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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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활 찰나찰나의 연속이지만
우리는 분명히 너와 나가 있으면서도 항상 같이 돌아가고 있듯이 오늘도 또 모두 함께 한자리를 하게 되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다 같은 길을 가는, 서로 진리의 길을 탐구하는 도반들로서 이렇게 모였습니다. 물론 이와 같이 다 함께 한자리를 하고 있으므로 비록 여러분 자신만이 아니라 저까지도, 더 나아가서 모든 일체 만물만생이 다 도반 아님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더불어 함께 시발점도 종점도 없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도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면서 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하셨고, 또 사방을 둘러보시고 일곱 발자국을 떼어 놓으셨는지 그 뜻을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고, 길을 인도 받게 되었고, 또 마음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씀하신 뜻은 결코 부처님 당신만이 천상천하의 유아독존이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삼라대천세계, 즉 우주천지와 세상의 근본이 바로 우리들의 마음의 근본에 직결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근본, 마음의 성품이야말로 여러분이 이 세상에 나오기 이전부터 이미 우주천지의 근본이었음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공을 초월해서 항상 밝아있기에 있다 없다는 말조차 붙일 수 없는, 그래서 본래부터 있어 온 마음의 근본을 깨우치고자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기의 근본을 깨우친다면 일차적으로는 자기 육신 안에 악업 선업으로 뭉친 수많은 중생들을 다 제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오신 부처님께서 사방을 둘러보셨다는 것은 모두가 다 무공이요, 무색이므로 다같이 돌아가고 있다는 뜻을 비유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부처님께서 일곱 발자국을 떼어 놓으셨다는 것은 ‘모두가 다 한 몸이요, 한자리이면서도 또한 네가 있고 나가 있느니라. 우리의 생활은 바로 찰나 찰나의 연속이지만 항시 여여하므로, 그것이 곧 그대로 진리의 길이니라.’ 하는 뜻을 우리에게 말 없는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주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본래 진리, 마음의 근본은 말로써 다 표현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학식이나 지식으로도 다 표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대 부처님과 선지식들께서는 말없는 가운데 가르치시고 말없는 가운데서 배우셨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말이 나오기 이전, 생각나기 이전,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 근본을, 즉 인간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그리고 왜 본래 여여하게 걷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지를 지혜롭게 참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우리의 몸이 지수화풍 사대로 구성되어 있으면서 또 다른 지수화풍 사대를 매일같이 먹으면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외면해서도 안되고 그리고 고맙게 생각하지 않아서도 안됩니다. 일체가 다 지수화풍을 비롯하여 생명이 생겼고, 그리고 그 생명이 진화되어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진 이 몸은 다만 가합(假合)이기에 인연 따라 모였다 인연 따라 흩어지는 것일 뿐으로 생멸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하고 멸하는 것은 참다운 실상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영원히 불생불멸하는 진실상이 아니라면 그 어느 것이든지 한낱 가상에 불과할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을 환과 같다고도 하고, 꿈과 같다고도 하고, 하늘에 떠다니는 뜬구름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환상천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공부를 한다, 수행을 한다 하는 것은 바로 이 환상천을 뛰어넘자는 공부요, 수행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참다운 공부요, 수행이겠습니까? 우리의 몸이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졌다고 앞에서 말했습니다마는 과연 환이요, 꿈이요, 가합인 이 몸을 운전하고 끌고 다니는 장본인은 누구이겠습니까? 만약 사대로 된 이 육신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라면 죽은 사람도 움직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그 무엇이 있어서 일분 일초도 쉬지 않고 우리의 육신을 운행시키고 있는 것일까요? 그 무엇이 있길래 어떨 때는 즐겁게도 하고, 어떨 때는 괴롭게도 하는 것일까요? 그 무엇이 꼭 있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서 오늘도 이렇게 함께 모여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늘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근본을 깨우치기 위해서는 “첫째도 죽어야 하고, 둘째도 죽어야 하고, 셋째도 죽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죽어야 한다고 해서 몸이 죽으라는 게 아닙니다. 첫째도 죽어야 한다는 말은 일체를 맡겨 놓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어디에다 맡겨 놓느냐고 묻겠지만, 우리는 내가 있으니까 상대도 있듯이 바로 내가 있음으로서 일체가 있고 또 우주천지와도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내 몸을 나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 듣고 앉고 서고 말도 하고,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소소영영하게 보는 이것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눈 한 번 깜짝하는 사이, 빛보다 더 빠르게 우주천지 어디든지 비춰 볼 수 있는 이 신통묘용의 주인공, 이 마음이야말로 바로 여러분 모두의 참나인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 속에는 각자 자가발전소가 하나씩 다 있습니다. 밝은 자가발전소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마음을 내는 대로 그것은 마치 전기 스위치를 올리는 거와 같아서 자가발전소에서는 전력이 무한정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일체를 놓는다, 맡겨 놓는다 하는 것은 바로 마음의 코드의 스위치를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철저히 믿고 오로지 일체를 다 맡겨 놓으시라는 겁니다.
놓기만 하면 어떻게 사느냐고 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오히려 맡겨 놓음으로써 더 잘 살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맡겨 놓게 되면 마음의 코드 스위치가 올려져 자가발전소의 무궁무진한 에너지가 공급되게 되는 것이니 생활이 어려운 사람은 생활이 윤택해지고, 건강이 나쁜 사람은 건강하게 되고, 가정이 화목치 못한 사람은 가정의 화목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로지 맡겨 놓으라고 거듭거듭 말씀드리는 겁니다.
마음으로 짊어진 무거운 짐을 맡겨 놓는 순간부터 여러분은 참으로 자유스러워질 것이며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어떠한 것도 실답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이 그러한 관념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스스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숱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일체를 나오는 그 자리에 맡겨 놓는 것만이 여러분을 편안하게 하고, 자유롭게 하고,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의 자가발전소, 참나, 주인공을 오로지 믿고 일체의 모든 것을 맡겨 놓는다면 안팎으로 끄달려서 일어났던 번뇌나 망상 불안한 마음을 푹 쉬게 되면서 우선 마음이 편안해지고 고(苦)도 또한 풀려 나가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편안해지도록 모든 것을 놓고 그리고 편안하다는 것까지도 다시 놓고, 나중에는 놓는다는 생각까지도 놓게 되면 그것이 바로 좌선이며 참선이며 생활선(生活禪)인 것입니다. 그러니 오로지 맡겨 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방하착이며 죽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놓는 데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무조건 닥치는 대로 맡겨 놓고 가야 합니다. 아는 것도 모르는 것도, 행도 불행도, 가난도, 병고도 다 맡겨 놓으십시오. 그래서 무슨 일이 잘 되었다 싶으면 그것도 감사하게 다시 놓고, 또 무슨 일이 잘 되지 않았다 싶을 때에도 그것마저도 ‘본래 고정됨이 없으니 거기에서밖에는 길을 인도할 수가 없다.’ 하고 다시 놓으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해 나가는 것이 바로 자기 마음을 비우는 길이며 억겁 전부터 짊어지고 온 선업 악업을 내려놓는 작업이며, 억겁을 지내 오면서 덕지덕지 붙은 마음의 때를 깨끗이 씻는 작업이며, 그리고 첫번째로 죽는 길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계속 끊임없이 놓고 가다 보면, 자연히 놓고 가는 것도 없이 놓고 가고 있는 자기를 알게 됩니다. 즉, 이때는 설사 수없이 안과 밖에서 경계가 닥쳐오더라도 마음의 걸림이 없이 편안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놓아진다고 느껴질 때 비로소 조심해야 할 경계가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계속 편안함만을 추구한다거나 편안한 상태가 좀 되었다고 해서 마치 무심 경지에 도달한 양 안다면 이는 큰 착각이요, 망상입니다. 일시적으로 마음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다고 해서 ‘아, 이것이 바로 무심의 도리로구나’ 하고 거기에 안주하려 든다면, 이것을 바로 공에 떨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공에 떨어짐은 수행자가 피해야 할 중대한 고비입니다. 그래서 모름지기 수행자는 편안함을 추구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마음의 편안함마저도 다시 놓고 나가다 보면 이미 안팎의 경계를 놓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안팎으로 일어나는 경계를 보는 자기를 지켜봐야 하는 겁니다. 이것을 일러 자기 내면을 관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확실하게 참 자기를 볼 수 없기에 답답하고 알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레 일어납니다.
이때가 되면 하나하나 경계가 닥칠수록 오히려 자기 내면을 관하는 힘이 커지면서 의심 또한 커지므로 이를 일러 의심덩어리다, 의단(疑團)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미 번뇌망상이 번뇌망상이 아니요, 경계 또한 이미 경계가 아니라 오히려 보리심을 키우는 밑거름이 될 뿐입니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결국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주의할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이 굳건하지 못한 사람은 답답증이 생길 때 더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자기를 관하며 일어나는 의심덩어리를 꿰뚫기가 힘든 것입니다. 전후 사방이 다 막혔으니 어디로 뚫고 나가야 할지를 모르게 됩니다. 이럴 때에 믿음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사람은 마치 구해야 할 법이 따로 있는 줄 알고 일어나는 망상에 속아서 오히려 주위 환경을 탓하고 스승을 원망하고 어디 더 좋은 것이 없나 하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방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수행자가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할 때에는 자기 믿음을 스스로 점검하여 볼 일이지 밖으로 책임을 돌려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래서 주인공을 믿고 모든 것을 맡겨 놓으라고 하고, 현재 의식의 내가 죽어야 참나를 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번째, 나를 발견해 가지고도 또 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개체적인 나가 아닌 전체적인 나를 발견하였기에, 비록 중생심으로서의 나라는 관념은 버렸다고 하나 아직도 나라는 것에 대한 습기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나를 발견하였다 해도 여기에서 또 다시 크게 죽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를 발견한 다음에는 어떠한 신호가 올 때도 있고 혹은 어떤 것이 보일 때도 있고, 혹은 어떤 것이 들리는 때도 있게 되는데 결코 거기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어떠한 것이 보이고 들리든지 비록 오신통이 열렸다 해도 그것은 도(道)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자기가 남아 있는 경우에는 보이는 대로 걸리고 들리는 대로 걸려서 마치 자기가 보고 자기가 들은 양 착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된다면 오히려 죽은 줄 알았던 자기가 되살아나서 다시금 더 미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발견하였다 해도 남과 더불어 또 다시 크게 죽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사 오신통, 즉 천안통 천이통 타심통 숙명통 신족통이 되었다 해도 다시금 놓아야 합니다. 오신통에서도 벗어나야만 통을 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오신통을 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신통에 사로잡혀 거기에 끌려 다니는 노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자기는 물론이요, 부처님과 스승, 그리고 모든 생명에게 다 누를 끼치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오신통에서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체가 둘이 아닌 하나로 돌아가는 도리를 배워 한마음으로 계합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보아도 본 사이가 없고, 들어도 들은 사이가 없고, 알아도 안 사이가 없는 것이니 실험을 통해서 체험을 해 보고, 그리고 체험을 통해서 행을 해 보는 그러한 진짜 공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번째도 죽어야 하며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는 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만의 하나라도 자기가 본 바가 있고 들은 바가 있고 가고 온 바가 있다고 한다면 아직도 모든 것을 둘로 보는 자기가 있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 바가 없고 들어도 들은 바가 없는 것이므로 비밀스럽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와 같이 비밀을 지키면서 비록 오신통이라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벗어나야만 그 통을 자유자재로 굴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여러분이 여러분 스스로 자기 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자기 몸을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거와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이 오신통이라는 다섯 가지 통 속에서마저도 벗어나야만 되겠기에 보는 것도 놓고 보이는 것도 놓고 들리더라도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해서 내 몸이 오고 감이 없이 오고 간다 하더라도 다 놔라 이겁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비밀을 지키는 것이 되며, 또한 오신통을 실험하고 체험하여 마침내 구족한 지혜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비밀 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밀 문은 어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나한테 있습니다. 절대로 밖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밖으로 찾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찾는다면 갈 곳은 저 밑바닥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오관을 통해서 들이고 내는 비밀 문이 나한테 있는 것이니, 나의 문, 즉 없는 문 있는 문, 이 양면을 다 놓고 그 비밀 문에서 나 자신을 더욱 크게 발견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록 오신통이라도 그것마저도 몰록 놓고 가다 보면 스스로 무심한 경지를 맛보게 됩니다. 무심하게 된다는 것은 닥쳐오는 경계를 우정 무관심할 수 있다거나 피할 수 있다거나 하는 뜻이 아니라 어떠한 경계가 닥쳐와도 이미 그것을 시비하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시비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경계가 온다 해도 마음은 항상 고요할 뿐입니다. 이와 같이 오신통에서도 벗어나서 무심경지에 도달하였다는 것은 바로 일체가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도리를 터득하여 이미 하나로 계합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때가 되면 그는 오신통의 불바퀴를 요리하여 먹을 수 있게 되는데 이를 누진이라고 합니다. 사실 사람들에게는 그 누구 할 것 없이 본래부터 자기 재료가 다 풍족하게 갖춰져 있어서 직접 요리를 하여 배불리 먹을 수 있건만 직접 요리를 해 먹을 생각은 못하고 오히려 남에게 구걸을 하고 있으니 이만저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며, 이만저만 잘못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너와 나는 분명히 있으면서도 너와 나가 따로 없이 네가 내가 될 수 있고, 내가 네가 될 수 있는 그러한 막강한 나툼의 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래부터 누구에게나 다 있는 참마음 자체는 모습이 없어서 수만 명의 모습으로 달리 나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일러 천백억화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음을 내고 들이는 대로 자기의 참마음은 거기에 응해 주기 때문에 여러분이 마음을 내는 대로 산신을 구하면 산신의 모습으로 나투고 살기가 힘들어서 관세음보살을 청하면 관세음보살의 모습으로 나투어 주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타난 그 모습에 속아서는 아니 됩니다. 나타난 모습이 자기 밖에 정말로 있다고 믿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어떠한 모습이 보이든지 다 자기 참마음의 나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이 참마음 주인공은 모습으로도 응해주시면서 또한 마음의 자비로서도 나투면서 응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나툼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서부터 곤충 미물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모든 생명들에게 나투며 화하면서 응하시는 부처님의 한 발 내려딛은 보살행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체에게 차별 없이 그 어떠한 문제이든 막론하고 다 같이 평등하게 응해 주시는 이 도리를 바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도리를 증험했다고 하는 것은 결코 자기만의 개별적인 완성이 아니라 전체를 한데 합친 다 같이 돌아가는 완성인 것입니다.
이와 같을 때 진실로 너와 내가 하나되어 세상의 모든 아픔은 내 아픔이 될 수 있고, 세상의 어려움은 바로 나의 어려움이 될 수 있는 그러한 둘 아닌 부처님의 세계가 진실로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그 어떠한 것으로 나툴 때 그것만을 진정한 부처라고 할 수가 없으므로 다만 “이것이 길이며 진리이니라.”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이름을 가진 “이름 없는 이름이 바로 길이며 진리이니라.” 하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그 뜻을 그 길을 믿고 따름으로써 타력신앙이 아닌 자력신앙으로써 올바르게 우리의 갈 길을 똑바로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과연 똑바로 가는 것입니까? 공한 불생불멸의 영원한 참자기를 믿고 거기에 모든 일체를 맡겨 놓는 것이 똑바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옛 선지식께서 “너희들이 땅을 파도 아니 되고 아니 파도 아니 되니 그것은 무슨 연고인고? 이 도리를 알아야만 농사를 잘 지어서 밥 한 그릇을 가지고 일체 중생들을 다 먹이고도 되 한 그릇이 남을 수가 있느니라.” 한 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옛 선지식께서 이렇게까지 말씀을 해 놓으신 것은 우리가 꼭 말을 해야만 알게 되기 때문이 아니라 벽을 치면 봇장이 울릴 수 있는 그러한 문제를 가질 수 있어야만 된다 하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저기 하면 저 전구를 보시게 됩니다. 물질로 만들어 놓은 저 전구만 보시고 스위치를 누르면 불이 밝게 들어온다는 것만 생각하시지 순간 전력이 오고 가는 것은 생각도 못합니다. 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뚱이만 보시고 생각하지 여러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온갖 재료들을, 즉 전력이나 광력 자력 통신력 등을 충만히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 겁니다.
믿지 않으니까 발견하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하니까 그 재료들을 갖고 맛있는 요리를 해서 나도 먹고 남도 먹이려는 생각을 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먹여도 그 한 그릇이 되남는 것을 모르고 사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래서 첫째도 놓아서 죽어야 하며, 둘째도 일체를 놓고 더불어 죽어 비밀을 지켜야 하며, 셋째도 또한 죽어서 더불어 나투는 법을 증득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와 같이 하지 않고는 스스로 물리가 터지지 않아서 지혜가 나오질 않습니다. 이러한 이치는 우리가 학식으로나 지식으로 배워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 마음을 증득한다면 학식이나 지식은 얼마든지 자유로이 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공부하는 수행인은 모름지기 모든 것을 다 자기로 보아야지 어떠한 거든지 둘로 보아서는 절대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증득하지 못하면 자기 안에서 스스로 밝혀져 나오는 지혜의 빛이 없기 때문에 항상 남의 말이나 학식, 그리고 남의 지식 남의 생각들을 자기 머리에 넣어놓고 쓰려고 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은 진정한 대장부, 대자유인으로서의 자유스런 자기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부자유한 남의 삶을 사는 것이요, 그래서 속고 사는 인생이요, 어디에 구속된 삶일 뿐입니다. 이래 가지고는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하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부처님의 제자라고 감히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혀를 깨물고 죽어도 시원찮은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수억겁을 진화되어 여기 인간까지 올라왔으므로 모두가 다 부처님이 되실 수 있는 승인을 이미 받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참자기를 떠나서 밖에서 진리를 찾으면 안됩니다. 대개 보면 타력으로 밖으로 찾거나 타력신앙으로 믿고 있습니다. 여기를 가 봐도 그렇고 저기를 가 봐도 모두 밖으로 찾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여러 종교가 있습니다마는 참다운 부처님 법을 빼 놓고는 대개는 밖으로 믿고 맹신을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현상이나 그림에 묶여 맹종하고 이름에 묶여 맹종하고 사람에 묶여 맹종한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가르치시지 않으셨습니다. 본래 진리의 길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각자 여러분이 스스로 마음을 발견해서 삶의 보람을 마음껏 누리고 살라, 영원히 윤회의 고통에 끄달리지 말고 당당한 자유인으로 살라고 하셨으며, 우주의 진리는 시공을 초월해서 고정됨이 없이 돌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제부터 짊어진 짐들을 내려놓으십시오. 맡겨 놓으십시오. 누가 짊어지라고 했습니까? 아니면 누가 내려놓지를 말라고 했습니까? 짊어진 것도 여러분이 스스로 짊어진 것이니 내려놓는 일도 여러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과 불행을 운전하는 운전수는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결코 누가 대신 운전해 주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만든 것도 여러분이니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여러분 자신임을 믿어야 합니다. 때문에 한생각 잘 내면 극락이 열리는 것이요, 한생각 잘못 내면 지옥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얘기는 이것으로 마치고 여러분께서 질문이 있으시면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질문자1: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한 지는 오래됐습니다마는 아직 부처님 가르침의 뜻을 잘 모릅니다. 스님께서는 항시 모든 것을 다 놓으라고 그러시는데 저는 지장보살님만 찾으면 왜 그리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감히 제가 지장보살님처럼만 될 수 있다면 하고 저도 모르게 발원을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경우에도 다 놓아야 되는 것인지요?
▲스님: 지장보살님이라는 것도 부처님이라는 것도 불성이라는 것도 다 이름일 뿐입니다. 여기(컵을 들어 보이시면서)에 있는 이것을 컵이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러한 뜻을 모르고 만약에 지장보살님이라고 위대하게만 자기 위에 놓고 찾는다면 그것은 밖으로 찾는 것이 되는 것이며, 따라서 망상이며 헛된 것입니다. 진정 지장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내 마음 속 무명의 굳은 땅에 파묻혀 있는 보배인 불성을 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밖으로 생각을 내지 마시고 안으로 돌리십시오. 여러분의 불성은 지장보살이라는 이름만 가진 것이 아니라 숱한 보살님의 이름과 일체 부처님의 이름을 다 가지신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특별히 지장보살만 따로 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불성 자리는 여러분 모두의 근본 진리인 동시에 지장보살도 관세음보살도 약사보살도 그 무엇이든 거기에 다 들어 계신 겁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이 다 하나로 계합이 되어서 한군데에서 들고나고 있으니 이것을 종합해서 주인공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경우에 따라서 지장보살 따로 찾고, 관세음보살 따로 찾고, 약사보살 따로 찾고, 부처님 따로 찾으면서 이리 찢고 저리 찢고 그렇게 부르고 찾을 수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밖으로 찾지 마시고 자기 마음 내면의 주인공을 굳게 믿고 모든 것을 거기에다 맡겨 놓고 나가라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 밖으로 이름만을 부르고 찾는다면 자기 한 몸도 건질 수 없을 뿐더러 자기 가정마저도 지킬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자2: 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발생한 종교를 신봉하였던 대학생입니다. 그래도 한국에서 발생된 종교라는 데 자부심을 갖고 있었으나 무엇인가 풀리지 않는 회의가 있던 차에 스님의 법어집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아 오늘 법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풀리지 않는 근본적인 의문이 있어서 질문드립니다.
제가 다녔던 종교 단체에서는 교리의 가르침은 물론 주문수행을 많이 시킵니다. 그런데 그 교리 중에는 하늘이 구천으로 이루어졌는데 부처님과 보살님들은 지금 제 칠천에 살아 계시고, 그리고 그 교의 교조 되시는 분은 현재 최고로 높은 구천에서 살고 계시면서 우리를 구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스님: 그 분이 지금 천상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있다 하면 벌써 없는 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천상이 천상이 아니고 천지가 천지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땅이 따로 있고 하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한다고 하는 사람은 구하지 못합니다. 구한다 하면 그건 벌써 일차가 아닌 이차가 되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지면 “아이쿠” 하는 즉시 그 물에 탁 뛰어들어서 건질 뿐이지 거기에 구한다거나 안 구한다거나 하는 그런 말이 붙을 자리도 붙을 새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 거기에 구한다는 말을 수차 해 보았자 해볼수록 그것은 이론에 불과한 겁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누가 뭐라고 하든지 간에 그렇게 타력에 의지하고자 하는 마음을 돌려서 바로 학생이 학생 자신부터 알아야 됩니다. 비록 내가 지금 여기에 석존의 모습으로 와 있다 할지라도 학생은 나의 몸을 믿지 말라 이겁니다. 학생의 마음을 믿어서 그것을 바로 발견해서 물리가 터져 지혜를 구하고 아래로는 자기 몸 속의 중생부터 제도해야 외부의 딴 중생들도 제도할 수 있게 된다 이 말입니다.
학생이 없다면 상대도 없습니다. 학생이 없다면 천상도 없고 그 교의 교조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천상에 누가 있다고 말하는 그 이론이 맞지 않다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천상에 있다 할지라도 그렇고, 없다 할지라도 그렇고 부정은 안하겠습니다. 남의 소견으로 있다 없다 하는데 내가 왜 거기에 끼어듭니까?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거지 거기 끼어들고 싶지 않습니다. 단 하나 말하고 싶은 것은 학생이 학생 자신부터 알아야만 그 교의 이치도 알게 되거니와 그 분이 천상에 있는지 없는지도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석존께서 여기 내려와 계신다고 해도 “내가 천상에 있느니라. 내가 중생을 제도하니 날 믿어라.” 이렇게는 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눈이 뜨였든 안 뜨였든 진리에 누가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난 오로지 여러분의 심부름이나마 올바로 할 수 있나? 항상 그뿐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학생은 학생 자신부터 알도록 하십시오.
▲질문자3: 저는 스님의 법어집을 읽고 나름대로 정진을 해 보았습니다. 스님께서는 늘 놓으라고 하셨으므로 법어집을 읽는 순간부터 계속하여 생활 속에서 부닥쳐 오는 모든 것을 내면에 놓으면서 생활을 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자꾸 놓다 보니까 결국 근본적으로 놓아야 될 것은 어떤 개개의 사건이나 사물 등의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에 집착하고 있는 나 자신을 놓아야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묘한 것은 나 자신을 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는 놓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들고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하여야만 잘 놓을 수 있는지 말씀하여 주십시오.
▲스님: 선생님이 질문을 참 잘하여 주셨습니다. 그 얘기는 선생님뿐만 아니라 여기 계시는 여러분을 위해서도 공부하는 데 좋은 계기가 될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또 “스님! 다 놔 버린다면 어떻게 삽니까?” 하고 묻기도 합니다. 그러면 오히려 제가 묻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왜 놓는다고 말은 하면서 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붙잡고 계십니까?” 이렇게 말입니다. 그런데 그 나 자신을 놓아야 한다는 생각도 놓으시기 바랍니다. 선생님께서는 조금 전에 질문을 하셨는데 지금 그 말씀을 내놓으라면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어디 흔적이 남아 있습니까? 선생님께서 분명히 말씀은 하셨고 나 또한 분명히 들었지만 어디 내놓으라면 내놓을 수 있습니까? 벌써 지나가 버리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이 우리는 누구나 다 본래 그대로 놓고 가면서도 놓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들고 있다, 놓고 간다는 이런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치 남아있는 양, 실재하는 양 생각하고 그렇게 생각을 가지니까 그만 그 생각에 걸려서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숱한 고생을 하므로 놔라놔라 하는 겁니다. 알고 보면 우리는 그대로 이미 놓고 살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옛날 어느 선지식께서는 “구태여 부처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해 놓지 않으셨더라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도 말씀하시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오늘날 이런 평지풍파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을…. 그때 내가 만약 있었더라면 그냥 죽여서 개에게나 줘버렸을 것을….” 하는 말씀을 했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찰나찰나 돌아가고 있는 이 생활이 바로 놓고 가는 길입니다. 만약 선생님이 지금 금방 가족을 만나고 돌아섰다면 이미 가족은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또 다른 사람을 만나고 또 돌아서고 다시 또 다른 사람을 만나고 연방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아까 만났던 가족만 계속 생각하며 하루종일 붙잡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만나서 일이 끝났으면 연방 지나갔습니다.
이게 바로 놔 버린 겁니다. 아니 놔 버렸다고 하는 것도 이름이요, 말이요, 이론일 뿐이지 이미 그냥 놓고 갔습니다. 그냥 그대로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또 만났습니다. 그리고 또 무슨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또 스쳐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 것을 내놓으라면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붙들고 있을 것도 없고, 안 붙들고 있을 것도 없고 그냥 그대로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도 얘기했지 않습니까?
“땅을 파도 아니 되고, 안 파도 아니 되느니라!” “너는 인사를 해도 아니 되고 안해도 아니 되느니라!” 이렇게 옛 스승들께서 아주 친절히 가르치셨단 말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 말씀에 아주 독특한 무엇인가 있을 터인데 그 도리가 무엇입니까?
어떤 스승께서는 또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어느 제자가 스승께, “부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고 물으니까 “이리 오너라!” 하더니 담박 멱살을 탁 잡고는 “요놈아!” 하고 소리치면서 주장자로 무조건 갈겨댔습니다. 그러니까 제자가 아파서 “아이구! 아이구!” 하니까, 그 스승께서, “요놈! 아이구 아이구 하는 놈이 누구냐! 요놈!” 아, 이러시거든요. 그러니 여러분께서 그 뜻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어떻게 놓느냐, 다 놓는다면 어떻게 사느냐고 하지 마시고 진실로 자기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맡겨 놓지를 못하는 겁니다. 믿으면 놓게 됩니다. 믿기 때문에 놓을 수 있는 게 아닙니까? 믿지 못하면 놓을 수가 없는 겁니다. 왜 자기를 믿지 못합니까? 남의 이름을 믿으라고 하면 잘도 믿으면서 자기를 낳아 준 자기는 왜 못 믿습니까? 그렇다고 놓고 공(空)에 빠져 있으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주인공이 하는 일이라고 참되게 믿고 맡겨 놓으면서 일을 한다면 일도 더 잘되는 법입니다. 더 적극적인 당당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에게 일체를 몰록 놓고 살라고 하니까 다 놓는다면 죽을 것 같은 모양인데 그러나 산다 죽는다 하는 관념조차 몰락 놓는다면 더 멋진 자유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참 진리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스스로 자기를 알게 된다면 비로소 이 소식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저의 답변은 이것으로 마치기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위 법문은 1989년 7월 16일 정기 법회에서 설법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마음선원 홈페이지(www.hanmaum.org나 한마음선원)에서도 같은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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