 그냥그냥 닥치는데, 그런데 자길 잊어버립니까? 그래서 항상 닥치면 닥치는 대로 ‘아, 나를 형성시킨 것도 거기고, 일체 만법을 운영하는 것도 거기고, 상대를 접하는 것도 거기다. 고정된 것이 없이 광대무변하게 쉴 사이 없이 돌아가는 이 운영을 다 당신께서 하고 있으니 모든 것을 당신께 맡기겠다.’ 하고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물러서지 않게 되고 다 놓으면서 자기를 지켜보게 되는 겁니다.

특별한 체험이 없어

스님께서는 내가 본래 공했기에 공한 그 가운데에서 일체를 둘로 보지 말고 나를 세우지 말며 자유인으로 생활해 나가라고 하십니다. 물론 그 말씀이 너무나 지당하신 말씀인줄은 알지만 생활 속에서 저는 일체를 나의 근본과 둘 아니게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둘로 보고 미워하면서 나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자리에서 일체가 나오는 거니까 그 자리에 모든 것을 맡기고 해 나가면서 관하라고 하시는데 저는 아직 특별하게 체험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공부의 진전을 위해서 고견을 듣고자 질문을 올립니다.

나는 열심히 공부하는데 뭐가 잘못 돼서 아직도 남들처럼 특별한 체험을 못하나 생각하지만, 뭐가 잘못 돼서 그렇다고 하기보다는 이 도리는 아무리 얘기를 백 번을 들어도 한번 자기가 직접 체험해 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벌써 자기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일체를 둘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이미 그것마저도 몰랐을 때의 자기가 아닙니다. 하려고 하는 게 다르고 해 보는 게 다르고 하고 나서 느끼는 게 다르고, 또 한 번 더 해 보는 건 분명히 다른 겁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실천을 하면서 체험을 얻게 되면은 자기 근본에 대한 확신도 생기고 그 자리에 대한 믿음 또한 더 강하게 되는 겁니다.
늘 하는 얘기입니다만, 콩씨를 올해 심어서 싹이 났으니 이미 콩씨는 콩싹으로 화했는데 어디 가서 콩씨를 찾겠습니까? 콩씨가 콩싹으로 변했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콩나무가 콩씨를 또 찾는 거죠. 그러니까 콩씨가 콩나무로 화했어도 그건 콩씨라는 얘기입니다. 콩나무에 콩이 열리면 또 콩씨가 되니까 말입니다.
그러니깐 상대하고 나하고 무슨 말썽이 있거나 한다면 그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자기 탓으로 돌려라 이겁니다. 그래야만이 모든 게 그냥그냥 돌아가면서, 즉 말하자면 체험이 되는 거죠. 상대를 원망하지 말고 내 탓으로 돌리라고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내가 있으니깐…, 이 말이 이해가 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있으니깐 그런 일이 생긴 거지 내가 없다면 상대도 없는 거니까 그런 일이 안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깐 모든 것이 내 탓이죠. 그런데 때로는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되 내 탓으로 돌리는 것보다도 억울한 마음이 든다면 ‘주인공, 당신만이 저 사람도 그렇지 않고 나도 이렇게 분하지 않게 만들 수 있잖아.’ 하고 관하는 거예요. 이건 진실된 겁니다. 거짓이 없습니다. 그러는 반면에 듣고 보고 침착하게 생각해보고 체험을 얻는 겁니다.
그렇다고 안 된다 된다를 체험 얻으라는 게 아니라 안 되는 것도 되는 것도 없습니다. 즉 말하자면 안 되는 것도 거기 놓고 되는 것도 거기 놓는 겁니다. 안 되는 거는 ‘너만이 되게 할 수 있어.’ 하고 놓고, 구정물이 들어오면 ‘당신만이 맑은 물로 바꿀 수 있어.’ 하고 돌려서 놓고 관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체험해 가다보면 일체가 둘이 아니기에 어느 것 하나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알게 될 겁니다.

빨리 넘어서고 싶은데

얼마만큼 가야 중생심을 녹일 수 있고 내가 죽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스님께서 본래 여여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하시는데 공부는 왜 필요한 것인지요? 스님, 빨리 단계 없는 단계를 모두 넘어서고 싶습니다. 가르침 주십시오.

내가 늘 얘기를 합니다마는 계단을 올라가려고 발자죽을 떼어놓을 때 한 발자국 떼어놓으면 이미 앞서의 발자국은 없어집니다. 한 발자국 떼어놓으면 연방 또 없어지구요. 구름처럼 바람처럼 한 발짝 한 발짝 떼어놓은 게 없어집니다. 그러니깐 그렇게 떼어놓게 하는 놈이 사는 거지 내 몸 껍데기가 사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게만 알고 산다면 그냥 자동적으로 녹일 수 있는 거다, 이 소립니다. 자기가 없는 걸 알거든요. 그게 녹이는 거예요, 죽는 공부고요. 걸어올 때에 내가 떼어놨다고도 할 수 없고 떼어놓은 거를 가져왔다고도 할 수 없고, 짊어지고 다닌다고도 할 수 없이 그냥 수시로 바뀌니까, 내가 순간순간 바뀌잖아요? 이거 하다가 금방 저거 하고, 이런 말 하다가 금방 저런 말 들어야 하고, 이 사람 만나면 저 사람 만나야 하고 이러니까 자기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자기가 없이 사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그게 녹이는 거고 그게 죽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지구에 관한 건도 미생물에서부터 이렇게, 미생물이 아니라 지수풍이 암흑 속에서 그냥 막 굴러다니다가 한데 뭉치니깐 거기서 생명이 생긴 거예요. 그래서 ‘불’이라고 하는 겁니다. 누가 지휘를 한 게 아니라 그렇게 생명이 생겨서 자동적으로 그냥 태어나다 보니까 나무도 커지고 생명들도 커지고, 그러니까 누가 다스려 가는 사람이 없이 그렇게 막 저거 하니까 어느 때 ‘야,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구나!’ 하고 다 생명체들이 죽어버렸단 말이에요. 그래가지고 그 생명체를 줄여서 아주 작게 만들어서 우리가 이 날까지 살아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왔던 우리가 지금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태어나 가지고 지수화풍을 먹고 다시 지수화풍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유자재권을 얻어야만이, 우주와 더불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와 더불어 이 세상을 그냥 앉아서 한생각으로 쥐었다 놨다 할 수 있고 착한 마음이 쥐었다 놨다 할 수 있다면 불국토를 이룰 수 있는 겁니다. 불국토라는 게 다른 게 아니에요. 우리나라로 치면은 심성 과학자가 많이 생기고 허공에 있는 에너지를 꺼내 쓸 수 있는 그러한 멋쟁이들이 된다면 자연적으로 불국토가 되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것뿐만 아닙니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하면은 과거로 돌아가서 현실로 오고, 과거로 갔다 와야 돼요. 왜냐하면 그 도리를 알고 믿어야만이 자기가 과거로 돌아가서 죽은 사람들을, 인과성이 있고 유전성이 있어서 못사는 사람들과 아픈 사람들을 고쳐줄려면 과거로 돌아가서 띠어줘야 현실의 병이 낫는 겁니다. 몸에서 그냥 낫는 거는 얼마 안돼요. 다 인과로 인해서 나오고 유전성으로 인해서 나오고 영계성으로 인해서 나오고 때에 따라선 세균성으로도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거를 갔다오고 그러는데 삼천 년이 걸린다고 하는 게 한 찰나예요. 삼천 년을 만약에 거리를 두고 생각한다면 아니 삼천 억이라고 하더라도, 미세한 티끌 수와 같이 그렇게 많아서 헤아릴 수가 없는 거거든요. 그런 것도 한생각이면은 그냥 다 맞붙어버려요. 그래서 과거를 전부 알게 되고 미래를 알게 되고 현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깐 내가 빨리 해야겠다는 생각도 말고 더디게 한다는 생각도 말고 오직 참자기를 믿고, 수없는 겁을 거치면서 자기를 형성시킨 장본인을 진짜로 믿고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여여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꿈이 얽히고 설키는데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요 근래에 꿈을 꾸면은 현실과는 다르게 얽히고 설키는 꿈만 자꾸 꾸게 되는데 그런 것이 자기 마음의 변화와 관계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혼란스럽고 무언가 잘못되지 않았나 걱정이 많이 됩니다. 스님의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낮에 활동하는 것도 꿈이요 밤에 꿈을 꾸는 것도 꿈입니다. 우리가 방편으로 나왔으니까 생시도 꿈이자 생시이고 꿈도 생시이자 꿈입니다. 내가 살아나오던 얽히고 설킨 상대성 원리가 꿈에도 나타나고 그러는데, 꿈에 다른 모습을 해가지고 모르는 인연이 돼서 나와도 아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모두 자기의 인연줄이니까 모든 거를 다 자기로 봐라 이겁니다. 그렇게 자기로만 본다면 그러면 통과입니다. 마구니가 나타나도, 꿈에 마구니가 죽이려고 해도 ‘일체가 나이니 너도 나지.’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냥 없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없어지니 쫓기지를 않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모든 것을 나로만 봐야 합니다. 하다 못해 개나 돼지가 보였다 해도 그것도 바로 나입니다. 인간이 미생물에서부터 거쳐 온 걸로만 따진다고 해도, 그것을 다 거쳐서 나온 사람들이니까, 그거는 어느 때의 연분에 자기가 그 모습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 모습으로 보이는 거거든요. 그러니까는 그것이 바로 잠재해서 차곡차곡 쌓여있던 것이 공부를 하다 보면 하나하나 풀어지니까 그게 자꾸자꾸 나타나는 거예요. 나타나면 나타나는 대로 놓게 되면은 바로 필름 지워지듯이 그렇게 지워지는 거예요. 그러니깐 둘로 본다면 절대적으로 상대성으로서 엉켜지니까 그것이 인과응보로서 닥쳐온다는 얘기죠.
그러니까 모든 걸 놔라 이겁니다. 그저 그 자리에다가, 그 자리에서 나오는 거는 그 자리에다 놔야지 다른 자리에다 놓으려고 애를 쓰면 놔지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누가 가난을 갖다주는 것도 아니고 누가 마음쓰는 거를 대신해 주는 것도 아니고 잘못되는 걸 대신 없애주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해놓은 거 내가 없애야 합니다.
그런데 단 한 가지, 이런 게 있어요. 장님은 지팡이를 짚어야 길을 갈 수가 있다, 이것이 한 가지 방편이 있습니다. 처음에 정히 그 지팡이가 없고 내가 허전하면은 스승을 붙드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눈 뜬 사람을 붙들고 가다가 눈이 떠지면은 그때는 ‘너가 나고 내가 너고, 이 지팡이도 없는 걸 가지고 그랬구나! 내가 그냥 지팡이구나!’ 이렇게 될 때까지는 붙들고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스스로 알아지니까 스승이 스승이 아니요 내가 내가 아니라는 거를 알게 되죠. 그렇게 줄창 어느 사람이든지 다 그렇게 하라는 건 아닙니다. 즉 말하자면, 정히 어디다가 어떻게 할 수가 없을 때에는 그렇게 하고 어느 정도 나가다 보면은 그게 바로 자기임을 알게 됩니다.
자기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때에 바로 내 마음도 거기 같이 돌아가니까, 자기가 알아질 때는 우주 전체가 바로 공한 주인공에 한 떡으로다가 화하는 거죠. 그 떡 하나 얻어먹으려면 그만큼 모든 거를 한데 종합해서 뭉쳐야 된다 이겁니다. 하나로 뭉쳐야지 둘로 된다면 안돼요. 참선이라는 건 둘로 가는 게 아니라 하나로 뭉쳐서 그 하나마저도 쪼개고 쪼개서, 만약에 그 하나도 무(無)다 이랬을 때는 그 하나도 고정되게 있지 않으니깐 무라고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유전자입니다. 그래서 고 하나로 뭉쳐 놨을 때 고것이 유전자고 고 하나도 세울 게 없다 할 때 무전자로서 이 세상에 아니 닿는 데가 없다 하는 겁니다.

일상생활에서의 공부방법

현대불교 신문을 통해서 스님 법문을 계속 읽고 있고 불교 TV에서도 몇 번 접하면서 수행처를 따로 정하지 않고 내가 처한 곳에서 수행을 할 수 있는 실천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님의 가르침을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공부해 가야 할지 수행방법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실천해 나가는데 지침으로 삼겠습니다.

수행방법을 구체적으로 얘기해 달라고 하는데 그 말이 어디에서부터 나왔을까요? 댁이 살아 있으니깐 나왔겠죠? 어떠한 생각을 했기 때문에 지금 그 말씀을 하는 겁니다. 들이는 것도 내는 것도 생각을 하는 것도 말을 하는 것도 바로 자기 자신을 좇아 나온 겁니다. ‘자’는 몸이라고 비유할 수 있고 ‘신’은 자기 불성을 말해도 됩니다. 그러니까 자신 속에서 모든 게 나온 겁니다. 그 자신의 뿌리, 즉 말하자면 한마음 뿌리, 거기에다가 모든 거를 참구하세요. 거기서만이 알 수 있으니까요. 물리가 터지게 하는 것도 깨우치게 하는 것도, 자기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알고 보면은 그 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은, 경을 독송하는 것도 그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라, 나부터 안팎을 꿰어서 알고 나서 경을 보면 한 번만 제껴 봐도 그 경에 말씀이 어떤 것인지 줄줄이 다, ‘아! 이건 무슨 말씀이고 이건 무슨 말씀이로구나.’ 하고 알게 돼요. 벌써 첫머리 중간 끄트머리만 봐도 알게 되고, 무불통진한 사람은 벌써 책을 들고 첫 머리만 떡 봐도 다 알게 돼 있어요. 백지를 볼 줄 알아야지 백지를 못 본다면 어떻게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볼 줄 알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천안통을 해서 보기만 해도 도가 아니니라, 천이통도 도가 아니니라, 숙명통도 도가 아니니라, 타심통도 도가 아니니라, 천이통도 도가 아니니라. 통 안에서 벗어나야 그 오신통을 굴리는 거지, 오신통 안에서 오신통을 굴릴 수가 있겠느냐. 그러니 벗어나야만이 오신통을 굴릴 수 있고 자유권을 얻을 수 있고, 누진에서 책정을 해서 명령을 내리면은 그대로 작용을 하고 중용을 하게끔 돼 있다 이런 겁니다.
그러니 마음이라는 걸 쥘 수도 없고, 붙들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지만 현현하게 여러분이 있는 데에 부처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 어디를 믿습니까? 무엇을 믿습니까? 대신 죽어줄 수 있습니까? 누가 대신 아파 줄 수가 있습니까? 똥을 대신 눠 주니 믿습니까? 대신 먹어 주니 믿습니까? 누굴 믿습니까, 지금? 제 나무는 제 뿌리를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공덕이 되며 가정이 화목하며, 한 자손이 이 공부를 하면은 위 조상들 대에 12대 종손을 건진다고 했고, 밑으로도 자녀들을 모두 소생케 한다고 그랬어요. 그러고 돌에 올려 세워 놔도 살 수 있다고 그랬어요.
세 가지 조건이죠. 이 공부를 하게 되면은 위로 조상이나 아래로 자기 몸뚱이 속의 자생중생들을 조복을 받거나, 또 아래로 자기가 낳아 논 자식들을 영원토록 불생불멸하게 만든다고 했어요. 그렇게 건진다고 했어요. 그랬는데 그저 요만큼 가지고 가서, 내가 요거를 가지고 가서 큰 걸 좀 얻어야지 하고 부처님 앞에 요만큼 갖다 놓고는 그냥 뭐 해 달라는 거는 천 가지 만 가지, 이것저것 주워 섬긴단 말입니다, 속으로. 그게 그렇게 주워 섬겨서 될 일이 아니죠. 단 하나를 해결을 하더라도 짬지게, 아주 맑은 물로 대치를 싹 해 버릴 수 있는 그러한 자기의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강을 건널 게 없는 이유?

“강이 없는데 배가 있으며, 배가 없는데 건널 게 있으랴.” 하는 이런 말씀이 있는데요. 강도 없고 배도 없고 건널 것도 없는데 깨친 사람은 무엇이고 미한 사람은 무엇입니까?

강을 건널 게 없기 때문에 건너야 하겠죠. 다시 말해서 지금 질문하는 분이 예전에 다녀온 적이 있는 곳을 지금 한번 갔다 와 보세요. 어떠십니까? 그런데 지금 그곳에 가는 길에 강이 사이에 놓여 있다고 합시다. 그래도 가볼 수가 있겠죠? 어디에 뭐가 있고 어디에 뭐가 있는 거까지도 다 아시겠죠? 그런 것과 같이, 부처님의 마음은 그와 같아서 여러분도 그 도리를 넘어설 수만 있다면 그렇게 자유스럽게 살 수 있다 이런 겁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몇 겁을 거쳐 살아오면서 누적이 된 습성을 그대로 녹이질 못한다면, 죽어서도 내가 물을 건너가야 할 텐데 물에 빠져 죽을까 봐 물에 의식이 그렇게 있기 때문에 못 건너가고 불에 타 죽을까 봐 거기를 못 건너가는 겁니다. 또 불바퀴에 들어갈려고 해도 넘어서야 할려고 해도 타 죽을까 봐 못 들어갑니다. 내 업식이 천차만별로 모여 있는 데를 건너가야 될 텐데 건너갈래도 그게 두렵고 무서워서 한 발짝도 떼어놓을 수 없이 못 건너갑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것을 말씀하신 겁니다.
내가 없는데 강이 어디 있으며 강이 없는데 배가 어디 있겠느냐, 그래 배가 없는데 건너갈 거는 어디 있겠느냐 한 거죠. 우리가 그 뜻을 나쁘다 좋다, 이게 틀렸다 옳다 이런다면 그냥 도의 길은 무색해지는 겁니다. 그대로, 이것은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경전을 많이 읽고 안 읽고 상식이 풍부하고 지식이 좋고 학식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그대로 이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도 그런 말씀을 드렸지마는 만약에 한 가정에 구정물이 닥쳤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돌려놓고 맑은 물로 돌려놓는다면 맑은 물로 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만약에 마음이 밀가루라면 밀가루에만 고집하지 마시고 밀가루가 화해서 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빵만이 아니라 국수도 될 수 있고 만두도 될 수 있고…. 그것은 원자에서 분자로 인해서 인연에 따라서 가공돼서 하나의 만두라는 게 나오는 겁니다. 그렇게 만들어 잡수라고 하는 소립니다.
모두가 아주 괴롭다고 말들만 하시지 말고 실질적으로 행동을 개시해서 바로 실천을 하는 데 묘미가 있다는 것을 아시고 또 그것이 마음의 발전도 되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는 마음의 발전이 아니라면 극한 이 세상에서 살아나갈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가만히 있으면 그냥 목석이지 그게 사람입니까? 그러니만큼 수 억겁을 거쳐 나오면서 경험을 했고 한마음 영원한 근본에 모든 것이 종합돼서 재료로 들어있기 때문에 이 생각 저 생각 다 나오는 겁니다. 스스로 입력이 돼서 말입니다.
그러니 부처님 법은 꼭 사찰에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생활에 바로 쓰이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딴 데 있는 게 아닙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어떠한 용도에 따라서 닥쳐오는 그 문제들을…, 문제가 한두 건입니까? 임신을 한다 하더라도 장애자를 낳을 수도 있는 거고, 그런 문제들이 어떡해서 오는가 그거를 잘 파악하셔야 될 겁니다.
어디서부터 오는가? 천차만별의 애고가 어디서부터 오는가? 바로 자기가 지은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은 데다가 도로 놓고 굴려 놔라 이 소립니다. 한두 건이 아닌 그 유전성, 항상 말씀드리지마는 유전성이나 영계성이나 업보성이나 세균성이나 이 모두가 바로 어디서 오는 겁니까? 자기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지금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올 것이구요.
삼세를 다 굴리고 일심으로써 실천궁행하려고 하고 자유인이 되려고 하고 만물의 영장이 되려고 하고 부처가 되려고 하고 법신이 되려고 하고 관세음, 지장 모든 것이 다 자유스럽게 되려고 하신다면 물도 맑은 물로 바꿔서 먹을 수 있어야 됩니다.
일체가 한군데서 들고나는 것이니까 한군데로 놓고, 놓는 작업만 잘 하시고 굴려 놓는 작업만 잘 하시고 자기가 자기를 다스리는 마음이 투철하다면, 그러고 믿는 마음이 투철하다면 못났든 잘났든 자기를 믿는 그 마음이 투철하다면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타파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둘로 보지 않으려면

스님께선 진리를 밖으로 찾지 말고 마음 안으로 찾고, 안으로 찾을 때도 둘로 보아서는 아니 된다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제가 안으로 들어가는 공부를 하면서도 둘로 보고 들어가는 듯 해서 하나로 보고 들어가는 것과 둘로 보고 들어가는 것의 분명한 차이를 이해하고 둘로 보지 않고 바른 길에 들 수 있도록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모든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볼 때 하나서부터 열까지, 태양계에서도 목성뿐이 아니라 딴 데는 딴 데 대로 또 그렇게 각자 자기가, 우리가 이 지구에서 이렇게 살듯이 여기는 없는 게 없이 있지마는 은하계로부터 끼고 도는 혹성들이, 외성이라고 해도 좋아요. 그런데 그렇게 도는 혹성들이 전부 끼고 도는 원인은 어딨는가? 내가 항상 그랬죠, 여러분한테 자석이 있다고요. 여러분한테는 자석이 있는 거라고요. 그리고 자가발전소가 있고요. 그리고 쉬운 말로 접착제가 있다고 그랬죠? 그 접착제로 인해서 우리는 마음이 벌써 한데 모이면 이렇게 접착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둘이 앉아서 얘기를 해도 한 사이가 없다는 겁니다. 그냥 이렇게 접착이 되기 때문에. 금세 접착이 됐다가 떨어지고 떨어졌다 접착이 되는 이런 작용을 자연스럽게 하고 있다 이겁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체가 그대로 여여하건만도 자기가 자기를 믿지 못하고 자기가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방의 그 접착제를 모르는 겁니다. 자기의 접착제를 모르고 상대방의 접착제를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항상 둘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 밝은 것도, 그래서 모든 게 이렇게 닿기만 하면 나한테 붙어서 타 버려요! 나도 없고 너도 없어요. 그러면서도 여여하거든요. 이 마음의 도리를 이렇게 쉽게 얘기해줘도 알지 못하고 믿지를 못한다면 안됩니다.
그렇지만 둘로 보는 요인이 왜 생기느냐 하면, 나도 있고 상대방도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도리를 공부하면서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고 뜻을 볼려고 테스트하는 건 모르고 어떠한 게 나타나도 그거를 또 둘로 보는 거예요. ‘아하! 이것이 나를 가리치기 위해서 나오는구나.’ 하고 알면 좋을 텐데 그렇지를 못하고 항상 둘로 보거든요.
요만큼도 다른 데서 나올 틈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붙을 것이 없고 붙일 것도 없는데 어디에서 붙어 들어오느냐 말이에요.
그러니 그 자리에서 나오는 거라고 생각을 한다면, 그 자리에 다시 놓으면 될 것을 이걸 둘로 보니깐 온통 집안이 형편없어 지는 거고, 자기의 마음에 분심이 이것저것 생겨 가지고는 집안에 우환이 끓는 거예요. 그러니 모든 걸 태워 버리고 모든 우환을, 가난 또는 병고를, 인연 업보를, 유전 이런 거를 떼 버리려면 나라는, 나 자체가 없어야 돼요. 붙을 게 없어야 돼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나 자체도 없고 너 자체도 없고 너다 나다도 없고 중생 부처도 없고, 이름이 부처요 이름이 중생일 뿐이라고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그 내면의 진의를 몰라서, 무지하게 내 안에서 나오는 것마다 모두 그냥 둘로 보고 그러는 문제가 있어 가지고는 그냥 끄달리고 돌아간단 말입니다.
부처님세계에서는 이 모습이 물질계예요, 물질계. 물질계는 한계가 있고 언젠가는 죽어요. 모습이 없어져요. 그러나 원소 자체는 언제나 영원히, 그건 죽는다 산다가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믿으라고 이러는 거죠. 왜 둘로 보느냐, 왜 너하고 너 아닌 너하고 둘로 보느냐? 물질계로 오면 물질계로 하나가 돼버리고 정신계로 오면은 정신계로 하나가 돼버리는데 왜 둘로 보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일체를 둘로 보지 말고 어떤 경우이든 자기 안에 되돌려 놓고 관하라고 하는 겁니다.
2003-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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