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분지의 중심, 그곳에는 황룡사가 있다. 동쪽에는 명활산, 서쪽에는 선도산, 남쪽에는 낭산과 남산, 북쪽에는 소금강이 둘러싸고 있다. 그렇다고 답답하게 막힌 공간이 아니라, 남북으로 길쭉하게 펼쳐진 평야와 동해 바다에서 연원한 동천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다. 이 터는 원래 궁궐을 짓기 위해 마련한 곳인데, 황룡(黃龍)이 나타나는 바람에 사찰로 바꾸었다고 한다. 도대체 황룡이 무엇이기에 궁궐을 사찰로 변경한 것일까? 아마 신라인들은 황룡이 출현하였다는 점에서 이곳을 영험한 신앙처로 인식해 정치적 공간을 종교적 공간으로 바꾼 것이리라. 사찰의 명칭을 보면, 동서남북의 중앙을 지키는 상징인 ‘황룡(黃龍)사’라 하기도 하지만, 임금을 상징하는 ‘황룡(皇龍)사’라고도 표기하였다. 이 명칭들에서 알 수 있듯이 황룡사는 신라의 중심사찰이자 임금의 권위를 상징하는 사찰이다.
황룡사는 진흥왕 때인 553년에 창건되었고, 이후에도 계속 중건과 중창이 이어졌다. 574년에는 장육존상(丈六尊像)을 만들고 10년 뒤인 584년에는 이 불상을 안치할 금당을 세웠다. 선덕여왕 시절인 645년에는 금당 앞에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탑인, 약 80m 높이의 9층목탑을 조성하였다. 또한 통일신라에 들어서서 경덕왕 때인 754년에는 성덕대왕신종보다 4배나 큰 황룡사종을 만들고 이 종을 건 종루와 경을 보관하는 경루를 탑과 중문 사이에 건립하여 황룡사의 면모가 완성된다.
그런데 금당과 탑의 배치는 고구려 사찰의 전형적 배치인 1탑 3금당식을 따르고 있다. 다만 고구려 사찰에서는 3금당이 탑을 향해 ㄷ자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 반면, 3금당이 남쪽의 입구를 향해 일렬로 서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러한 배치는 634년에 창건된 분황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분황사는 탑을 중심으로 금당이 둘러싸고 있어 ‘品’자 모양을 한 1탑 3금당식이지만 양쪽의 금당은 탑을 향해 있는 고구려 사찰과 달리 황룡사처럼 정면을 향해 있다. 고구려의 3금당 공간은 폐쇄적인 반면 신라의 3금당 공간은 개방적인 것이다. 황룡사 금당에 서서 훤하게 열린 정면인 남쪽을 바라보면, 왼쪽의 낭산과 오른쪽 남산이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 남북 방향으로 길쭉한 경주분지의 형세로 볼 때, 남쪽을 향해 열어둔 것은 지세를 살린 배치라 할 수 있다. 고구려의 1탑 3금당식의 배치를 받아들이면서도 경주의 자연에 맞게 자기화한 것이다.
황룡사의 걸작은 역시 중앙에 우뚝 솟은 9층목탑이다. 선덕여왕은 여왕이라 멸시하고 침략을 일삼는 이웃나라를 진압하려는 목적으로 거대한 탑을 세웠다. 종교적인 목적보다는 선덕여왕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태종은 남편이 없는 선덕여왕을 업신여겨 향기 없는 모란꽃그림을 보내었는데, 선덕여왕은 당태종을 향해 시위하듯 꽃향기가 나는 임금의 절이라는 뜻의 분황사를 짓기도 했다. 황룡사9층목탑은 아쉽게도 고려시대 몽고 침입 때 불타 없어졌다. 그러나 이 탑은 황룡사의 중심이면서도 경주의 중심이고, 선덕여왕의 자존심이면서도 신라인의 긍지로서 우리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다. ■경주대 문화재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