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집 작고 단아한 ‘폴란드 스님’
선무도 지도…영어로 법문도
출가 후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비교적 오래 함께 살았던 스님 중에 외국인 스님이 한명 있다. 서울 화계사 숭산 큰스님의 상좌인데 원통이라는 법명을 쓰는 폴란드 스님이다. 눈은 푸르고 코는 오뚝하지만 자그마한 몸집이 외국인이라는 거대한 느낌하고는 거리가 먼 단아한 모습의 스님이다. 내가 통도사부산포교원에 사는 10년 동안 거의 5년을 같이 살았으니까 긴 시간을 함께 한 스님이라 해도 될 것 같다.
처음에는 우리말을 배우는 것이 목적이었고,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하는 가운데 이런 일도 있었다. 종무소에 근무하는 보살님의 딸 선하가 초등학교를 가게 되었는데 한창 글을 배우던 선하가 유일하게 원통스님을 꼼짝 못하게 하는 강적이었다. 하루는 종무소에서 선하가 받아쓰기를 하자고 제의를 했다. 원통스님이 볼 때 안 하자니 체면이 안서고, 하기에는 자신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서로 한 단어씩 부르면서 연필로 쓰는데, 선하가 ‘통도사’라고 불렀다. 각자 가리고 쓴 후 서로 확인을 하는데 갑자기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원통스님이 틀린 것이다. 신이 난 아이의 흥분한 목소리와 멋쩍은 스님의 서툰 표현으로 서로 놀리고 우기는 소동이 일어났다.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천진난만하고 재미있는 모습이었다. 초기에 그렇게 어린아이와 겨루면서 배운 한국말의 수준이 이제 거의 다 알아듣고, 반 이상은 표현하는 정도가 되었다.
또 이런 문화적 충격도 있었다 한다. 처음 화계사에 와서 한철 참선수행을 하고난 후 고향에서 먹던 커피가 간절히 생각이 나서 산문 밖을 나가게 되었다. 한글을 잘 모르던 원통스님은 커피 잔 그림이 그려져 있는 다방으로 들어갔다. 서구식 카페를 연상했던 원통스님은 실내 분위기가 심상찮다고 생각하면서 자리에 앉았다. 셀프서비스에 익숙한 스님은 주문을 받으러온 여종업원에게 어색하게 “커피”만을 외치게 되었다. 그런데 커피를 가져온 여 종업원은 커피를 내려놓고 스님 옆에 바짝 붙어 앉아서 이런 저런 호기심과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저 향긋한 커피 한잔에 고향의 향수를 달래 보려던 스님은 이해하지 못할 문화적 차이에 당황했었노라고 말했다.
그리고 함께 살던 어느 해에는 이런 해프닝도 있었다. 봄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는 요즘 같은 시기에 겨우내 벼르던 철새구경을 가게 되었다. 들은 대로 쌍안경을 준비해서 새벽 예불 후에 주남저수지로 달려갔다. 초행이라 막연하게 저수지에 도착한 우리는 눈이 튀어나올 만큼 의욕을 가지고 철새를 찾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텔레비전에서 보면 그토록 새까맣게 하늘을 뒤덮던 새들이 물을 박차고 비상하는 장엄한 모습은 어디 가고 새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구경을 갔을 때는 철이 이미 지난 후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새벽하늘을 향해 떼지어 비상하는 날갯짓을 상상으로 그리며 열심히 둘러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허탕이었고, 아쉬움의 무거운 발길을 돌리고 있을 때 저만큼 앞에 까치 한 마리가 날고 있는 것이 보였다. 원통스님이 너무 반가워하며 무슨 새냐고 물었다. 생각할 여지도 없이 까치 라고 답했다. 그리고는 절로 돌아왔다. 그랬더니 원통스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철새구경을 갔는데 까치 한 마리 보고 왔노라고 자랑 아닌 자랑을 하는 것이다.
원통스님의 특기 중 한 가지는 선무도다. 경주 골굴사에서 배운 선무도 덕에 몸이 유연하고 동작이 절도가 있다. 그래서 어린이집 아이들에게 선무도를 가르쳤다. 어린아이 눈에 비친 외국인 스님의 선무도 강의와 실습은 다른 어린이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시간이었다. 아마도 먼 훗날까지 아이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준 셈이다.
스님이 제일 싫어하는 말은 ‘미국스님’이라는 말이다. 스님은 폴란드사람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는데, 잘 모르는 사람들은 으레 처음에는 미국스님이라고 부른다. 그럴 때면 얼굴이 몹시 구겨진 불쾌한 표정으로 답한다.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렇게 좌충우돌 살면서 사람들과 친해지기 시작하더니 우리말을 배우는 속도가 빨라져서 법회 때에는 신도들의 축원문을 읽을 정도가 되었다. 불공은 물론, 천도의식에 금강경 독송을 할 때면 신이 나서 독송을 한다. 때로는 참선에 대한 지도와 영어로 법문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처음의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분야에 익숙해져서 오히려 김치를 즐기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스님이 되어 있다. 보이는 모습은 엄연히 다르지만 원통 스님이 앞으로 불교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리라고 본다.
■(사)한나래 문화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