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된 경계로 집중 통일해 진리체득
진실된 귀의, 덕 실현만이 화엄의 삶
보현보살은 백가지 삼매를 설하면서 보살이 갖가지 삼매로 비로자나 부처님의 모든 법계에 가득 찬 삼매의 신통변화의 바다에 들어갈 수 있음을 설하고 난 후, 삼매에 들어간 보살들의 경계를 자세히 설하고 있다. 그 내용을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그 보살들은 모두 큰 지혜와 신통을 구족했으니, 밝고 예리함이 자유자재하여 여러 지위에 머물며, 광대한 지혜로 모든 것을 두루 보고, 모든 지혜의 성품으로 났으며,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지혜가 항상 앞에 나타나서 어리석은 가림을 떠난 청정한 지혜의 눈을 얻었느니라
여러 중생을 다스리는 스승이 되어 부처님처럼 평등하게 머무르며, 모든 법에 분별이 없으며, 경계를 분명히 통달하여 세간의 성품이 고요하여 의지한 데 없음을 알고, 모든 부처의 국토에 두루 나아가지만 집착이 없으며, 모든 법을 관찰하나 머무름이 없고, 모든 묘한 법의 궁전에 두루 들어가나 오는 바가 없으며, 모든 세간을 교화하고 조복시켜 여러 중생에게 편안한 곳을 나타내었느니라. (중략)
널리 부처님을 뵙는 마음은 싫어할 줄 모르고, 부처님 법신은 이미 자유자재하며, 교화할 중생을 따라 몸을 나타내니 한몸이 모든 부처님 세계에 두루 하였느니라. (중략)
이 보살들이 부사의한 법의 광명을 얻었으므로 당연히 이러한 불가설 부처님 세계의 티끌 수와 같은 큰 신통변화로 장엄한 구름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보더라도 삼매에 들어간 보살들의 경계는 그야말로 부처님의 경계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입법계품에서는 부처님의 경계를 보살들의 다양한 삼매로써 나타내는 데 커다란 특색이 있다. 언설로써 설명할 수 없고 생각으로도 미칠 수 없는 부처님 깨달음의 경계를 보살의 삼매로써 증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깨달음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이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화엄경>에서의 비로자나부처님은 법을 깨달아 그것과 하나가 되어 무량한 공덕을 갖추고 시방세계에 편만하면서 본원력(本願力)으로 끊임없이 광명을 발하며 활동하시는 부처님이다. 이러한 부처님을 근거로 해서 화엄의 보살도가 시작된다. 화엄삼매(華嚴三昧)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가능하다.
종교라고 하는 것은 본래 무한의 절대적 존재와 유한의 상대적 존재라고 하는, 이원성(二元性)을 전제로 성립하며 그 이원성을 극복하여 양자가 만나 서로 하나가 되는 것을 궁극적인 이상으로 한다. 대승불교에서 불가사의한 힘이 있어서 마음을 하나의 경계에 집중 통일해 어떠한 경계에도 흔들리지 않게 되면 만물을 그대로 비추어 낼 수 있게 된다.
삼매는 진리를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방법으로서, 이를 통해서 부처님을 보고 만나서 부처님의 경지에 곧바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경> 십지품에는 ‘보살은 하나의 삼매를 증득해서 한 부처님을 보고, 일천의 삼매를 증득해서 일천의 부처님을 본다.’ 고 하고있고, 십정품에서도 ‘삼매에 들어서 부처님을 뵙고 법문을 들으며, 삼매에서 일어나서도 잘 기억하여 그 법문으로 도량에 모인 대중들을 깨우쳐주고 모든 부처님의 국토를 장엄한다’ 고 설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상을 삼매라고 하는 종교체험을 통해서 실현하려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현실세계를 벗어나 따로 존재하는 어떠한 세계가 아니며, 부처님들만이 갈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부처님의 세계는 한없이 지혜롭고 자비로운 세계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진실로 지혜롭고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언제 어디서나 부처님을 만나고 그 세계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우리들이 부처님을 보지 못하고 그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몸과 마음을 다하는 삼매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실로 부처님께 귀의해서 그 공덕을 찬탄하면서 부처님의 덕을 실현하려고 하는 삼매의 마음과 노력이 있다면, 하나 하나의 삼매가 그대로 부처님의 생명을 자신에게 꽃피워내는 화엄삼매의 삶이 되는 것이다.
<금강대 불교문화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