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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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문제가 생긴다 해도
어떻게 마음을 내야 하는지

항상 저희와 함께 하시는 은혜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대구 참사를 겪고 있는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그러한 대형사고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만, 지구온난화현상으로 남 북극의 빙하가 녹으면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이상기온으로 몇 년째 재난을 당하고 있는데, 올 해 들어서는 북한 핵전쟁 위협과 미국의 이라크에 대한 전쟁선포와 같은 무서운 일들을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들어야 하고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자로서 이와 같은 시련들을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하려면 마음을 어떻게 내야 하고 생활 속에서 어떻게 실천해 나가야 하는지요. 불경의 말씀처럼 말법시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인지요? 아니면 불법의 가르침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나갈 방법이 있는 것인지요? 너무도 불안하고 당혹스럽습니다.

그래서 올해하고 내년은 아주 산란한 문제가 많기 때문에 우리 신도님들은 꼭 알아둬야 될 일이 있습니다. 북극 남극의 얼음이 녹는 문제 때문에도 그렇지만 별 세계에서 자리를 바꾸고 죄 옷을 다시 입히는 일도 있고 그러기 때문에 문제가 아주 산란합니다. 그래서 물도 문제가 있고, 우리 몸의 혈관이 통하지 않는 것처럼 물도 혈관을 따라서 가야 할 텐데 혈관이 제대로 돌지 않기 때문에 주먹같이 덩어리가 져서 물이 그냥 일어나게 되는 수가 많습니다. 그러니깐 물도 바다에서 일어나고 허공에서는 비가 오고, 지구에 열이 나기 때문에 산에서는 화산이 일어나게 되고 그러기 때문에 상당히 살기가 아주 바쁜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은 올내년 아주 근중히 생각을 깊이 하고 조심들을 해야된단 말입니다. 지구 안에 열이 나면 하세계도 열을 받기 때문에 화산이 터지는 것처럼 부엌에도 무슨 일이 있으면은 그냥 뭐든지 터지게 돼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주 나가서 돌고 이렇게 해서 그런 일이 안 생기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올내년은 물이 솟고 허공에선 비가 오고 또 산에서는 화산이 터지고 그러기 때문에 문제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게 한 두 건이 아닙니다.
그러니깐 어딜 가더라도 조심을 해야 하고 가다 오다가도 또 조심해야 하고 느긋이 맘놓고 다니지 못하는 이런 해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많이 죽는 해입니다. 그러니깐 정신차려서 꼭, 이걸 우습게 생각을 하지 마세요.
내 말이 아니더라도 뭐 다들 웅성웅성하고 야단들을 할 겁니다. 이건 전 세계가 문제니까요. 이렇게 되면 전 세계가 문제란 말입니다. 이게 여기에서 문제가 아니라 수성이나 금성, 화성 이런 데서 전부 지압이 되기 때문입니다. 올내년이 피가 안 도는 해예요. 사람의 피만이 아니라 전체에, 지구나 금성이나 수성 그런 데서 피가 안 돌아서 고장이 나는 것처럼 그러기 때문에 북극 남극에서 돌질 않으면은 물이 순환이 되지 않아서 모두 물이 덩어리가 져선 그냥 솟고 그렇게 되요. 그니깐 그걸 혼동이라고 그럴 수밖에 없는데 그냥 저절로 혼동이 되는 게 아니에요. 순환이 되지 않아서 혼동이 나는 거죠.
그러니깐 걱정 근심 할 거 없이 인의롭게 웃으면서 잘 관(觀)하고 그렇게 살아야 되요. 말로는 이렇게 하지만 자기가 경험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우습게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그러기 때문에 만약에 화(禍)가 일어나서 죽으면, 죽었다고만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순수하게 살아 나가야 되는데 지금 위에서 순수하질 못해요. 금성이나 수성도 순수하지 못하고 지구가 순수하지 못하고 그러니깐 사람 사는 게 전부 순수하지 못하죠. 그래서 올내년에는 상당히 조심하고 사셔야 되요. 마음 한 번 잘 쓰는 대로 복이 오고 마음 한번 너그럽게 쓰는 것도 바꿔서 생각을 하고 웃고 사는 지혜로운 분에게는 액난이 덜 오고 순수해요. 그러니 모두 그렇게 사세요. 어떠한 문제가 생긴다 하더라도 껄껄 웃고 뒤집어서 돌리고 그러세요. 남을 원망하거나 그런다면 더 원망이 나한테 돌아오니까요. 지금 이 말의 뜻은 대단한 것인데 말은 이렇게 해요. 그러니깐 우습게 듣지 마시고 그냥 소신껏 생각을 깊이 하세요.
그래서 그것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하루에 초 세 개씩만 태우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진압시키는 일이니깐 초 세 개씩만 하루에, 다 타지 않았다고 껐다가 다음 날 또 그걸 가지고 켜려고 하지말고, 그 날은 그걸 치우고 또 고 이튿날 다시 새로운 초 세 개를 켜고 해서 그 고난을 면하게 하세요. 하여튼 하루에 초 세 개씩만 켜되 불나게 만들지 말고 옹백이 같은 데다가 안전하게 해서 켜세요. 초 하나가 전 우주를 싸고돈다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행복한 마음으로 사세요. 그저 남한테 억울한 걸 덮어씌우려고 하지말고, 언짢다고 그래서 남한테 씌우지 말고 내 탓으로 돌리고 그걸 없애세요. 나한테도 들어오지 않게 없애세요. 그리고 스님네들만 공부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도 다 그렇게 해서 체험을 얻으면서 살아나가면 곱게 살아나가실 겁니다. 그러니까 그저 어떠한 급한 일이 생겨도 웃고 돌리면은 그게 돌아집니다. 여러 사람들이 다 그걸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공부 열심히 하시라고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까 몇 마디 안되지만 소중하고 급한 얘깁니다. 2년 동안을 열심히 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잘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전체를 다 살린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깐 꼭 그렇게 해 보십시오. 하루에 초 세 가락씩 세 달 동안 꼭 태우면서 지극하게들 관하시기 바랍니다.

근본적인 의문에 관하여

가장 근본적인 의문에 관해서 질문을 드릴까 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것을 얻기 위해서 많은 분들이 수행을 해 오신 걸로 알고 있는데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와 가지고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하는 겁니다. 전생으로부터 윤회를 해서 여기까지 왔고 또 다음 세상에도 윤회가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더 근본적으로 의문을 가지다 보면은 태초에 과연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으며 우주 만물과 인간 그리고 생명들이 과연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것과 또 우리는 과연 어디로 가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항상 우주의 근본자체가 우리 마음에 직결되어 있다고 말을 하는 겁니다. 우리 몸이 오대양 육대주도 될 수 있어요. 자기 몸 속을 들여다보고 뇌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복잡하고 거대하게 되어 있나.
그러니까 우주천하 만물만생이 다, 즉 말하자면 벌레에서부터 진화되는 것은 생각에 의해서 진화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의식자체가 벌레는 벌레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그러다가 어떻게 가다보면 벗어나게 되는데 인간도 그렇습니다. 살다보면 차원에 따라 편안하게 살 수도 있고 편안하지 못하게 살 수도 있는 것이 바로 백지장 하나 사이를 두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공부를 진짜 하려면, 무조건 자기를 끌고 다니는 자기 주인공을 진짜로 믿고 거기다 일체 생활을 다 맡겨 놓고 ‘당신만이 나를 건강하게 끌고 다니고, 당신만이 내 가정을 이끌어 갈 수 있다. 나를 대신해서 가줄 사람도 없고 대신 먹어줄 사람도 없다. 내가 혼자 와서 혼자 지금 길을 걷고 있다.’ 이런 걸 아셔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참나를 발견하고 감응이 될 때, 그때에 한 번 하늘을 쳐다보고 울고 한 번 땅을 내려다보고 땅을 치고 울 때 바로 진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진짜! 자유인 말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머리로만 모두 알려고 하는 것을 다 놓으십시오. 여러분의 그 차원에 따라서 빨리 싹이 날 수도 있고 빨리 더 클 수도 있고 아직 밑에서 싹도 나지 않는 분이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열반이라는 것은 죽어서가 열반이 아니라 콩깍지가 익었을 때, 콩으로 비유하는 겁니다. 콩이 익었을 때 아주 잘 익었다면 그냥 건드리기만 해도 탁 벌어지는데 덜 익은 거는 속 껍데기가 붙어가지고는 아무리 콩을 까려고 해도 안 까집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죽음에 의해서 고생을 하고 죽는다는 의미와 같은 뜻입니다. 그게 잘 까져야 할 텐데 안 까지거든요. 그래서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애쓰다가 결국은 몸을 벗는다는 이치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그냥 툭 건드리기만 해도 콩깍지가 탁 벗어지게끔 할 수 있는 자유스러운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해나갈 수 있는 대로 해나가야지 이 생각 저 생각을 자꾸 벌려서 하지 말아야 해요. 이 생각이 나는 대로 맡겨놓고, 저 생각이 나는 대로 또 맡겨놓으세요. 울고 싶거든 자기 주인공을 붙들고 울고 감사한 일이 생겨도 자기 주인공을 붙들고 감사하세요. 그렇게 한 일년 계속 가 봐요. 진짜로 그렇게 못하기 때문에 모두 겉껍데기로써 애를 쓰는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없으면 아무도 없어요. 내 몸에 불이 났을 때 남이 나의 불을 꺼주는 게 아니라 제각끔들 자기 불 끄느라고 애를 쓰죠. 누가 불 꺼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 자기가 자기를 가엾게 생각하고 불쌍히 생각하고 자기 주인공한테 감사하고…. 그러니 자기 주인공은 자기를 얼마나 위하고 가르치려고 노력하고 때로는 그렇게 많은 살림살이에서 자기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 이것도 보여주고 저것도 보여주고, 꿈에도 보여주고 생시에도 보여주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 그런 데 속지 말라 이거예요. 자기 주인공이 자기를 가르치기 위해서 그러는데 왜 속아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그래서 환상천도 넘어서고 그 어떤 경계에도 속지 말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겁니다. 그러니 그렇게 꼭 생각하고 모든 것을 근본 자리에 놓고 관하도록 하세요.

습이 붙지 않게 하려면

스님께서는 모든 일을 함이 없이 하고 살라고 하시는데 저의 모습을 보면 함이 없이 하고 간다고 하면서도 습이 덕지덕지 붙어서 차곡차곡 업이 되어 저의 발목을 붙들고 늘어짐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습과 착이 붙지 않고 허공처럼 티 없는 자유인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가르침 주십시오.

그래서 공했다고 하는 겁니다. 색이자 공이요, 공이자 색이라는 것은 비행기 프로펠러가 돌아가듯 하는 것인데, 그렇게 돌아가는 데에 먼지 묻을 것이 뭐 있겠는가 이겁니다. 육조 선사께서 “틀이 없는데 거울이 어디 있으며 거울이 없는데 먼지 앉을 게 어디 있느냐?” 하신 것이나 “테가 없어서도 아니고 있어서도 아니 되느니라” 하는 뜻은 뭐냐? 없다고 하면 없는 데 치우치고, 있다고 하면 있는 데 치우치기 때문에, 그것은 없어서 없는 게 아니라 그렇게 빠르게 프로펠러가 돌아가듯 그렇게 빠르게 돌아가니까 먼지 앉을 게 없다 이 소립니다. 그래서 ‘무(無)!’ 했던 겁니다.
세상은 그렇게 순간순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돌아가고 있는데 사람의 사량적인 마음은 결국은 이런 게 어떠니 저런 게 어떠니, 내가 했느니 내가 줬느니 항상 그렇게 하기 때문에 그것이 업보가 되고 또는 유전이 되고 윤회에 끄달리고 그런 문제점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지어서 부스럼을 만들고 아프다고 울고, 또는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어 놓고 괴롭다고 우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끄달린다면 부(父)와 자(子)가 상봉할 수 없는 그런 일이 됩니다. 심봉과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데에 심봉이라고 따로 부르지 않고, 프로펠러라고 따로 부르지 않지 않습니까? 그냥 ‘그 사람!’ 하면은 그냥 그 사람 안에 진실한 마음도 거기에 있듯이, 또 프로펠러라고 그렇게 부르면은 그 프로펠러 속에 바로 심봉이 들어 있듯이, 물질적인 것은 보이지마는 심봉이라는 것은 내놓을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고 바로 쥘 수도 없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프로펠러가 돌아가듯 여여하게 돌아간다 이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인간만 그런 게 아니라 우주도 역시 그렇게 삼각 원형을 이루고 돌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어느 별성도 삼각 원형을 이루지 않고 도는 것은 없습니다. 즉 말하자면 우리 지구도 그렇게 삼각 원형을 이루고 돌아가고 있고 은하계도 그럴 뿐 아니라, 무전자와 유전자, 바로 무생 유생, 일체가 같이 돌아가는 겁니다. 일체 유전자 무전자가 같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불교에서 말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불, 법, 승 삼보가 같이 원형을 이루고 돌아간다 이겁니다.
그래서 본래 습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냥 몸 속에 있는 생명들과 나와 더불어 같이 살기 때문에 공했단 말입니다. 그랬으니까 속에 생명들이 움죽거릴 때 내가 했다고 할 겁니까? 내가 움죽거릴 때 내가 움죽거렸다고 할 겁니까? 그렇지 못하잖아요, 알고 보면. 모두가 팔 하나 들어도 이건 내가 움죽거린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어떤 걸 움죽거렸을 때 내가 움죽거렸다고 할 수 없는 거거든요. 그래서 내가 없다 내가 공했다, 내가 공했으니까 내가 하는 것마다 전부 공했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함이 없이 하는 거죠. 함이 없이 하는 거예요, 그냥. 그래 책에도 ‘분별 아닌 분별’ 이렇게 해놓으면 이것이 ‘분별이 아닌 분별’ 이렇게 되죠. 하면서도 함이 없이 하는 거를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그냥 함이 없이, 진실하게 함이 없이 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 진실한 거는 내 껍데기가 한 게 아니라 내 알맹이가 나를 이끌어 가지고 가기 때문에 진실한 거지, 내 몸뚱이가 진실한 것은 아니에요. 이 몸은 수레와 같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수레를 끄는 장본인이 누구냐는 얘기입니다. 그걸 굴리려고 끄는 장본인 말입니다. 그걸 주장자라고도 하고 깃대라고도 하고 그냥 그걸 자불이라고도 하고 뭐, 불성이라고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이름을 가지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이름 있기 이전 그거를 알고 우리가 진짜로 믿고 들어가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관하면 나을 수 있는지

스님께서는 모든 것이 내 안에서 빚어진 일이니 내 앞에 닥치는 모든 문제를 나의 근본에다 모두 맡기고 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다리 연골이 늘어져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병원에서는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데 내 안에 맡겨놓으면 내 안에서 해결이 가능한 것인지 절박한 마음으로 질문을 올립니다.

다리뿐이 아니라 여러분이 일체의 해결책을 다 가지고 있어요. 진짜로 누구나가 다 주인이 있다면 심부름시키는 제 시자를 그렇게 돌보지 않겠습니까? 진짜로 자기 주인을 믿는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진짜로 믿으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그러더군요. 이 마음의 도리를 공부해 나가는 분인데 병원에서 폐암이라고 그래서 죽게 됐더래요. 근데 그 순간에 마음이 더 넓어지더라는 얘기입니다. 아팠을 때는 그냥 그런가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에 조바심을 냈는데 인제 죽는다는 생각이 들어가니깐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수술할 생각도 안 나고 그냥 죽으면 편안하겠다 이렇게 생각이 들더라는 겁니다. 그러고는 아주 더 간절히 주인공한테 관하고 오직 거기만 믿고는 기운이 없으면 찹쌀 물을 끓여서 냉장고에 넣어 놓고 그냥 물처럼 마시고 어디가 쑤시면은 감자를 생으로 갈아서 한 컵씩 먹으면서 그냥 그렇게 지냈다는 거예요. 보약을 한 재씩 지어서 때로는 먹기도 하고 이러면서 죽으나 사나 그냥 놔뒀다는거죠. 근데 지금 건강해서 잘 다닙니다. 그러니깐 모두 각자 자기 마음에 달려 있어요. 우습게 생각을 하니까 정말 우습게 되는 거예요.
또, 한 칠십이 채 못된 어떤 노인네가 암에 걸렸다는 겁니다. 암이 걸려서 도무지 얼마 못 산다는 거예요, 너무 오래 돼서. 그런데 ‘수술을 하면은 어떻게 하시겠소?’ 이러니까 ‘수술을 하면 뭘 합니까. 그냥 편안하게 살다 편안하게 가야죠.’ 이러더라구요. 그러더니 그냥 그걸 없애고 지금은 편안히 잘 살고 있어요. 그게 왜 그럴까요? 버리니깐 나아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믿음에 달려 있다는 얘기입니다.
공부하는 데도 믿지 못하면 힘이 드는 겁니다. 당신들 속에 주인공이 다 있다고 해도 나를 큰스님이라고 생각하니까 다른 거 같지만 불성은 누구나가 다 똑같아요. 둘이 아니에요. 그러니깐 수만 명이 한데 합치면 큰 에너지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깐 걱정들을 하지말고 머리를 써서 진짜로 믿을 생각을 하고 믿는 반면에 에너지는 그렇게 커진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이것도 과학적인 문제입니다. 불성은 다 똑같으니까 한데로 모아지면 큰 에너지가 되고 또 그 에너지를 안 쓸 때는 딱 펴지고 또 모아서 쓰고 이러는 거죠, 그거 뭐. 그래서 모두가 과학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정통의 길을, 정통의 길이라고 할 것도 없고 진짜 내가 나왔으니까 내가 있고 내가 있으니까 나의 불성이 근본적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생명의 근본인 것이지요. 우리가 작용해서 대치를 할려니까 주인공이라고 해야죠. 내 속의 의식들도 다 한마음이 돼 줘야만이 아픈데도 파워를 일으키지 않고 화합이 돼서 아프지 않게 되는 거지, 간의 생명들이 싸움을 해서 죽으면은 다 굳어지고 그래서 그게 간암이 되는 거예요. 싸움을 안 하고 호응을 하는데 어떻게 간암이 됩니까? 바깥에서나 안에서나 싸움을 해서 모두 한 쪽이 죽으니까 그렇게 되는 거지 싸움을 안 하면은 죽지를 않죠.
그래서 둘로 보지 말라 이런 겁니다. 바깥에서 세균이 들어왔다 하는 것도 있지마는 안에서 생기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안에서 생기는 것도 너, 나를 따져서 싸우게 되거든요. 그래 백혈병도 그렇고 다 그래요. 이게 바깥에서도 세균이 들어와서 또 그렇게 싸우는 게 있구요. 그러면 내편을 다 만든단 말입니다, 또. 그렇게 해 가지구선 싸우게 되면 그거는 단박 그냥 순식간에 살이 굳어져 들어가니까 병자가 돼 버리고 마는 거죠.
그래서 모두를 둘로 보지 말라고 하는 겁니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느나에 따라서 인과성, 업보성, 영계성 세균성, 유전성 이 다섯 가지가 주둔합니다. 다섯 가지가 주둔해서 모두 과거의 자기가 벌여 놨던 것이 현실에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렇게 꼭 하셔야 합니다. 이게 뭐 돈이 드니 못합니까. 힘이 드니 못합니까? 수억겁을 거쳐서 자기를 이끌고 나온 자기 뿌리를 진짜로 믿어야 나무는 아주 푸르르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꼭 알고, 생각을 돌이켜서 간절한 마음을 내서 관하게 되면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자유자재로 쓸 수 있으려면

공부하다가 의문이 생겨서 질문 드립니다. 정원사가 꽃나무를 가꾸듯 불성을 살려내야 한다고 하셨는데 불성을 살려내서 자유자재로 쓰고 발현하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지금 알고 싶다고 마음 내는 사람과 마음을 내고 움죽거리는 사람이 어디 둘입니까? 둘이 아닙니다. 하나죠. 하나니깐 그 하나 속에서 자기를 발현해내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지금. 그런데 모두들 지금 살고 있는 자기 모습이 자기인 줄 알고 보이지도 않고 쥘 수도 없고 가눌 수도 없는 정신계는 생각지도 않고 사는 겁니다. 그 보이지도 않고 쥘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데서 자기를 리드해 나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둘 아니게 상봉한다면 서로 뜻으로 통해서 공부를 하게 되죠.
그래서 언젠가 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길을 가는데 ‘이 길은 길이 아니니라.’ 그래서 ‘어떤 게 길입니까?’ 하니까 아주 천야만야한 산중을 길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그때에 너무 몰랐으니까, 몰랐으니깐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냥 듣고 믿고 거기가 길이라고 한다고 갔습니다. 믿고 가질 않았으면 그것도 길이 아닌 길이라는 거를 몰랐을 텐데 갔기 때문에 길이 아닌 길이라는 걸 알았고 길이 따로 없다는 걸 알았고 허공도 아닌 허공을, 즉 말하자면 속도가 빠르게 다닐 수가 있다는 사실도 알았던 겁니다.
그러니깐 나는 마음 속에서 나오는 그 한 생각을 믿고 행하는 시자인 것입니다. 심부름꾼이에요. 그 자기 심부름꾼을 진짜로 공부 가르쳐서 자기를 만들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를 만들기 위해서 하는 거죠. 그런데 그걸 모르고 자꾸 비난을 하게 됩니다. ‘아이그, 뭐 그까짓 것….’ 하고 그렇게 되면 둘이 아니게 상봉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항상 둘이 되고 마는 거죠. 그러니깐 문제는 그런 데서 이 세상을 다 한데 합쳐도 하나로 구성된다. 하나로 돌아간다. 나중엔 그 하나도 없다는 것이 나오질 않죠.
그래 지금 모두 일들이 많이들 벌어지고 생기는 게 다 마음이에요. 이 마음이라고 그런다면 그냥 지금 물질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같이 이어지질 않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고 길을 제대로 걷게 되질 못하죠.
그래 전 세계에 물난리가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나고 있고 모두 사람들이 곤경에 빠지고 아픈 일들이 많이 생기고 그런다 해도, 이걸 병원에 가지 않는 게 옳으냐 병원에 가는 게 옳으냐 이거를 문제를 삼는 분들도 있거든요. 그렇지만 진짜로 믿는다면 병원에 안 가도 괜찮다 이겁니다. 왜냐하면 병원에 안 가는 분들은 밖으로 믿지 않고 오직 안으로 주장자가 완벽하게 섰기 때문에 그렇지만, 서지 않는 분들은 서지 않은 대로 병원에 가고 병원에 안 가고 그걸 떠나서 병원에 가든 안 가든 진실히 나무가 자기 뿌리를 믿고 살듯이 그냥 진실히 그렇게 해야만 되지 않나 이렇게 봅니다.
그래서 그렇게 둘 아니게 들고나는 그 자리를, 그게 한자리입니다. 한자리라 하면 하나의 개별적인 한자리가 아니라 포괄적인 자리를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포괄적인 한자리고 또는 거기에서 과거로부터 수없이 자기를 진화시켜온 장본인이 바로 홀연히 자기와 통하게 되는 거죠. 통하게 돼야 자기 몸 속에 있는 의식들도 전부 거길 따라서, 즉 말하자면은 항복을 한다고 하는데 한마음으로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내 마음 쓰는 데마다 한마음이 돼 주니까, 그거를 내가 일일이 마음을 써서가 아니라 이거는 이렇고 저거는 저렇다는 걸 내 마음으로 벌써 보고 듣고 알고 그럴 때에 그거를 행해 나간다는 얘깁니다.
그러니깐 즉 말하자면 들고 내고 내고 들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 가운데에 홀연히 자기가 스스로서 자기를 발전시키고 자기를 리드해 가고 정신계와 물질계를 둘 아니게 굴리면서 길을 인도하는 거죠. 그렇게 인도하게 되면은 자기도 없고 자기라는 생각도 없고, 모두를 둘로 나누는 분별심도 없이 자유권을 얻게 되는 겁니다.

한마음의 의미

저는 현대불교를 통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해 나가고 있습니다. 저처럼 학식도 부족하고 배운 것도 없는 사람이 이렇게 부처님 법을 쉽게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황공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한마음선원이라고 이름을 지으실 때 어떤 연유로 한마음이라고 하셨는지와 스님 법문 중에 자주 말씀하신 한마음의 뜻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여쭙고 싶습니다. 사사로운 질문이라 생각지 마시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한마음의 뜻이라는 건 소소한 의미의 한마음이 아닙니다. 물론 종지에 담아도 한종지요 큰그릇에 담아도 한그릇이지만, 그리고 또 한바다만큼 담았어도 그저 한그릇이구요. 조그만 거서부터 큰 것까지 전부 한그릇으로 돌아가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한마음으로 돌아가겠습니까? 내 마음은 체가 없는데 무의 세계에서도 그렇고, 무의 세계에서 한생각이 유로 나오고 유에서 또 무로 가고 이렇게 돌아가면서 조화를 이루는 진리, 여러분의 몸만 봐도, 여러분이 마음먹는 대로 속에서 운행을 해줘요. 그걸 아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맘먹는 대로 속상하게 생각하면 모두가 속을 뒤집어서 나옵니다. 생각할수록 그냥 속에서 이런 게 치밀죠. 여러분이 속상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걸 둘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 그 여럿이서 모두 그냥 일어나는 거죠.
그와 같이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건 내면이나 외부나 모든 것이 전체, 삼라대천세계가 전부 한마음으로 돌아갑니다. 그건 왜? 우주 삼천대천세계의 근본은 인간의 마음의 근본이니라, 사바세계의 천차만별로 일체 만물만생이 살아나가는 거는 가설이 돼 있는데 그 가설된 근본은 바로 인간의 마음의 근본에 직결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한마음에, 전체가 한마음에 있는 거죠. 그러니 한마음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마음 전체를 한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고 내면의 세계의 그 생명들 마음들과 내 마음하고 한마음이 될 수 있고 그런 겁니다.
별성은 마음을 말하지만 혹성은 그 마음을 담은 거를 말하는 겁니다. 전체가 그저 한마음 아닌 것이 없어요. 오고감도 없이 오고가고 이어감도 없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과나무도 그렇고 은행나무도 그렇고 모두가 둘이 천리라도 마주보지 않는다면 열매가 안 열리지 않습니까. 벌이 갖다가 자꾸 심어줘야 열리죠. 그 조화를 어떻게 인간이 다 알겠습니까만은 그래도 이 공부를 통해서 문리가 다 터집니다.
여러분도 남녀가 없다면은 어떻게 자녀들을 생산하겠습니까. 그랬듯이 이것은, 그래서 태양은 일체 만물만생을 소생시키는가 하면 어머니는 산하대지로서 기르고, 가을에 엄마 아빠가 다 씨를 거두어들인다는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들은 비구니도 아니고 비구도 아닌 도리를 알아야만이 같이 씨를 거둬들일 수 있고 씨를 뿌릴 수 있다 이런 거죠. 아니 자기네들 뱃속에 조그만 벌레로부터 자기가 그렇게 커졌다는 걸 모르고, 벌레도 자기와 둘이 아니거늘, 하물며 여자라고 이런다면은 자기는 여자 속에서 나왔지 딴 데서 나오지 않았는데 어찌 둘로 나눌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고런 걸 가지고도 분별하는 사람이 어찌 산하대지를 집어먹을 수가 있겠냐 이거죠. 그래서 공부를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역시 우리는 마음을 좀 더 넓게 가져서 생명 가진 풀 한 포기도 나 아님이 없고, 내 생명 아님이 하나도 없고, 바로 내 모습 아닌 게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아무리 잘못하더라도 내가 수억겁을 거쳐오면서 모르던 때를 생각한다면 누구에게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모습이 내 모르던 모습이지 하고 둘로 보지 않을 때 비로소 그 사람도 착해지고 나도 보살이 되는 거죠. 그러니 허술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것을 진실한 뜻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벗어나는 마음의 법칙

사람이 건강하고 건강하지 못하는 경우와 풍요와 빈곤이 다가오는 것, 성공하고 실패하는 그 모든 것이 전생의 업보나 그런 것에 의한 숙명적인 결론인지, 누구의 탓인지 말씀을 좀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하면은 질병을 극복하고 성공하고 풍요로운 환경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지, 그 벗어나는 마음의 법칙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이 모두 자기 탓이죠, 뭐. 과거에 자기가 살아 나온 과정을 진실로 지금 ‘네가 한 거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그러고 거기다 맡겨 놓을 때 입력이 되거든요. 이건 자동적인 입력입니다.
여러분이 보고 듣고 생각하고 하는 것이 그냥 그대로 입력이 되기 때문에 죽었을 때도 그것이 바로 말해주는 겁니다. 그건 여러분이 모르시죠. 뭐 책도 없고 적어 논 것도 없고 그러니깐 모른다고 생각을 하시겠지만 여러분은 오늘 하고 내일 가면 벌써 오늘 한 거는 모르시겠지만 다 입력이 되는 겁니다. 즉 말하자면 숙명통에 입력이 돼 돌아가죠. 그러니까 여러분은 그것을 예를 들어서 고생하고 가난과 우환과 성공과 실패의 그 모든 것이 바로 거기에서 나온 거니깐 거기서 해결하는 것이, 그렇게 믿을 수 있는 마음이 성공을 하게 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작년 마음먹었던 거와 올해 지금 마음 내는 거하고, 작년 마음 낸 거하고 올 마음 낸 거 하고 둘이 아닙니다. 짝 붙으면 작년도 없고 올해도 없습니다. 그러게 불 한번 딱 치면 반짝하는 그러한 찰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숙명이다 운명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질 마세요. 그냥 앞에 닥치는 대로 용도에 따라서 거기 맡기고, 거기서 내가 넘어졌으니까 내가 일어나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세요. 즉 말하자면 내가 있으니깐 모든 게 내 앞에 용도에 따라 닥치지 내가 없다면 뭐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나한테서 나온 거니까, 내 한마음 속에서 나온 거니까 내 한마음 속에서 해결을 할 수 있다라는 믿음을 가질 때에 그것은 정말 엄청난 문제가 거기서 벌어지죠, 해결이 나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팔자 운명 타령은, 우리가 역사를 본다 하더라도 수없이 거듭거듭 태어나면서 쫓고 쫓기면서 얼마나 그냥 고생을 했습니까? 좀 벗어납시다, 아셨죠?
그런 관념, 관습, 운명이다 팔자다 업보다 이런 소리를 자꾸 해 줘 가지고 그게 습이 돼 가지곤 나는 업보가 얼마나 많아서 요렇게 될까 하고 이렇게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줘요. 종교인들이 그런 건 만들어 줘서 안됩니다. 왜 죄가 있다고 그럽니까? 그러고 멀쩡한 사람 너는 죄가 있고 어떤 죄를 졌기 때문에 정성을 들여야 한다고 합니까. 그런 데가 어디 있어요? 그렇게 해 가지고 남의 가정을 남의 마음을 갈갈이 찢어놓는 그런 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늘부터라도,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운명도 없고 팔자도 없고 병고도 체가 없기 때문에 붙을 자리가 없다, 고도 없다. 그래서 고집멸도 사제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 하나만 없다고 생각한다면 집착도 없고 멸도 없고 도도 없어요.
이것이 참, 여러분의 생각 하나 차이입니다. 나는 여러분의 길을 인도해 주는 사람이지 이 고깃덩어리를 믿으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믿는 건 여러분의 그 한마음 주인공, 그 자체 바로 법좌를 믿으라는 겁니다. 왜 자기 법좌를 믿으라는데 자기 본래 자성불을 믿으라는데 왜 글쎄 안믿어요, 글쎄 참 이상해요.
내가 살아 나오면서 세상에 누구를 믿을 게 있습니까? 믿을 거 하나도 없어요. 아무리 부모가 잘 해준다 하더라도 내가 아파서 죽으려고 그러는 데는 같이 가 주지 않아요. 사랑도 그렇고, 돈도 그렇고. 그래서 어느 사람이 나이먹도록 잘 살다가 가야 될 시간이 되니까 “야, 너 나하고 같이 가지 않으련?” 하고 물으니까 ‘네가 나를 좋아서 쫓아 다녔지 내가 너를 좋아서 쫓아 다녔니?’그러고 안 가요. 모두가 그래요. 아무리 부부지간이나 자식지간이라도 “너 같이 가지 않을래?” 하니깐 “네, 묘지까지만 같이 배웅하겠습니다” 또는 “화장터 밖에는 같이 갈 수 없습니다” 그러거든요. 그러니 그게 영원한 친구입니까, 어디.
그러니 여러분의 영원한 친구는 지금 몸을 모두 형성시켜서 가져 나온 장본인, 영원한 생명의 근본, 즉 말하자면 불성 그 자체만이 자기 선장이에요. 그러니 꼭 믿으세요. 자기를 자기가 못 믿는다면 자기 육신을 자기가 헌신짝처럼 버리는 거와 같습니다.
여북하면 고양이 목을 딱 들고선 그냥 목을 딱 쳤습니다. 이걸 말을 안 하면 치고 말을 대답을 하면 안 친다 했는데 말을 영 대답을 못하니까 고양이 목을 쳤거든요. 예전에 동당 서당에서 공부를 하는 스님네들이 말입니다. 그랬는데 그나 그뿐입니까? 어느 스님이 들어오니까, 귀찮으니까 간단히 얘기합시다. 그런 얘기를 많이 했거든요. 그러니까 아무 소리 않고 짚세기 신었던 거를 머리 위에 이고는 그냥 나가는 겁니다. 어때요? 멋지죠. 사람이 인생으로 태어나서 삿갓 쓰고 법좌 들고 바릿대 하나 들으면은 그저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대장부가 하는 일이 바로 그거거든요. 아, 턱 믿고 아무 소리 없이 나가거든요.
그 뜻을 모르시겠죠? 말로 해줘서는 아니 되니 여러분의 법좌를 진짜로 믿으시고 그렇게 해 보십시오. 그러면은 여러분의 몸 속의 그 생명들이 전부 보살로 화해가지고 천백억화신으로 화합니다. 그래서 털구녘을 통해서 들이고 내고 하면서 그 만가지 법을 그대로 응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꼭 하십시오.
2003-03-12
 
 
   
   
202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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