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태용
건국대 철학과 교수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指鹿爲馬)”는 말이 있다. 힘을 배경으로 억지로 밀어붙여 참과 거짓을 뒤바꿔버리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전후해서 미국이 벌이는 행태를 보면 바로 이 말에 해당하는 예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결정적인 증거도 내세우지 못하면서 유엔을 무시하고, 국민적인 지지도 충분치 않은 전쟁이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강변을 누가 믿는단 말인가?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세계 여러 나라들이 이미 “그게 말이라구? 무슨 미친 소리야! 사슴을 말이라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드러내 놓고 말하지 못하는, 우리 나라처럼 힘없고 미국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나라들도 속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대통령이 부끄럽게도 “그거 말 맞아요”하고 나선 우리 나라의 언론도 미국의 침공 목적은 세계 석유시장의 지배 등의 자국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견해들을 당연한 것이라는 듯이 보도하고 있다. 참으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꼴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부시로 대표되는 미국이 옳으냐, 후세인으로 대표되는 이라크가 옳으냐 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런 방식으로 논의가 되는 것 자체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바탕에는 어느 한 쪽은 선이고 다른 한 쪽은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심심찮게 ‘기독교적인 흑백논리’라는 말이 언론에 등장하는 것은 종교와 관련시켜 말하는 것을 금기(?)로 삼는 우리 언론 풍토에 있어서는 참으로 신기한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사고방식의 위험을 이제 어느 정도 지성을 갖춘 사람들이라면 인지하게 되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미국의 행태가 가져올 다음의 파장이다. 자기와 다른 쪽을 무조건 악으로 규정하고 말살하려는 방식이 세계의 최강대국에 의해 저질러졌고,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외면적이나마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방식이 세계적으로 확산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미국 반대쪽에 있는 입장에서 이런 논리를 사용한다면 극단적인 테러를 포함한 모든 수단 또한 용납되지 않을 수 없다. 9·11 테러를 테러와의 전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을 써도 좋다는 면죄부처럼 휘두르고 있는 미국…. 이란 침공도 그런 명분으로 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테러를 합리화시키는 이율배반적인 짓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것이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점에서, 아무도 그것을 저지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이번 이라크 침공은 세계사적인 비극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어떤 전쟁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전쟁이 가져오는 참화를 생각하면 전쟁은 아무리 신중하게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하기에 오직 전쟁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전제를 미리 깔고 유엔도 무시하고 세계 여론도 무시한 미국의 처사가 가볍게 정당화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가능하면 빠른 시일 안에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것도 자국의 경제적 이익 등을 고려한 마음에서가 아니라 전쟁으로 참화를 입을 죄 없는 사람들이 가능하면 적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그래야만 폭력에서 폭력, 테러에서 테러로 이어지는 악업의 확대재생산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미국은 어떤 식으로든 이번 전쟁에서 이기겠지만, 이것이 오히려 세계무대에서 미국이 퇴조를 상징하는 대표적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